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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회

제 1 편

제 1 장

5

며칠이 지나갔다.

저녁무렵에 집에 들어온 리승기는 웃방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며 안해한테 물었다.

《저기 있던 연구보문철이 어디 갔소?》

힘겹게 되살려내여 이젠 책처럼 한데 묶어놓은 그 연구보문재생본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남편을 쳐다보는 안해의 눈길은 소심하였다.

《제가 건사했어요.》

《어디다?》

《장농속에 넣었어요. 아이들이 못 다치게 하느라구.》

신통히도 방하민부국장이 그 연구보문철을 두고 하는 말그대로이다. 바로 이 점이 리승기로 하여금 더 화가 치밀게 했다.

요새 남편이 집에 들어와서는 괜히 그것만 뒤적거리는것 같아 분이는 제사 더 속이 상해서 아예 보이지 않는 곳에 그걸 건사한것이였다.

《그러라구 하지 않았는데두 당신 맘대루?》

어지간히 화가 난 남편의 목소리였다.

《그럼 어찌겠어요?》

분이는 애절한 눈매로 남편을 쳐다본다.

그러면서 더 대꾸를 안했다. 무릇 학자들이란 신념과 주장은 강해도 정에는 무른 법이니 남편도 사랑하는 이 안해의 사려와 정을 곧 느끼겠으니 말이다.

아닌게아니라 때없이 화를 낸 리승기는 자신이 멋적어졌다. 실상 그것이 요즘 초조와 불안에 잠긴 자기의 심리상태의 반영임을 스스로도 모르진 않았다. 리승기는 딴전을 부리듯 안해한테 물어보았다.

《요새 려경구소장네 부인을 만나지 못했소? 소장이 외국에서 언제 돌아온다는 말이 없었소?》

공연한 질문같기도 했다. 려경구가 여기 연구소의 소장직책을 그냥 두고서 외국에 실습떠난지도 수개월이 지났다. 적어도 1년이 돼야 돌아올것이나 리승기는 요즘 려경구가 몹시 기다려졌다. 후퇴의 어려운 길을 따라나서도록 결단성있게 자기를 이끌어준 려경구라도 있었으면 이런 때 이 참을수 없는 정신적인 방황과 번민을 함께 나눌수 있을것 같았다. 그때 후퇴의 길에서 지친 리승기는 건강이 급작스레 나빠져서 려경구와 함께 떠나지 못했던것이다.

려경구와 같이 갔더라면 지금의 이런 공백을 메꿀수도 있지 않았을가? 한데 왜 하필 그때 앓아눕게 되였단 말인가. 지금 자신이 여기서 공회전과 제자리걸음만 하는듯 한 안타까움을 버릴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송복섭이한테 문병을 가기만 하면 마음의 괴로움은 더욱 참을수 없는것으로 여겨졌다. 송복섭에 대한 원망은 사라지고 연구보문철이 제가 아니라 송복섭한테 꼭 필요하다고, 그것으로 그를 구원해줄수 있다고 생각되여 그것을 재생시키느라 애를 썼던 리승기였다. 이제는 공장기술문건문제까지 제기되여 그까짓 연구보문철따위는 누구도 돌아보지 않은듯싶었으나 적어도 리승기자신으로 놓고볼 때는 송복섭이한테 후배의 의리까지를 의심했던 자신에 대한 참을수 없는 자책감에서 그것을 장농속에 보관하고싶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 재생된 연구보문철을 보고 다행한 심정으로 송복섭이를 용서해주기를 바랐던것이다.

저녁밥을 설때린 후에 리승기는 저녁산보라도 하듯 이미 어둠에 싸인 밖으로 나왔다.

저녁산보라니?… 저녁산보는 사실 리승기가 가장 즐기는 일과였었다.

이국땅에서는 고독을 잊고 탐구에 열중해보기 위해서 그리고 어수선한 남조선땅에서는 불안과 초조감에 못이겨서, 그것은 거닌다기보다는 헤매며 다니는 발걸음이였다.

전시인 지금은 저녁산보랄것도 없다. 원컨대 전쟁이 끝나 그것이 완전한 의미에서 사색과 탐구의 저녁산보로 되였으면… 그것은 마음 한구석에 간직한 생활상 요구와 소망이기도 했다.

리승기는 집앞 돌개울가의 나지막한 바위우에 앉았다. 그는 잠시 마음을 질정하려고 애썼다. 평양에서 내려왔다는 당조직원이라는 사람을 이밤에 당장 만나고싶은 충동을 누를수가 없었던것이다. 그 사람이 행정부소장과 함께 송복섭이네 집에 갔댔다는것, 환자가 잠들어있기에 깨우지 말라면서 다시 오겠다고 돌아섰다는것을 누구한테서 들은 다음부터는 줄곧 그 생각뿐이던 참이다.

