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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 회

제 2 편

제 1 장

1


청수에 도착한 때는 새벽무렵이였다.

화물자동차꼭대기에서 내려온 리승기는 리재업과 함께 집마당에 들어섰다. 안해가 간데라불빛에 눈물을 번쩍이며 그들을 맞아들였다.

세상모르게 자던 열세살짜리 맏아들애가 제일 먼저 일어나 손등으로 눈을 부비며 첫마디로 물었다.

《아부지, 축지법 쓰신다는 장군님을 만나보셨어요?》

《만나뵈왔다. 땅을 주름잡는 축지법보다 더 신기한 힘을 가지신분이시다.》

《어떤 힘 말예요?》

아들애는 잠기가 싹 가신 눈으로 아버지와 매부되는 리재업을 의문에 차 번갈아 쳐다본다.

리승기는 대답을 아들이 아니라 안해한테 하려고 그를 돌아본다.

《여보, 그 힘이란…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한 인력을 가졌다구 할가, 난 그런분을 첨 만나뵈왔어. 지금두 눈앞에는…》

장군님의 그 미소, 그 눈길, 영특하신 지혜와 강의한 의지가 담긴 특유한 입모습… 사람을 강렬히 매혹시키는 그 뛰여난 인품을 안해한테 다 전달해줄수 없는것이 안타까왔다.

안해는 더 말을 못하는 남편을 눈물이 글썽한채 지켜보다가 밤새워 차타고온 그들의 속을 덥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내 얼른 더운 차라두 끓일게요.》하고 부엌에 내려서려 하였다.

허나 승기는 그를 제지시켰다.

《뭘 그리우, 한숨 자지 못하구 밤바람을 맞아두 속이 후끈거리기만 하오. 짐속에 누우니 춥지두 않았구…》

리재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집에 내려가겠습니다. 인차 날두 밝겠는데 가까이 있는 현석동무랑 옥동무한테두 빨리 알려줘야지요.》

분이는 굳이 그를 만류하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라지오로 세상이 다 아는데… 그 선생들두 대회소식을 벌써 휑하니 알구계셔요.》

《하여튼 가봐야겠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리승기네 집 맨 웃방에 거처하는 오정해가 16살짜리 실험공을 깨워가지고 나왔다. (리승기는 그들을 제집에서 밥먹고 다니게 하였던것이다.) 무거운 배낭을 멘채 회의장에 뛰여들어 송복섭이를 열렬히 옹호하던 그때같지 않게 지금은 훨씬 어린 나이로만 보이는 오정해였다. 그는 자다가 일어난 푸시시한 고수머리를 손빗질하며 흥분된 어조로 《선생님, 우리두 여기서 의논이 많았습니다. 제 오늘 흥남쪽에 떠나겠습니다. 실험기구, 시약을 가지러 말입니다.》 하면서 제가 생각한 명세를 내리꼽기 시작했다.

리승기는 한손을 들어보이며 웃었다.

《정해, 좀 천천히. 미처 정신을 차릴수 없구만. 허허허.》

오정해도 급하게 구는 제가 쑥스러운듯 손을 뒤더수기에 가져갔다.

그러자 리승기가 오히려 미안해하는 어조로 그한테 말했다.

《그래서? 이자 가감저항기라구 했던가?》

《네, 그렇습니다.… 좀 누워 쉬십시오. 저희들은 올라가보겠습니다.》

《아니아니, 가만있게. 이제 잠이 다 뭔가… 그래 그쪽에 나가는 차편이라두 있나?》

《태호동무와 같이 걸어서 떠나자구 했습니다. 가다가 잡아타기두 하구.》

《태호동무와?》

《네, 한태호는 특수용접봉이 꼭 있어야겠다며…》

《참, 태호동무가 있지.…》

리승기는 한태호의 존재를 비로소 생각해낸듯싶었다. 화학자한테는 훌륭한 장치제작공이 있어야 한다. 참말이지 연, 늄, 동, 백금 등 특수용접을 귀신같이 해낼줄 안다는 한태호, 더구나 백금도가니용접은 그 누구도 이 청년을 대신 못한다고 했지… 한태호나 오정해는 다 김용진이 자기한테 맡겨놓고 간 사람들같이 생각되였다.

