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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회

제 1 편

제 1 장

3


그날 오후였다.

돌개울을 끼고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수레길을 따라 한대의 《윌리스》가 굴러오다가 집앞에서 급정거를 하였다. 차에서 키가 작달막한 공장지배인이 내리더니 리승기네 집마당으로 들어왔다.

차옆에는 허우대가 큰 서필규부상이 길에 서서 위엄있게 사방을 두릿거리고있었다.

지배인과 함께 마당밖으로 나간 리승기는 서필규가 입은 해빛에 번들거리는 그 가죽잠바에 먼저 눈이 갔다.

서필규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그새 편안하셨소? 길을 질러 이쪽으로 내려오다가 여기가 박사선생네 집이라고 해서… 바빠서 들어갈새는 없구.》

세번째로 보게 되는 서필규의 그 가죽잠바, 역시 세번째로 만나는 서필규였다. 번들거리는 가죽잠바에서는 여전히 랭기와 위엄기가 풍기는것만 같았다. 리승기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벌써 여름철에 들어서는 때인데 왜 아직 그것을 벗지 않을가. 하긴 쏘련의 공민전쟁시기 정치위원들이 많이 입었다는 가죽잠바는 일종의 정치적방탄복으로도 되였다고 그자신이 말했다지 않는가. 지금은 어깨에 걸치기만 한 가죽잠바, 그는 어느때나 그것이 몸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려는듯 갈라진 앞자락을 각기 량손으로 붙잡고있었다.

물론 리승기가 함흥에서 70리 떨어진 연구소소재지에서 서필규를 처음 만났을 때에는 그가 가죽잠바를 어깨에 걸치기만 한것이 아니고 입어도 단단히 입으려는듯 허리에 혁띠까지 매였으며 거기에는 권총이 혁띠를 얽어놓은 자물쇠처럼 매달려있었다.

서울에서 들어온지 두달밖에 안되던 리승기는 그때만 해도 전략적인 일시적후퇴라는 말이 담는 준엄성을 미처 리해하지 못했으며 그저 산골짜기에 한 보름동안 앉아있노라면 후퇴니 소개니 하는것도 다 끝나리라고 믿었었다. 그래서 어느 농가의 웃방이나 굴속에 앉아서 해방후에 북반부에서 우리 힘으로 합성했다는(그것은 참 희한한 일이다!) 초산과 알콜의 기술문헌이며 자기의 연구보문철을 펴놓고 앞으로의 중간공장구상까지 해볼 작정을 했었다.

박사의 이 순진한 생각에 결정적이고도 운명적인 조언을 준 사람은 려경구소장이였으니 그는 리승기한테 사태의 엄중성을 납득시키면서 누가 누구를 하는 이 판가리에서 학자가 갈길은 따로 없다고 엄숙히 말했던것이다.

그때 리승기 자기가 품었던 그런 생각을 서필규가 알수는 없었을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꼭 제 속을 꿰뚫어보는듯싶어 리승기는 일종의 전률이 등골을 식히는것을 느꼈었다. 그것은 순전히 서필규가 입은 번들거리는 그 가죽잠바의 랭기때문이였던것 같다.

불안한 밤, 불안한 새벽…

산업성 전권대표인 서필규는 못미더운 눈길로 리승기를 힐끔 쳐다보고는 열린 문으로 들여다보이는 구들에서 아직 자고있는 아이들을 보고나서 말했었다.

《제일 큰 애가 열두살이라지요? 그래 리선생은 저렇게 밤알같은 다섯아이를 데리구 또 부인은 몹시 무거운 몸인데 가내겠습니까?》

《가야지요.》

그때에 와서는 리승기도 명백히 결심을 한 뒤였다.

서필규가 려경구를 보고 말했다.

《로약자들을 어디 가까운 골짜기들에, 외딴집이라든지 그러루한데 남기구 가야겠는데 리선생네두 거기 가는게 어떻겠습니까?》

려경구가 대답없이 리승기한테 눈길을 보냈다.

리승기는 전보다 더 확고히 말했다.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라두 가야지요.》

《아니 선생두 참, 남의 짐이 될건 생각지 않구요?》

리승기는 그만 말문이 막혔었다. 려경구가 그를 구원해주었다.