리승기는 별들을 쳐다보았다. 적기가 날지 않는 밤하늘에 별들이 황금낟알같이 휘뿌려져있건만 화려한 빛을 뿌리지 못하는듯싶었다. 어느 농군이 내던진 낫가락같이 가느다란 쪼각달이 산마루에 서글프게 걸려있었다. 밤하늘이 땅에 퍼그나 가까이 펼쳐진듯싶었다.

어느새 따라왔는지 12살짜리 딸애 혜연이가 곁에서 《야참, 별들이 많네.》하더니 잔뜩 머리를 제끼고 하늘을 쳐다보며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하고는 《아부지, 저 별 봐. 왜 저렇게 혼자 삐여져있을가. 뚝별이라구 번쩍번쩍 뽐내네. 저기 저 별들은 한군데 사이좋게 오구구 모여앉았는데…》하고 종알거렸다.

《혜연아, 그러다 넘어질라.》

그러면서 리승기는 딸애를 빨리 집에 들여보내려 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으로 하여금 마음의 탕개와 안정을 갖게 하려 해서인지, 별빛을 반사하는 어린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느닷없이 이런 말을 꺼냈다.

《얘야, 옛날 어떤 학자가 하늘만 쳐다보며 별을 관찰하다가 그만 우물에 빠졌단다. 그래서 같이 걷던 사람이 뭐라구 했는지 아니? 〈선생님은 하늘은 잘 아시는데 땅은 영 모르시는군요.〉하였단다.…》

혜연은 어둠속에서 깔깔대며 웃었다. 과학은 알아도 생활은 모른다는 깊은 뜻을 알기에는 그의 나이가 너무도 어리다. 한데 어이하여 이런 일화가 머리속에 떠올랐는지… 그것은 별만 쳐다보다가 우물에 빠진 고대그리스의 철학가 탈레스보다 더 생활과 현실을 모르고 사는것같은 자신에 대한 타매에서 나온 말일것이다.

딸애를 집에 들여보낸 리승기는 약간 경사진 아래길을 걸어내려갔다. 당조직원이 류숙한다는 화학공장지배인네 집으로 향하였다.

그의 걸음은 차츰 더 빨라졌다. 이제는 한시바삐 그를 만나고싶었다. 초저녁이니 그는 아직 자지 않을것이다.

그런데 어둠속에서 올라오는 한사람이 리승기를 지나쳐 가다가 불쑥 물어보았다.

《리승기선생이 아니십니까?》

리승기는 뒤돌아선채 어둠속에서 마주선 사람을 얼른 알아볼수 없었다.

《뉘신지요?》

《하, 아침에 만났던 사람을 몰라보십니다그려.》

부드럽지만 다소 웅글은 음성이였다. 그제야 눈앞에 선 사람이 제가 지금 찾아가려는 그 당조직원이라는것을 알고 퍼그나 놀랐다.

《아, 이거 참말 미안합니다.》

산밑의 단층집에 실험실을 꾸리는 현장에 와서 자기 소개로 그저 중앙에서 내려왔다고만 하던 그 사람이였다. 그때는 당조직원이라는 부름도 생소했지만 서로 몇마디 얘기를 나눈적도 없었다.

당조직원은 새삼스레 제 이름을 소개했다.

《김용진이라구 부릅니다. 선생님 댁에 가자구 나선 참인데… 내려오다가 저기 송복섭선생네 집에두 들리구. 한데 어디루 이렇게?》

리승기는 스스럼없이 대답하게 되였다.

《사실은 저두 당조직원동지를 좀 만날가 해서요.》

《저를요? 마침 잘됐군요. 저는 선생님을 만나구 선생님은 저를 만나자구 했는데 이렇게 중간에서 만났으니 참.》

그도 별스레 신통한 생각이 드는 모양이였다. 그바람에 리승기는 저도 모르게 솔직히 물었다.

《저를 어째서 만나시려구?》

김용진의 대답 역시 허물이 없었다.

《리선생한테서 송복섭선생에 대한 의견을 좀 들을가 해서이지요.》

리승기는 다시한번 놀라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저두 그 부소장때문에 당조직원동지를 찾아가려던 참인데…》

《그렇습니까?》

무척 반가와하는 김용진의 목소리였다.

《그럼 우리 이렇게 합시다. 여기서 거닐며 얘기를 나누다가 저기 송복섭선생네 집엘 같이 가지 않겠습니까?》

《그게 좋겠습니다.》

리승기는 얼른 대답하며 어째선지 무척 마음이 가벼워지는것을 느꼈다.

김용진이 미소를 띠우고 (어둠속에서도 분명 그렇게 느껴진다.)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리선생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난 국수를 무척 좋아하는데 해방후에 송선생이 초산을 합성해낸 덕분으로 국수에 식초를 쳐서 먹으니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릅니다. 한번은 내가 말입니다. 함흥에서 유명한 똥똥이국수집에 갔더랬는데 그 축구공처럼 동그랗게 똥똥한 녀주인의 말이 해방덕분에 흥남식초를 쳐주니 손님이 곱절이나 늘어났다나요. 허허허…》

리승기도 덩달아 말했다.

