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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회

제 3 장

불길처럼 타오르라

11


직장초급당비서를 만나본 진호는 맡겨두었던 짐들을 책임기사방에 옮겨놓은 다음에야 태수가 있는 기술과로 찾아갔다.

《아-니 이게 누군가, 응? 정말이군그래, 정말이야!》

기술과청사의 좁은 계단으로 막 굴러내려오다싶이 한 태수는 다짜고짜 진호를 부둥켜안았다.

《하- 이거 모르겠는걸! 어떻게 된판인지 모르겠다니! 어디 보세, 진호가 맞나.》

《글쎄 내가 뭐랬어, 꼭 온다잖았는가 말야!》

사무실에 들어서서도 태수는 《자- 다들 보시오, 바로 이 친구가 진호요.》 하고는 마치 경기에서 이기고 퇴장하는 진호를 맞을 때처럼 허리를 안고 한바퀴 돌기까지 했다. 이런 부산스런 행동에도 부서사람들은 탓하는 기색이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뭐라고 한마디 한 태수는 곧 진호의 팔을 끌었다.

《가자구.》

《어디루?》

《어디긴 어디야, 우리 집이지!》

《우리 집?》

그제야 진호는 그사이 태수가 결혼했다는것을 감감 잊고있은 사실에 놀랐다.

작년말, 결혼식에 꼭 와야 한다는 편지를 받고도 바쁜 출장이 제기되여 몸을 빼지 못했던 자기였다. 지방려관의 초라한 방안에서 어떤 축전을 보낼것인가를 궁리하다가 숱한 초안들을 다 찢어버리고 《행복의 꽃을 피우라》는 단마디로 된 전문을 날렸던것이다.

어떻게 생긴 녀잘가? 성격은 어떻고?

모르긴 해도 태수의 안해될 녀자라면 한두마디의 핀잔쯤에는 끄떡도 하지 않을 녀장부래야 된다고 믿는 진호였다. 그렇지 않다간 그 드센 성격에 몰리워 밤낮 애꿎은 눈물만 짜리라는것은 의심할 여지없었다.

편지에는 교원대학을 졸업한 꼬마선생님이라고 했었지?

아무리 생각을 굴려보아도 태수가 어떤 녀자를 데려왔겠는지 가늠할수 없었다. 우선 그가 낯모를 녀성과 생활을 꾸리고있다는 자체가 믿어지지 않았다.

결혼생활, 특히 신혼생활이란 부부끼리 서로 귀속말로 속삭일줄도 알아야 하고 안해의 온정에 넘친 트집도 아량있게 대할줄 알며 특히는 각별한 매력이 숨어있는 생활의 갈피들을 묘리있게 들추어내는 재간도 있어야겠는데 덜퉁스럽기만 한, 수업시간 옆사람과 한다는 얘기가 강사의 목소리보다도 큰 그가 어떻게 그런 생활을 꾸려나가는지 자못 의심스럽기만 했다. 한마디로 색다른 생활을 능숙하게 대할 재치라고는 전혀 없는 그가 어떻게 살고있는지 몹시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 우습기도 했다.

사무실을 나서면서 진호는 소란을 피운데 대한 사과의 뜻에서 사람들에게 묵례를 했다.

문옆에 서있는 남달리 뚱뚱하고 혈색이 좋은 사람에게 시선이 미친 그는 분명 낮에 전화를 받던 그 과장이라고 생각하며 각별히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보였다.

《아깐 안됐습니다.》

《뭘요.》

아무 의미도 없는 미소를 띄운 그였으나 목소리만은 더없이 위엄이 있었다.

《어때? 경기장에선 내가 내내 동무의 뒤를 쫓았지만 이번엔 날 따르지 않을수 없었지?》

《정말 죽기내기로 따라왔네.》

《어물어물하다간 영 떨어지고말어!》

정말 자기뒤를 바싹 쫓아오는가 어떤가를 시험이라도 하듯이 태수는 두팔을 휘저으며 힘차게 걸었다.

