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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회

제 1 편

제 4 장

4


또다시 세월은 흘렀다.

어느날이였다.

승기는 교또에 가려고 전차를 탔다. 다까스끼의 화학섬유연구소 소장과 교또대학 화학연구소 소장을 겸임하는 기다 겡이쯔의 연구실에서 주일에 한번씩 진행되는 외국잡지 발표모임에 참가하러 가는 길이였다.

차창가에 자리잡은 승기는 생각에 잠겨 멀리를 둘러보았다. 기복이 완만한 구릉지대의 한낮은 고요한데 우수를 자아내듯 먼 산발은 뿌잇한 내굴안개속에 잠겨있다. 일본으로 처음 떠나올 때 아버지가 보라고 내주던 그 기행문집이 다시 뇌리에 살아오른다.

문득 승기는 멀지 않은 법륭사에 한번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사람이 와서 지었고 그림을 그렸다는 그 절간을 여태 가보지 못했다. 이 지방의 건물들의 치수는 조선의 치수로 재야 정확히 맞는다고 한다. 그러니 조선의 목공들이 지은것이 확실하다고… (호리우찌의 글에 씌여진것처럼) 나라현이라는 《나라》라는 말자체가 조선말이라고 한다.

승기는 멀리 그리고 가까이를 바라보며 저기 어딘가에 조선사람들의 령혼이 잠들고있을거라는 생각이 강렬해졌다.

이것은 어제 받은 아버지의 편지에서 느낀 그 감정의 연장인지 모른다.

아버지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어느덧 내 나이도 예순고개를 넘었다. 일본으로 너를 떠나보낸 나의 뜻이란 무엇이며 장차 민족의 장래는 어찌될고 하는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많구나.…

우국지사연하던 최남선, 리광수, 최린이도 민족을 배반하고 《내선일체》에 대하여 떠드는판이다.…

이런 때 생각나는건 서경조군인데 그건 내 젊은 날의 뜻이 그와 함께 얽혀있기때문이겠지. 네가 따르던 그 목포큰아버지는 15년세월 행방을 알길 없구나. 일설에는 평안도지방에서 독립운동에 관계했다가 옥에 갇혔댔는데 그후 북간도로 들어가 독립군이 되였다는 말도 있고, 그러다가 연해주로 들어가버렸다는 소문도 있구나.

목포에서 솔가를 해서 만주로 들어갔던것은 사실인데 어디로 갔는지 일찌기 그를 따라나서지 못한 유한을 너를 기둥으로 삼는 마음으로 바꾸면서 오늘까지 나는 살아왔다. 서군에게도 자식들이 있다면 그들도 들끓는 저 간도땅에서 지금쯤은 항일전에 나설수도 있어.

승기야! 나는 네가 《우리 아버지가 아직 창씨를 하지 않았는데 자식이 어떻게 창씨를 한단 말이요.》하면서 창씨를 하지 않는것에 힘을 얻고 일본놈들에게 말한다. 《 내 아들이 일본에서 박사를 하는데 그 아들이 창씨를 해야 나두 창씨를 할게 아니요!》하고 말이다.

우리 어떻게 성마저 버린단 말이냐!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한다고 너도 편지에 썼지. 네가 또 한다던 그 무슨 연구는 어떻게 되고있느냐. 일본놈들을 놀래우고 세상을 놀래우는 그 무엇이 되지 못하겠느냐? 그것이 어느때 가서 과연 민족의 장래에 쓸모가 있게 되겠는지… 생각은 막막한데 정은 그저 가슴에 넘치누나.…

승기는 한문이 절반나마 섞인, 내리체로 쓴 아버지의 편지구절들을 마음속으로 다시 읽으며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준수한 얼굴, 인제는 퍼그나 늙었을 그 모습을 그려보며 아뢰인다.

(아버지, 전 아버지의 뜻을 지켜 민족의 슬기를 자랑하고야말겠습니다. 우리 함께 기뻐할 날을 기다려주십시오.)

승기는 고분자합성으로 섬유를 만들겠다는(당시로서는 누구도 상상할수 없는) 대담한 연구에 진입한 이 고충이 얼마나 큰가, 더구나 그보다 조선사람이라는것으로 해서 주위에서 받는 온갖 랭소와 중압감을 이겨내는게 얼마나 더 고통스러운가를 결코 아버지한테 설명해낼수 없다는걸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내 답장을 쓸수가 없었다. 구체적인 연구정형을 썼대야 아버지는 리해하지도 못할것이였다. 아버지는 애오라지 성공의 결과만 기다리고계실게 아닌가.