《사실 저두 서울에 있을 때 북에서 나온 식초를 쳐서 국수를 먹으며 송동무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우린 모두 송선생의 신세가 크단 말입니다.》

김용진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웃고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말했다.

《물론 〈똥똥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 국수집녀주인이 좋아한다구해서만 초산합성이 의의가 있는게 아니지요. 장차 리선생의 〈합성1〉호에서 그 초산합성은 기초적인 역할을 놀게 아닙니까?》

리승기는 김용진의 입에서 뜻밖에도 《합성1》호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후두둑 뛰여 얼른 응대를 할수 없었다.

김용진은 어둠속에서 천천히 말을 계속하고있었다.

《48년도에 김일성장군님께서 초산직장이 조업한걸 보시구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일본기술자들두 못하던걸 해방돼서 얼마 안되여 우리 손으로 해냈으니 참… 그때 송선생은 출장중이여서 장군님을 만나뵙지 못했는데 돌아와서 하는 말이 해방된 조선의 로동계급이 장군님의 치하를 들으면 그게 곧 제가 받는 치하라구 하였지요. 송복섭선생이 학자로서 참말 큰일을 해놓은건 사실입니다.》

리승기가 서울에서 흥남으로 왔을 때 무엇보다 송복섭의 초산합성이 큰 힘을 주었던것인데 그러한 힘이 이제 김용진의 그 말에서 다시 울려오는것만 같았다. 또한 당조직원이 송복섭이를 찾아가는것을 주저하지 않을뿐아니라 긍정적인 립장에서 신중히 그의 문제를 대하게 되리라는 희망에 점점 더 마음이 가벼워졌다. 당조직원이라는 사람은 제 직함때문에(어떤 검열성원으로 알수 있으니까.) 상대방이 위압을 당하여 실무적으로 대해줄가봐 걱정한듯 행정부소장이 아니라 다름아닌 자기를 통하여 알아보고 자기와 같이 송복섭이한테 가려고 작정한것이였다. 리승기는 그 믿음이 우선 고마왔다.

그들의 머리우에 밤의 고요를 흔들며 물황철나무의 애어린 잎사귀들이 조용히 설레고있었다.

김용진이 말했다.

《사실 저… 리선생은 모르시겠지만 전 선생의 사위되는 재업동무와는 비료공장에 함께 있었습니다. 재업동무는 47년에 연구원에 가느라고 외국에 류학을 떠나고 전 그 먼저 중앙에 소환되였습니다. 나이도 지금 33살로서 동갑입니다.》

《그렇습니까. 이거 정말… 반갑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선생을 아주 나이가 드신분으로 생각했댔습니다. 사위의 나이가 그만치 되니 장인되시는분의 나이는 적어도…》

《그렇게 됐습니다. 재업의 처인 제 맏딸은…》

《선생님, 이거 제가 괜히…》

김용진은 당황해서 리승기의 말을 밀막았다. 그는 두 딸을 낳은 전처를 잃지 않으면 안되였던 리승기의 인생곡절을 본의아니게 상기시킨 자신의 부주의를 스스로 힐책하듯 머리를 흔들면서 황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때 말입니다. 재업동문 돌에서 실을 뽑는 선생님의 신기한 발명에 대하여 얘기해줬습니다. 한데 왜놈들이 날 비료하조계에서만 부려먹었으니 어디 무식해서 그걸 알아듣겠더라구요. 그저 카바이드에서 뽑는다는것밖에 몰랐는데 그게 믿어지지 않아 따라다니며 물었지요. 재업동무의 설명을 듣구서야 알게 되였는데…》

보나마나 사위가 뭐라고 했을는지는 뻔하다.

1920년에 도이췰란드학자 헬만이 폴리비닐알콜로 실같은 형태를 뽑은적 있었지만 물에 녹은것이여서 그러다 말았다는것, 그러면서 사위는 장인의 과학적인 공적을 운운하며 포르말린처리, 열처리를 하여 폴리비닐알콜로 물에 녹지 않고 열에 견디는 섬유인 《합성1》호를 발명했다는것을 자랑했을것이다.

누구앞에서나 이런 말을 하던 사위였으니 김용진의 앞에서도 마찬가지였을것이다.

그 순간 사위의 말을 추측해보던 리승기는 지금과 같은 때에 폴리비닐알콜을 위한 초산비닐합성따위를 생각한다는것은 당초에 어리석은 일로 여겨졌다. 그래서 리승기는 차라리 이제 김용진이 전쟁에 필요한 반화학대책이나 절연물연구를 권고하거나 지시한다면 마음이 편하고 용기가 생길것 같았다.