리승기는 갑자기 주위의 사람들이 다른 눈으로 보이기 시작하였다. 인간들이 새롭게 보이는 때가 이제껏 있어본적 없었으니 누구든지 일생에서 이런 때는 흔치 않을것이였다.

며칠이 지났다. 리승기는 아침길에 나섰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이 봄이였던가싶어 저 혼자 스스로 놀래였다. 골안에 진달래가 한창이였다. 사위는 고요한데 어디선지 물소리만 조잘대며 들려온다. 저아래 압록강에서 들리는 여울물소리가 아니라 골짜기길을 따라 나란히 흐르는 돌개울의 수집고도 열렬한 속삭임이 분명하다. 땅속깊이에서 들리는것도 같고 봄하늘 종다리의 지저귐처럼 공중에서 들리는것도 같다. 눈석임물이 가셔진지 오랜 돌개울에서 맑고 투명한 물이 돌짬으로 흐르는것이였다.

그는 개울가의 물황철나무를 바라보았다. 버들개지 못지 않게 봄을 먼저 아는 물황철나무였다. 벌써 가지마다 뾰족뾰족 내미는 연두색의 신선한 움들은 흡사 해죽거리는 아기의 미소와도 같았다. 어찌하여 험한 돌서덜에 뿌리박은 그 투박한 나무줄기에서 그런 애어린 움들이 돋을수 있는지 자못 이상스런 생각이 들었다.

리승기는 산기슭의 단층집에 꾸린 실험실로 향하였다. 방안에 들어서자 이것 역시 얼마전까지 자기의 고독을 위안해주던 그런 장소가 더는 아니라는것이 명백해졌다. 일본에서도, 남조선에서도 그 어떤 실험실이건 그것은 관찰과 사색의 장소이면서 더우기는 고독감을 달래주는 곳이였었다. 그때는 주위에 사람이 있는것 같지를 않아 줄곧 고독감을 느껴왔었다. 학자한테는 고독감이 평생 떨어질수 없다고까지 생각하면서… 대학시절에 어느 동료가 노르웨이의 희곡작가 헨리크 입센의 말이라면서 고독한 사람이 힘이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이 학문에 뜻을 둔 사람한테 특별히 맞는 말이라고 여긴적도 있었다.

한데 지금의 이 실험실조차 자신의 고독을 위안하는 그런 장소로 되여왔었다는것이 이제와서는 믿어지지 않는다.

조촐하고 불비한 실험실이였다. 하지만 이제는 삐걱거리는 실험대에 벌린 유리기구며 자그만 벽장안에 주런이 세운 시약병들이 무엇인가 다정히 말을 건늬여오는것만 같았다.

대뜸 그한테는 항온건조기며 관상로, 가감저항기를 어떻게 해결할것인가, 그대신 어떤 장치들을 대용할수 있겠는지, 활성탄은 무엇으로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생각들이 떠올랐다.

문소리가 나고 림창직이 들어섰다. 아직도 견장과 모표만을 뗀 군관복차림인 그는 불룩한 마대자루를 어깨에 걸메고 다른 한손에도 무엇이 가득한 자루를 들었다. 어깨에서 내려놓는 마대속에는 빈병들이, 손에서 놓은 자루에는 파전구알들이 있었다.

《비커와 후라스코대신에 써볼가 해서…》하고 림창직은 그답지 않게 점직해하며 말했다.

리승기는 파전구 한개를 들고 마치 처음 보는 물건이기나 하듯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꼭지만 떼면 여불없는 후라스코가 아닌가. 현대적인 화학실험연구실의 조상으로 되는 저 19세기에 있은 리비히의 실험실에서도 그때 이런 훌륭한 후라스코를 쓰지 못했을수 있다!

《선생님, 제가 꼭 넝마장수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의 입귀에서는 금이발이 반짝여도 그것이 귀염상스럽기만 하다.

