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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회

제 4 장

사랑을 꽃에 비김은…

14


누가 사랑을 따사로운 봄날에 꾸는 단꿈이라고 했던가, 그 누가 청춘기의 련정을 무섭게 타오르는 불길과 같다고 했던가.

그렇듯 달콤하고 그렇듯 열렬한것이기에 이르는 말이련만 현옥이에게는 그 말이 자기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말로, 지어는 사랑이 아직 어떤것이라는것을 알지 못하는 자기같은 어리숙한 처녀를 파멸시키기 위한 독이 발린 미사려구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꿈이라기에는 너무도 야속하고 불이라기에는 또 너무나도 순간적인 자기의 사랑이 아닐수 없었다. 아니, 불이나 꿈이라기는커녕 눈깜박할 사이에 굴러떨어진 천길 아득한 낭떠러지가 아닐수 없었다.

(과연 사랑이 이런것이란 말인가! 이처럼 엄혹하고도 무자비한것이 사랑이란 말인가!)

그제야 그는 비로소 남들이 그처럼 아름답고 고상하고 신비롭다고 하는 사랑의 무서운 리면, 즉 아름다운 반면에 가혹하고 고상한 반면에 심각하며 신비로운 반면에 더없이 독선적이기도 한 사랑의 리면을 뼈저리게 체험하지 않을수 없었다.

(사랑이란 자칫 잘못 다치면 산산쪼각이 나고마는 유리그릇과 같은거야. 아니, 물거품과 같은거지.)

진호와 헤여진지 근 한달이 되여오지만 아직도 그는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혼자 더듬어볼수 있는 여유를 가질수가 없었다. 상혈된 눈에 모든 물체가 2중으로 보이듯이 그의 마음속에도 모든것이 2중으로만 헛갈리는것이였다. 자기가 무엇을 겁내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조차 분간할수 없었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이런 생각에 이를 때마다 그는 어떤 공포에 휩싸여 부랴부랴 그 생각을 머리에서 털어버리는것이였다. 그때면 오직 우울한 표정을 짓고 하던 진호의 마지막말만이 끝없이 머리속에 맴돌이칠뿐이였다.

《난 내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도 모르면서 동무를 불안과 모험에 찬 길로 유혹하려고 했소. 하지만 이제라도 동무가 눈을 뜨고 똑바로 볼수 있게 된것을, 그리하여 험한 운명을 피할수 있게 된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오.》

이 말이 상기될 때마다 그의 입에서는 저절로 무거운 탄식이 쏟아져나오군 했다.

자기가 그처럼 두려운 마음을 품고 상상하던 그 의혹을 확인하여준 진호의 말은 그의 가슴에 혹독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고통만이 아니라 고통보다 몇배 더한 원한까지 새겨놓았다.

(어쩌면 나한테까지 그 사실을 숨겼을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상대에 대한 기만이 그 사랑을 거품으로 만든다는것을 몰랐단 말인가! 기만당한 상대방이 그 기만을 의식적으로 부정하면서까지 인위적인 감정을 품을수 없다는걸 몰랐단 말인가!)

어느모로 따져봐도 자기는 정당했고 그는 비렬했다. 누가 봐도 순진한 자신에 비해 그는 무례한 인간이였다. 그러나 그 과정이 어떻든간에 또 누가 옳고그른지간에 리유는 둘째치고 그와의 결렬이 가져다주는 고통만은 피할길이 없었다. 어떤탓으로 생겼던간에 또 누구의 잘못으로 받은 상처라 해도 역시 아픔은 아픔인것이다.