《그건 념려마시오. 가족대렬두 짜놓구 또 가다가 먹을 량식은 도당부에서 받은 증명서로, 하여튼 서로 협력해서.》

《말은 쉬운데. 그러지 않아도 연구소후퇴정형이 걱정되여 들렸는데 아직두 이러구있으니… 리선생두 정 가려면 혼자서 떠나던지.》

그러면서 서필규는 가죽잠바의 옆구리에 매달린 권총을 툭툭 쳐보이며 말했다.

《난 황초령계선방어전투에 참가하게 되오.》

그때 그가 갖고있던 책에 호기심이 나서 리승기는 슬그머니 들여다보았다. 겉표지에 내리체로 쓴 《지하주당위원회》라는 제목을 보았다. 제목의 뜻조차 알수 없었다.

서필규는 그 책을 내들어흔들다가 말했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준엄한 시련을 어떻게 이겨냈는가를 보여주는 훌륭한 교과서지요. 쏘베트애국자들이 지하당을 꾸리고 파쑈강점자들과 얼마나 견결히 싸웠는가 하는 이 책이야말로 오늘의 현정세하에서…》

서필규는 이미 리승기가 아니라 려경구를 보면서 말하고있었다.

리승기는 두사람을 번갈아보았다. 쏘베트니, 지하당이니 하는 말들에 그저 어리둥절할뿐이였다.…

그때 서필규와 헤여져서 후퇴의 대오와 함께 갖은 고생을 다하며 들어왔던 리승기는 이곳 청수에서 당중앙위원회 3차전원회의문헌토의때 두번째로 그를 만나고 오늘이 세번째인것이다.

서필규한테는 두툼한 입술을 삐주름히 내밀며 미소아닌 미소를 띠우는 새로운 표정이 생긴것만 같다.

첫번째 만났을 때는 초조와 불안, 극단적인 의심, 그것을 가리우는 무자비하고도 랭철한 의지라면 두번째로 이곳 청수에서 만났을 때는 권력의 시위와 복수의 감정이 뒤섞인 오만한 표정이였었다.

세번째는 지금 여기서 보게 되는 이상야릇한 미소아닌 미소…

서필규가 리승기를 향해 말을 꺼냈다.

《그래 이젠 자리가 잡혔겠지요?》

그 말은 흡사 몇달전에 있은 두사람사이의 담화를 회상시키려는상 싶다. 그때는 아직 모든것을 미처 모를수 있었지만 지금은 여러모로 정신을 차리고 각성되였으리라고 말하는것만 같았다.

서필규는 우연히 생각난것처럼 리승기한테 말했다.

《참, 흥남에서… 화학공장에서 후퇴시기 분실되였다는 그 귀중한 기술문건이 바로 또 다름아닌 송복섭이를 통해 적들의 손에 넘어갔다는 증거가 나타나구있습니다. 자,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리선생의 연구보문철은 더 계산하지 않더라두 말입니다.》

서필규는 팔을 홱 내저으며 길바닥을 성급히 오가기 시작했다.

리승기는 어지간히 놀란 표정으로 안경알속에서 두눈을 슴뻑이고있었다. 리승기를 흘깃 옆으로 바라보는 서필규의 표정은 지어 흡족한듯싶었다. 그것은 마치 작년 겨울에 내앞에서 하던 당신의 그 청원이 얼마나 어리석은것인지를 이제는 알겠는가고 말하는듯 하다.

리승기도 화학공장기술문건을 알고있었다.

해방직후에 화학공장에서는 복잡한 기술공정과 표준조작법, 생산운영에서 제기되였던 문제들을 공장범위에서 집대성한 과학기술문헌을 만들어놓았었다. 일본놈들이 조선사람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기때문에 해방후 우리 손으로 당장 공장을 돌리기 위해 그것이 절실히 필요했던것이다. 얇은 미농지에 쓴 두툼한 책이 세권이나 되였다. 해방후 5년이 지나 그 책은 이미 적지 않게 의의를 상실했지만 오랜 기간의 경험까지 거기 서술돼있는것만큼 뜻밖의 공정사고나 조작에서 참고가 된것은 물론이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리승만이 흥남에 파견한 《경제시찰단》의 단장인 안가놈도 이 기술문건을 찾아 돌아쳤다.

