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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회

제 1 장

푸른 하늘 푸른 꿈

3


다음날 직장에서 돌아온 현옥이는 실내옷으로 갈아입기 바쁘게 환기창을 열어놓고는 전축이 있는 웃방으로 올라갔다. 늘 홀로 있게 되는 이 시간이면 특별히 바쁜 원고작업이 제기되지 않는 한 음악을 듣는것이 하나의 버릇으로 되여있었다.

얼마나 좋은가! 부드러이 흘러드는 선률에 하루의 기쁨을 실어보기도 하고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쳐보기도 하는 벅찬 랑만이란. 그러면 피로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하루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다시금 즐거이 되살아오른다.

그는 곡도 그날의 감정에 맞게 고르군 했다.

기쁨으로 하여 혼자서라도 뭔가 속삭이고싶은 충동이 솟구칠 땐 경쾌한 독주곡이나 경음악을 택했지만 깊은 사색을 필요로 할 땐 잘 소화되지는 않았지만 굳이 협주곡이 아니면 교향곡을 고르는것이였다.

오늘의 기분에 따라 어떤 곡을 택할가 하고 망설이던 그는 들었던 교향곡대신 며칠전에 사온 밝고도 힘찬 영화주제곡을 골랐다.

씩씩한 선률이 방안에 흐르기 시작하자 그의 마음은 한결 명랑해졌다.

그는 오늘 마침내 자기의 결심을 동무들에게 터놓았던것이다.

난생처음 자기 문제에 대해 자기스스로가 옳바른 결심을 내렸다는 긍지로 하여 자랑스럽기까지 한 심정이였다.

물론 그도 자기의 용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흔히 남자를 두고 생각할 때 정직한 처녀들이 그렇듯이 그도 진호를 자신의 장래와 결부시켜 몇번이고 따져보았었다. 성격과 지향 그리고 행복, 온갖 조건들…

점심식사를 한 후 의례히 식탁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기 마련이였으나 오늘처럼 모두가 놀란적은 없었다.

《아니, 네가 현장으로 간단 말이니? 그래 어디루?》

《아무래도 제철소에 가야지 뭐.》

《제철소?》

《넌 늘 편집과젤 제때에 수행하군 해서 평가를 받지 않니. 여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건 아니겠지?》

《물론 싫지는 않아.》

동무들이 자기의 말이며 눈빛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는데 기쁨을 느끼며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지만 난 왜 그런지 남의 원고에만 매달리는게 성차지 않아. 능력은 없어도 자기 창조물을 내놓고싶어. 말하자면 남을 위하는데만 습관되지 않은 나쁜 버릇이 있는가봐.》

《음-그래서 네가 요즘… 난 또 웬 애인이라도 생겼는가 했지?》

남의 일에 끼여들기 좋아할뿐아니라 그것을 들고다니기 즐기는 영금이가 이제야 알만 하다는듯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래도 아직은 결심에 불과하겠지?》

《아니, 어머니도 찬성하셨어!》

《어머니도? 넌 정말 대단한 결심을 했다얘.》

모두들 현옥이를 마치 달나라에 올라갈 우주비행사라도 되는것처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얼마나 좋니?》

잠자코 앉아있던 숙희가 진정에 넘쳐 속삭였다.

《난 네가 부러워! 정말이야! 사실 그만한 포부도 없이야 무슨 청춘이겠니. 나도 그런 생활을 동경은 하지만 정작 결심은 못 내려. 왜 그럴가?》

자기를 둘러싸고 놀라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하던 동무들의 모습을 상기할수록 현옥은 자신에 대한 긍지가 더욱 세차게 솟아올랐다.


펄펄 날려라 위훈깃든 댕기

용감한 해병들 정의의 싸움길…


선률은 한껏 고조에 이르고있었다.

그 경쾌한 리듬이 가로수아지들을 춤추게 하고 어항안에 있는 금붕어들을 더욱 흥겨이 꼬리치게 하는상싶었다.

(며칠후부터는 새생활이 시작되겠구나! 힘겹고도 아름찬 생활이!)

그도 지금의 자기로서는 앞으로의 생소하면서도 거친 생활을 감수하기가 무척 베찰것이라는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있었다. 듣고싶은 음악도, 살뜰한 보금자리도 없다.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고 새 연료연구에 바치는것, 바쳐도 열렬하게 바쳐야만 하는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점으로 하여 그는 미지의 생활에 대한 각별한 매력을 느끼는것이였다. 누구에게나 한번밖에 차례지지 않는 청춘시절, 그 귀중한 시절에 그만한 흔적도 없이야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사람이란 사회에 보탬을 주자고 태여났으며 그렇게 사는것만이 떳떳한 삶인것이다. 그 권리로 하여 자유롭고 행복하며 그것으로 하여 또 누릴수 있는 모든것을 기꺼이 향유할 자격을 가지는것이 아닌가.