진호와 지낸 잊을수 없는 일들이 가슴을 저미는가 하면 그가 하던 한마디한마디의 말이 새삼스런 의미로 회고됐고 어쩌면 자기들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런 불행은 세상에서 유독 자기들만인것 같아 눈앞이 깜깜해지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고 자기 혼자 남게 된 순간에야 그는 자기가 얼마나 진호를 사랑하고있었는가 하는것을 절실히 느낄수 있었다. 요즘에 와서야 그는 자기가 어째서 그때 진호만 제철소에 보내고 자기 혼자 여기에, 그가 없는 여기에 남아있을수 있으며 그때의 자기 심정이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우랴 하는것을 미처 가늠해보지 못했는지 리해할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가 옆에 있을 때에는 그에게 사실여부를 따지기도 하고 자신이 취할 태도를 랭정하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진호가 떠나간 지금에 와서는 마치 자기 육체의 한부분이 그대로 뭉청 떨어져나가 자기 혼자로서는 도저히 어떤 사색도 행동도 자유로이 할수 없는 그런 상태에 처해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자길 속인 이상 자기는 결코 그와 같이 행동해야 할 그 어떤 도덕적인 의무도 없을뿐아니라 응당 헤여질수밖에 없다고 단정했댔으나 오늘에 와서는 그런 생각대신 오히려 아무리 그가 자길 속였다 해도 어떻게 자기의 처지에서 그런 생각을 품을수 있었을가 하는 의혹까지 금할수 없는것이였다. 하지만 그는 가끔 그런 정신상태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쳐 놀라기도 했다.

(아니, 도대체 내 잘못이 뭐길래 내가 고민하는거야. 내 잘못은 없어! 없지 않고, 어디까지나 죄를 지은건 내가 아니라 그니까.)

이러면서 자신을 랭철한 리성으로 다잡는것이였으나 일단 기름에 젖었던 물체가 물에 잘 젖지 않는것처럼 좀처럼 그 리성에 익숙되지 않는것이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일시적인 감정보다 리성에 의해 행동하기마련이지만 그 리성이 리성으로만 있을 때에는 즉 그 리성이 감정과 합치되지 않을 경우에는 자기 행동에 대한 자신을 가지지 못하는것이다. 아무리 리성으로는 옳다고 여기는것도 감정이 동반되지 않으면 리성은 그 자리에 굳어져버리던가 아니면 사멸되고마는 법인데 바로 지금 현옥의 경우가 그랬다. 아니, 현옥의 경우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동반하지 못해서라기보다 서로 상반돼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리성이 옳다고 고개를 추켜들면 들수록 그의 감정은 리성에 더 반발하는것이였다.

바로 이런 불가사의한 정신상태로 하여 그는 몇번이고 진호에게 편지를 쓰려고 했으나 쓸수가 없었다. 정작 편지지를 펼쳐놓기는 했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알수가 없었던것이다.

그의 기만을 탓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런 그를 원망해야 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번민과 고통을 써야 하는지, 아니면 그에 대한 미련을 적어야 하는지 도무지 종잡을수 없었던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자기의 처지가 아무리 정당한것이라 할지라도 언제까지나 이 상태로 있을수는 없다는것을 똑똑히 느꼈으며 자기가 찾아낸 결론이외에 그와 못지 않는 아니, 그보다 더 강한 또 하나의 억센 힘이 자기를 조종하고있다는것을, 또 그 힘은 결코 자기가 바라는 안정만을 주지 않으리라는것을 절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에게로 육박해오는 그 불가사의한 형체를 공포에 질려 바라보는것이였다.

오늘도 그는 책상에 마주앉아 창밖을 내다보고있었다.

소설책을 펴놓긴 했지만 그것은 한갖 자기의 고민을 가리우기 위한 위장물에 지나지 않았다. 때없이 방에 들어오군 하는 어머니가 빨래감을 찾는척 하기도 하고 필요도 없는 말을 시키면서 자기의 내면을 투시할 때마다 나타내군 하는 그 은근한 눈길을 마주볼 때면 저으기 당황하게 되는것이였다.

어머니앞에서는 자기의 마음을 숨기기도 어려웠거니와 자기의 정신적고통을 읽고 괴로와할 어머니를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언짢았던것이다.

…다음번 출장시에는 저에게 꼭 들려주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그의 눈에는 아까부터 몇번이고 반복해읽은 소설의 이 글줄이 다시금 밟혔다. 그것은 주인공이 누구에겐가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구절이였다.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의심치 않습니다. 도대체 뭘 의심하지 않는다는 소릴가?)

이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돌아보지 않고도 들어온 사람이 누구라는것을 곧 알아차린 현옥이였으나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한 사람처럼 여전히 책에만 시선을 쏟고있었다.