승기는 때로 자기가 시작한 이 연구가 허망하게도 생각되였다.

30년대 전반기만 해도 천을 짜는 실을 화학적으로 합성해낼수 있다는것을 누구도 생각지 못하고있었다. 섬유가 고분자라는것이 해명되고 섬유의 고분자설이 우세해진것은 사실이나 그랬다고 고분자합성으로 섬유를 만든다는것은 아직 상상할수 없는 일이였다.

물론 인견사나 스프는 천연고분자이고 합성수지의 조상인 베클라이트는 망상(그물형)의 고분자라는것이 밝혀졌다. 고분자가 그물형으로 되면 수지이고 선상으로 되면 섬유로 된다는것이 해명되였다.

리승기의 착상은 폴리비닐알콜이라는 고분자물질로 섬유를 만들려는것이였다.

당시 도이췰란드에서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바로 그 화학연구소를 믿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그 I.G.연구소에서 땅크용합성연료를 만들도록 하면서 그외 합성고무와 염화비닐연구에 학자들을 몰아대였다. 도이췰란드학계는 초산비닐합성에서 얻어지는 폴리비닐알콜로 합성섬유를 만들수 있다는것에 도달하지 못하고있었다. 도이췰란드화학을 앵무새처럼 받아무는 일본화학계도 여기에 주목을 돌리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땅에서 그 누가 승기의 연구에 주의를 돌렸겠는가.…

교또시내에 들어선 승기는 일본의 옛 서울로서 중세문명과 교또비단천을 자랑하는 이 도시도 혹여 조선사람들이 건설을 시작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내에는 직물공장들이 많다. 직기들의 기대소리가 요란한 공장울타리를 지나 걸으면서 승기는 그처럼 유명한 조선의 명주실이 배에 실려와 저 탐욕스러운 직기들의 먹이로 되는것이 분명하다고 여기면서 상실감과 좌절감으로 가슴이 허전해지는것이였다.

이미 방안에는 기다의 제자들이 모여있었다.

읽은 잡지들에 대한 소감과 함께 자기의 주장과 연구계획을 발표해보는 토론회였다.

승기는 앉아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의 차례는 은연중 맨 나중으로 정해진듯싶었다. 들어봐야 또 폴리비닐알콜섬유소리겠지 하는 좌중의 기정된 견해였다.

기다교수도 합성섬유라는 처음 듣는 소리에 기의를 숨기지 않았었다.

《합성섬유라… 합성섬유…》

인견이나 비스코스법을 두고 화학섬유라는 말은 있어도 이 세상에는 아직 합성섬유라는 말은 없었던것이다. 기다는 이 반도의 조선청년을 과찬해주어 그가 이런 엉뚱한 생각까지 한것이 아닌가싶어 머리를 기웃거렸다.

리승기가 속한 연구실의 실장으로 되여있는 사꾸라다는 거의 랭소에 가까운 미소를 띠웠는데 그 의미는 충분히 다음과 같이 리해될수 있었다.

(넌 조선사람이야. 박사론문을 통과시켜주니 괜히 경거망동이 아닌가.… 합성섬유라는 새 단어결합에 흥미를 가지는건가? 이보게 햇내기친구, 도이췰란드의 어느 대가도 이런 합성섬유라는건 말조차 생각해내지 못했어.)

불현듯 승기는 이 잡지토론회에서 다시 자기의 주장을 내놓을 결심을 하며 조선에 나가 공장들을 돌아보던 때를 생각해보았다.

박사학위로서 어느 정도의 인정을 받았던 리승기는 나라가 독립은 되지 못했어도 조선땅에서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 할수 있지 않겠는가 해서 서울은 물론 멀리 청진과 신의주 그리고 흥남과 순천 등 화학이라는 이름을 단 공장들을 돌아보았다. 흥남에서는 노구찌도 만났다. 허나 리승기는 조선땅에서 자기가 식민지하수인으로밖에 달리는 될수 없다는것을 통절히 느끼였다. 그리하여 때를 기다려 다시 학문의 교실로 되돌아오게 된것이다. 리승기는 흥남에서 우리 나라에 무진장한 석회석과 무연탄에서 만든 카바이드를 황금덩이처럼 바라보며 속이 끓어올랐다. 아마도 그래서 폴리비닐알콜계 섬유연구에로 달리는 마음이 더 불같아졌는지 모른다.

