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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회

제 1 편

제 2 장

2


흥분으로만 달릴수 없는 길이였다. 석대의 목탄차가 숨가삐 헐떡이며 서한령과 황초령을 거쳐 사흘만에 함흥에 들어서기까지 적기의 시달림으로 불안해지는 그런 길만은 아니였다.

차창턱에 팔굽을 얹고 운전칸에 앉아 밖을 내다보는 리승기의 눈앞으로 흘러가는 숨을 죽인 카바이드로의 굴뚝들… 흡사 두달이 아니라 일생을 거기서 살아온듯 한 공장구내를 지나갈 때 대낮에도 아름다운 오렌지색으로 주위를 물들이던 그 카바이드류출구가 이미 싸늘해졌다는 사실이 그지없이 괴롭게 느껴졌다. 사색과 탐구, 창조적생활이 모두 흐름을 멈춘것만 같았다.

허나 차들이 파괴된 백화점의 뒤마당에 들어서고 그 지하실에서 꺼내오는 책들을 보자 리승기의 기분은 어지간히 가벼워졌다.

김용진이 연구소행정부소장과 함께 책을 꺼내오는 일을 지휘했다. 협조원들이 지하실에 내려가 책을 마대에 대충 넣어지고 올라오면 마당에선 그것들을 다시 선별하면서 많이 들어가도록 다른 마대에 차곡차곡 챙겨넣었다.

마대에 책을 넣으면서도 리승기는 가끔 그중의 한 책을 손에 들고 펼쳐보군 하였다. 묵직한 잡지묶음을 들고보니 1830년부터 100년동안에 발행된 도이췰란드의 어느 잡지일식중의 한묶음이다.

영문, 일문, 도이췰란드문, 로문의 책과 잡지묶음들, 해방후에 우리 글로 발행된 책들도 섞여있었다.

그 귀중한 도서들이 리승기의 눈앞에서 보물처럼 빛을 뿌렸다. 책들은 오래전에 만났던 벗처럼 다정한 미소를 보내는것만 같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고분자화학계통의 서적들에 더 관심이 갔다.

해방직후 흥남지구에서는 일본인들의 도서실에 산재한 책들을 한데 모아 적산으로, 인민의 재산으로 만들었고 후에는 산업성흥남연구소의 장서로 되게 하였다고 한다. 그 말을 처음 듣는 때도 그랬지만 지금 이 책들을 보는 순간에 다시금 리승기는 서울에서 공과대학교사의 마당에 갔다가 보게 된 정경이, 미군의 무지막지한 군화에 밟혀 흩어졌던 책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리승기가 책들을 흥분이 어린 손놀림으로 뒤져보다가 그중에서 어떤 책들을 골라 한쪽에 따로 내놓는것을 눈여겨보던 김용진이 리승기한테로 다가갔다.

《리선생은 저하구 약속하셨지요? 선후차를 가려 먼저 실을 책은 먼저 싣겠다구.》

한손에 안경을 벗어들고 다른 손에 펼쳐진 책을 들고 들여다보던 리승기는 뒤를 돌아보며 어정쩡해서 대꾸하였다.

《그랬던가요?》

《허허허… 그러니 말입니다. 리선생이 저 행정부소장동무와 의논해서 먼저 가져갈것들을 선별해서 실읍시다.》

《다 단번에 가져갔으면 좋을 책들입니다.》

《그래두 더 귀중하구 당장에 필요한것부터… 례컨대 에나멜수지에 대한 문헌이라든지 또 연구소에서 하려는 군수과제에 필요한것들을 말입니다. 그리구 여기에 내놓은건 선생님의 〈합성1〉호에 필요한것이 아닙니까?》

그제야 리승기는 발치 가까이에 무드기 쌓인 책무지를 내려다보며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거의나 무의식중에 장차 자기한테 필요한 책부터 골라내놓은것이다. 습관의 타성에서 오는것일가.

허나 김용진은 바로 그것을 바랐던것처럼 뭐니뭐니해도 이것부터 우선 실어야겠다고 행정부소장한테 말하는것이였다. 그러면서 그는 진심이 어린 목소리로 뇌이였다.