《또 소설책이냐?》

이렇게 묻는 오빠의 목소리가 여느때없는 활기에 넘쳐있다는것을 감촉하자 현옥은 어쩐지 화가 치밀어올랐다.

사실 진호와의 결렬이 있은 후부터 은연중 오빠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수 없었던 현옥이였다. 따져보면 오빠의 말을 부인할 근거가 없는것은 물론 오히려 오빠로 하여 진호의 온당치 못한 새로운 측면을 깨닫게 되긴 했으나 어째선지 오빠를 마주할 때면 저절로 반감이 솟구치고 울화까지 겹치는것이였다. 마치 자기들사이를 이렇게 갈라놓고 서로 원한의 감정을 품게 만든 고통의 장본인이 바로 오빠인것처럼 여겨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자기옆으로 다가선 오빠가 소설책의 표지를 보려고 하는것을 한쪽으로 밀어치운 현옥은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떻게 왔어요?》

《너하고 말좀 하자고 왔다.》

손가방에서 몇권의 신간기술번역잡지를 꺼내 책상우에 놓은 명식은 현옥이의 기색을 살피면서 천천히 전축옆에 있는 포의자에 몸을 실었다.

《무슨 말이예요? 전 별로 할말이 없는걸요.》

《할말이 없어? 그래 네가 요즘 고민하는건 뭐니? 어머닌 네가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잠도 자지 못한다고 얼마나 걱정이신지 몰라. 바로 그걸 같이 얘기해보자고 왔어, 너도 이젠 모든걸 랭정하게 따져볼 여유가 생겼을테니 말이다.》

《저에겐 고민이라곤 없어요, 아무것도.》

《없다―》

무슨 말을 해도 죄다 마뜩지 않게 여길 현옥이라는것을 이미부터 짐작하고있던 명식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고. 실상 그는 네가 고민할만 한 가치가 있는 그런 사람은 못돼.》

제잡담 본론에 들어가면서 명식은 그런 문제는 대수로운 일이 아닌것은 물론 론의할 가치조차 없는것이라는듯이 전축옆에 쌓여있는 레코드판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가슴이야 아프겠지, 너로선 진정으로 사랑했으니까. 그렇지만 네가 진정으로 사랑한 그가 너를 진심으로 대해주기는커녕 도리여 속였는데도 무엇때문에 고민하냐 말이다. 고민한다면 자길 속인 그에게 증오가 아니라 미련을 품고있는 나약한 자신에 대해 고민해야 옳지, 안 그렇니?》

현옥이는 오빠의 말에 점점 더 부아가 솟구쳤지만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설사 대꾸를 한다 해도 틀림없이 오빠가 언제나처럼 해당한 론거를 가지고 자기를 옴짝 못하게 하리라는것을, 그러면 자기 맘이 더 고통스러우리라는것을 짐작하지 않을수 없어서였다.

그래서 그는 말로는 음악에 꽤 관심이 있고 조예가 깊은것처럼 하지만 막상 음악을 감상하거나 거기에 섬취해본적이라고는 없는 오빠라는것을 모르지 않는터여서 지금 오빠가 레코드판을 고르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회전판우에는 올려놓지 않으리라는것을 짐작하고 그 짐작이 옳은가 어떤가를 지켜보기로 했다.

아니나다를가 명식은 레코드판을 이것저것 뒤적이기는 했으나 표지에 새겨진 사진이며 그림들을 보기만 할뿐 그것들을 다시 제자리에 차곡차곡 꽂아놓는것이였다.

(그렇겠지 뭘!)

《그러나 미련이나 동정도 애매한 경우나 뜻하지 않는 경우에만 한하는거야. 그런데 그야 어디… 그래 넌 그렇게도 자존심이 없니? 그렇게도 사랑에 눈이 멀었느냐 말이다.》

《?!》

이 말을 듣는 순간 현옥이는 여태껏 자기 맘속에 도사리고있던 울분과 애써 극복하려고 하는 혐오감, 그것이 오빠에 대해선지 아니면 자기자신에 대해선지 알수 없는 그런 혐오감이 일시에 창끝처럼 고개를 추켜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사랑에 눈이 멀었다구? 자존심이 없다구?)

