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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 회

제 2 편

제 1 장

2


련일 적기들이 수풍발전소를 폭격했고 그때마다 거기서 5리남짓한 화학공장지구도 폭격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아군대공화력이 치렬한 격전으로 적기들과 맞서군 하였다. 낮동안에 두세차례 방공호에 들어가 오래도록 앉아있어야만 하는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이 많았다.

아침에 리승기는 실험실들을 들여앉히려고 뚫은 굴간에 갔다. 군수공장의 굴도 미처 뚫지 못하는 형편에서도 삭주군당에서는 많은 굴파기기능공들을 보내주어 공장로력과 함께 공사의 마감을 다그치게 했다. 굴은 빠른 시일에 완공되는셈이였다.

특유한 굴간냄새가 풍기는 그안은 서늘하였으며 측벽을 따라 발밑 어디선지 흐르는 가느다란 물소리가 들려왔다. 한쪽은 외랑식으로 통로가 쭉 뻗어있고 다른쪽에는 실험실로 될 열두칸 방의 문들이 차례로 서있었다.

리승기는 하나하나 문들을 열어보았다. 어쩐지 신비스러운 생각이 앞서 문손잡이를 무심히 당길수가 없었다. 아늑한 방들에는 송진내 풍기는 실험대들이 설치되였다. 습기를 없애느라고 고촉광들이 켜졌고 전열기들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있었다.

리승기는 송구하고 죄스러운 심정때문에 거기에 더 오래 머물러있을수가 없었다. 전선에서는 전호도 미처 굴설하지 못한채 적들의 공격을 물리치다가 목숨까지 바친다는데 여기에 편안히 들어박혀 과학이니 뭐니 하는게 도대체 온당치 못한 행위처럼 느껴졌다. 그는 밖으로 나왔다. 오히려 폭격의 위험이 무시로 닥치는 단층실험실건물에 다가왔을 때 차라리 마음이 편해지는것 같았다. 이제 며칠 있으면 이사해나올 그 단층집마당에서 웬 로인이 서성거리며 주위를 살피고있었다.

턱수염이 드리우고 코수염마저 희슥한 로인은 60이 훨씬 넘었겠지만 꽤 정정해보였다. 나들이차림인듯 하나 옆에 작시미를 받쳐놓은 지게를 보면 그렇지도 않은것 같았다. 지게우에는 굵지 않은 바줄로 동여맨 불룩한 가마니 두개가 얹혀있다. 지게짐과 로인의 옷차림새가 어울리지 않았다.

로인은 무작정 리승기앞에 허리를 굽석하며 말했다.

《리승기박사선생을 찾아왔쉐다.》

리승기는 급히 로인의 두손을 모두어잡고 더는 그가 허리를 굽히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지 마십시오. 제 리승기입니다.》

《내 짐작이 맞았구만. 제 오원배라구 부릅네다. 선상님, 내 이자야 찾아온다구 날 욕하지 마시우. 내 정해의 애비웨다.》

리승기는 놓으려던 로인의 두손을 다시 감싸쥐였다.

《그렇습니까!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방에 들어서자 리승기는 로인한테 방안의 유일한 안락의자에 자리를 권했다. 까만 비로도가 다스러지고 헐어서 속에 넣은 벼짚이 보이는 볼품없는 고물이건만 그래도 앉으면 편안히 몸이 잠기는 의자였다.

로인은 습관되지 않은 거기에 거북살스레 앉으려다 엉거주춤 일어나려고 했으나 리승기는 제가 앉은 쪽걸상을 그리로 가까이 끄당겨놓으며 로인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팔을 눌러 앉히였다.

원배로인은 고맙다는듯 머리를 연신 끄덕이며 말했다.

《집에서들 우리 녀석때문에… 이거 정말 신세가 많게 됐시다. 인사가 늦어서…》

《뭘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리승기자신은 눈썰미가 있는 곱슬머리연구조수를 더 가까이 둬두고싶었으니 회의장에서의 그 정의감과 의협심이 학문에서 진취성으로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기때문이였다.