잠시 별이 많은 하늘을 쳐다보던 김용진이 지금껏 해오던 생각의 연장에서 깨여나지 못하는듯 불쑥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흥남지구에 있던 기술자, 학자들은 대체로 우리가 명단을 갖구있습니다. 이제 송복섭부소장동무한테서두 더 확인하겠지만… 한데 말입니다. 리선생은 서울에서 연구를 계속해보겠다고 섬유강좌를 꾸리다말지 않았습니까. 그때 거기에 관여했던 사람들중에 혹시 누가 또?…》

리승기는 처음 한순간 영문을 몰라 얼떠름해서 있다가 너무나 아득히 멀어졌던 일을 더듬는듯 떠듬거리며 말했다.

《한사람… 있습니다. 림창직이라구… 일본에서 고학으로 고공을 나왔는데… 내가 〈합성1〉호를 내놓았다는 말을 듣고 달려와 〈나도 조선사람입니다. 나를 중간공장에서 일하게 해주십시오.〉하더니… 해방후엔 또 그 섬유강좌에 와서 실험조수를 했습니다.… 만능이여서 공정에도 밝고 실험에도 재간이 있습니다.》

《한데 그 사람이 북반부에 들어왔단 말이지요? 지금 어디 있는지 모릅니까?》

리승기는 또다시 떠듬거렸다.

《글쎄… 서울이 해방되였을 때… 의용군에 입대한것만은 사실인데…》

《그렇습니까? 림창직이라… 림창직…》

김용진은 깊이 새겨두려는듯 천천히 곱씹었다. 그러다가 활기에 차서 부르짖듯이 말하는것이였다.

《자, 이젠 저기 송선생네 집으로 들어가봅시다.》

그는 조금도 머밋거리는 기색이 없었다. 리승기는 불쑥 이런 의문이 들었다.

(당조직원은 왜 흥남의 화학공장기술문건얘기는 한마디두 꺼내지 않을가? 오정해의 말대로 해명되였을가. 그렇다면 우선 그 얘기부터 해줄것인데. 아마 지금 확인중에 있는 모양이지.)

리승기는 이제껏 그와 얘기를 나누면서 가장 중요한걸 빠쳐놓은것만 같았다. 허나 언제 그걸 더 물을새가 없었다. 두사람은 송복섭이네 집 문전에 와닿은것이다.

전시에 바삐 지은 반토굴집이지만 두칸으로서 부엌도 그리 좁지 않았다.

키가 큰 송복섭이 구들아래목에 베개를 둘씩이나 고인채 이불속에 반좌위로 누워있었다.

송복섭의 안해가 그들을 맞아들였다. 몸가짐이 단정한 중키의 녀인은 수심어린 얼굴에 애써 미소를 띠우고있었다. 난산의 고통에 허덕이던 저때문에 결국 남편이 곡절을 겪게 되였다고 쩍하면 두눈에 물기를 담더니 지금은 또 남편의 병때문에 얼굴에 근심이 어린것이였다.

송복섭이 누운 자리에서 웃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김용진이 얼른 그의 몸을 잡아주면서 다시 그를 자리에 눕히였다. 그곁에 김용진이 먼저 올방자를 틀고앉았다. 그는 자기를 소개하고나서 이렇게 말했다.

《리선생과 같이 왔습니다.… 병원에다 얘기했으니 큰 병원에 가기 전에 여기서두 치료를 잘 받아야겠습니다.… 가만, 저 처녀동문 누굽니까?》

웃방에서 한 처녀가 일어서서 아래방을 향해 다소곳이 머리숙여 인사를 했다.

《리금진이라구 불러주십시오.》

스물두셋쯤 나보이는 처녀는 풍만한 몸매에 균형이 잡혔으며 억실억실한 눈이 전등빛에 유난히 정기를 뿜었다. 김용진이 자꾸 앉으라 하자 리금진은 젊은 안주인의 곁에 앉았다. 처녀는 한옆으로 뉘인 두 무릎우에 양복치마자락을 쓸어내리며 정숙한 앉은태를 흐트리지 않은채 이마를 감추듯 고개를 숙이였다. 그러다가 인츰 생각이 난듯 안주인한테서 포대기에 싸인 아기를 끄당겨 제가 받아안는것이였다. 이 말없는 동작에서 젊은 안주인은 누워있는 남편을 대신하여 제가 손님들을 대해줘야 한다는것을 채심한듯 다시 아래방에 내려와 남편의 발치에 앉았다.

그는 뜻밖에 들이닥친 큰 손님이라 할수 있는 두사람의 저녁방문을 당황과 불안속에서 맞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서 무슨 말이든 꺼내려고 서두르던 참이라 지금 리금진을 소개하게 된것을 무척 다행으로 여기는듯싶었다.

《회령처녀인데 전쟁직전부터 여기 화학전문학교 교원으로 있습니다. 저녁마다 찾아오는데 모를게 있으면 애아버지한테 묻군 합니다. 그리구 몸이 좀 낫게 되면 학교에 와서 초빙강의도 해달라는겁니다. 저렇게 초약을 갖다 달여주면서… 애아버지에 대한 지성이 보통 아닙니다.》

그러자 웃방에서 처녀가 약의 효과를 강조하면서 변명하듯이 말했다.