하지만 그 기술문건이 송복섭이의 손으로 적들한테 넘어갔다는 사실을 리승기는 믿을수가 없었다.

리승기가 미처 정신을 차릴새도 없이 서필규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리승기한테 말했다. 마치 여기서 더 시간을 보낼수 없다는듯…

《하여튼 저녁에 회의에 참가하면 알게 될겝니다. 거기에 꼭 참가하시오. 청수공장과 연구소의 기술자, 기능공들이 모여 전시생산토의도 있겠지만 일련의 사람문제들을 지적해주고 경종을 울리겠습니다.》

《윌리스》차가 부릉거리며 떠나갔다. 리승기는 먼지를 일쿠며 사라지는 차의 뒤모양을 그냥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고있었다.

문득 어째선지 자기의 연구보문철로 해서 송복섭이를 원망하며 그 의리까지 의심하던 제 처사가 다시금 뼈아프게 돌이켜지면서 송복섭이한테 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 어떤 동정과 울분에 차서 부르짖었다.

(여보게, 송복섭이… 그런 일은 없었을테지? 그건 그럴수 없어. 자네가 해방후 북반부에 와서 인민을 위해 해놓은 일 그 모든걸 제스스로 배반하지야 않았겠지?)

송복섭이로 말하면 일본교또대학에서 리승기보다 몇년 후배였다. 해방직후 리승기는 북으로 들어올 용단을 못 내리면서도 (그자신은 조만간에 38도선이 없어질터인데 괜히 북이니, 남이니 왔다갔다하면서 과학연구나 대학설립에서 시간을 랑비할게 없다고도 생각했었다.) 북에서 나온 사람한테 데려가라고 권유해준 사람들중의 한사람이 송복섭이다.

수재형의 학자인 송복섭은 전라도 리리땅의 고향집에 꾹 박혀있다가 어떤 정치리념에 공감해서라기보다 우선 화학의 과학기술토대가 있는 흥남지구에서 과학탐구를 해볼수 있다는 그것에 끌려 주저없이 북반부에 들어왔던것이다.

송복섭은 왜놈들이 비행기합성연료를 목적해서 꾸려놓은 화학공장에서 왜놈들도 해내지 못하고있던 초산합성을 조선사람의 기술로 해내였다.

리승기가 흥남에 와서 제일 기쁜것도 바로 초산을 우리 힘으로 생산한다는 사실이였다. 초산은 자기가 발명한 폴리비닐알콜섬유의 기초물질인것이다.

리승기가 서울에서 흥남으로 왔을 때 제일 반가와한 사람도 송복섭이다.

키가 리승기보다 더 클사한 송복섭이 그 선량하게 생긴 기름한 얼굴에 웃음을 담고 이마우에 내리쏠리는 긴 머리칼을 버릇처럼 자주 한손으로 쓸어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 기쁩니다. 기다렸습니다.》

《그동안 수고많았네. 초산을 합성했다지, 알콜을 합성했다지, 그러니 이제 폴리비닐알콜을 해볼수 있지 않나 말일세.》

《리선생의 〈합성1〉호를 위해 저두 힘껏 함께 나서겠습니다.》

초산은 그동안 많이는 식초로 리용되여왔다. 해방후 우리의 식초로 함흥의 국수집들이 흥성거리고 국수를 먹는 사람들이 그 식초로 하여 더더욱 해방의 감격에 목메였다지 않는가. 식초의 신세를 후에 북반부는 말할것 없고 밀수업자들에 의해 서울을 비롯한 남반부에서도 톡톡히 진것을 리승기도 알고있었다.

《정말 그동안 수고많았네, 많았어.》

리승기는 송복섭의 손을 오래도록 놓지 못했었다.

《리선생, 이제 〈합성1〉호 중간공장을 세우면 나두 힘껏 돕겠습니다.》

그러던 송복섭이였다.

서필규가 물러간지 오래여도 리승기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불현듯 그한테는 왕청같은 의혹이 떠올랐다. 자기처럼 5년동안을 남조선에서 살아보지 못한 송복섭이한테 혹시 미국에 대한 환상이 생겼을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것이였다.