오원배가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고맙쉐다. 소같이 먹어대는 녀석이 둘씩이나 쯔쯔… 사모님고생이 오죽하겠수다레?》

《고생이야 무슨 고생이겠습니까. 그 젊은이들이 이제 유명한 발명가나 학자가 될겝니다.… 지금 정해는 흥남에 갔습니다.》

《그렇다구 합디다. 아무 일이나 다 시키십시오.》

《저희들스스로가 떠난 걸음입니다.》

오원배는 안락의자속에 몸을 잠그며 차츰 등받이에 상반신을 뉘이고 편안히 앉았다.

《사실 우리 녀석 칭찬은 아닙니다만 남한테 미운 밥은 먹지 않습니다.… 흥남에서 훌쩍 들어왔을적에 난 놀랐쉐다. 군대에 나간줄 알았는데 여기로 연구소에 오다니? 미국놈을 치는 전선에 나간줄 알았더니 이게 무슨 새빠진 소린가? 내레 다 큰 녀석의 뺨을 후려갈길번 했지요. 그 무슨 파견장까지 보여주면서 뭐라구 했지만 맨첨엔 그 말이 통 바늘귀만큼두 들어오지 않았쉐다. 한데 그후에 다시 와서 하는 말이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으루 소환된 사람들과 같이 저두 큰 연구를 한다구 해서… 그래서 더 말두 못했수다레, 허허허.…》

그를 마주보며 리승기도 미소를 지었다.

이때 문기척소리가 나고 옆방에 있던 신현석실장이 방안에 들어와서는 손님을 보고 머밋거리다가 《무슨 일이요?》하는 리승기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아까 그것 말입니다. 그 숯이 활성탄으로 될것 같습니다. 초산아연을 흡착하는 성질을 나타내는군요.》

리승기는 신현석을 향해 일어섰다.

《그 숯으로?》

《네, 옥동무의 실험에서 이젠 명백해지는것 같습니다.》

《좀더 실험을 계속하도록 합시다.… 한데 가만…》

리승기는 나가는 신현석을 멈춰세우고 그한테 오원배로인을 소개하였다.

《오정해동무의 아버님이시오.》

《네에, 그렇습니까? 안녕하십니까?》

허나 신현석실장은 오로지 활성탄에만 정신이 쏠려있어 인사만 하고는 인차 되돌아나갔다. 그러던 그가 얼마 안있어 다시 문을 열었다. 침착한 성미의 그한테서 있어보지 못한 행동이다.

《실례입니다만… 저기 지게우 가마니… 박달나무숯말입니다. 저걸 누가? 혹시?…》

리승기가 대답을 못하고 현석실장만 바라보자 곁에서 오원배가 말했다.

《아, 그건 말이웨다. 제가…》

아직 무엇이 확실치 않은지 신현석실장은 더 말이 없이 스르시 문을 닫는다. 리승기는 묻는듯이 오원배를 돌아보았다.

오원배가 결코 숯장사는 아닐것이다. 그럼 여기서 박달나무숯이 필요하다는걸 알고서 그 먼 의주땅에서 그것을 지고왔단 말인가?

《우리 정해녀석이 여기서 좋은 박달숯을 찾는다기에 아니, 그거야 못하겠느냐고 내가 직접 숯가마에 가서 구워서 좋은걸 골라가지구 왔수다.》

《저걸 지게에 두가마니씩이나 지고왔단 말인가요?》

리승기는 무척 놀라와 오원배로인의 한팔을 지그시 잡기까지 했다.

《다행히 오다가 절반길은 지나가는 달구지신세를 졌지요.》

《그래두 그게 어디라구 그걸 지구서 떠날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까짓 내 이래뵈두 젊은 시절엔 쌀 두가마니쯤은 공기돌 다루듯 했습무다레… 한때 나두 여기 청수동에 살았는데 씨름선수로 뽑혔댔지유. 늙으신 어머님만 아니면 나두 독립군대장이던 오동진이라구 우리 가문에 내 아저씨벌되는 그 사람을 따라 세상천지를 한번 휘돌아보는건데. 아, 오동진 그 량반때문에 글쎄…》