리승기는 지금 진행되는 잡지토론회에 주의를 모으려고 애썼다.

호리모도라는 제자가 잡지를 들고 일어나 책장을 번지면서 말했다.

《이 글에서 헤쓰교수는 저분자회합설의 주창자로서의 제 견해를 피력하면서…》

《호리모도군, 자꾸 헤쓰, 헤쓰 하지 말고 자기 소감만 내놓으면 되지 않을가요?》

이 자리를 주관하는 기다를 무시하고 사꾸라다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입을 연다.

《계속하시오. 그래서…》

기다가 불쾌감을 숨기지 못해 약간 미간을 찌프리며 말했다.

승기는 조용히 눈을 감고있었다. 사꾸라다가 왜 헤쓰라는 이름을 피하는지 그는 안다. 사꾸라다는 원래 도이췰란드류학때에 헤쓰의 리론을 따랐고 섬유의 저분자설을 주장했던 사람이다. 일본에 귀국한 사꾸라다는 이미 우세한 고분자설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지만 체면상 공개적인 론문으로 할수는 없었다. 그래서 바로 고분자설을 주장하는 리승기를 자기의 제자로 해줄것을 기다에게 청했던것이다. 기다는 그의 연구실에 리승기를 배속시켰다. 리승기보다 1년년배인 사꾸라다가 도이췰란드류학생이고 일본인이기때문에 리승기의 스승으로 자처할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수준차이가 무엇으로 설명될수 있으리란 말인가.

사꾸라다가 리론화학자이고 리승기가 응용화학자라는것으로서는 도저히 그 어떤 차이를 운운할수 없지 않는가.…

허나 리승기는 자기의 목표를 향해, 오직 그것만을 향해 그외것은 다 무시하고있었다.

《도이췰란드의 헬만은 1920년에 폴리비닐알콜을 합성했지만 물에 녹지 않는 섬유형태는 생각지도 못했고…》

누군지 이렇게 말하고있었다. 승기는 제가 생각에 잠긴 사이 어떻게 되여 론의가 폴리비닐알콜로 번졌는지 알수 없었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미국학자들도 수용성정도의 섬유를 뽑았지만 물에 녹는것을 실이라고 하기엔… 그래서 전 콩단백에서 섬유를 뽑자는 현실적인 주장에 동의하게 되는것입니다. 더구나 그 원료조건으로 말하면 만주에는 콩이 무진장하게 많고…》

(만주를 이젠 제 나라 땅처럼 생각하누나. 과시 천황의 적자답다.) 하고 승기는 생각했다.

만주를 강점한 일본이 중국본토를 침략한지도 1년이 넘었다. 중국도 조선처럼 일본의 식민지로 될수 있다. 거기에 무진장한 콩이 있다는것이다. 아서라, 이 섬나라의 고명한 학자제씨들.…

승기는 속으로 반발하듯 부르짖었다.

(우리 나라의 명주실을 모조리 략탈해오더니 이제는 중국의 콩도 저네의 원료처럼 기정사실화하누나. 아니야, 나는 콩단백으로 하지 않을테다. 그렇다, 난 폴리비닐알콜로 해볼테다!)

흰천으로 된 막을 벽에 드리우고 환등을 비쳐가며 기다교수가 다른 문제를 토론에 붙이고있었으나 그 말이 승기의 귀에는 이미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


승기는 폴리비닐알콜로 섬유형태를 뽑아 그것이 물에 녹지 않게 하려고 포르말린처리를 착상하였다. 그는 다까스끼에 있는 화학섬유연구소의 숨막히는 자그마한 방에서 포르말린의 심한 자극에 눈물을 쥐여짜며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였다.

기다 겡이쯔교수는 포르말린처리에 대해 《한번 그렇게 해보지.》하는 정도였고 명색이 실장인 사꾸라다 이찌로는 제가 마지 못해 동의한바도 있는지라 영 모른척 하지는 않았다. 그는 보다 리론적저술에 몰두하고싶은듯 워낙 실험실에서 손에 시험관 한번 쥐여보지 않는 사람이다.