《나두 래일부터 숯쟁이가 되자는거네.》

《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신현석이, 옥지문이 활성탄때문에 숯을 구우러 다니면서 새까맣게 되여 아이들이 숯쟁이라구 잘못 알구있지만 설사 우리가 넝마장수, 숯쟁이들이 된다 해두 이제는 마음속으로 소리치고싶은 긍지라는게 있지 않나?》

림창직은 그렇듯 거침없이 말하는 리승기를 놀라운듯 바라보다가 《제 좀 아침밥을…》하고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난다.

《아직 식전인가?》

《아침산보였지요.》

《허참.》

실험실에 잇달린 방을 꾸리고 혼자서 자취를 하는 림창직이였다. 멀리 떨어진 합숙보다 가까이에서 시간을 더 얻어낼수 있다는 그의 야전식사고방식에서 흘러나온것이다.

림창직이 나간 다음 리승기는 잠시 의자에 앉았다. 여직껏 림창직한테 하지 못한 그 말을 아직도 꺼낼수 없다는것을 혼자 괴롭게 더듬고있었다. 그를 만날 때마다 마음속에서 언뜻거리는 그 불안의 그림자… 지금도 리승기는 림창직의 안해가 갓난애와 함께 인천―서울간 도로상에서 적들의 포탄에 잘못되였다는 그 사실을 믿을수가 없었다.

허나 리승기보다 이틀 늦어 과학자대회에서 돌아온 김용석은 그간 평양에서 자기 형수와 두 조카애들을 찾아보고는 림창직의 안해에 대하여 알고있는 그 내각사무국지도원도 만나고 왔다.

모든것이 사실임에 틀림없는것 같았다. 사무국지도원이 김용석에게 림창직의 안해한테서 나온 자그마한 사진까지 넘겨주었다. 뒤등에 백날기념이라고 씌여진 젊은 어머니와 갓난애가 함께 찍은 사진…

어느 한 녀성군의가 그 사무국지도원한테 사진을 넘겨주면서 남편을 찾아 전달해달라고 했다는것이다.…

그런데 리승기는 이런 서글픈 생각에 오래 잠겨있을수 없었다.

사위 리재업이 찾아와서 제가 합성고무연구를 위해 받은 자금중에서 일부를 떼내여 이웃나라에 사람을 띄워 《합성1》호를 위한 4연구실에서 필요한 실험기구들을 사오자고 했을 때 리승기는 그 자금은 군사위원회 명의로 받아온 국가자금이니 빨리 합성고무를 연구생산할 생각이나 하라고 하면서 사위의 권유를 일축해버리였다.

리승기는 림창직이 가져온 마대속의 빈병과 파전구를 가리켜보이면서 이렇게 군대식으로 하면 안될게 뭐냐고 했다. 해놓고보니 제 말이 짜장 저로서도 퍽 그럴상싶어보이는것이였다. 리승기는 흥남쪽에 큰 예비가 있을거라고도 했으며 필요한 실험기자재들을 서로 빌려쓸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아예 사위가 더 말을 못하게 방에서 쫓아버리다싶이 하였다.

리승기는 사위가 나가자 마치 큰 론적이나 물리친듯이 득의만면해서 혼자 방안을 빙빙 돌아갔다. 그다음 그는 기분이 좋아서 유리기구들을 불에 대고 직접 제 손으로 구부리고 펴고 하면서 실험조작준비를 서둘렀다.

봄날의 저녁해가 압록강너머 이국의 산발로 스러져갔다. 어느덧 황혼이 깃들었다. 리승기는 실험실을 나서다말고 맨끝에 달린 림창직이 자취를 하는 방앞에 다가섰다.

한칸안에 부엌도 방도 함께 있는셈이다. 밤낮없이 실험실을 드나들수 있어 제격이라고 좋아하는 림창직은 《이러느라면 통일두 되겠지.》하고 휘파람을 불면서 팔을 썩썩 걷어붙이고나서 가마를 부시고 쌀을 안치군 하였다.

