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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 회

제 1 편

제 4 장

2


아버님께(제1신)

…제가 여기 섬나라에 온지도 몇달이 지났습니다. 어쩌면 이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느낌은 아버지가 보라고 하시던 그 기행문집에서 본 그대로입니다.

바다와 산들은 붓으로 그린듯 하고 밀감나무숲들은 곳곳에 있어 자연은 역시 자연인데 이게 모두 귀측의 소굴로 된것이 심히 아깝습니다.

내가 처음 기숙사에 들어가려고 할 때였습니다.

《센징까?》

조선사람을 얕잡는 그 말에 왈칵 속이 뒤번져졌으나 참는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인학생을 다 채우고 자리가 남으면 줄테니 기다리라는것이였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더 기다릴수가 없어 뛰쳐나오고말았습니다. 하숙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학생이라고 받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겨우 하숙을 얻었습니다. 남편은 공장에서 일하다 다리가 짤리워 집에 앉아 땜질수공업을 하고 안해는 품팔이를 하는 일본사람네 집이였습니다.

한번은 지질선생인 모리시다가 나에게 수작을 걸었습니다. 나의 실력이 만만치 않아서인지 평소에 늘 나에게 까다로운 질문을 해서 은근히 모욕을 주자고 하던 그가 이렇게 말하는것이였습니다.

《일본전국시대엔 수많은 소국들이 세워져 살았으나 오늘은 통일되였소. 조선과 일본도 그렇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

나는 분통이 터져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조선사람이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하는지 선생은 알기나 하는가? 조선사람을 과연 일본이 동등하게 대해주겠는가? 비근한 실례를 들자. 우리가 입학한 다음 기숙사에 들자고 하니 일본인학생을 다 넣고 자리가 남으면 주겠다고 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네 전국시대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나 봉건사회때는 수많은 할거국으로 돼있었다. 우리 조선도 고구려, 백제, 신라로, 갈라졌다가 고려로 되였고 다음에 조선으로 되였다. 우리는 오늘 더는 백제의 후손이요, 신라의 후손이요 하면서 분간하지 않으며 분간할수도 없다. 그러나 종주국인 일본과 식민지인 조선이야 어떻게 갈라지지 않겠는가? 기숙사까지도 차별하는판에.》

이 말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날수도 있었으나 다행히도 모리시다는 그렇게까지 악착한 교원은 아니였습니다.

아버님, 나는 느낍니다. 이상하게도 섬나라사람들은 대륙에 대하여 본능적인 적의를 가지고있는듯이, 저네들이 대륙을 타고앉지 않으면 도리여 대륙이 자기네를 먹어치우기라도 할듯 앙심과 반발, 피해의식을 체질적으로 몸에 가지고있는듯이 느껴진단 말입니다.

나는 놈들의 모욕을 받을 때마다 벽가에 걸어놓은 자그마한 족자에 씌여진, 아버지가 적어준 시구절을 쳐다봅니다.


어리고 성긴 가지 너를 믿고 키웠더니…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을 되새겨보면서 속으로 다짐하군 합니다.

(어디 두고보자, 내 네놈들 학계가 들썩하도록 무엇인가 하나 해낼테다. 너희들 머리우에 올라설테다.)

나는 학교와 하숙집밖에 모릅니다. 하숙집에 앉아서는 어디선가 들리는 라지오소리도 싫어 귀구멍에 솜을 틀어막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주위의 소음이 방해가 돼서만 아닙니다. 일본생활에서 받는 온갖 신경자극을 물리치기 위해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하는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나보다 성적이 못한 일본학생도 등수에서 내앞에 놓았습니다. 허나 내가 이를 악물고 월등해지니까 할수없이 나를 한둘밖에 내지 않는 갑류에 넣더군요.

그런데 애를 먹이는것은 필재(리몽재의 동생)입니다. 그한테 내 시간을 바치는건 할수 없는 일이지만 그가 뼈심을 들여 공부를 해서 일본학생들을 따라앞설 생각은 하지 않는것이 안타깝습니다. 필재가 다니는 학교도 조선학생이 몇명밖에 안되는데 가뜩이나 실력까지 낮게 되면 밀려날게 아닙니까. 게다가 필재는 일본녀학생들의 뒤꽁무니까지 따라다닙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그것이 사랑의 모욕인지, 아니면 민족적인 모욕인지도 분간하지 못하니 답답하지 않습니까. 차라리 사랑의 모욕이라면 작히나 좋겠습니까. 생각같아서는 당장 그의 공부를 돌봐주지 않고 쫓아버리고싶지만 그의 형인 지주 리몽재가 학비를 끊을것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형편입니다. 그래서 필재를 붙들고앉아 울며 겨자먹기로 그를 타일러줘야 합니다. 그게 공부를 배워주는것보다 더 품이 듭니다.