이무렵 대학을 졸업한지 7년만에야 리승기는 겨우 조수를 데리고 실험할수 있게 되였다. 고학으로 겨우 공업학교를 졸업한 빈한한 출신의 일본청년 가와가미 히로시의 나이는 19살, 키는 크지 않고 곱살하게 생긴 얼굴에 동작이 날쌔였다.

가와가미는 산촌출신이여서 마음드는데가 많았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고 어머니 혼자 누이와 함께 산밭에 고구마를 심어 근근히 지낸다는것이였다.

《선생님, 우리 집에 한번 놀러 갑시다. 우리 고장엔 밤나무가 많습니다. 가을엔 밤따기가 정말 재미납니다.》

가와가미는 미국에 돈벌러 간 삼촌이 장차 돌아오면 야단이라고 했다. 삼촌이 제 딸을 가와가미와 결혼시키련다는것이다.

(정말 별난 풍습이야, 사촌끼리도 결혼시키니.)

리승기의 이런 생각을 알아맞힌듯 가와가미도 그런 풍습이 맞갖잖은듯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일본사람들이 아무리 큰소리 쳐두 그런 풍습이랑 보면 조선보다 아주 뒤떨어졌어요. 앞으로 정 강요하면 우리 누나한테 우리 집 혈통을 맡기구말겠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일본에서는 녀자켠 가문의 대를 이어 녀자성을 따르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는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남편이 처의 성을 따른다는것이다.

어쨌든 승기는 그가 빈한한 출신이라는것으로 해서 그를 꼭 키워주고싶었다.

한데 가와가미는 실험기구조작이 손에 익지 않아 자꾸만 유리기구를 떨구어 깨여먹었다. 화학의 문에 들어선 사람이면 누구나 초기에 그렇다고 보았다. 그래서 승기는 유리기구들을 다루는 방법을 실지동작으로 해보였으나 어떻게 된셈인지 본인의 열성과는 달리 실수가 끊기지 않았다. 눈썰미가 있는 청년인데 이상한 일이였다.

부엌에 들어서면 특별히 그릇을 많이 깨는 녀자들이라고 해서 다 머리가 아둔한것은 아닌것처럼 재능있는 연구사나 실험공들도 실지 유리기구를 다룰 때 버릇을 잘못 붙이면 그런 경우가 종종 있는것이다.

가와가미도 몹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던 어느날 실험실에서 리승기한테 다가서는 가와가미의 손에는 깨여진 후라스코의 토막이 쥐여져있었다.

《선생님, 전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이렇게 자꾸 깨여먹으니… 전 아무래도…》

가와가미는 사직하고 나갈 기미였다.

모처럼 어쩌다 생긴 조수마저 떠나가다니? 리승기는 그를 의자에 끄당겨앉히고 저도 곁에 앉았다.

《어떤 사람은 몇년이 지나도 익숙되지 못하네. 이것두 눈에 익고 손에 설다는 우리 나라 말처럼 어디를 쥐고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몇백번 숙련이 돼야 한다구 말하지 않았나. 이게 화학이라는 학문의 첫공정이네. 여기서두 의지력을 키워야 한다구 생각하게.》

리승기의 설복에도 가와가미는 침묵을 지켰다.

리승기는 안타깝게 말했다.

《가와가미군, 난 군을… 이 일본땅에서 나를 리해해줄수 있는 유일한 일본사람으로 알았댔는데?》

그러자 가와가미는 놀란듯 고개를 쳐들며 리승기를 의아하니 쳐다보더니 도로 숙이면서 떠듬거리였다.

《사실 전… 선생님의… 탐구의 의지력에 탄복하구… 그래서 선생님을 돕자구 했는데…》

《가와가미군, 그게 진정이라면 이 고독한 사람을 버리지 말아주게. 조선사람 조수는 채용 못하게 돼먹었은즉 내 이제 어디 가서 자네같은 사람을 구하겠나?… 그리구 난 자네가 꼭 훌륭한 과학도가 되리라고 믿었는데…》

다시 머리를 쳐든 가와가미의 눈은 감동에 젖은 빛으로 번뜩이였다.

그는 제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손이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어릴적에 산밭에다 거름을 등짐으로 져올리다가 그만 산비탈에서 굴러 발목도 손목도 상한적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 말을 듣자 리승기는 가와가미의 손을 쥐고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뜨겁도록 꽉 잡아주었다.