《같이 배치된 친구들은 다 잘있나?》

《잘있지. 이젠 여기 귀신이 다 됐어. 정국이는 밤낮 새까매가지고 두더지처럼 굴뚝만 쑤시는데 뭐 연진에서 새로운 금속을 잡아낸다나? 그리고 용필이는.》

《용필이라니?》

《아, 왜 그 〈구강공학강좌장〉있잖아.》

《그래그래!》

너무도 능한 웅변가여서 일격에 《구강공학강좌장》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은 기계제작학부의 뚱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친군 무슨 프로그람선반에 달라붙었는데 도무지 만날 사이도 없어!》

《참! 내가 깜빡 잊었댔군! 축하하네. 그사이 굉장한걸 만들었더군. 투사기 말이야.》

《피-》

미간을 찌프린 태수는 곧 입술을 삐죽이 내밀었다. 언제나 자기에 대한 평가는 그것이 아무리 응당한것이여도 이러군 하는 그였다.

《내가 특별히 고맙게 여기는건 그게 대단한 기계라는데도 있지만 보다는 그걸 만든것으로 해서 동무가 내 빚을 갚아준거야.》

《빚이라니?》

《그런 일이 있지!》

《아직이야 알게 뭔가? 이제 부의 심사를 거쳐봐야지. 생각만 해도 난 벌써부터 가슴이 졸아드네. 그들이야 덮어놓고 흠만 잡자고 달려드는걸.》

《아니, 환성을 올릴거네. 용해공들이 격찬인데야 무슨 걱정인가. 표창급수에 상금은 맡아둔걸세.》

《제-길.》

기쁠 때마다 속으로는 더없이 흥이 나 하면서도 무슨 다른 화제를 꺼내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군 하는 그의 모습을 보느라니 진호는 자기들이 그동안 서로 떨어져있은것이 아니라 대학생활을 그대로 연장하고있으며 교정을 거닐며 하던 얘기를 계속하고있는듯싶었다.

태수를 만나는 첫 순간에 진호는 벌써 그가 이전과는 달라졌다는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오래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던 사람의 얼굴을 오래간만에 볼 때면 처음에는 헤여져있었던 사이에 생긴 외모의 변화에 놀라게 되지만 차츰 그 얼굴은 이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면서 모든 변화들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그 사람에게 고유한 표정만이 나타나는 법이다.

진호도 그에게서 바로 그런 낯익은 점들을 찾아보게 되면서도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특징, 확신에 넘쳐 한곳을 향해 줄달음치는 사람에게만 특유한 열정과 신심을 깨닫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본래의것을 억지로 다르게 바꾸어 나타내는것이 아니라 본래의것이 한껏 좋게 발전된, 말하자면 훌륭한 생활속에서만 얻을수 있는 자신심이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아니 왜 이쪽으로 가나?》

인도를 벗어나 야산쪽에 있는 좁다란 비탈길로 접어드는 바람에 진호는 의아한 눈길로 태수를 쳐다보았다.

《아빠트에 들라는걸 떼를 써서 이 집을 얻었네. 낡은 유습이라고 욕할건 없어. 일이 일이니만치 조용한 곳에 있고싶더군. 또 일터가 가깝기도 하고. 그런데 왜 물어보지 않나? 어떤 처녀를 얻었는가구?》

《왜 겁이 나나? 과소평가할가봐?》

진호는 뒤에 선것으로 하여 태수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게 유감스러웠다.

《난 동무의 평가보다 자기의 인상을 기준으로 삼고픈거야. 내가 물어보면 동문 암암리에 정도이상으로 과장할게고 그럼 난 실지 부닥쳐서는 실망할수도 있지 않나.》

《원, 제-길! 보면 알겠지만 과대고 과소고 할 대상이 못돼!》

태수는 어처구니없다는듯이 고개를 저었다.

나지막한 산비탈을 에돌자 열댓채됨직 한 아담한 사택들이 서로 이마를 맞대고있었다. 그중 첫머리에 있는 집앞에 이른 태수는 익숙한 동작으로 울타리문을 열어제꼈다.