《우리 아버진 동네의원이신데 저 황백피가 퍽 좋다구 했습니다. 이 고장 의원들두 그렇다구 하더군요.》

금진은 쌔근쌔근 잠이 든 아기를 내려다보듯 다시금 고개를 숙이며 더 말이 없었다.

김용진이 머리를 끄덕이며 감심한 표정을 띠우더니 리승기를 얼핏 건너다보고는 송복섭에게 말했다.

《리승기선생과도 좀 얘기가 있었지만, 송선생… 흥남에서 우리 손으루 초산과 알콜을 합성하지 않았습니까. 이게 우리 나라 화학공업의 기초나 다름없습니다.… 그때의 기술진이 지금 군대에두 있구 사방에 흩어져있으니… 대체루 여기 많이 모이긴 했으나 아직두 무슨 조직적대책이 필요한것 같아 좀 토론을 해보자구 합니다. 한데 참, 송선생은 자리에 누워서두 너무 무리하는것 같습니다. 듣자니 연구문헌들을 정리한다는데… 아주머니?…》

김용진이 송복섭의 안해를 묻는듯이 바라보았다. 그제사 녀인은 딱한 표정을 띠우며 말했다.

《애아버진 말려두 소용이 없습니다. 이불을 등에 고이고서… 빼앗아 감추어두 자꾸 달라구만 하니… 이자두 그걸 쓰다가 베개밑에…》

김용진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인주시오. 내가 빼앗아내야겠습니다.》

《아무것두 아닙니다.》

송복섭이 안해를 원망에 찬 눈길로 바라본다. 오히려 그 눈빛에 힘을 얻은듯 녀인은 제꺽 베개밑에 손을 넣어 두툼한 종이뭉테기를 꺼냈다.

반좌위로 누운 송복섭은 눈을 감은채 조용히 말했다.

《그저 초산공업화때 있었던것들을 한번 적어본겁니다.》

그 종이장들을 몇장 번져보던 김용진이 리승기한테 머리를 돌리였다.

《이게 리선생한테 참고가 되지 않겠습니까?》

《장차로는 그렇게 되구말구요.》

리승기는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다시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김용진이 물론 그 분실된 공장기술문건얘기를 함부로 꺼낼수는 없겠으나 애당초 그런건 관심밖인듯 한 흔연한 태도이다.

리승기는 연구문헌을 받아 손에서 번져보았다.

설명문보다 반응식과 구조식, 공정도해가 더 많았다. 리승기가 그것을 보는데 호흡기환자들의 그 특유한 갈린 음성으로 송복섭이 말했다.

《리선생은 앞으로 〈합성1〉호를 하실려면 초산비닐부터 합성해야겠는데 어떤 방법으로… 기상법인지, 액상법인지…》

송복섭의 얼굴에 떠오르는 창백한 미소를 바라보며 리승기는 급히 말했다.

《그건 후에 토론해보자우. 천천히… 우선 몸부터 돌보게. 군수과제두 이것저것 지도해준다더니 누워서 그것까지 생각하니, 참.》

리승기는 송복섭이를 위안해주고싶은데 그가 도리여 이런 상태에서도 자기를 위해주려는것이다. 그러자 자신의 연구보문철때문에 그를 원망했던 자기자신이 그지없이 옹졸해보이였다.

리승기는 자기한테 향하여진 송복섭의 마음이 고맙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였다. 그간 많은 정신적고충을 겪었건만 그전날의 송복섭은 아닌것이다. 그한테는 아무런 고까운 생각도 없는게 분명하다. 새로운 혐의가 들이닥친다 해도 그가 끄떡도 안할것 같았다. 그가 무척 굳세여졌으며 따라서 리승기는 그한테서 무엇인가 배워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송복섭은 수건으로 입을 막고 한참이나 기침을 하였다. 한참 그러고나니 그의 얼굴은 벌겋게 상혈이 되였다. 남편의 얼굴을 근심스레 지켜보던 안해는 별다른 증상이 보이지 않자 안도의 숨을 가만히 내쉬는것이였다. 그러던 그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부랴부랴 웃방으로 올라갔다가 손에 길쭉한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그것을 보는 송복섭은 병색이 짙은 창백한 얼굴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였다. 뒤이어 안해를 몹시 나무람하는 눈길로 바라보다가 아예 베개우에 머리를 던지며 눈을 감고마는것이였다.

리승기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 편지속지를 제가 먼저 손에 들게 되였으나 읽을념을 못하고 그저 쥐고만 있었다. 송복섭의 안해가 말했다.

《이 편지를 쓴 청년이 우리 애아버지를 도와 초산을 합성하던 사람입니다.… 종합대학에 가서 공부하다가 졸업반에서 군대에 나갔습니다. 군대에서 제앞으루 편지왔는데 한번 읽어보십시오.》

리승기가 그 편지를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하는데 김용진이 머리를 끄덕여보였다.