강철용해를 위한 우리 나라의 새 연료!

그것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해도 진호와 함께라면 어떤 시련도 뚫고나갈것 같은 자신심이 솟구쳐올랐다. 이미 있은 실패보다 더한 곡절이 자기들앞에 막아나설수 있으리라는것도 그는 각오하고있었다. 그것조차 유쾌하게만 여겨졌다.

문득 책꽂이 웃단에 올려놓은 빨간 사진첩에 눈길이 미치자 그는 얼른 그리로 갔다. 원래 사진을 보기 즐겨했지만 오늘따라 별스레 지나온 일들을 더듬어보고싶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사진기앞에 나섰었고 저도 모르게 찍히운 사진들이였으나 이제 와선 매 장들에 어떤 심각한 의미가 깃들어있는것 같았던것이다.

첫장에는 사진대신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195×년 8월 20일

최고인민회의에서 남조선에 구호물자를 보낼데 대한 문제를 토의.

××공장 복구조업식.

무럭무럭 자라나 부디 우리 조국을 받드는 아름다운 꽃으로 피여주기 바란다.

-오빠로부터-


사진첩을 보는 사람마다 태여나는 첫날부터 그의 오빠가 누이동생에게 얼마나 다심했는가를 감탄해마지 않았다.

다음장부터는 어릴적부터의 사진이 드문드문 보기 좋게 배렬돼있는데 정말 꽃으로 피여나는 과정이 순서대로 또박또박 새겨져있었다.

어머니의 무릎우에 인형처럼 오도카니 앉아있는 사진이 있는가 하면 대학모자를 쓴 오빠옆에서 우스우리만치 차렷자세를 하고 찍은것도 있었다.

멀리 휴양소의 합각지붕이 바라보이는 호수우에서 어머니와 함께 뽀트를 타고있는 사진밑에는 〈1964년 표창휴가-석암휴양소〉라는 글이 새겨져있었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기 전, 말하자면 유년시절의 사진이라고는 몇장 되지 않았다. 전후의 어려운 환경때문이라는것을 모르진 않았지만 현옥이는 자주 이런 투정을 했다.

《어머닌 정말 그때 사진을 좀 찍어두지요.》

그러면 윤씨는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원 애두, 사진이 다 뭐냐? 그래도 너니 그만치 있는줄 알아라!》

사실 고중시절부터 사진에 남다른 취미가 있은 오빠가 아니였어도 이런 흔적조차 찾아볼수 없을 현옥이였다. 이땐 벌써 아버지를 대신한 오빠가 집에서는 가장이였던것이다.

잊지 못할 소년단시절의 야영생활과 고등기술학교때의 과외실습 그리고 천리마학급칭호를 수여받은 기념으로 학급전체가 찍은 사진이며 백두산과 홍원사적지를 답사하던 대학때의 추억들… 모든것이 새라새로운 의미로 회고되는것들이였다.

사진첩을 번질 때마다 제일 오래동안 여겨보게 되는 사진에 그는 시선을 모았다. 그것은 눈부실만큼 흰 체조복장을 한 자기가 맵시있는 륜동작을 하고있는 천연색사진인데 머리우로 높이 쳐든 륜과 허리로 쌍원을 재현한 순간을 포착한것이였다.

이 사진을 볼 때면 그는 늘 이 매혹적인 동작을 정말 자기가 창조한것일가 하는 황홀경에 휩싸이는것이였다. 미소지은 자기의 얼굴이 드러나있지 않았더라면 누구든지 이 사진을 어느 화보에서 오려낸것으로 믿기 십상이리라.

《대학생》잡지의 표지에도 실린적이 있는 이 사진을 그는 무척 소중히 여겼다. 경기때마다 숱한 동무들과 기자들이 샤타를 눌러대군 했지만 손에 들어온것도, 마음에 드는것도 별반 없었으나 이 한장이 모든것을 보충해주고도 남았던것이다.

대학예술체조경기에서 개인상을 받던 그때의 일이 눈에 선했다. 《바다의 오솔길》이라는 경쾌한 피아노반주가 들려오는것 같고 그 선률에 따르는 매 순간의 동작까지도 생생하니 되살아났다.

그때부터 온 대학이 자기를 《갈매기》라고 불렀다는것도, 그 별칭이 다만 체조복의 앞가슴에 갈매기를 새겨넣었기때문이 아니라 바다를 날으는 해연과도 같은 기교에 대한 찬사였다는것도 즐겁게 회상했다.