첫눈에도 주부의 알뜰한 손길이 느껴지는 정갈한 집이였다.

마당가에는 벌써 품들여 손질해놓은 꽃밭이 있고 그 주위로는 하얀 옥돌들이 보석처럼 다문다문 박혀있었다. 그 꽃밭으로부터 지붕까지는 포도넝쿨이 덮여있어 여름이면 아늑한 공원에 들어선듯 한 느낌이 들게 할것이 틀림없었다. 처마끝에 매달아놓은 새장들에 눈길이 미친 진호는 더욱 어리둥절해지고말았다.

《아니! 이거야 분수가 없을따름이지 별장이 아니고 뭔가!》

모든것이 태수의 재간이 아닐것은 두말할것도 없고 오히려 이렇게 꾸리기까지 그가 안해의 속을 얼마나 태웠겠는가를 십분 짐작할수 있었다.

《엉큼하다니… 어느새 이런 알뜰한 처녀를 다 구슬려냈나? 그렇지만 뭐 1년만 지나면 저절로 달아나고말걸! 도대체 어떤 처녀가 동무같은 불도젤한테 견디겠나 말일세.》

이러면서 뒤돌아보던 진호는 주춤하지 않을수 없었다.

어느새 자기옆에 얼굴을 다소곳이 숙인 태수의 안해가 미소를 머금고 서있기때문이였다.

《안녕하십니까?》

《?!》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 몰라 주밋주밋하는데 옆에 다가선 태수가 웃음을 터뜨리는것이였다.

《하하! 이젠 좀 헴이 들었군그래. 우물쭈물할 때가 다 있는걸 보니.》

《정은심이예요. 얘긴 많이 들었습니다.》

자그마한 키에 상냥한 눈빛도 다정스러웠지만 바로 그 유순한 눈에서 흘러나오는듯 한 맑은 목소리가 더욱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한데 지내 아련해뵈는걸? 태수가 한마디만 해도 대꾸는커녕 눈물부터 떨구겠군. 그렇지만 저 귀여운 모습으로 해서 이 친구가 노상 입을 벌리고살겠어!)

《자, 이젠 올라오게. 우린 그저 이렇게 사네.》

퇴마루에 올라서서 방문을 열어젖히며 말하는 태수의 어조는 마치도 초라한 살림을 흉보지는 말라는듯 했으나 그 말이 진호에게는 되려 정반대의 의미, 즉 《자, 우리는 이렇게 행복하게 사네.》하고 강조하는것 같았다.

집안은 더욱 알뜰했다.

전실을 사이에 두고 아래웃방이 갈라져있는데 웃방은 주로 태수에게 필요한 책상과 책장, 침대가 놓여있고 아래방에는 옷장과 재봉이 있었다. 텔레비죤과 갖가지 화분들이 놓여있는 전실에는 제도판이며 설계도구까지 설치돼있어 제법 기사가정의 품위가 여실히 느껴졌다.

《뭐 좀 없소? 아무거나 있는대로 가져오오.》

갓 살림을 꾸린 세대주가 흔히 그런것처럼 태수의 목소리는 어딘가 호령하는듯 하면서도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였다.

이런 태도로 미루어보아 진호는 아직 한번도 태수가 안해에게 곰살궂게 군 일이 없으며 또 앞으로도 없으리라는 짐작이 갔다. 그리고 은심이의 행복에 겨운 모습, 조용하면서도 자신만만한 행동거지는 그가 아련한 녀자임에도 불구하고 교단에서 사랑스런 꼬마를 다루듯 그렇듯 수월히 또 재미와 존경을 가지고 남편을 대하고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진호는 이들의 모습에서 신선하고도 청신한 향기를 풍기며 잎이 피기 시작하는 한쌍의 백양나무를 보는듯 한감을 느꼈다.