《리선생이 먼저 읽어보시오.》

리승기는 안경을 벗어 왼손에 든채 바른손에 든 편지장을 눈앞에 가져갔다. 그는 점차 주위의 시선들을 잊고 글줄을 더듬어갔다.

《존경하는 아주머니, 애기이름도 몰라 그저 여전히 이렇게만 부릅니다. 용서하십시오.

…이것이 청수에 보내는 저의 세번째 편지입니다. 내가 송선생의 주소를 알게 되여 송선생한테 처음으로 편지를 썼을 때 나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게다가 이날은 평양하늘을 지키는 우리 고사포부대에서 적기를 석대씩이나 떨궜으니 더더욱 기분이 떴지요. 나는 송선생님의 조수로서 일하던 평화시절의 우리 실험실을 회상했고 대학에 보내면서 나한테 선생이 하던 당부도 생각하면서 이제 전쟁이 승리하면 대학을 마저 마치고 다시 선생님에게로 달려가겠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선생님한테서 과연 어떤 회답이 날아왔겠습니까. 송선생은 편지에 쓰기를 인제부터 나를 잊어달라, 나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것을 생각지 말아달라, 나는 조국과 인민앞에 엄중한 죄를 지은 사람이니 나를 이제부터 스승으로 부르지 말아달라, 나같은 스승아닌 스승으로 해서 자네한테도 별로 좋을 일이 없을것이니 그리 알고 영영 나를 잊어달라…고

청천벽력같은 편지였어요. 하지만 나는 당장 편지를 썼습니다.

선생님은 나약하고 고지식한것이 탈이다, 과오를 범했으면 고치면 되지 않는가, 선생이 반역자이겠는가, 반동분자이겠는가, 선생은 우리 나라 화학공업에 발동을 건 애국자이며 장차 주추돌이 될 그럴분인데 이 무슨 일인가, 설사 과오를 범했다 해도 나는 그것이 무의식적인것이며 절대로 의식적인것은 아니라고 본다, 나는 나자신보다도 선생을 더 믿는데 용감하게, 견결하게 시련을 뚫고 나가달라, 이렇게 썼습니다. 그런데 회답이 없습니다. 안타까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아주머니에게 편지를 쓰는것입니다.

아주머니는 곁에서 어떻게 보살폈기에 나의 사랑하는 스승을 이 지경의 정신상태에 빠지게 놔두었단 말입니까. 그는 아주머니의 남편이기 전에 전선으로 달려나온 우리 화학계 초학도들의 스승입니다. 무엇보다도 송선생의 육체적인 병이 도지지 않았는지 걱정됩니다. 그 어떤 명약보다 더 나은것은 사랑하는 안해가 남편에게 바치는 사상정신적인 고무라고 말들 하던데 나도 감히 그것을 말하며 아주머니에게 권고하는바입니다.

아주머니! 송선생은 두번째 편지부터 회답이 없는데 제발 아주머니라도 회답을 해주시오. 자초지종을 좀 구체적으로 적어보내주십시오. 만약 아주머니의 편지를 받게 되면 나는 그날 꼭 미국놈의 비행기를 명중으로 쏴떨굴 용기가 더 생길것만 같습니다. 정말입니다.

선생님과 아주머니의 결혼식에서 내가 부르던 노래를 여기서 상기시켜드립니다.


장하고나 우리들은 힘찬 근로자

새 세기를 창조하는 승리의 주인

동무들아 이 기세로 굳게 뭉치여

…》


김용진에게 편지장을 넘겨주는 리승기의 손가락은 가늘게 떨리였다.

김용진이는 리승기가 읽을 때 곁에서 얼핏얼핏 들여다보고있더니 이번에는 제가 편지를 받아들고는 너무 빨리 읽는다싶게 단숨에 훑어본다. 그리고나서도 별로 아무 말이 없었다.

리승기는 안경알을 통해 비쳐드는 김용진의 덤덤한 표정을 놀랍게 바라보게 되였다. 이 편지가 김용진한테 아무런 반응도 불러일으키지 못한것 같았다.… 리승기라는 나라는 사람은 학문을 탐구하는 사람이기에 선후배간의 이 뜨거운 관계를 더 특별하게 흥분해서 생각하는걸가. 아니, 이건 그 어데서도 찾아볼수 없었던 그런것이다. 스승에 대한 제자의 불같은 사랑이며 의리깊은 존경심이다. 그런데 어째서 김용진은? 아마 저 사람은 정치인이기때문일것이다. 그러니 그가 함부로 감정에 뛰놀지 않는것은 자명한 리치이다. 응당 그래야만 할것이다. 그래도 리승기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도 뜻밖이리만큼 확고한 결단성을 품고 송복섭의 뼈대가 우뚝한 코잔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편지를 쓴 그 사람을 알구싶네.》

그 목소리는 어쩐지 안타깝게 울리였다.