허나 리승기는 설레설레 머리를 저으며 제 생각을 부정하였다.

오히려 이 순간 리승기는 자기도 송복섭이도 똑같이 지금 서있는 이 지점까지 무던히도 험난한 길을 걸어왔으며 또 걷고있다는 생각이 가슴을 저미였다. 아무리해도 그는 여기서 말하는 계급적원칙성과 인간성을 나란히 놓고 생각할수 없었다. 원칙성이란 랭혹성, 무자비성으로만 느껴졌다. 저녁에 회의가 있다는 사실은 그한테 점점 더 큰 의혹만을 안겨주었다.


×


한때 그 2층청사에는 공장실험실과 도서실이 자리잡고있었다. 웃층의 강당에서는 저녁마다 취주악대의 음악에 맞춰 당시에 류행하던 무도회가 벌어지군 했다고 한다.

허나 공장의 대부분 직장들이 소개되여 굴속에 들어가버린 지금에는 그저 한적한 텅 빈 장소로 되고말았다. 이따금 폭격의 위험이 없는 저녁무렵이면 여기서 회의가 열리군 하였다.

바닥이 널마루인 회의실안에는 장의자들이 놓여있었다. 두개의 긴 탁자를 맞붙여놓은 주석단에는 서필규부상과 공장지배인이 앉았다. 주석단의 세 의자중 한 의자는 비여있었다.

리승기한테는 거기에 방하민이 앉아있어야만 할것 같이 느껴졌다. 그는 왜 여기에 없을가? 무슨 일이 벌어져 참석 못하게 되였는지, 아니면 그자신이 이 자리를 피하였는지도 모른다.

리승기는 카바이드로의 굴뚝을 산으로 뽑을데 대한 론의며 기타 다른 기술문제들을 더 적극적으로 도와줄데 대한 토론에는 아무리해도 깊은 주의를 기울일수가 없었다. 서필규의 입에서 이제 분명 다른 말들이 나오리라는 예감에 잡혀 리승기는 두눈을 지그시 내려감은채 앉아있었다. 앞줄의 개별의자에 앉은 그는 눈을 떴다고 해도 기껏해서 발아래를 내려다볼뿐이였다.

오뉴월에도 오한이 나는 사람처럼 여전히 가죽잠바를 어깨에 걸치고 앉은 서필규는 일부러 회의가 지루하게 되도록 내버려두어 참가자들이 졸거나 하품을 하게 될 때에 돌연히 일어나 우뢰와 같은 열변으로 회의의 흐름을 역전시켜 효과를 보려는 사람처럼 잔뜩 시간을 끌기만 하였다.

서필규가 무엇을 부지런히 쓰더니 마침내 머리를 들고 입을 열었다.

《생산문제들은 개별적으로 래일 더 구체적으로 토의합시다. 모인김에 중요하게 강조할 문제가 있습니다. 지난 년말과 금년초에 있은 당중앙위원회 3차전원회의 문헌접수토의과정에 무규률적인 현상들이 없어지고 적지 않게 우리의 대오가 계급적으로 각성된것만은 사실입니다. 한데 이즘에 와선 일부 불건전한 층들속에서 책벌받은자들을 비호한다든가, 관대한 처리와 원칙적인 처벌을 혼돈시하면서 애매하다느니, 과장되였다느니 상부에 신소질이란 말입니다.》

《그게 어떤자들입니까! 여기다 내놓고 폭로합시다!》

누군가 격분에 넘쳐 부르짖었다.

서필규는 허리를 쭉 펴고 장내를 둘러보며 득의만면해서 말했다.

《소부르죠아인테리들은 후퇴시기에도 우리의 대오를 좀먹더니 지금두 우리의 전진을 방해하려고 음으로 양으로 책동하고있습니다. 사회의 간층으로서의 인테리는 마땅히 자기의 처지를 자각해야겠으나 의연히 간고한 투쟁속에서 혁명의 탈락분자로 전락되고있으며 그릇된 부르죠아인도주의로써 대렬내에 복잡성을 조성하고있습니다.… 가만, 송복섭부소장이 보이지 않누만.》

서필규는 이제야 그가 참가 못한것을 알기나 한듯 《앓고있다지.》하고는 차라리 본인이 없는게 잘됐다는듯 말을 계속하였다.