《오동진이라니? 〈광복군〉총사령까지 지냈던? 후에는 왜놈들한테 체포되여 감옥에 갇힌 그분말인가요?》

《그렇지요. 오동진이 여기 있을 때 김일성장군님의 아버님이신 김형직선생님께서 몇번인가 이 청수동에 오셨댔지요. 나두 야학에서 만나뵈운적 있습니다.》

《그렇구만요.》

리승기는 머리를 끄덕이였다. 자기네가 지금 살고있는 웃골안에 김형직선생님께서 와서 회의를 지도하신 집이 있다는 말은 옆집로인한테서 이미 들은바가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돼서 의주에 가 사시는가요?》

《오동진아주번네와 같이 우리두 의주가 고향이지요. 그 아주번네를 따라 청수동에 와 살다가 오동진네를 사돈의 팔촌까지 못살게 구는 왜놈들 등쌀에 화가 나서 야밤에 솔가도주를 해서 고향에 돌아가 깊은 산속에 들어갔습무다레. 거기 가서 화전두 일쿠고 숯을 구우면서 살았지요.》

리승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나서 말했다.

《오늘 밤은 우리 집에 가 쉬여서 가십시오. 정해의 잠자리에서 말입니다. 그리구 좋은 얘기두 많이 들려주구요.》

《사모님이 날 욕하겠지만 오늘은 내 지금 돌아서 내려가야 합무다레.》

《아니, 이렇게 가는 법 어데 있습니까?》

《우리 집 밭갈인 끝내놓았는데 남정네손이 없는 집들에서 파종을 채 못해서… 어쨌든 하지전에 박아놓은 곡식은 다 먹지요. 그래서 바쁜 목이나 죽이구나서 내 꼭 오리다. 이젠 동생집에, 아들집에 다니듯 자주 오지요.… 내 첨엔 정해녀석이 선상님이 돌에서 실을 뽑는 연구를 한다기에 저녀석이 제가 희한한데서 일한다구 뽐내느라구 그러려니… 허파에 바람이 든 사람들 아니구야 이 란리통에 무슨 그런 허황한 소릴 하겠느냐구 도제 믿지 않았습무다레, 허허허. 용서하슈.…》

리승기도 같이 웃었다. 불현듯 그는 앞으로 로인과 만날적마다 마음속으로 자기가 무거운 책임을 더 느끼게 되리라는걸 의식했다. 먼길에 박달숯을 지고온 로인의 심정에 보답하는 그 연구가 자신의 앞에 놓인것이다.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른다. 허나 이 순간엔 웬일인지 그것이 그렇게 막막하게 생각되지를 않았다.

리승기는 로인을 바래우러 얼마쯤 따라나갔다가 그 자리에 서서 로인의 뒤모습을 바라보았다.

오원배는 빈 지게를 지고 작시미를 손에 들었다. 그는 작시미를 지팽이로 삼아 앞을 내짚는것이 아니라 옆구리에다 끼고가듯 가볍게 끌고간다. 그한테는 아직 지팽이가 필요없는 모양이다.

리승기가 나갔다 온 사이 신현석과 옥지문이 와 기다리고있었다. 두사람은 같이 활성탄을 맡았는데 각기 다른 방법으로 진행해오는터이나 실장인 신현석은 옥지문의 실험성과에 더 흥분에 싸인듯싶었다.

당자인 옥지문이 물론 즐거운 기색이다. 박달나무숯을 쓴다면 수증기부활법으로 활성탄을 해결할수 있다고 한시간전의 실험결과로 증명한 그로서는 그럴만도 하다.

리승기가 들어서자 뒤미처 김용석이와 림창직이 들어왔다. 그들은 활성탄문제를 둘러싸고 학술토론회를 저녁에 가지기로 하였지만 옥지문의 연구에서 일정한 성과가 명백해지자 자연히 한자리에 모여앉게 되였다. 초산비닐합성의 시작이고 첫 고리인 활성탄문제이니 시간을 가릴 형편이 못되였다.