《그래요, 전 사랑에 눈이 멀었어요, 자존심도 없구요. 그러니 어쨌단 말이예요, 그게 오빠와 무슨 상관이예요!》

고민이 없노라고 한 현옥이였으나 정작 오빠가 진호를 두고 고민할 가치가 없다고 한 말을 듣자 참을수가 없었다. 더우기 그런 감정을 자존심과 결부시켜 사랑에 눈이 먼 처녀의 미련한짓으로밖에 치부하지 않는데는 불만스럽기 짝이 없었던것이다.

《?…》

명식은 한동안 의외의 경우에만 나타내는 그런 표정, 량눈섭을 한군데 뫃고 눈살을 한껏 좁힌채 유심히 현옥이를 지켜보았다.

대체로 감정이라는것을 중시하지 않을뿐더러 필요로 하는 경우에도 오로지 합리적인것을 위해서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로서는 현옥이의 심정을 도저히 리해할수가 없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감정이란 한갖 공정한 사색을 방해하는 불순물로서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인간들에게만 한하는 소유물이라는것이였다. 때문에 자기처럼 지극히 엄정한 사업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런 불순물에 유혹되거나 희롱당하지 말아야 하는것은 물론 결코 그런 권리조차 없다는것이였다.

《그러니 넌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걸 알면서도 잊지 못하겠다는거냐?》

의자를 책상옆에 끌어다붙인 명식은 한결 의아한 어조로 말했다.

《얘, 이걸 봐라, 너도 알겠지만 내가 없는 사실을 만들거나 그를 과장해서 나쁘게 보려는건 아니지 않니. 난 언제나 사실에 기초한 공정성, 이것을 사업에서나 생활에서 첫째가는 본분으로 여기고있어. 그가 너를 속인건 둘째로 치자,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문제니까. 우선 그는 우리 사회 사람이라면 누구나 응당 지켜야 할 일반적인 요구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냐. 우린 누구나 그가 어떤 사람이든 사회가 요구하는 위치에 있어야 할뿐아니라 언제나 거기에서 정보로만 걸어가야 하는거야.〈앞으로 갓〉,〈뒤로 돌앗〉하는 구령에 맞추어 정확히 행동해야 하며 전체의 대오에 지장이 없이 움직여야 한단 말이다. 우리의 대오란 조직이고 집단이니까, 물론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욕망이야 다 있겠지.》

(욕망?)

현옥이의 머리속에는 하나의 의문이 피뜩 떠올랐다.

(과연 오빠한테도 욕망이 있을가? 그런 충동을 한번만이라도 느껴보았을가?)

《하지만 그런것은 어디까지나 집단의 요구에 순응시켜야 하는거야. 제때에 아무 미련도 없이 말이다. 왜냐하면 개인이란 아무리 천재적이라 해도 집단에 비기면 티끌에 지나지 않으니까, 알겠니? 이게 바로 우리의 생활원칙이지. 그런데 그는 이 요구를 제멋대로 무시할뿐아니라 자기가 대오내 한 성원이라는 자각조차 가지지 못하거던. 그래서 제 맘대로 삐여지는가 하면 남달리 행동하길 바라지. 결국 어떻게 됐니? 집단은 자기의 의사를 무시하는 그런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법이야.》

언제나 오빠의 말을 들을 때면 그런것처럼 이번에도 현옥이는 오빠의 론리앞에서 무력해지는 자신을 깨닫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왜서인지 무작정 반발하고싶은 충동을 억제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까보다도 더 야무진 소리로 대꾸했다.

《오빠가 말하는 그 자존심이 저에게 없기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전 아직 그에 대한 미련이 증오로 바꿔질만치 그를 미워할순 없어요. 아시겠어요? 그러니 제발 제앞에선 그에 대한 얘길 말아주세요, 더우기 비난만은 말이예요. 글쎄 어떻게 사람이 감정을 오빠가 요구하는것처럼 필요에 따라 가지기도 하고 버리기도 할수 있겠어요.》

《그것 참!》

명식은 다시금 고개를 기웃했다.