《필재, 너한테 민족의 얼은 있겠지. 일본학생들보다 떨어져 쫓겨나면 너 혼자의 망신이냐, 차라리 일본놈들한테 항거를 해서 쫓겨난다면 몰라도.… 이렇든저렇든 지금 너와 나는 공부에 전심하는 길밖에 없다.》

내가 고등학교를 마칠 3년동안만이라도 그를 붙들어놓을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뿐입니다.

나라없는 민족의 설음에다 같은 민족끼리도 돈때문에 머리를 숙이고 참아야만 하니 내가 뼈를 깎아 학문을 닦은들 장차 과연 그 학문을 조국과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참답게 바치게 될는지요? 그러나 어쨌든 아버님의 뜻대로 왜놈들을 따라앞서 그들을 이기고야말겠다는 초지를 결코 굽힐수 없습니다. 나는 아버님의 뜻을 나의 결심으로 속다짐합니다.

(나라가 있자면 공과가 있어야 한다. 공과가 있어야 나라가 있다!…)


×


아버님께(193×년 ×월)

…오래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한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주옵소서.…

대학 3, 4학년에서 겪은 고통이 이제껏 내가 겪은것보다 몇배로 절망적이여서 그것을 아버님이 아시면 잠을 이루지 못하실가봐 차마 말씀드릴수가 없었던것입니다. 그러나 이젠 좀 소생의 숨이라도 내쉬게 되는것 같아 이 아들은 글월을 올립니다.

아버님도 아다싶이 필재가 달아나버리자 리몽재는 먼 인척이라 단번에 돈을 끊지 못하고 보내며말며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아주 끊어졌습니다. 차라리 리몽재를 찾아다니는 아버님의 구차스런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는것 같아 마음이 편한적도 있었으나 앞길은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얼마 안되는 땅뙈기를 끝내 팔아서 그것을 학비로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생각다못해 점심을 건너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일본인학생이 더러 눈치를 채고 물어오면 나는 위가 요즘 나빠져서 일부러 굶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시간이면 나는 학교울타리를 돌군 하였습니다. 허기증도 시간을 넘기면 좀 나아지는 법이 아닙니까. 그러나 학교주변을 혼자 돌 때면 가장 참기 어렵게도 고독감이 나를 엄습하군 했습니다. 그때로부터인지 이 정신적인 고독을 이기기 위하여 산보나 하듯 길거리로 방황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일본인학생들한테 끌리여 해수욕장에 더러 간적이 있습니다. 일본인 남녀학생들이 모여서 히히닥거리기도 하고 따로 둘이서 속삭이기도 했지만 나는 바다물에 들어갔다 나와서는 그들과 동떨어져앉아 수평선 한끝만을 바라보군 하였습니다. 바다건너 거기엔 조국이 있을듯 싶었습니다. 고향이 당장 보이는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동켠을 향한 태평양쪽수평선인데 조국이 있는 서쪽으로 착각되군 했던것입니다.

나는 무인지경에 사는것 같은 이 고독감을 차라리 공부로 굼때버리는것을 좋게 여깁니다. 나는 머리가 아프다가도 책을 들여다보면 도리여 그것이 낫군 합니다. 방황도 산보도 바꾸고 그 시간에도 학문을 탐구하는 사색을 기울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쿨룩거리며 한 뒤골목을 걷다가 불시에 목이 꽉 메임을 느끼였습니다. 뒤이어 나는 한공기나 실히 되게 각혈을 했습니다. 나는 눈앞이 아뜩해졌습니다. 끝내 나는 이렇게 죽고마는가 하고 생각하니 눈물부터 앞섰습니다. 병원에서는 페결핵같은데 렌트겐사진을 찍으라는것입니다. 단돈 한잎을 아껴 점심을 못 먹는 신세에 무슨 수로 그 큰돈을 내여 (3원씩이나!) 사진을 찍고 치료를 받는단 말입니까.… 확진도 받지 못했는데 결핵이라면 심한편이 아니였던지, 기관지의 확장에 의한 출혈이였던지.… 어쨌든 의지의 힘으로 그럭저럭 견디여냈습니다.…

그무렵에 하루는 졸업론문을 지도하는 담당교수인 기다 겡이쯔가 리승기를 불렀다.

…리승기가 방에 들어서자 기다 겡이쯔는 몸을 의자등받이에 젖히고는 상대방의 얼굴을 유심히 훑어보며 말했다.