실험대우에는 넙죽하고 전이 낮은 유리그릇이 몇개 놓였는데 그안에는 여러가지 숯덩이들이 있었다. 소나무숯, 박달숯, 고로쇠숯… 연구사의 안해들이 주어온 복숭아씨들로 구운 숯도 있었다.

외국문헌에 있는 야자나무숯은 우리 나라에 없다. 따라서 여러가지 다른 숯을 써보다가 마침내 굳은 나무인 박달로 구운 숯이 제일 좋다는 결론에 도달한것이다.

실험대우에는 시약병들도 놓여있었다. 맨 앞줄에 《초산아연》이라고 쓴 500그람짜리 갈색병이 두드러져 나와있었다. 그것이 바로 초산비닐합성의 촉매제인것이다.

활성탄은 바로 이 촉매인 초산아연을 붙잡고있을 담체(어떤 물질을 붙잡아두는 물체)로서 필요한것이다. 벌집속에 꿀을 두었다가 빼듯이 초산아연을 흡착시켰다가 다시 회수해서 쓸수 있는 그것은 오직 구멍이 숭숭 뚫린 활성탄으로만 가능한것이다.

리승기는 오원배로인이 앉았던 그 허름한 안락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손에 자그만 숯덩이를 들더니 안경을 벗어들고 들여다보았다. 박달숯에 초산아연이 흡착된 정도를 육안으로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연구사들은 실험대를 마주향해 창문가까이 놓인 나무의자와 동그란 쪽걸상에 앉았다.

리승기가 쥐였던 그 숯덩이는 옥지문이한테로 넘어갔다.

옥지문은 그것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즐거운 기색으로 설명을 시작한다. 실험결과가 좋으니 얼굴에 어리는 밝은 빛도 매우 자연스럽다. 창조적사색이 낳은 열매를 일단 제손에 놓고 이리저리 굴려보는 이런 순간의 흥분과 긴장과 즐거움을 과연 학자들 말고 누가 체험할수 있으랴.…

《의견들을 말해보시오.》

리승기는 좌중을 둘러보며 조용히 말하였다. 옥지문의 설명에서 별로 더 큰 의문은 없으리라 여기는 평온한 어조였다.

현석실장이 촉매의 흡착정도에 대하여 물었다. 림창직이 촉매의 회수비률을 알고싶어하였다.

옥지문은 실험일지를 들여다보지 않고 질문들에 대답했다.

김용석은 초산아연이 흡착된 그 자그만 박달숯덩이를 손에 쥐고 유심히 들여다보며 아무런 말도 없이 생각에만 잠겼다.

리승기는 그제야 김용석한테 주의가 미쳤다. 평양에서 돌아온 김용석이 벗고싶지 않다고 다시 입고다니는 그 제대군인군복차림때문에 자신이 그를 순간이나마 연구사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여긴게 아닌가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김용석은 줄곧 무슨 생각에 잠긴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김용석한테 어울리지 않는 행동거지로 보인다. 좋은 일이나 옳은 일에 흥분과 열정을 앞세우는 그의 성미는 침착하고 대범한 제 형인 김용진의 그것과는 판판 다르다. 모색은 너무나도 비슷하여 문득문득 김용진을 만나는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러한 김용석이 지금 저렇게 말없이 앉아있다니?

자기를 주의깊이 바라보는 리승기의 눈길을 감촉한듯 김용석은 머리를 쳐들었다. 리승기는 그와 눈길이 부딪쳤다.

어째선지 김용석이 다시 그 숯덩이를 얼핏 들여다보고나서도 얼른 입을 열지 못하고있다.

리승기는 좀자르지 말라는듯 턱짓을 해보이였다.

《말해보시오, 용석동무.》

김용석이 그제야 용기를 내여 입을 열었다.

《박달나무숯이 다시 회수해쓰는 측면에서나 흡착성질에서나 나무랄바 없다는게 실험결과로 다 보고되였습니다. 저두 거기엔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그런데…》

리승기는 김용석의 얼굴을 똑바로 보려는듯 안경을 끼였다. 옥지문이도 현석실장도 림창직이도 김용석의 얼굴을 지켜본다.