《여러분들두 다 알겠지만 그는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 범한 사상적인 불철저성으로 하여 엄중히 비판되였으나 그가 한 일두 있구 해서 관대히 처리되였습니다. 그러나 보시오. 새로 엄중한 자료가 나타났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그 귀중한 기술문건이 적들한테 넘어간데는 송복섭부소장한테 책임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적기관 복무자들의 입에서 나오고있습니다. 이것이 확인되면 그는 완전히 반동분자나 다름없는것입니다.》

바로 이때였다. 닫기지 않은 뒤문가까이 의자가 없어 앉지 못하고 서있는 몇몇 사람들속에서 돌연히 《사회측에 언권을 청합니다.》하는 높은 목청이 들려왔다.

서필규는 한쪽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가죽잠바를 추슬러올리며 못마땅하게 그쪽을 쏘아보는것이였다.

《정식 회의도 아닌데 언권은 무슨 언권이요? 말하겠으면 말하시오.… 한데 동문 누구요?》

사람들이 뒤돌아보았다. 해쓱한 얼굴빛의 고수머리청년이 배낭을 멘채 문간에서 두세걸음 앞으로 나왔다. 모두들 의아해서 수군거렸다. 서필규가 위엄과 침착성을 잃지 않고 말했다.

《동문 여기사람같지 않은데 어떻게 회의장에 막 들어왔소?》

《이제부턴 여기사람입니다.》

《그런데 오자바람 왜 회의에 참견질이요?》

서필규가 마뜩지 않게 그를 노려본다. 그의 행동과 말이 자기에 대한 항변으로 해석되였기때문이다.

리승기는 이제껏 두눈을 감은채 앉았다가 비로소 처음으로 뒤돌아보았다.

청년은 끈이 어깨를 파고드는 무거운 배낭조차 벗어놓을 경황이 없는지 그냥 지고선채 모자를 두손에 모아 비틀어쥐고 말했다.

《우린 지금… 흥남에서 걸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나한테는 상부의 소환장이 있습니다. 적들의 일시적강점시기 지하조직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재진격하는 인민군대를 따라나갔는데 다리에 부상을 입구 제대되여…》

서필규가 날카롭게 그의 말을 잘랐다.

《인물소개는 필요없소. 차차 알게 될텐데. 여기서 말하자는게 무어요?》

《말하자는것이 많습니다!》

배낭을 멘 청년은 걀람한 몸매의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마주 어성을 높였다. 그가 여태 조용조용 말한것은 길에서 지쳤거나 회의장공기에 위압되여서가 아니라 속에서 꿈틀거리는 무엇을 극력 참느라 애썼기때문인것 같았다.

《제 이름은 오정해라고 부릅니다. 난 방금 거기 주석단에서 말씀한걸 듣구 우리 송복섭선생을 위해 가만있을수가 없단 말입니다.… 송선생이 화학공장에 들어갔던것은 사실입니다.》

《가만! 그렇다면…》

서필규가 갑자기 손을 쳐들어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런데 동문 송복섭동무와 어떤 관계에 있소?》

《저 말입니까?》

《그렇소.》

《저두 연구소성원입니다. 그전에 화학공장에 있을 때부터 송선생의 밑에서 조수 겸 실험공으로서…》

《그러니 스승과 제자라… 사제간이구만. 또 초산을 함께 합성해냈다는 그 소리겠소?! 여보 동무, 그런 소린 백번두 더 들었소.》

그러더니 서필규가 장내를 휘둘러보며 더욱 어성을 높였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들 봅니까? 제자가 스승을 무턱 비호해나서는 이런 현상을 두고 말이요.》

갑자기 어조를 바꾼 서필규는 여유를 갖느라 애쓰면서 말했다.

《동문 아직 지내 어립니다. 이 복잡한 문제를 갈라보기엔 너무 젊단 말이요. 송복섭이와 반동놈인 안가의 관계를 동문 얼마나 알구있다구 그러오? 너무 술덤벙물덤벙하지 마시오.… 그를 동정하구 리해할 사람이 그래 동무밖에 없는줄 아오?― 그는 음성을 높이지 않고 집요하게 물었다.― 동문 무슨 증거로 송복섭부소장동무를 자꾸 옹호해나섭니까?》

그러자 오정해가 장내를 둘러보며 소리치듯 말했다.