송복섭이 그제야 지꿎게 감고있던 눈을 뜨며 천천히 대꾸를 하였다.

《열혈청년입니다. 미래가 보이는 화학자… 전쟁전에 이미 동년배대학생들보다 더 당당하게 자란 동무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그때 가서는 리선생의 믿음직한 방조자가 될수 있습니다.》

송복섭의 마감말에서 울리는 그 미묘한 의미만은 김용진이 놓치지 않고 또 그것을 용서치 않으리라 믿었던 리승기가 김용진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김용진이 이렇게 말할줄이야.

《이 편지를 두고 구태여 말한다면 (그의 손에는 여전히 편지장이 쥐여져있었다.) 흥분과 열정은 좋으나… 현실을 랭혹하게 판단하는 리성적인 능력이 부족해뵈지 않습니까?》

리승기는 더욱 커다란 놀라움에 휩싸였다.

(그러니 나로서는 처음 보는 이 새로운것, 선후배간의 뜨거운 정이 저 사람한테는 리성적인 판단의 부족으로 보인단 말이지.)

그리하여 리승기는 김용진에게 뭐라고 대답을 할수가 없었다. 리승기의 순탄치 않은 심사는 다른 표현으로 송복섭한테 향해졌다.

《여보게 송군, 아니 송동무… 회답을 써보내야 하지 않겠나.… 스승에 대한 의리를 제자가 지키는것보다두 제자에 대한 의리를 스승이 지키기가 더 어려운 때가 있는 법이 아닌가. 제자의 믿음을 저버리지 말구 편지를 쓰게.》

리승기는 여태 이런 류의 말을 별로 해본적이 없었다. 과묵한 성미라 언제나 한두마디에 자기의 감정과 의사를 담군 하던 그가 이 절절한 편지를 보고는 도무지 마음을 감당해낼수가 없었던것이다.

그때 리금진이 초약 달인 물을 그릇에 담아들고 부엌에서 올라왔다.

《선생님, 약입니다. 단숨에 들이켜자셔야 합니다.》

처녀의 목소리에는 한껏 걱정이 어려있다.

눈을 감은채 쓴 약물을 마시고난 송복섭은 머리맡에 놓인 랭수사발을 들어 맹물로 입가심을 하여 목구멍에 넘기였다. 그의 목에서 울대뼈가 솟았다가 내리는것을 지켜보듯 거기서 눈을 떼지 않던 김용진이 길죽길죽한 손가락의 뼈가 앙상한 송복섭의 손을 지그시 잡더니 노전우에서 쳐들어올렸다.

《송선생… 부소장동무, 왜 앞으루, 앞으루 하면서 다 남이 할것처럼 말합니까? 바루 이렇게 신심이 없는 송선생을 당신의 그 제자가 비판하구있는겁니다. 그 점이 더 랭철하게 되여있지 못해두 여하간 이렇게 맥을 놓은 자기의 스승을 충분히 상상하구있는것만은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아주 정당합니다. 송선생, 기운을 내시오, 병은 육체보다 정신에 먼저 생긴다는 말두 있는데…》

송복섭은 눈을 감은채 한가닥의 미소를 띠웠는데 그가 가슴노리까지 끌어올린 청포빛누비이불의 새하얀 잇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였다. 그는 애써 진정하듯 가빠지는 숨을 가라앉히고나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리선생, 리선생의 연구보문때문에 선생까지… 제가 나가서 꼭 그걸 찾아야겠는데…》

그러자 김용진이 말했다.

《그런 지나간 일은 걱정마시오. 리선생이 되살려놓았구 또 그 원본을 찾는 대책두 다시 취해서 흥남지구에 과업을 주었으니…》

이때 리승기는 이상한 감촉이 들었다. 서필규가 새로운 자료라고 하던 그 분실된 기술문건문제까지 김용진이 알고있으면서도 일부러 일언반구 비치지 않는것만 같았다.

리승기는 송복섭한테 말하였다.

《그런 생각을 말구 몸을 안정시키게, 지금 당장 그건 소용두 없으니.》

송복섭이 리승기와 김용진의 얼굴을 두루 바라보며 말했다.

《하긴 그렇기두 합니다.… 한데 장차로 거기 필요한 문헌조사를 할 책들은 우리한테 있습니다. 지금 당장 여기서 하는 다른 연구사업두 그 책들이 필요한데…》

리승기보다 김용진이 급히 물었다.

《그게 어디에 있습니까?》

《흥남에… 우리 행정부소장동무랑 같이 후퇴의 마지막시간까지 남아서 여기저기 방공호와 지하실에 분산은페시켜둔 10만권의 장서가 있습니다.》

《10만권?》

리승기는 퍼그나 놀랐다. 도서가 많다는 말은 들었어도 그것이 10만권이나 되다니? 리승기는 대번에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책이 많다는것보다 더 반갑고 즐거운 일이 없으며 지금 당장 볼수는 없어도 그것이면 과학자라고 할 때 인생의 막바지에서도 삶이 얼마든지 활기로와질수 있으니 책 10만권이라니?