《그러면 내 이제부터 이 손목을 풀어주는 운동부터 시키겠네.… 그러니 갈 생각은 더욱 말게.》

이튿날부터 리승기는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에 가와가미를 데리고 단층집연구소의 뜰에서 정구를 쳤다. 워낙 눈썰미가 좋은 가와가미는 이내 정구를 배워냈다.

리승기는 실험조작시 유리기구를 어떻게 쥐고 옮겨야 하는가를 더욱 깐깐히 배워주었다. 이것자체가 리승기한테는 연구의 첫공정처럼 무척 어렵고 품이 많이 드는 일이였다.

하루는 가와가미가 리승기한테로 달려왔다.

그때 리승기는 책상을 마주하고앉아 새로 얻게 된 과학문헌을 아침부터 여념없이 들여다보던 참이였다.

가와가미는 급히 말했다.

《선생님, 지진입니다. 저것 보십시오. 방안의 전등이 흔들리지 않습니까. 이제 더 큰 지진이 있을거라고들 하면서 모두 피하고있습니다.》

리승기는 한번 고개를 들고 《그래? 그렇단 말이지.》하면서 다시 눈길을 책장에 박은채 일어나더니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가와가미는 의아스레 바라보다가 이내 뒤따라섰다.

리승기는 집앞의 정원에 서있는 커다란 나무아래에 가앉아 여전히 책을 보고있었다.

가와가미가 서두르며 말했다.

《선생님, 빨리 안전지대로 피해야 하겠습니다.》

그러자 리승기는 가와가미를 쳐다보며 약간 못마땅한 어조로 푸접없이 《가만 좀 있게.》하더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금 머리를 쳐들며 말했다.

《내 걱정은 말라니까. 보라구, 나무가 얼마나 큰가. 여기에 앉으면 땅에 금이 가도 이 거목의 뿌리가 있어서 괜찮을것 같아. 땅속에 빠져들어가지는 않을테니까…》

리승기는 다시 책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어안이 벙벙해 서있던 가와가미의 얼굴에는 그때 온화하면서도 탐구의 열의에 끓고있는 이 조선인박사에 대한 어쩔수 없는 감동의 빛이 떠오르는것이였다.

가와가미가 실험조작을 능숙히 돕는 믿음직한 조수로 되기까지는 상당한 기일이 걸렸다.

가와가미도 자신을 갖게 되자 그 고마움을 표하려는지 이런 말을 하였다.

《선생님은 참 놀랍습니다. 우리 일본사람들속에서… 특히 이 무서운 학문의 경쟁에서 그렇듯 끄떡도 하지 않으니… 조선사람들은 다 그런가요?》

《자네가 일본사람이지만 믿구서 난 솔직히 말하고싶네. 내 처지는 자네두 알지. 민족적차별과 수모를 받으니 오히려 반발적으로 내 학문의 의지가 스스로도 더욱 굽힐수 없는것으로 여겨지네.》

《선생님, 실장인 사꾸라다 이찌로선생은 실험실에 들어와 손 한번 대지 않으면서도 뭘 어쨌다고 날 불러다 욕할 때면 그것마저 난 참기 힘든데 선생님은 어떻게 그 모든걸 참아내시는지…》

리승기는 가와가미한테 강잉히 미소를 지어보일뿐 대답이 없었다.…

리승기의 회상은 여기서 잠시 중단되였다.

자동차가 멎어선것이였다. 운전사가 기관실뚜껑을 열어젖히고 전지불을 비쳐가며 무엇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리승기는 적재함우에 누운채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멀리 동켠이 알릴듯말듯 희붐히 밝아왔다. 하지만 아침의 려명보다도 캄캄한 밤의 어둠이 아직은 하늘에 그냥 있었다.

운전칸에서 내린 방하민부국장이 적재함우를 올려다보았다.

《리선생, 여기 내려오시오. 밤바람이 더 차지는데… 나하구 교대합시다.》

리승기는 몸을 기울여 적재함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정말입니다. 여기가 더 좋습니다.》

그는 여기서 내려가면 깊은 회상에 영 잠기지 못할가봐 겁을 내는것 같았다.

자동차는 다시 떠나더니 아릉아릉 숨가쁘게 어느 고개마루를 치달아올랐다.

리승기는 지난날의 넘기 힘들었던 인생의 고개길을 다시금 돌이켜보기 시작했다. 하늘에서는 새벽별들이 리승기와 그의 추억을 함께 나누려는듯 지치지 않은 눈빛으로 그냥 깜빡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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