웃방 태수의 책상에 마주앉은 진호는 무심결 유리판밑에 깔아둔 종이장에 눈길이 갔다. 거기에는 자기가 수행해야 할 과제며 계획들이 깨알같은 글씨로 적혀있었다. 무수한 색갈로 그려진 동그라미며 삼각표식을 보는 순간 그는 갑자기 전기에라도 감전된것 같았다.

그처럼 자기가 꿈꾸던 일, 현옥이와 함께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그 생활이 자기한테서는 영영 사라져버리고 친구의 생활에 꽃피고있다는것을 느끼게 되자 저절로 가슴이 메여오르는것이였다. 반갑다고 해야 할지 서글프다고 해야 할지 종잡을수 없는 심정이였다. 고개를 돌리긴 했으나 시선이 자꾸만 그리로 쏠리는것 같아 그는 아예 방바닥에 내려앉고말았다.

《자- 이젠 좀 차근차근 얘기해봐.》

이제까지 한 말은 모두 가식에 지나지 않고 이제부터야말로 진짜라는듯이 태수는 진호앞에 바싹 다가앉았다.

지금 태수는 그사이 진호가 어떻게 지냈으며 또 어떻게 예고도 없이 불시에 내려오게 되였는가를 알고싶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동안 자기가 겪은 생활, 한두마디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벅찬 사건들이 새로운 의미로 회고되는것이여서 그것들을 어떻게 다 펼쳐보일가 하는 생각에 젖어있었다.

《아니, 눈이 더 나빠진게 안야? 그전보다 더 자주 깜빡이는군!》

《뭐 일없네!》

어느새 상을 차려 든 은심이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자개가 박힌 네모난 상우에는 락화생이며 조개따위의 마른 안주와 함께 보기드문 생선회까지 올라있었다.

《이건 또 뭔가?》

《상봉을 축하해서지.》

상을 받아놓은 태수는 두손을 마주 비벼대며 싱글벙글했다.

《아무것도 준비한게 없어 미안해요.》

미리부터 준비한것이 틀림없었으나 은심이는 녀성일반이 그렇듯이 자기 솜씨는 좀더 우월한데 바삐 서두르다나니 이렇게밖에는 차리지 못했다는듯 한, 그러면서도 은근히 주부의 능력을 과시한것을 못내 만족해하는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것이였다.

《난 동무가 아무때건 이리로 오리란걸 알았어. 그 따분한 장벽을 뚫고야말리라는걸 말이지. 그런데 어째서 강철직장을 택했나?》

은심이가 부엌으로 내려가자 태수는 진호의 잔에 맥주를 부으며 이렇게 물었다.

《왜 내가 거길 내놓고, 그 깡철직장을 내놓고 어딜 간단 말인가?》

진호는 일부러 공장지도원의 흉내를 내여 《깡》이라고 발음해보았다. 그러자 우습긴 하면서도 무척 친숙한감이 드는것이였다.

《아니! 내 말은 호케이선수가 불바다에 뛰여들었으니 하는 말일세. 얼음과 용금을 합쳐보게. 어떻게 되나? 폭발일세. 그것도 굉장한 폭발! 야금이 불과 물의 과학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들은 서로 상극이거던.》

《하하.》

오래간만에 가슴을 터놓고 웃어보느라니 진호는 자기에게 닥쳐온 새 생활에 대한 환희와 함께 이미 지나간 생활의 구슬픈 선률이 한데 엉켜 어쩐지 가슴이 멨다. 그러면서 태수한테야말로 자기가 이제껏 겪은 모든 일들, 그 누구한테도 털어놓지 못한 사연들을 다 털어놓을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것이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초지종을 자세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진호의 얘기를 다 듣고난 태수는 그를 무척 위로해주고싶은 심정에 휩싸였다.

그는 자기가 진호한테서 이런 련민의 정을 느끼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러자 가슴속에 그 어떤 모순된 감정, 이를테면 진호에 대한 동정과 그의 행동에 대한 열렬한 공감은 금할수 없으면서도 그가 자기의 지향을 고집한탓으로 의심받은 부당한 생활에 비하면 자기가 걸어온 길은 너무도 뚜렷하고 줄기찬것이였다는 긍지가 솟구쳐오르는것이였다.