리승기의 기분이 송복섭한테 옮겨진듯 송복섭은 베개에서 머리를 들고 팔을 짚으며 일어나앉았다.

이제야 그는 자기들이 해놓은 일을 긍지에 차서 되새겨보려는듯 《바루 그 책들이 우리 손으로 초산과 알콜을 합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지요.》하고 저으기 흥분에 겨워 말하는것이였다.

방안의 분위기가 밝아지는 이때에 이르러 김용진은 한손으로 턱을 천천히 문지르더니 입을 여는것이였다.

《그런데 잠간… 제 한가지 사죄할 일이 있습니다.》

리승기와 송복섭은 그제야 이 방안에 앉은 김용진을 처음 알아본듯 일시에 그한테 의아한 눈길을 보내였다.

김용진은 그때까지 여전히 손에 쥐고있던 그 편지장을 흔들었다.

《이 편지를 쓴 김용석은… 저의 동생입니다.》

리승기는 얼떠름해졌다. 놀랐을 때 늘 그런것처럼 안경부터 벗어들었다. 머리속에 떠오른 의문이나 생각에 더 주의를 집중시키는 버릇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송복섭은 김용진을 잠시 지켜보다가 말을 하였다.

《어쩐지 전 그런 짐작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알리는것 같았지요.… 모색이 하도 비슷해서 키까지 닮구… 당중앙위원회에서 사업한다더니…》

《그렇습니다. 내가 일찍 흥남을 떠나다나니 송선생은 날 모르실수 있지만 난 용석의 편지를 통해 선생에 대해 잘 알게 되였습니다. 선생과는 전화로 한번 만난 일이 있지요.》

《저를요? 그렇다면 내가 왜 기억을 못할가요?》

《용석의 형으로가 아니라 그저 사업상으로… 그러니 기억에 없을수 있지요.… 참, 동생을 극진히 키워주는분을 일부러 찾아 인사를 해야겠으나 어디 그렇게 되더라구요.》

곁에서 들으면서 리승기로서는 의문스러운것이 왜 김용진이 그 말을 여기에 오자바람으로 터놓지 않았는가 하는것이였다.

허나 생각은 빨리도 그 원인에로 뻗어갔다.

일군으로서 현실을 더 객관적으로 보고 판단하기 위해서일수 있으며 또 그보다는 처음부터 김용석의 형으로 나타난다면 송복섭은 사랑하는 제자인 김용석 당자앞에서처럼 제 과오의 엄중성, 그 죄의식만 더 크게 생각할것이다.

그것을 우려해서 적당한 시간을 보아온게 아닐가.

거기에는 그 어떤 용의주도한 타산보다도 송복섭이라는 한 인간에 대한 김용진의 진심과 사랑이 더 진하게 흘러있는듯싶었다.

저녁시간이 퍼그나 흘렀다. 환자를 흥분으로 너무 지나치게 만들면서 오래 앉아있을수는 없었다.

김용진이 나오면서 어둠속 바깥에 서서 송복섭의 안해에게 말했다.

《인차 큰 병원에 후송하도록 하겠습니다.… 곁에서 아주머니의 수고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신심과 고무를 주십시오. 자, 그럼 우린…》

리승기와 나란히 큰길에 나섰을 때 김용진은 이렇게 말했다.

《좋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시간이 모자라구 늦어질 때가 많다구 했지요. 아무튼 당장 래일로 올라가던 길에 신의주에 들려 국제의료단에 후송하도록 시급한 대책을 취하겠습니다.…

그건 문제가 아닌데 이제 평양에 가서 뭐라구 보고를 드려야겠는지 참…》

그러던 김용진이 리승기의 팔을 잡고 조용히 속삭이듯 말하였다.

《화학공장기술문건얘기는 아직 본인한테 하지 말도록 했습니다. 연구소당조직에 말입니다. 그 문건이 송선생의 손에서 적들한테 넘어갈수 없습니다. 월남도주한 공장서무계장놈의 작간이라는게 옳을겁니다. 하여튼 내 걸음이 바쁘게 됐습니다. 모든걸 빨리 대책취해야겠는데, 빨리 말입니다.》

병치료라는것보다 다른 의미로 울리는 이 대책이라는 말이 더 절절히 울리는것만 같았다.

김용진과 헤여진 리승기는 하늘가로 향하듯이 경사져올라간 수레길을 천천히 따라 걸음을 옮겨갔다.

밤하늘에는 은하수가 한결 훤하게 빛나면서 휘우듬하니 흘러있었다. 내려올 때처럼 주위는 그렇게 캄캄하지 않았다. 하늘도, 우중충한 산발도, 발앞에 다가오는 길바닥도 한결 밝아진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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