곧게 뻗은 자기의 두다리를 내려다보던 그는 탄력이 넘치는 허리에 두손을 얹어보고는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다음장을 넘긴 그는 저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웃음으로 하여 입을 틀어막지 않을수 없었다. 그 사진은 한손에 꽃다발을 쥔 자기가 얼음판우에 주저앉아있는데 비행사같은 호케이복장한 리진호가 뒤에서 자기를 부둥켜안고있는 모습이였다.

(난 이때 왜 웃기만 했을가? 바보같이!)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우습긴 하면서도 처녀다운 수집음이나 랭담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자신에 대한 부아가 치솟군 했다.

이때부터랄가? 확실히 그랬다. 바로 이날부터 그는 진호로 하여 야릇한 마음의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던것이다.

그날은 전국대학호케이결승경기가 벌어진 날이였다.

이미 두차례나 결승전까지 올라갔다가 패한적이 있던지라 전교생모두가 미천호반을 둘러싸고 경기 첫시작부터 응원에 열을 올렸다.

경기는 치렬했다.

동점 또 동점으로 오르던 경기는 마감시간을 앞두게 되면서 더욱 맹렬해졌다. 수천명의 학생들이 저마다 손에 땀을 쥐고 환성과 욕설을 퍼부어대며 매 순간을 지켜보고있었다.

심판도 자주 시계를 들여다보던 바로 그때였다.

팍을 몰고 질주하던 한 선수가 그것을 상대방문앞으로 길게 련락한 순간이였다. 마침 그리로 달려들어가던 진호가 날아오른 팍을 채에 붙이기 바쁘게 마주선 방어수 하나를 보기 좋게 물리치고는 더욱 문앞으로 육박해들어갔다. 어느새 그의 몸이 공중에 비호처럼 날았다.

《휙!》 하는 아츠러운 소리와 함께 뽀얀 가루가 허공에 일었다.

《딱!》

일시에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문지기도 몸을 날렸다.

꼴인가?

문지기가 팍을 잡았는지 어쨌는지 멀리서는 얼른 분간할수 없었다. 한 선수가 부리나케 진호에게 달려가 그를 부둥켜안았을 때에야 학생들은 땅을 차고 뛰여올랐다.

《꼴-》

《꼴이다!》

《이겼다!》

당장 호반이 터져나갈듯 한 환호였다.

현옥이도 발을 동동 구르며 기뻐했다.

마감시간을 알리는 호각소리가 울리기 바쁘게 꽃다발을 쥔 현옥이는 얼음판으로 나섰다. 경기때마다 승리자들에게 주는 꽃다발은 언제나 예술체조선수들에게 맡겨지군 했었다. 그는 종종걸음으로 진호에게 다가섰다. 꼭 그에게 안겨주고싶었던것이다.

이전에도 합동강의실에서나 대학체육관에서 더러 만난적이 있긴 했지만 그땐 《바로 저 동무가 강철용해를 위한 새 연료를 연구한다며?》 하는 호기심을 느끼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간혹 무슨 얘기를 나누고싶어도 어쩐지 남들처럼 호락호락 범접하게 되질 않았다.

《축하해요.》

너무 급히 다가선 나머지 현옥은 그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안깐힘을 쓰지 않으면 안되였다. 요행 몸을 피한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바람에 중심을 잃어버린 그는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그만 얼음판우에 미끄러지고말았다.

《흐-하-》

관중들의 폭소로 얼굴에 모닥불을 뒤집어쓴 현옥은 인차 일어설념도 못했다.

이때 자기뒤로 다가선 진호가 《허참, 여기가 뭐 체조훈련장인줄 아우?》 하며 제꺽 두팔로 안아일으켜세웠는데 그 순간을 대학신문편집부에 있는 한 익살꾸러기가 놓치지 않았던것이다.

《아이! 이 동문 정말!》

그담에야 그는 새침한 기색으로 진호의 두손을 뿌리쳤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자리에서 일어서긴 했으나 발목이 아파 한발자국도 옮겨디딜수가 없었다. 넘어질 때 발목을 시그러뜨린게 분명했다.

《어떡한다?》

난처한 기색을 짓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진호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어찌겠소. 할수 없지.》하고는 놀랍게도 대번에 자기를 냉큼 두팔에 안아드는것이였다.

《어머머-》

기겁을 한 현옥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으나 창황중에도 그게 더 부끄러운 일이라는것을 짐작하고는 다시 그의 어깨를 주먹질했다.