《그가 서울서 들어온 안가놈과 격분에 차서 언쟁하는걸 직접 본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용한 송선생의 성미에 무슨 일에 그리두 성냈겠습니까? 안가는 송선생보다 10년이나 우인 선배지만 끝까지 맞서지 못하더랍니다. 거기서 말하는 기술문건은 공장서무계장이란놈이 그 출처를 대주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세한 증거가 이제 확인되리라고 봅니다.》

《그만하시오!》

서필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기가 어디 재판정이요?》

오정해가 말했다.

《재판정이면 차라리 좋겠습니다. 나 말구두 증인들이 올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그러면서 오정해는 좌중을 둘러보며 웨치였다.

《여러분, 제 이 배낭속에 송선생네를 돕자구 부속품과 기구들을 잔뜩 짊어지구 오느라구 했는데… 너무 무거워 더러 버릴 생각까지 하다가두 여길 생각해서 이렇게 왔는데… 여기서는 어쩌구있는겁니까? 네? 난 여러분들께 의견이 많습니다. 여러분들중에는 흥남에서 온분들이 절반이상이라던데… 그래 송복섭선생이 어떤분인지 모른단 말입니까?》

그러면서 오정해는 주먹으로 가슴을 탕 쳤다. 곁에 앉았던 사람들이 일어나서 그의 어깨에서 이때에야 배낭을 벗겨내리였다.

오정해는 홀가분해진 어깨를 움직여보며 말했다.

《나와 같이 흥남에서 오던 기술자동무들 셋이 지금 송선생네 집에 들렸습니다. 나두 이 배낭을 맡기구 다시 가려다가 마침 회의하길래… 여기서 송선생을 두고 또 이러쿵저러쿵 하는것 같아 좀 말했으니 용서해주십시오.》

서필규가 의자등받이에 몸을 제치며 말했다.

《용서는 무슨 용서, 동문 자기 발언에 대해 이제 책임져야 할것이요. 동문 저 혼자만 인간성이 있는듯이 떠따고는데… 젊은 혈기에 그럴수 있지만 너무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못된 송아지 엉치에서 뿔난다더니, 흥.》

방안은 다시 어수선해졌다. 수군거림과 못마땅해하는 부르짖음들이 울리였다.

《조용하시오.》

공장지배인이 진정시키려 했으나 장내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오정해의 출현과 그의 열기띤 목소리로 리승기는 다소 따뜻한 기운에 젖어들다가 그만 서필규의 랭랭하고 매정한 어조에 다시금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드는것만 같았다. 마음을 괴롭히던 의혹이 더욱 짙어졌다. (나의 주위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있는가.) 새삼스레 이런 의문이 뇌리를 쳤다.

회의장을 나선 그는 집을 향해 어둠속을 혼자 걷고있었다.

이길로 당장 송복섭이한테 달려가고싶었다. 한데 가서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물으랴. 리승기는 자기를 극력 자제하면서 좀더 랭정해지려고 애썼다. 아무리해도 송복섭이 안가놈한테 기술문건을 넘겨주었다고는 믿을수가 없었다.

리승기는 험한 수레길에 발을 헛짚어 넘어질번 하였다.

여전히 서필규의 말이 한데 뒤엉켜 검질기게 귀전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인테리는… 의연히 간고한 투쟁속에서 혁명의 탈락분자로 전락되고… 부르죠아인도주의와 소부르죠아적근성으로 대렬내에 복잡성을 조성하고있다.…》

바로 그 목소리의 한마디한마디가 송복섭이를 사정없이 꺼꾸러뜨리는것만 같았다. 송복섭이 이 타격들을 견디여낼수 있을것인가. 리승기는 제몸으로 막을수만 있다면 그러고도싶었으나 문득 놀라며 전률을 느꼈으니 그 무자비성이 바로 자기한테로도 향해져있었기때문이다.

생각할수록 인간성이나 인도주의는 서필규가 하는 말이나 그가 빚어놓은 랭랭한 현실의 그 어디에도 있을상싶지 않았다.

그는 어둠속에서 발걸음을 무겁게 옮겨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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