문을 연 리승기는 황급히 소리쳤다.

《저런! 밥탄내…》

부뚜막에 책을 놓고 정신없이 들여다보던 림창직이 와뜰 놀라 헤덤벼치며 쇠가마뚜껑을 쥐다가 《이크!》하고는 손으로 귀불을 쥐다말고 급히 행주로 가마뚜껑꼭지를 쥐여 들어내더니 가마에다 무작정 물을 부었다. 쏴― 하면서 밥탄내가 섞인 뜬김이 뽀얗게 좁은 방안을 채웠다. 두사람은 마주보며 같이 소리내여 웃었다. 웃는 림창직이를 보고 돌아서 나오는 순간 리승기는 여직껏 잊어버린것 같던 그 불안과 서글픔이 또다시 되살아나 잠간 걸음을 멈췄다. 그러다가 다시 발길을 옮겼다.

봄밤의 푸근한 대기가 흥분도 불안도 한결 가라앉혀주는것만 같았다.

그가 집마당에 들어섰을무렵 차광막을 친 캄캄한 문의 어느 짬새에서 실낱같은 빛이 알릴락말락 새여나왔다.

리승기는 부엌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해와 함께 아래방구들에서 일어서는 처녀는 리금진이였다. 처녀는 양복깃우로 넘어와있는 량태머리의 한쪽끝을 쥐여 살그니 어깨뒤로 넘기고는 미소를 머금은채 머리숙여 인사를 한다.

《전 그럼 그만 가보겠습니다. 골안 막바지에 있는 학생네 집에 가정방문 갔다오던 길에…》

《좀더 놀다 가지.》

리승기는 그렇듯 준엄한 전쟁속에서도 이 봄따라 어쩔수없이 활짝 피여나는 처녀의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처녀가 간뒤 안해는 소반우에 저녁밥을 차려놓았다.

안해는 숟가락을 드는 남편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금진이 하는 말이 학생들이 창직선생이 하는 초청강의를 제일 좋아한대요.》

그래도 리승기는 응대가 없이 그저 밥을 뜨기만 하였다. 안해가 말을 계속했다.

《글쎄 녀선생들이 합숙에 있는 독신연구사들을 지원하여 빨래랑 해주자구 약속했다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사실 창직선생은 내가 맡아 돌봐야 할 처지인데 식솔이 많아 미처 보살펴주지 못해요.〉하니까 금진이는 〈그럼 사모님, 제가 사모님 대신해서 창직선생의 빨래는… 아니 아니, 우리가 다 함께 책임지겠어요.〉하는거예요.》

《거 좋은 일이지.…》

급기야 리승기는 밥을 몇술 더 뜨고는 놓고말았다.

그는 그 어떤 운명의 암시가 느껴지는것 같아 급히 거기서 멀어지려는듯 손을 홱 내젓고말았다. 안해는 여전히 금진이를 두고 칭찬이였다.

《회령처녀라더니 그게 무슨 말인가 했어요. 금진이를 보구야 그 말이 옳다구 생각돼요. 얼마나 매력이 있구 몸맵시가 쭉 빠져보여요? 이담에 우리 며느리두 그런 처녀가 나타났으면…》

《됐소, 됐소. 별소릴 다하누만.》

안해가 또 이런저런 소리를 할것 같아 리승기는 소풍이나 하듯 밖으로 나왔다. 집앞의 돌개울가로 나간 그는 뒤짐을 지고 봄밤의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연구집단앞에 당장 활성탄문제만 아니라 그만 못지 않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생긴것만 같아 그는 얼떨떨해지였다. 이것이 무엇때문인가. 장차 무슨 일이 있단 말인가. 그는 자신에게 물었으나 대답도, 마음의 안정도 찾을길 없었다.

학술적인 착상이나 중요한 판단과 결심이 떠오르군 하던 저녁산보… 하지만 이밤 자기로서는 어쩔수 없는 인간들의 문제가 그의 사색을 송두리채 빼앗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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