사업을 설계할 때나 도면을 분석할 때에는 그 과정에 있을수 있는 사소한 요소까지도 다 예견하고 해당한 대책을 세우는 명식이였으나 지금 현옥이를 대함에 있어서는 자기가 진호에 대해 면박을 가하면 가할수록, 즉 그런 사람을 두고 고민할 가치가 없다는것을 증명하면 할수록 현옥이의 가슴에 도리여 진호에 대한 그리움과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애달프게 여기게 만든다는것을 모르는것이였다.

《넌 바로 그런 하찮은 감정에 자신을 얽어매는게 탈이야. 그럼 도대체 네가 바라는건 뭐니?》

《바라는거라구요? 그래요, 전 지금도 그의 일이, 그의 연구사업이 잘되기만 바랄뿐이예요. 단지 그것뿐이예요.》

《연구사업?》

대뜸 아연한 눈길로 현옥이를 지켜보던 명식은 갑자기 어이가 없다는듯이 허구픈 웃음을 터뜨렸다.

《얘, 넌 그가 거기서 연구사로 일하는줄 아니? 아직도 새 연료를 연구하는줄 알아? 넌 어째서 아직도 그 새 연료안이 가망이 없다는걸 모르니? 그러니까 제철소에서도 그를 현장에 배치하지 않았겠니. 생산을 위한 공정기사로 말이다. 그건 그렇다치고 지금 제철소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있는지 알기나 하니? 이젠 그전보다 더 많은 중유가 공급되고있어. 말하자면 우리가 제기한대로 지금단계에선 새 연료의 취입이 불가능하다는것을 우에서도 시인했단 말이다.》

《?》

현옥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오빠를 쳐다보았다.

(더 많은 중유라니?)

이 소식은 실로 현옥이에게 충격이 아닐수 없었다.

(그럼 그의 기술안이 지금 단계에선 정말 무리한것이란 말인가!)

저로서도 의심을 품고 이미부터 그 가능성에 대해 따지긴 했지만 정작 국가적인 조치까지 취해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아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보다 더 가슴을 찌르는것은 그가 그처럼 대학때부터 고심해오던 일이 이젠 영영 막혀버렸다는 절망감이였다.

(그러니 그의 기술안이 아직은 한갖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이 아닌가!)

《이것만 놓고봐도 그의 기술안이 얼마나 현실성이 없는 허황한것인지 명백하지 않니. 그러니까 너도 이젠 마음을 다잡고 자기 일에나 전념해라, 알겠지?》

명식의 얼굴에는 다시금 아까 방안에 들어설 때의 활기와 미소가 어리였다.

사실 그가 오늘따라 여느때없이 흡족해하는데는 여태껏 질질 끌어오던 ××설비의 심사를 무난히 끝내 위원회에 통과시켰다는데도 있지만 보다는 제철소에 중유가 공급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데 있었다.

까다로운 설비의 심사를 맡아 끝낸것이 자기의 실무를 과시한것이라면 또 자신이 책임지고 한 연구사업의 결과를 당에 보고올려 중유를 공급받을수 있게 한것은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안목을 평가받는것으로 되지 않을수 없었다. 실무능력과 랭철한 안목, 심사일군에게서 가장 중요한 이 두가지를 최대의 수준에서 겸비하고있다는것이 이번 기회에 여실히 증명된것으로 하여 그는 특별히 만족스러운것이였다. 그런 기분으로 해서 그는 지금 현옥이가 겪고있는 고민도 별로 대수롭지 않는것으로만 여기는것이였다.

(일없어! 그런건 시간이 저절로 해결해주니까. 상처란 첨엔 아프지만 아물기마련이거던. 한데 그건 상처라고도 할수 없지, 손톱이나 발바닥에 박힌 가시를 뽑은것이나 같으니까.)

그러나 소설책에 시선을 뫃고있는 현옥이의 가슴은 걷잡을수없이 활랑거렸다. 도무지 진정할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있을가? 희망을 잃고 절망에 잠겨있을가? 아니면 이젠 모든것을 단념하고 맡은 일이나 하고있을가? 후회하고있을가 아니면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있을가?)

그의 눈에는 또다시 아까부터 반복해읽던 그 대목,《다음번 출장시에는 저에게 꼭 들려주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습니다.》하는 그 글줄이 안겨왔다.

그는 아무 의미도 없이 그 글줄을 몇번이고 몇번이고 곱씹어 읽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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