《외람된 말이오나 이 책들을 보자 리선생은 얼굴에 화색이 돌고 눈빛이 번쩍이였습니다. 참, 책을 보는 선생님의 욕심이 부럽습니다. 저는 말입니다, 동생한테나 기대를 걸었지 이미 때가 너무 늦은것 같습니다. 나이가 벌써…》

《무슨 말을… 아직 공부하면…》

《그럴가요?… 아닙니다.… 그래두 마음은 그렇지 않으니…》

김용진은 미소를 그리였다. 이 순간에 그의 마음속에 어떤 남모를 결심이 굳혀졌는지는 모른다.

김용진은 그루박듯이 천천히 말했다.

《어쨌든 선생님의 그 〈합성1〉호에 필요한 책들을 첫탕에 실어야겠습니다, 백권이든 천권이든.》

김용진은 더는 리승기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하면서 행정부소장더러 리승기선생과 같이 그한테 필요할 책부터 골라 첫차의 짐을 짜라는것이였다.

행정부소장과 저쪽에 마주서서 무슨 말을 하던 김용진이 리승기한테로 왔다.

《리선생, 제 잠간 화학공장주택지구에 올라갔다올 일이 있습니다.

저녁까진 돌아옵니다. 내가 그전때 늘 출퇴근하던 낯익은 길이니 한번 걸어보기두 하구요.》

책들을 정신없이 들여다보던 리승기는 고개를 쳐들고도 김용진의 여유있는 얼굴표정과 미소를 도무지 리해할수 없어 덤덤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저녁무렵에 돌아온 김용진의 얼굴에는 지어 흐뭇한 미소까지 어려있었다. 그것이 책마대들을 그쯘히 실어놓은 차의 적재함우를 바라보는 만족감때문만은 아니였다. 무슨 일인지 화학공장이 있는 웃지구에 갔다온 그 걸음에서 생긴것이 분명하였다.

《리선생, 다이야를 손질하구 한밤중에 떠나겠다니 그새 내 비료공장에 좀 갔다오겠습니다.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갈수두 없구.》

리승기는 그의 심중이 헤아려졌다. 페허로 된 공장이지만 거기서 잔뼈가 굵었다는 김용진이니 구내를 한번 돌아보러 다녀오지 않고는 그냥 돌아설수 없겠지… 리승기는 말했다.

《나두 갑시다, 동무해서. 그새 내 여기서 뭘하겠습니까?》

처음에 김용진은 주저하다가 이내 동의를 표했다.

운성에서 천기리까지 그들은 묵묵히 걸었다.

공장을 보위하는 로동자들의 량해를 얻고 두사람은 비료공장구내에 들어섰다.

달빛만이 은은히 비치였다. 배가 터진 대형가스탕크들, 엿가락처럼 마구 휘여져서 길을 막는 철골들, 무너진 벽체들… 어디가 어딘지 김용진이도 처음에는 향방을 잡지 못해하였다. 휑뎅그렁한 비료하조장에 들어선 김용진은 얼이 빠진 사람처럼 서있기만 했다. 텅 빈 공간에 어둠과 정적만이 군림하였다.

리승기는 희슥한 바닥에서 티검불이 섞인 한웅큼의 비료를 손으로 긁어모아쥐고 코앞으로 가져갔다. 비료냄새, 어쩌면 암모니아냄새가 아직도 세게 풍긴다는것이 이상하기도 했다. 김용진이 그것을 받아들고 걸탐스레 냄새를 맡고있었다.

그러다가 김용진은 단호히 뒤돌아섰다.

《갑시다, 선생님…》

차라리 보지 않는것만 못하다고 생각하며 더는 거기에 서있을수 없었던 모양이다.

김용진이 걷다가 나지막한 2층건물을 가리켜보였다.

《이게 시험소건물인데 여기서 해방직후에 재업동무가 일했지요.》

그런데 그 어둑컴컴한 2층건물안에서 무슨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나고 이따금 전지불이 희뜩거리였다.

《누구요?》

김용진이 그쪽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좀 있더니 현관앞에 한사람이 나왔다.

《누구긴 누구겠소, 여기 주인이지요.》

어둠속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그 사람은 모표가 없는 군모를 쓴 젊은이였다. 그의 손에는 철근토막 같은것들이 들려있었다.

《이 밤중에 웬일이요?》

《한데 여러분네는 누구들이시오?》

물음에 물음으로 맞서나왔다.

《우리두 주인들이요. 보위대에서 허락을 받았소.… 가만, 이게 건국대에서 솜씨를 보이던 한태호동무가 아니요?》

청년이 다가와 머리를 기웃하며 눈여겨보더니 《아 용진아저씨, 이게 얼마만입니까.》하고 허리를 굽석하고 인사를 한다.