김용석이 말을 이었다.

《이건 사실 누구나 다 알수 있는거지만… 박달나무숯을 구워내자면 많은 량의 박달나무가 있어야 할겝니다. 한데 제 알건대는 산에 박달나무가 그리 많지 못합니다. 원래 빨리 퍼지지 못하는 수종입니다. 전 이 점을 말하려구 했던겁니다.》

방안에는 침묵이 깃들었다. 김용석의 얼굴을 살피던 사람들이 문득 제앞만 묵묵히 바라보고있었다.

이제껏 그렇듯 온화한 표정이던 리승기의 얼굴에 놀라는 빛이 떠올랐다. 리승기는 김용석을 마치 처음 만난 사람처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용석이 뭐라구 했던가? 그렇지, 우리 나라 산들에 박달나무가 흔치 않다구 했어.)

그는 눈을 감았다.

(한데 박달나무가 많지 않다는걸 난 왜 착안하지 못했을가. 외국문헌의 야자나무대신에 우리 나라에 있는 굳은 종류 나무를 생각해낸걸 괜찮은 착상으루 인정해주었지.… 그래그래, 흔치 않은 수종으로 숯을 구워낼순 없어. 장차 그 많은 활성탄을 대여낼순 없거던.…)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채 (하다면 어째서? 무엇때문에?)하고 자신의 마음속을 더 랭혹히 굽어보았다.

(그런 나무가 많지 않다는걸 은연중 느끼면서도 실험실적방법으로 우선 해놓고보자는 조급한 마음이 앞섰기때문일가? 아니, 난 근본적으로 모르고있은게 분명해. 그러니 그것두 똑똑히 모르면서 무슨 연구를 한다는건가.…)

자신에 대한 실망의 싸늘한 랭기가 가슴을 식히는듯 한 순간이 지나가자 그는 눈을 뜨고 김용석을 바라본다.

김용석은 제가 갑자기 연구사업앞에 장애를 조성해놓아 그것이 죄송스럽기나 한듯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있었다. 진리를 말했다고 해서 다 승리자는 아니라는듯 한 자세였다.

리승기는 마음속으로 그한테 말한다.

(용석동무, 머리를 들라구… 동문 도회지에서 자란 사람일세. 오히려 어릴적에 난 산이 가까운 곳에서 자랐지.… 퇴락한 량반가문의 마지막세대로 태여나 아버지한테서 한자나 배우느라고 생활과 자연에 접촉할 기회는 적었어도 그래두 난 동무가 그걸 말하니 대번에 리해가 되네그려. 그러니 난 알고있으면서도 채심을 못한거지.… 머리를 들게. 동무의 형이 나의 스승이더니 동무 역시 내 선생님이야. 과학자대회에서 하시던 장군님의 연설과 담화내용에 그토록 흥분했어도 난 아직 제 나라를 너무두 모르고있어.… 20년간의 일본생활이, 남쪽에서 보낸 악몽같은 5년세월이, 통털어 나의 전반생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구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이야.…)

《선생님.》

리승기는 누군가의 부름소리에 눈길을 들었다.

림창직이 말하고있었다.

《우린 지금 실험실단계에 있지 않습니까? 초산비닐합성이 박달나무숯으로 가능하게 된 때에 갑자기 그걸 바꿀수는 없습니다. 그걸루 쓰다가 이제 봐가며 한쪽에서 다른 방법에 의한 활성탄을 찾아내면 될게 아닙니까.… 우선 초산비닐합성을 성공시켜놓고서…》

림창직은 자기를 유심히 지켜보는 리승기의 시선이 얼핏 날카롭게 느껴져서인지 입을 다물었다.

리승기는 그 순간 이렇게 생각하고있었다.

(사람들의 기대가 큰것만큼 전시에 이런 어려운 조건에서 빨리 초산비닐합성을 발표한다면 백번 좋을수도 있어.…)

한데 어찌하여 림창직이, 언제나 앞날을 두고 공상이 많은 랑만가인 그가 갑자기 근시안으로 되여 이런 말을 할수 있는가.… 그의 말은 리승기한테 문득 누군가의 견해를 상기시켰다. 그것은 방하민부국장이 하던 주장들이였다.