《리쑈기군, 졸업이 박두하였는데 어떻게 하겠소? 요즘 불경기판이라 취직이 여간만 힘들지 않은데… 군이야 우수한 성적이긴 하지만…》

기다 겡이쯔가 뒤말을 잇지 못하며 한숨을 쉬였다. 우수한 성적이지만 조선사람이기때문에 써줄데가 없다는것이였다.

승기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서있기만 했다. 기다도 창밖을 내다보고있었다.

승기는 그래도 최우등생이야 아무리 식민지출신이래도 어떻게 특별한 조치가 있겠지, 학교의 체면도 있지 않을가 하고 생각했던 기대마저 무너지는 순간 당장 밖으로 뛰쳐나오고싶었지만 기다 겡이쯔한테서 다른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을수 없었다.

승기는 기다 겡이쯔를 량심적인 학자라고 믿어왔다. 한것은 기다가 동경대학에서 거만한 다나까교수한테 밀리워 교또대학에 왔다는 그것만이 아니였다. 교또에서 열리는 학회에서 언제나 정치적문제를 거들어 학회를 좌지우지하려는 다나까교수를 싫어하는 기다 겡이쯔한테서 학문위주의 청렴결백한 학자의 성품을 보았던것이다. 물론 그도 일본인학자로서 조선사람들을 외면하고 무관심하게 대했고 리승기를 자기 집으로 오게 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승기의 재능을 아까와하는 눈치는 분명했다.

승기는 최후의 용기를 내여 말했다.

《선생님,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조선사람을 좋은 공장에는 보내지 않습니다. 전 다른것은 필요없습니다. 하루에 두끼의 밥만 먹여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교실에, 연구실에 남겨주십시오.》

승기는 이렇게 말하고나서 묵묵히 밖으로 나왔다.

한달이 지났다. 기다 겡이쯔한테서 오라는 소리가 없었다.

승기는 동경에 있는 조선인졸업생들은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하는지, 혹 도움을 받을수 있겠는지 해서 가보았다. 거기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두각을 나타낸 젊은 재사들이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때는 1932년 이른봄 9. 18사변이 있은지 거의 반년이 지났다. 일본당국은 주로 조선인졸업생들을 만주로 보낼 꿍꿍이를 하고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조선인졸업생들이 조선안의 회사들에 나가 종주국인 일본을 위해 복무하는 길밖에 없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적으나마 조선인학생들을 입학시킨 그 속심이 이제야 명백해지는것 같았다.

그러니 더욱 학문의 테두리안에서 나가고싶지 않고 기다 겡이쯔의 교실에 남아서 연구를 계속할 생각만 났다. 정 안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밭이나 뚜지며 농사를 지을 심산이였다.

마지막으로 기다 겡이쯔를 찾아갔다.

기다는 제사 다행이라는듯 이렇게 말했다.

《됐소.… 그러지 않아두 찾으려던 참이였소. 우린 그동안 민간위탁연구대상을 구해봤댔소. 오사까공영사에서 아스팔트연구를 해달라는 위탁이 들어왔소. 군이 이걸 맡아주오.》

승기는 어떤 연구이겠는지 그것은 둘째치고 그저 위기모면의 심정으로 형언할수 없는 기쁨에 휩싸였다.

물론 아스팔트는 승기가 생각하는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하지만 기다 겡이쯔의 친절한 알선을 거절할 형편이 못되지 않는가.… 외국에서 수입해다 쓴 아스팔트는 질이 좋은데 일본제는 자주 금이 나고 터지고 한다면서 이것을 극복해달라는 주문이였다. 아무 흥미도 없는 연구대상이다. 그러나 그 공영사의 밥을 먹는 이상 연구를 안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승기는 거기에는 별로 깊은 탐구가 없고 회심의 연구쩨마인 섬유에 대한 생각뿐이였다. 비둘기마음은 콩밭에 가있다고 승기의 열정은 아스팔트보다 섬유소에 관한 연구에 가있었다.

…불과 6개월동안에 연구소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둔 승기는 1932년 ×월에 오사까 공업화학회 년차발표회에서 섬유소에 대한 연구론문을 발표하여 적지 않은 물의도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곤난한 생활조건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말했다.

《여보게, 조선에 나가 〈동아일보〉고속도 전기에 가게나.》 또는 《남만주철도 중앙실험소에 가라는데…》하고 권고하군 하였지만 그런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취직 그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거니와 그때 벌써 승기의 눈앞에는 용액상태에서의 섬유소분자의 활동이 눈에 표상되여 막 보이는것만 같았다.

(조선에도 과학자가 있다는것을 세상에 시위하자! 일본놈들이 우리를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자!)