몇십년동안 헤여졌다가 만나는 사람들 같았다.

《인사하오.… 리승기박사선생이시오.》

《아, 리승기선생님… 리재업선생이 늘 말씀하시더니.》

김용진이 물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거요?》

《후퇴시기에 로동자부대에 속해 싸우다가 재진격때 인민군대를 따라나섰는데 갑자기 공장으로 돌아가라는거예요.… 하는수없이 공장에 왔는데 나더러 이번엔 청수에 가라누만요. 와보니 벌써 기술자들, 기능공들이 더러 청수에 갔군요. 한데 청수에서는 나한테 대체 무슨 일이 차례집니까?》

김용진은 머뭇거리다가 짐짓 엄엄하게 말했다.

《비밀이요. 중요한 사업이요.》

《그렇습니까?》

《한데 동문 벌써 손에 뭘 들었군, 제가 뭘하게 되겠는지 모르겠다면서.》

《용접봉이지요, 날 불렀을 때에야…》

한태호는 해방직후에 비료공장을 복구할 때 건국대원으로서 용접솜씨로 이름을 날리였다. 연, 늄, 백금의 용접은 물론 수소로 동을 용접하는데서는 누구도 그를 대신하지 못하였다.

《옳소, 동문 역시.》

《한데 극비가 아니라면 좀 압시다. 그래야 나두 여기서 이것저것 갖구 가야 할게 아닙니까.》

《하, 이러니 정 할수 없군.》

김용진은 한태호한테로 약간 몸을 굽히며 능청스런 어조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국방과학을 연구하오.… 돌에서 실을 뽑는단 말이요.》

《뭐라구요?》

달빛이 희미한 어둠속에서도 한태호의 눈이 놀라운 빛을 반사하며 휘둥그래지였다.

리승기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실을 뽑는것이 국방과학이라니. 롱담두, 거참… 하긴 이런 때에두 여유있는 마음을 갖는 그 인품이 놀라운걸.)

김용진이 리승기의 팔소매를 가벼이 잡으며 말했다.

《리선생님, 앞으루 이 동무와 잘 친해두십시오. 장치제작에서, 특히는 용접에서 귀신이랍니다.》

리승기는 대답했다.

《제일이야 이제 언제… 하여튼 반갑습니다. 앞으루 많이 도와주시오.》

《저야 뭘… 한데 모두 무슨 말씀인지…》

한태호는 여전히 영문을 몰라 어둠속에서도 두사람의 낯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나 김용진이 새벽에 떠나는 자동차로 같이 떠나자고 말하자 모든 의문을 잊고 어린애처럼 기뻐하였다.

《야, 이거야말루 실루… 걸어갈 일이 아뜩했는데 …내 그럼 이길루 집에 갔다가 곧장 운성리에 건너가겠습니다.… 아참, 그런데 그차로 송복섭선생두 타고가시는가요?》

첫 순간에 리승기는 제가 이름을 외껴들었다고 여겼다. 송복섭이 여기에 있을수는 없었기때문이였다.

《건 도대체 무슨 말이요?》

김용진이 한태호의 팔소매를 잡은채 다우쳐물었다. 그로서는 무슨 예감이 있었던것 같기도 했다.

한태호가 오히려 얼떠름해서 말했다.

《아니?… 모르구계신가요?》

《무슨 일이요?》

《송선생네 가시집이 우리 마을에 있지 않습니까? 덕동 말입니다. 그 집에 와 누워있지요.》

리승기는 그저 어리둥절해만 하는데 한태호한테 김용진이 급히 묻고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가 신의주에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소?》

한태호는 그제야 제 할말을 찾았다는듯 《아, 그건 말입니다.》하고는 설명을 했다.

국제의료단에서 약품을 싣고 동해지구로 나오는 차가 있었다는것이다. 그 차는 돌아갈 때 부상병들과 환자들을 위해 고등어를 싣고가기로 되였다고 한다. 열도 내리고 병이 일정하게 호전되는것 같으니까 병원측에서도 중요한 기술문헌들을 찾아내야 한다는 송복섭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준것 같다는것이다.

《그런데 와서 송선생은 끝내 찾으려던 연구문헌을 찾았다질 않나요. 참 얼마나 기뻐하던지.