사업을 놓고보나 개인적인 생활에서나 자기가 행복하다는 의식은 그것을 바랐으면서도 이룩하지 못한 진호에게는 불쾌하리라는 생각이 들어 그는 자기 생활에 대해서는 될수록 비치지 않으려고 맘먹었다.

《그래 이번엔 그 새 연료가 자신이 있나?》

《글쎄… 뭐라고 해야 할지. 생성물처리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네만 보다 중요한 온도만은 아직도 부족점이 많아. 전번 실패도 바로 열부족에 있었거던. 겨우 1 650도정도니까 아직 150도는 더 올려야 하네.》

《아니, 아직도 150도나?》

태수는 버럭 어성을 높였다. 그런데는 어딘가 락심해하는듯 한 진호의 태도가 불만스러웠기때문이였다.

이럴 때 진호의 의기를 돋구어주기 위해선 어떤 양념을 쳐야 한다는것을 알고있고 또 격하기 잘하는 그의 버릇을 오래간만에 즐겨보고싶어진 태수는 이번에도 틀림없이 자기의 계책에 말려들리라는것을 느끼며 곧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긴 하겠지만 아직도 그 정도라면 이제라도 다른 과제를 잡는게 어때?》

《왜?》

《숱한 사람들이 그걸 가지고 얼마나 씨름했게? 작년에도 그 연구집단이 반년이나 내려와있지 않았나. 그런데도 결국 허탕이였거던.》

《흠! 그들이 뭐라구!》

진호의 눈이 꼿꼿해지는것을 보며 태수는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그들이 동무보다야 훨씬 선생이 아닌가! 그들에 비하면 동문 초학도에 지나지 않지.》

《하긴 그럴수도 있지. 그들이 나보다 아는거야 많겠지. 경험도 있고.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걸 내가 알아낸것도 있단 말일세. 그들은 새 연료자체 그 하나만 가지고 취입하려고 했거던. 말하자면 새 연료에 첨가제를 배합하려 하진 못했단 말이네. 여기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지. 내가 대학기간 3년을 괜히 첨가제 하나에 몰두한줄 아나? 그들은 단지 어떤 기성원리가 있으면 그걸 현실에 적용해보려고 할따름이야. 마치 하나의 나무모를 지고 다니면서 여기는 땅이 나빠 안되오, 여긴 물이 없소 하고 결론을 내리는 사람처럼 말이야. 문젠 나무에 맞는 땅을 찾을게 아니라 그런 땅에 맞는 나무모를 키워야 한다는데 있지. 난 나의 첨가제야말로 아직 부족점이 있긴 하지만 거기에 맞는 그런것이라고 생각하네. 자- 보라구. 여기에 9천카로리의 중유가 있네. 그리고 여기엔 6천카로리밖에 안되는 연료가 있고. 그래 이 연료가 어떻게 중유만 한 열량을 담보한단 말인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

《그럼 그들이 아직 그것도 모른단 말인가?》

《왜 알기야 하지. 그렇지만 다른 나라에서 아직 그렇게 도입한 실례가 없으니까 시도하지 않는걸세. 그들에겐 기성의 전례와 경험이 활동기준으로 돼있단 말이네. 어쨌든 기본고리는 이 첨가제네. 이 첨가제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있지. 이걸 보게. 이게 연료네. 그런데 여기다 이 첨가제를.》

《아니, 가만! 양념이야 쳐얄게 아닌가!》

앞에 놓인 양념접시를 집어옮기려고 하는 진호의 손을 멈추며 태수는 미소를 지었다.

《난 중유를 제철소에 먼저 주라고 하신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전달받는 순간 가슴이 미여지는것 같았네. 그 사랑이 너무도 고마와 눈물이 나다가도 어떤 죄책감으로 하여 울수조차 없더란 말일세. 그이께서 그런 걱정을 하시는데도 과학자며 연구사들이 그 무슨 사정이요, 조건이요 하고 손꼽아 렬거하는 리유들에 대해 반감이 치밀어 견딜수가 있어야지. 아니, 그보다 내자신이 여태까지 무슨 일을 했는지, 또 어떻게 태평스레 하루하루를 살아올수 있었는지 리해할수가 없더란 말일세.