《좋아! 좋아!》

《진호야말로 진짜 꽃다발일세.》

관중들은 마치 멋진 휘거경기의 한 장면을 보기라도 하는것처럼 요란한 박수갈채를 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딘가 과묵하고 엄엄하게 느껴지던 진호였으나 이제 와선 자기의 요구라면 어떤것도 서슴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우습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진호가 친절하지만 않다는것을, 때에 따라서는 거칠고 무자비하기까지 하다는것을 그도 알고있었지만 바로 그런 점으로 하여 그에 대한 사랑을 더욱 뜨거이 느끼게 되는 현옥이였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남자들이란 아무리 사랑스러운 애인에게라 해도 절대 고분고분하기만 하면 안되는것은 물론 어떤 경우에도 자기 주장을 고집할줄 알아야 한다는것이였다. 아무리 처녀가 간절히 바래도 사내로서의 억센 담보와 듬직한 무게가 느껴져야 처녀의 가슴도 더욱 사랑에 불타게 된다는것이였다. 다른 남자들에게 없는 바로 이 점이 진호의 매력이며 이것만은 아무나 노력으로써도 감히 획득할수 없는 진정한 사내에게만 한하는 천성이라고 그는 생각하고있었다.

(내가 정말 그의 기술안을 제대로 도울수 있을가? 도리여 부담으로나 되지 않을가?)

문득 이런 걱정이 앞을 막았으나 그는 자기가 바로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는것을, 그래야 먼 후날 누구앞에서라도 자기의 청춘시절을 버젓이 자부할수 있으며 《나도 남 못지 않게 일을 했어!》하고 자신있게 대답할수 있다는 생각에 미쳤다.

정녕 그때야말로 지나온 생활을 두고 얼마나 크나큰 영예와 자랑을 가지고 행복에 넘쳐 돌이켜보게 될것인가!

언젠가 한 동무의 집에 가서 사진첩을 본적이 있었는데 모든 사진들, 말하자면 그가 지나온 생활들은 하나같이 자기보다 초라한것이였으나 현장에서 찍은 사진들만은 부지중 부러움을 금할수 없게 했다. 확실히 자기에게는 없는 아니, 자기 생활에선 결여된 공간이였던것이다.

그때도 그는 순탄하게만 걸어온 자신의 생활에 대해 돌이켜보지 않을수 없었고 돌이켜볼수록 어쩐지 죄스럽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젠 멀지 않아 자기 사진첩의 여백에도 철갑을 두르고 솟아있는 로체앞에서 찍은 사진이며 시험로옆에서 맹렬한 작업을 하고있는 모습 그리고 무수한 점과 선으로 련결된 도면앞에서 피곤에 지쳐있는 자신의 모습이 나붙게 되리라는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가슴이 후더워올랐다.

(그 모습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꽃이 아니고 뭐람!)

첨보다 몇배로 확대된 희열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웃방으로 올라가 새 레코드판을 올려놓고는 곧 부엌으로 내려섰다. 오늘따라 음식을 만들어보고싶었고 팔을 걷고 나서면 저절로 맛있는것이 될것만 같았다.

음악에 맞춰 코노래를 부르며 자기가 만든 자그마한 맵시있는 앞치마를 허리에 두르는데 어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니 웬일이냐, 오늘은?》

윤씨는 언제나 시켜도 잘하지 않던 부엌일을 오늘따라 무슨 바람이 불어 하느냐는듯 한 의아한 눈길이였다.

《이제 두고봐요, 얼마나 맛이 있나.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볶음밥을 만들게요.》

《아이구, 관둬라! 맛은 무슨 맛, 그저 빛이나 곱겠지.》

동사업을 책임진데 불과하지만 마치 구역위원장이기라도 한것처럼 늘 바삐 사는 윤씨였다. 오늘도 그의 겨드랑이에는 두툼한 책이 두권이나 끼여있었다. 목도리를 풀면서 방안으로 들어서던 그는 무슨 생각이 났던지 다시 부엌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참 낮에 전화가 왔댔다, 네 오래비한테서.》

《왜요?》

《왜라니? 네가 그리로 가는것때문이지 뭐냐. 일요일에 꼭 집에 들리라더구나.》

흔히 어머니들이 그런것처럼 딸의 결심에 승낙을 해놓고도 못내 안심찮아하는 윤씨였다.

《무슨 선물이라도 준비해놓은 모양이지요?》

말끔히 씻어낸 홍당무를 도마우에 올려놓은 현옥은 그것을 썰기 시작했다.

그가 손을 놀릴 때마다 가락맞는 장단소리와 함께 홍당무는 마치 기계속을 거친것처럼 꼭같은 규격으로 보기 좋게 밀려나오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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