한데 각혈을 해서 병이 더해졌습니다. 그래서 홍원에 갔다오는 그 자동차로 따라서려는걸 장인, 장모가 한사코 붙들어두었습니다. 그래두 병이 급한 고비를 넘기니 자꾸 청수로 간다는거지요. 제 요새 며칠 집에 안 들어갔는데 그새 차편이 생겨 떠난지두 모르겠습니다.》

기뻐해야 할지 나무람을 해야 할지 모를 이 일앞에서 두사람은 똑같이 어리둥절해지였다.

급기야 김용진이 한태호더러 동무네 사는 덕동으로 가자면 어느 길로 가는가고 묻고나서 《태호동문 먼저 집에 가오. 가서 송선생이 있으면 우릴 기다리라구 하오. 우린 운성리에 갔다가 아침에 송선생한테 가겠소.》하고 말했다.

리승기와 김용진은 우중충한 건물들과 탕크들의 거무스레한 형체들을 지나 공장구내를 나서면서도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어둠침침한 담벽을 따라걷던 김용진이 문득 멈춰서며 리승기의 팔소매를 가벼이 잡았다.

《리선생,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줄곧 송복섭을 두고 생각하던 리승기도 바로 그런 심정으로 그렇게 김용진한테 묻고싶었던 참이다.

《글쎄 말입니다.》

말없이 서있던 김용진이 제 생각을 부정하듯 머리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이건 자기의 청백함을 증명해보이려는 조급한 시도라고는 볼수 없습니다.

그건 말입니다, 나보다 리선생이 더 잘 아시겠지만 그건… 제 루명을 벗기보다두 그 연구보문에 한 학자의 반생의 땀과 눈물과 온갖 고초가 어려있음을 알구 그 원본을 찾지 않구는 견딜수 없는 학자로서의 량심의 충동이라구 보고싶습니다.》

김용진은 걸음을 멈추며 다시 리승기한테로 돌아섰다.

《한데 지금쯤 심의위원회가 우선 신의주부터 내려갔겠는데 송복섭선생은 여기에 있으니… 아니 아니, 그것이 나한테는 더 큰 용기를 줍니다. 송선생의 그 결연한 행동 말입니다. 그리고 끝내는 찾아내고야만 그 결과 말입니다.… 괜찮습니다, 내가 보증하겠습니다. 자신이 있습니다.》

언제나 여유있고 때로는 능청스러워 목소리 또한 빠르지 않던 김용진이 이처럼 흥분하는것을 리승기는 처음으로 보았다. 여기 페허로 된 공장구내의 옆을 지나며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속을 걸으면서도 김용진의 눈빛은 황황히 불타오르는듯싶었다.

《리선생한테 말하지만 화학공장기술문건문제두 안심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내 아까 오후에 가서 누구를 만나 확인해본데 의하면 서무계장놈이 공장기술문건을 적들한테 넘겨준것이 사실인것 같습니다. 그걸 확인할수 있는 몇사람의 이름도 수첩에 적어두었습니다. 그 심의위원회에 방조가 되게 말입니다. 화학공장기술문건문제만은 송선생자신이 모른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괜히 알았더라면 어쩔번 했습니까?》

김용진이 걸어가면서 말했다.

《송선생을 우리 자동차운전칸에 태울수두 있지만 그러면 다시 몸에 무리가 갈수 있으니 그렇게 할순 없습니다. 안전지대로 소개한 도병원이 멀지 않으니 거기에 입원을 시킵시다. 어떻습니까?》

리승기는 그저 긍정과 감동에 겨워 고개만 끄덕였다.

(※ 력사와 시간이 더 명백히 판별해준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 1970년대에 이르러 흥남의 화학공장기술문건문제는 명백해지기 시작했다. 해방직후까지 흥남에 있다가 간 일본학자 오시마 요시끼로가 책 《반응공학》서두에서 바로 그 기술문헌을 입수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있다. 그는 남조선학자로부터 많은 돈을 주고 산것이 분명하다. 오시마 요시끼로는 흥남에서 제자신이 일제의 대륙침략을 위해 만들려던 그 이소옥탄의 공정들을 《반응공학》에서 많이 례증하기 위해 그 자료들을 입수했던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술문헌은 어떤 경로로 남조선에 갔는가?

월남도주한 공장서무계장놈과 정체를 숨기고있던 김××의 작간이라는것이 세월이 지나서야 판명되였지만 1950년대만 해도 적들의 일시적강점시기에 없어진 그 기술문헌이 많은 의혹을 불러일으켰던것은 사실이다.

똑같은 두통의 기술문헌중에서 한통만이 적들한테 넘어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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