사실 우리야 그이께서 바라시는 일이라면 무조건 해야 한다고 교육받지 않았나. 교육은 둘째치고 여태껏 받은 사랑에 뭔가 하나라도 해놓은 일이 있어야 할게 아닌가. 난 그때에야 내 심장이 녹쓴 파철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똑똑히 알았네.》

점점 낯빛이 창백해지는 진호를 여겨보며 태수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언제나 모순된 문제성만 옹호해나서던 그가 이젠 필요한 일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신심을 느끼고있을뿐아니라 거기에 한몸바칠 불같은 각오에 충만돼있는것이 아닌가!

《좋아!》

태수는 그의 어깨를 철썩 갈겼다.

《진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걸 똑똑히 보여주게, 경기때처럼 말이야. 응, 자- 그 소원이 성취되길 바래서!》

태수는 잔을 들어보였다.

《그래, 직장사람들은 마음에 듭데?》

잔을 비운 태수는 화제를 옮길 생각으로 이렇게 물었다.

《누구 말인가, 비서? 좀 무뚝뚝해뵈더군.》

《하긴 그렇기도 해. 바탕이 용해공이였으니까. 로행정도 환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은 그보다 더 잘 들여다본다네. 어떨 땐 너무 속속들이 꿰뚫어봐서 막 화가 날 때도 있지.

그의 버릇이 뭔지 아나? 언제나 자기가 먼저 론증을 해놓고는 반박을 기다리는거야. 만일 자기를 꼼짝 못하게 반박을 가하면 좋아하지만 말문이 막혀 우물쭈물하면 오히려 성을 내거던.》

진호는 《반갑소. 어디 같이 한번 일해보기요.》 하면서도 도대체 몇푼이나 되는가를 가늠해보기라도 하듯이 깔끔한 눈길로 훑어보던 비서의 얼굴이 떠올랐다.

《참! 누구보다 책임기사가 맘에 들더군! 그 나이에 책임기사라니 보통친구가 아닌 모양이지?》

생선회를 씹느라고 입을 우물거리던 태수는 대답대신 제꺽 세개의 손가락을 펼쳐보였다.

《벌써 세개의 기술안을 현장에 도입했는데 그중 두개는 발명권까지 받았다네. 남다른 재간에 일욕심까지 있어서 제철소에선 누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지. 거기다가 생기긴 또 얼마나 곱살하게 생겼나? 그래서 숱한 처녀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군 하지만 그에겐 언제나 시기상조라네.》

《그건 왜?》

태수는 벌쭉 웃었다.

《〈남아 이십 미평국이면 후세수칭 대장부리요〉하는 시조를 알지? 남이의 시 말이야. 그게 그에게는 〈남아 이십 미현국이면 후세수칭 과학도리요〉라고 읊히운다네. 말하자면 이십대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을 누가 과학자로 인정하겠는가 하는거지. 새색시처럼 얌전해뵈지만 속에는 그런 만만찮은 투지를 품고있는 대장부야. 알겠나? 지금도 무슨 열관리개선에 대한 기술안을 연구하고있는데 뭐 중유를 절약하는 안이라던가?》

《중유를 절약하는 안?》

진호는 저도 모르게 태수의 말을 되받아외웠다.

《하여간 뭘 어떻게 해서 중유소비기준을 떨군다는건데… 아-니, 그러고보니 동무 기술안과 비슷하군그래. 응?》

그제야 태수도 굳어졌다.

커다란 충격이 진호의 온몸을 휩쌌다. 어떤 원리에 의한 기술안일가?

《어디 좀 구체적으로 말해보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쨌든 이미부터 그 기술안이 숱한 사람들의 관심속에 있는것만은 사실이네.》

어떤 새로운 흥분에 휘말린 진호는 책임기사에 대한 놀라움을 더욱 금할수 없었다.