방하민은 과학자대회전에는 《합성1》호 연구가 지금의 조건에서 당장 필요치 않으며 그것이 곤난하다고 여기더니 그 이후에는 도리여 서두르면서 빨리 초산비닐합성을 세상에 선포하자는것이였다. 물론 방하민자신이 지금의 조건에서 그것이 그렇게 빨리 되리라고 믿지는 않았었다.

그러니 림창직의 견해가 방하민과 꼭 같지는 않을것이다. 그의 말을 마저 들어봐야 한다.

《창직동무, 말을 계속하오.》

그러자 림창직은 간절한 눈빛으로 리승기를 바라보며 거의나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일단 실험실단계에서 성공하여 발표하면 우리들자신이 힘을 얻구 또 사람들두 신심을 가지구 우리를 주시할게 아닙니까?! 초산비닐합성을 해낸다는게 어디 간단한 수준입니까?!》

림창직이 더 말하지 않아도 리승기는 충분히 그의 심중을 알수 있다.

2차세계대전전에는 도이췰란드에서만 합성해낸 초산비닐… 쏘련도 일본도 미국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이것을 다른 시기도 아닌 전쟁때에 조선에서 해내였다면 그것은 적어도 세상의 화학자들속에서는 원자탄성공만치나 놀라운 기적으로 평가될것이다. 초산비닐합성은 《합성1》호를 위한 폴리비닐알콜의 첫 공정이면서 그자체만 아니라 한 나라 화학과 화학공업의 발전정도를 웅변적으로 말해주는것으로도 된다.

하지만 리승기는 림창직의 말을 수긍할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과학에서 중요한것은 다른 나라에서 못한것을 우리가 해내였다는데 있지 않다. 보다 선차적인것은 다른데 있다. 나라와 민족의 리익에 얼마나 맞는가 하는, 바로 과학자대회에서 받아안은 그 진리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그것이였다. 그리하여 리승기는 연구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박달나무로는 안되겠습니다. 활성탄을 다른 재료로 탐구해봅시다.》

그러면서 리승기는 활성탄을 맡은 신현석이나 옥지문이 아니라 림창직을 향해 말을 했다.

《주위에 흔히 있는것들로 만들어봅시다. 화학에서는 페설물이 오히려 유용한 원료나 귀중한 촉매로 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정당한 의견을 내놓은 김용석은 오히려 고개를 숙이고있는데 림창직은 여전히 리승기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한다. 그가 리승기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간절한 빛이 여전하고 게다가 거기에는 고집과 불만의 뜻조차 어려있는듯싶었다.

리승기는 이런 림창직을 처음으로 보았다. 놀라운 순간이였다. 그는 림창직을 모질게 질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언뜻 그의 머리속에는 안해의 비극적인 소식을 그한테 전해줘야 할 자기가 결코 남들앞에서 지금 당장 그를 꾸짖지는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승기는 조용히 《다들 좀더 생각해봅시다. 가보시오.》하고 말하였다. 연구사들이 나간 뒤에도 그 허름한 안락의자에 앉아 그는 눈을 감은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불현듯 《선생님…》하는 소리에 눈을 뜬 리승기는 자기앞에 서있는 림창직의 얼굴을 의아쩍게 쳐다보았다.

《선생님, 제 그만… 조급히 생각하다나니…》

림창직의 자책에 잠긴 목소리.…

리승기는 웬일인지 그한테 안해의 소식을 전해줘야 할 일이 생각나며 그가 몹시도 측은해났다. 그리고 림창직이 스스로 찾아와 뉘우치는 그 말에 그만 리승기는 그를 다시 불러 질책해야만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자신이 창피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말하였다.

《아닐세. 내가 선배의 구실을 제대로 못했네. 내자신이 그 박달나무숯을 좋은 착상으로 기뻐하지 않았나? 그러니 내가 우선 용서를 바라야 하네.》

림창직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무슨 말씀을… 제가…》

그들의 뜨거운 눈길이 부딪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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