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회
제 1 편
제 3 장
2
비통한 소식이 있은 그날 한낮때에 리승기는 혼자 있고싶어 실험실의 뒤산 등성이에 올라섰다.
바람에 굴러다니던 가둑나무락엽이 어찌다 앙상한 떨기나무의 가지끝에 걸려 쌀쌀한 바람결에 파르르 떨고있었다.
흙을 덮은 넙죽한 락엽들우에 누런 솔가리들이 깔렸는데 양지쪽산허리의 잔디덤불속에선 계절을 헛갈린 파란 바늘움들이 때아니게 뾰족뾰족 끝을 내밀고있었다.
자연은 항상 그한테 사색과 마음의 안정을 주었으나 오늘따라 그는 제가 어디에 서있었던지도 기억하지 못한채 거기서 내려오고말았다.
리승기는 책도 시험관도 손에 통 잡히지 않아 산기슭의 이 나지막한 단층집에서 공장안의 합성고무중간공장에 있는 리재업을 만나러 갔다가는 다시 실험실로 돌아오기를 그 몇번, 마침내 실험실에서 더는 아무데로도 나가지 않으려고 작정했을 때는 오후 4시경이였다.
그는 비록 누르끼레한 광목이지만 깨끗이 빨아서 다린 실험복을 입고 (어느때건 그는 실험실에 들어서기만 하면 꼭 실험복을 착용한다.) 탁자우에 또는 벽가에 엉성하니 설치하기 시작한 실험장치들에 주의를 집중해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바깥은 쌀쌀하고 방안도 썰렁하였다.
부지중 몸이 오싹해나며 (요즘 추워지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웬일인지 고독감이 가슴속에 엄습해왔다.
방안공기만 아니라 마음조차 싸늘해진다.
어찌된셈인지 가장 가까운 사람들만 가버리는것 같다.
학문의 벗도, 생활의 길동무도… 김용진이 가고, 이제는 송복섭이마저 갔으니 주위가 허전하고 쓸쓸해져 마음은 때없이 추위를 느끼는상싶었다.
리승기는 내의를 한벌 더 입고 나오지 않은걸 후회했으며 밖에 나가 잠시나마 볕을 쪼이며 해바라기를 하고픈 생각이 났다.
실장인 신현석이 있는 옆방에 가서 무슨 말을 해보고싶다가도 그만두고말았다.
평상시에도 말이 적은 두사람이 마주앉았대야 더 속만 상할것 같았기때문이다.
리승기는 공허한 시선을 들어 뒤창문가까이로 다가붙은 산기슭의 누런 풀덤불을 내다보고있었다.
그는 문기척소리를 들었으나 돌아서지 않았다.
연구소의 그 누구라면 응답없이도 들어설것이다.
문소리는 났으나 아무런 말소리나 기척도 들리지 않자 리승기는 뒤돌아섰다.
그의 앞에는 웬 군인이 서있었다.
군인이 아니라 견장과 모표를 뗀 군복차림의 청년이였다.
(내가 이런 얼굴을… 어디서 보았더라?)
너무나도 낯이 익었다.
허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헛된 일이다.
시커먼 눈섭, 다부진 몸집, 군대식으로 경례를 붙이느라 들어올리는 그 커다란 손조차 퍼그나 눈에 익었다.
《선생님, 저는…》
어째서 저 목소리가 떨릴가. 억양조차 귀에 익으니 웬 일인가. 그러는 순간에 리승기는 《아!》하고 놀라면서 말을 더 못하고 두팔만 쳐들었다.
청년이 한걸음 다가오며 《선생님, 제가 송복섭선생의 조수인 김용석입니다.…》하고 말하자 리승기는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러니… 그러니 김용진동무의 동생이?》
《네, 그렇습니다.》
그러자 리승기는 한발작 뒤로 물러나 얼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청년은 옆의 쪽걸상에 풀썩 주저앉으며 울먹이였다.
《형님이 희생되신줄은 알구 왔습니다. 한데 송선생이 뜻밖에 그렇게 가셨다니… 세상에 이런 일두 있습니까?》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을 그 군복차림과는 어울리지 않게 김용석은 실험대우에 얼굴을 파묻고 사나이의 울음을 참으려 애쓰고있었다.