그는 잔을 들어 단숨에 입안에 쏟아넣었다.

《어쨌든 첫인상은 괜찮았네. 비서도 그렇고 책임기사도 말이야. 아무렴 동무네 과장같은 사람이겠나?》

《과장이라니?》

《그 뚱뚱보 말이야. 전화를 받으면서 어찌나 을러대는지, 원…》

한참 눈알을 굴리던 태수가 갑자기 방바닥을 내려치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 그 친군 과장이 아니라 며칠전에 온 햇내기야.》

눈에 고인 눈물을 씻으며 그는 계속 숨넘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같이 있으면 씩씩거리는 숨소리로 해서 가슴이 다 답답하지, 그래서 우린 〈송풍기〉라고…》

《송풍기? 하하.》

진호도 고개를 쳐들고 온몸을 들썩거렸다.

안주접시를 들고 들어오던 은심은 너무도 호탕하게 웃어대는 두 사내의 모습에 놀랐으나 저 역시 곧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그런데 이쪽 문젠 어쩔셈인가?》

진호의 표정이 밝아진것을 보고 태수는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던졌다.

그가 이렇게 우연한 말처럼 물은것은 그만큼 그것이 궁금했고 중요했기때문이며 아무리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되지 않거니와 진호가 괴로와하리라는 생각으로 하여 묻지 않는다면 그의 맘이 더 괴로우리라는것을 알기때문이였다.

《뭘 말인가?》

태수가 무엇을 묻는다는걸 모르지 않았으나 진호는 이렇게 되물었다.

《현옥동무문제 말이야. 말하자면 의문분가 아니면 휴지분가 하는거야.》

태수는 진호의 말을 들으면서 명식이에 대한 불만은 끝이 없었으나 현옥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정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이들사이가 이렇게까지 버성겨진게 명식이도 명식이지만 진호의 지나친 과단성때문이 아닐가 하는 생각도 들었던것이다.

대학시절 현옥이에 대해 느끼던 인상때문인지 아니면 진호가 그런 선고는 했지만 맘속으로는 결코 그를 그처럼 타기해마지 않을 처녀로까지는 치부하지 않으리라고 여겨선지 어쨌든 그는 이들의 관계가 못내 아쉽게만 생각되는것이였다.

《헛참! 장가를 들더니 의심이 많아졌군그래! 휴지부도 의문부도 아니야. 깨끗한 종지불세.》

《제길! 이렇게도 한심한 친구라구야.》

태수는 대뜸 눈을 흘겨붙였다.

《동무같은 주제에 그런 처녀를 다시 만날것 같아?》

태수는 진호의 성격이 남달리 명확하고도 단순한것으로 하여 좋아했으나 어떨 때는 도가 넘어 심중성조차도 소심성으로 치부해버리는 점만은 더없이 안타까왔다. 대학때도 《세상만사가 다 동무뜻대로 된다 해도 처녀 하나만은 안될걸.》하고 자주 놀려대군 했었다.

《그건 왜?》

《동무가 바라는것처럼 그렇게 완전무결한 처녀가 세상에 있어야 말이지.》

그때마다 진호는 자긴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런 처녀를 찾아내고야말테니 두고보라고 장담을 했었다. 정말 그런 처녀를 찾아냈는가 했더니 웬걸…

《아무래도 동문 안되겠어, 훌륭한 처녀는 고사하고 곱사등이조차도 동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걸 알고는 당장 뺑소니치고말걸세.》

《아니, 그거야 너무하지 않나!》

《너무하긴 뭐가 너무하다는거야! 이것 보게, 흔히 사랑하느라면 서로의 행동을 지나치게 보고 관계를 첨예하게 만들 때도 있지 않나. 그게 사랑이기도 하지. 그런데 그것조차 리해를 못하니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지나치게? 그래, 동문 그가 날 지나치게 봤다고 생각하나? 있을수 있는 일로 생각해?》

단호히 고개를 젓던 진호는 갑자기 한숨을 내뿜었다.