허나 공영사의 밥을 먹으면서 제가 마음먹은 연구를 한다는것은 모험이 아닐수 없었다. 일조에 밥줄이 떨어질 위험이 커갔다. 아닌게아니라 오사까에서 표독스럽게 생긴 사나이가 달려왔다.

《우리 공영사의 돈은 어디 썩은 돈인줄 아는가. 자금을 떼는가 마는가 하는 최후통첩인줄 알라.》

당황한 기다 겡이쯔도 순수한 학자의 체면을 벗고 돈에 매인 장사군처럼 랭정하게 말했다.

《빨리 공영사의 주문을 실행하라구. 그렇지 않으면 나도 더는 어쩔 방도가 없어.》

게다가 승기는 건강이 다시 악화되여 가끔 혈담을 남몰래 뱉군 하였다.

하숙집 녀주인인 일본녀자가 몹시 꺼리는 눈치여서 승기는 페결핵이 아니고 전염성이 없다는 의사의 소견서를 보여주었다. 그래도 녀주인은 다른데로 옮겼으면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무척 오래동안 편지가 없던 아버지한테서 편지가 왔다. 예감이란 이상한것이여서 승기는 얼른 겉봉을 뜯을수가 없었다. 승기가 편지를 하지 않으면 좀해서 편지를 보내지 않는 아버지였다. 편지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니 걱정말고 네 뜻을 굽히지 말아라.》하던 아버지가 무중 편지를 보내온것이다.

…승기야, 조금이라도 성공해야 집에 와보겠다는 네 뜻을 지켜 내 이제껏 모든것을 너한테 속여왔다. 세상에 불효한 자식보다 매정한 애비가 더 나쁘다는 말이 있다.…

승기야, 놀라지 말아. 네 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독수공방에 상사병으로 몇달어간에 손쓸새없이 가버렸구나. 녀인의 상사병에는 남자의 사랑이, 녀인의 이마라도 짚어주는 남자의 살뜰한 보살핌이 없어서는 안될줄로 알면서도 이 애비는 여태 그 정상을 전하지 않고있었으니 나도 사람은 아닌가보다.

네 할아버지는 네 처가 두 딸만 낳아 대를 끊는다고 야단질이였다. 딸 여섯에 아들이란 너 하나만을 둔 나로서도 할말이 없었다. 게다가 네 삼촌이라는 병직이까지 합세해서 종가의 종손이 그러다 쓰러지면 우리 가문은 다 망하고만다고 밤낮 술을 마시고와서 푸념질이였다. 네가 돌아와서 가문도 돌보고 새 녀자를 맞아 대를 이을 증손자를 네 할아버지의 무릎에다 앉혀야 한다는거였다.

아, 수백년동안 이 나라를 숨막히게 하던 지독한 가부장제, 남존녀비… 이 모든 봉건질곡속에서 우리가 얻은것이란 과연 무엇이였더란 말이냐?

《돌아오라, 집으로 돌아오라.》

나는 이런 편지를 몇번이나 썼다가 찢어버렸다.

나는 종숙이 에미가 감지 못하는 눈을 내 손으로 감겨주고 마당에 나와 한밤중의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네 처는 림종에 나를 쳐다보며 간신히 말했다.

《아버님, 내 저세상에 가도… 종숙이 아버지의 뜻만은…》

나는 내가 네 처를 죽이는구나 하는 생각에 혼자서 가슴을 쳤다.…

승기야, 나는 고인한테 죄를 지었다. 만일 일본놈들을 누르고 그 무슨 연구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너한테서 온다면 그날은 내가 고인의 령전에 달려가 너의 몫까지 합해서 며늘애의 명복을 다시 빌어보겠다. 그래서나 쓰라린 회한이 얼마간 위안이라두 되겠는지.…

네가 허약한 몸을 돌보지 않아 너마저 쓰러지면 나는 어찌라, 뉘를 바라고 살고?

네 삼촌의 말대로 이제라도 돌아오는것이 낫지 않겠는지? 이 아비의 심정을 리해해다오.…

승기는 편지를 채 다 못 읽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밖에는 안개가 자욱하여 어디가 어딘지 알수 없었다. 방향없이 헤매이다가 거의 쓰러질듯이 지쳐서 나지막한 천정밑의 실험실로 돌아왔다.

그날 그는 세번이나 손에 들었던 시험관을 떨구어 깨여버려 주위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튿날부터 승기는 제가 받은 편지로 하여 아버지의 뜻이 더욱 굳혀져 가슴속에 들어박히는것을 느끼면서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였다.

이렇게 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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