여기 오기 전에 송복섭의 부인을 위로하면서 참고참았던 눈물이였다.
리승기는
그는 김용석의 곁에 다가서며 군복어깨우에 손을 얹었다.
어느덧 마음이 다소 가라앉은 김용석이 천천히 일어나 웃호주머니에서 종이장을 꺼냈다.
《선생님… 이건… 송선생이 저한테 보냈던 편지입니다.》
《알구있소… 알구있습니다.》
(그건, 그건… 나를 인젠 스승으로 부르지 말고 가까운 사람으로도 생각지 말아달라, 나는 죄많은 사람이고 정치적인 락오자이다.… 이런 내용일것이다.)
리승기는 손에 그 종이장들을 쥐였다.
《송복섭이… 그는 동무한테 이 편질 보낸걸 마지막엔 후회했소. 생전에 도로 이걸 손에 쥐였다면 아마 찢어버렸을게요… 그러니 그의 깨끗한 령혼을 위하여…》
김용석은 잠시 리승기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마치 이 방의 주인처럼 스스럼없이 실험대우의 알콜람프에서 유리뚜껑을 제껴놓고 (그것은 매우 익숙된 동작이였다.) 라이타로 불을 달았다.
그는 편지장들을 리승기의 손에서 받아들고 알콜람프의 불꽃에 갖다대였다.
한줄기의 연기가 피여올랐다.
거기서 날아오른 가벼운 흰 재가 천천히 떨어져내리자 용석은 그것을 손바닥에 받아들고 유심히 내려다보더니 후― 하고 조심히 불어버렸다.
고인의 령전에 분향할 때 흩날리는 재티처럼 그것은 녹아버리듯 없어지고말았다.
김용석은 그것으로 다소 진정이 되는듯 그리고 다시한번 흥분과 오열을 눅잦히려는듯 후― 하고 숨을 길게 내불고나서 리승기앞에 다가왔다.
《선생님, 나한테 형수나 다름없는 송선생의 부인을… 본인의 소원대로 흥남공대에 입학시키기 위해 이제 시간이 생기는대로… 그쪽으로 불원간 갔다올 일도 있겠으니 대학소개지인 북청으로 갔다올 생각입니다. 가던 길에 송선생의 부인과 함께 고인의 령전에… 애기는 아주머니가 친정에 맡기겠다니 내가 업구 가겠습니다. 걸어서라두.》
《거기가 어디라구?》
리승기는 놀라며 말했으나 김용석은 벌써 공식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참, 연구소행정에두 갔댔지만 우선 선생님한테두 이걸 보여드려야지요.》
김용석이 이번에는 군복적삼단추를 끄르고 안에서 크지 않은 봉투를 꺼내더니 속지를 뽑아들었다.
《최사직속 고사포구분대에서 복무하다가…
리승기는 제대명령서를 제가 쥐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가늠하듯 김용석의 얼굴과 종이장을 번갈아보다가 마침내 그것을 받아들고 보았다.
《제1호, 제1호…》
리승기는 아직 그 의미를 미처 깨닫지도 못하면서 되뇌이기만 하였다.
어쨌든 이 가렬한 전쟁통에 부상병도 아닌 사람이 제대가 된다는것, 그것도 처음이라는 뜻으로 《제1호》라고 하니 거기에는 필경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고 어렴풋이나마 짐작은 하였으나 의문은 지워지지 않는다.
김용석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제1호입니다. 전쟁의 장기화에 대처하여 총동원령인데 우리는 제대되였습니다. 제1호가 아니구서야 제가 어찌
리승기는 의문에 차서 물었다.
《헌데 어디루 가던 길입니까? 어째 여기부터? 송동무때문에?》
《선생님, 전 여기루 영 왔습니다.》
《건 어째서?》
《아니, 그럼 선생님께선 모르구계십니까?》
《모르다니, 무엇말이요?》
《이거 참, 행정부소장동무두 아직 모르는것 같더니. 전 선생님의 〈합성1〉호 연구를 도우라고 보내서 왔습니다. 성과 관리국에서 그렇게 말하던데요.》
《뭐라구요?》
리승기는 김용석의 손에 가있는 제대명령서를 다시 끄당겨서는 거기에 그 해답이라도 있는듯 정신없이 들여다보았다.