《나도 차라리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있다면 좋겠네. 의심에 싸여있을 땐 괴롭긴 하지만 그래도 희망이라도 있는게 아닌가. 그러나 그게 아니야. 그는 그이상 더 날 모욕하고 배반할수 없는 행동을 한걸세. 어쨌든 이젠 명백한 일이네. 안개속에 있는 배를 보고 바위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중에 배라는것을 안 다음에 어떻게 그걸 다시 바위로 볼수 있겠나 말일세. 난 이번에 진정이란 생활에서는 물론 사랑에서도 필수적인 선결조건이여서 그것을 리해하지 못할 땐 사랑도 그에 반작용하기마련이라는걸 똑똑히 깨달았네.》

확실히 그는 자기자신을 더없는 멸시와 모욕을 받은 인간으로, 나아가서는 그 굴욕을 씻을 가능성을 잃어버린 인간으로 치부했다. 바로 그래서 그는 그렇듯 확고하던 자기의 포부와 희망을 졸지에 허망한것으로, 무의미한것으로 일축해버린 현옥이가 괘씸해서 견딜수 없는것이였다.

《그게 탈이야. 그게 바로 동무의 결함이거던. 동문 우리 생활이 자기가 바라는것처럼 순수하기만을 원하지만 현실은 아직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다니?》

진호의 눈은 대번에 번쩍하는 빛을 뿜었다. 어찌보면 살벌하기까지 했다.

《바로 그거네! 난 바로 그걸, 동무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믿고있는 그걸 부정하자는걸세. 그게 틀렸다는걸 증명하고야말겠단 말일세. 지금 일부 사람들속에서 아무리 옳아도 옳은것으로 되지 않고 오히려 곡해되고 비난받는 원인이 바로 동무처럼 생각하기때문이라고 보는거네. 순수하지 못한 오물들이 진리를 가리우고있기때문이라고 말일세. 그래 그것들이 진리를 가리울수 있나? 가리워야 하나 말일세. 난 오직 순수한것만이, 가장 깨끗한 량심만이 승리한다는 진리를 보여주고야말테네. 그 진리가 누구한테 있는가 하는걸 똑똑히 실증해보일테란 말이네. 현옥이한테, 그 오빠한테 아니, 온 세상사람들한테. 그래, 내가 그만한 힘도 없을줄 아나? 사실 그만한 힘도 없이야 도대체 내한테 젊음이라는게 있어 무엇하겠나.》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확고한 의지에 넘치다못해 어떤 처절한 비분까지 어려있었다.

그 목소리만 듣고도 태수는 진호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또 어떤 결심을 품고있는지 충분한 짐작이 갔다.

《…》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둘 다 자기들이 만나자마자 대학때 하던 버릇대로 또 론쟁에 열을 올리고있다는것을 생각하고는 곧 침묵을 지켰다.

저가락을 집어든 진호는 부지런히 안주를 집었다. 어느새 방금 들여온 생선회 한접시가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이런 그의 행동이 마음속에서 이는 어떤 격정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는것을 태수는 알았다.

《허, 이런 걸구라구야. 닥치는대로 냠냠일세그려!》

《…》

진호는 여전히 저가락만 놀려댔다.

《난 아까 동무를 기다리면서 이런 생각을 했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어젖힌 태수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의 생활은 언제나 3월에 시작된다고 말일세. 우리가 서로 알게 되여 가슴들먹이며 수도의 야경을 바라보던 그때도 3월이였지. 그런데 또다시 이렇게 만나 3월에 새생활을 시작하게 됐으니… 결국 3월은 우리의 달이네. 안 그런가?》

3월! 확실히 그것은 희망을 예고하는 계획과 기쁨의 계절이였다.

진호도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리라는 계획들이 머리에 떠오르는듯 한감이 들었다.

(그래, 이제부터야말로 새생활이 시작되는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선 그는 새삼스런 눈길로 화광에 타오르는 제철소의 밤하늘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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