그는 거기서 다른 그 무엇을 발견하지 못한듯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고는 제대장을 김용석에게 돌려주었다.
몇순간이 지났으나 리승기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방하민이 합성고무에 힘껏 조력해달라고 한것은 불과 몇시간전 일이다.
그리고 이 전쟁중에 《합성1》호를 연구하여 그 합성섬유가 도대체 어디에 필요하며 또 설혹 그것을 시작한다쳐도 무엇으로 어떻게 한단 말인가. 분명히 여기에 무슨 착오가 생긴것 같다는 의혹과 놀라움만 커지였다.
김용석이 또 말을 한다.
《림창직이라구 있습니까? 한때 선생님의 조수로 있었다는…》
《있소, 있구말구.》
《그 동무 얘기두 들었는데 소환장을 받구 이제 여기루 올겝니다. 역시 제대명령 제1호이지요.》
《아니, 그럼 그가 어디에 있단 말이요?》
《그는 여기서 엎어지면 코닿을데인 대관에서… 군관학교에서 반화학강의를 맡아한답니다. 련락군관이 직접 거기에 갔다니 본인이 곧 올겝니다.》
《가만가만, 좀 계시오.》
연방 들이닥치는 충격과도 같은 말에 리승기는 황급히 손만 내저으며 모든걸 찬찬히 되새겨보려고 애를 쓰는것이였다.
림창직이까지 불렀다니 《합성1》호와 관련하여 무슨 쪼간이 있는것이 분명하다.
그제야 김용진이 림창직의 행처를 확정하려고 애쓰다가 갔다는 생각이 머리를 쳤다.
김용진이 《합성1》호 연구를 두고 여러모로 알아보면서 기대와 희망을 보여주었을 때 거기에 별반 깊은 주의를 돌리지 않고 뜨아하니 대했었지만 지금에 와서 이렇게 김용진이 가고만 뒤에도 보통정도가 아니게 어디선가 이것을 계속 관심하고 현실적인 대책까지 취하고있음을 알았을 때 리승기는 뭐니뭐니해도 가버린 김용진한테 죄를 지은 생각만 앞섰다.
왜냐하면 그때 김용진의 말을 반신반의 아니, 거의 전적으로 믿지 않았던 자기가 아니던가.
리승기는 흥분과 격정의 급한 호흡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김용석이 쪽걸상에서 일어섰다.
《전 송선생의 부인을 진정시켜야 할것 같습니다. 함흥쪽으로 나갈 준비를 서두르더군요. 송선생의 령전을 찾고 그길로 북청까지도 가려고 말입니다. 비분을 가라앉히게 당분간 며칠은 눌러앉혀야 할것 같습니다.》
《그럼 나도 같이 그리루 갑시다.》
밖으로 나가 앞장서 걸어가는 리승기는 지금 당장은 《합성1》호에 대한 생각을 미루고 (그것은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꿈같은 일같았다.) 송복섭에 대한 김용석의 의리를 두고 가슴이 뜨거워올랐다.
그렇지야 않겠지만 어찌 보면 제 형님의 희생보다 더 원통해하는것 같았다.
그럴수도 있었다.
리승기는 뒤따라오는 김용석을 두고 생각했다.
(여기서 해방후에 자라난 과학자의 첫 세대이구나. 스승과 제자간에 오가는 진정, 그 의리… 이런 불같은 관계가 언제 어디에 또 있었어?)
리승기의 가슴은 짜장 불을 안고가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날씨는 을씨년스러웠으나 그의 볼을 타고 마치 후더운 봄바람이 부는듯 얼굴이 자꾸만 후끈후끈해났다.
불과 1시간전만 해도 싸늘해지는 마음을 안고 고독감에 잠겨 몸을 옹송그리던 그였다.
아니다, 주위는 봄날처럼 따스하다.
뒤에서는 열혈과학도 김용석이 따라오는 발걸음소리가 믿음직스럽다.
송복섭이도 김용진이도 다 살아서 함께 가는것만 같다.
그러자 불현듯 리승기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학은 론문이나 학위로 이어지는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으로 련결되고 계승되고 그래서 발전을 하는게 아닌가 하는 그것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