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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회

제 1 편

제 1 장

1


전선이 남으로 멀어져가고 서울이 다시 해방되자 리승기는 당장에 전쟁이 끝나리라는 기대에 조바심을 쳤었다. 하지만 이젠 그런 희망조차 잃고말았다.

간고한 겨울은 지나갔으나 마음은 때없이 추위를 느끼는듯 싸늘해지였다. 일생토록 체험했던 그 고독감이 다시금 마음속에 찾아들군 하였다.

리승기는 할일없이 깊은 후방에서 어정거리는 자신을 두고 《정신적인 룸펜》이라고 생각하였다. 전쟁은 사정없이 자기를 북변땅 강기슭에 내동댕이친것만 같았다. 학자로서의 방황과 고민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괴롭히는것이였다.

화학공장구내에서 얼마간 떨어진 산기슭에 자그마한 실험실을 꾸려놓기는 하였다. 나지막한 단층집의 뒤에는 방공호도 있었다. 허나 리승기는 거기서 결코 마음의 위안을 찾을수가 없었다.

연구소의 각 연구실들은 청수동골안의 여기저기에 흩어졌는데 거기서는 전선에 필요한 가루된장을 연구한다든가, 동판이나 늄판대신에 종이로 수류탄뢰관을 만든다든가 하는 일이 벌어지고있었다. 리승기는 이것저것 조언도 주었다. 그는 자기가 사람들에게 필요하다고 느끼다가도 불시에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는것이였다. 이른바 학문에서 떠돌이신세로 생각되군 하였다.

리승기는 집에 돌아오면 웃방에 들어박혀 아무래도 분실된것 같은 자기의 《합성1》호 연구보문들을 종이우에 되살리느라고 무진 애를 썼다.

일본에서부터 간수해오면서 남조선의 5년동안에도 고스란히 보관해오던 그 연구보고문헌들은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시작되자 흥남공대 학장한테 주어 대학의 귀중한 과학기술문헌들과 함께 보관하게 하였다. 연구소 소재지에 올라온 리승기는 급기야 생각을 달리하며 연구보문철을 제가 직접 갖고있어야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혀 그것을 찾아 가져다줄것을 송복섭부소장한테 부탁했었다.

리승기의 연구보문철을 흥남공대 학장한테서 받아쥔 송복섭은 안해의 난산때문에 미처 떠나지 못하다가 화학공장의 카바이드교대 직공장한테 그걸 맡겼으나 그 직공장 역시 적들한테 체포되였으며 후에는 불행히도 피살되고말았다. 적들이 패주한 뒤 직공장네 집까지 찾아가 그 뜨락까지 구석구석 파보았으나 연구보문철은 어데서도 나지지 않았다.

흥남에서 청수로 들어온 송복섭은 《사상적동요로 후퇴를 하지 않았다.》고 무섭게 비판을 받았으며 요즘은 일본고학시절에 얻은 병이 도져 거의나 집에 누워있는 형편이였다.

처음에는 송복섭이 학자로서 그리고 후배로서의 의리를 지키지 않았다고 그를 마음속깊이 원망하고 나무람하던 리승기는 그의 정치적과오가 엄중해지자 급기야 그를 심심히 동정하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는 그에게 그것을 부탁한 제한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 리승기는 자기의 연구보문들을 빨리 재생시켜놓는것이 한 학자의 정치적운명과 육체적생명을 다같이 구원하는 일인듯이 여겨지면서 이 간단치 않은 일을 시작했고 시간을 다투며 여기에 열중하는것이였다.

그는 안경을 벗어 앉은뱅이책상 한귀에 놓고는 굵은 중국제 대포만년필로 열심히 끄적거렸다. 그러다간 고개를 쳐들고 기억을 더듬는듯 뿌연 흙벽을 한참이나 바라보군 하였다. 자신이 오랜 세월 고심참담해서 이루어놓은것으로서 되살리기가 막막하지는 않다 해도 헐치 않은 일이였다. 실험표에 적어야 할 수치들은 거의나 공백으로 남겨야만 하였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이 전쟁중에 당장 필요치도 않은 일이지만 한 인간을 구원하는데 어떤 도움이 될가 하는 막연한 기대에 연구보문을 재생시키느라 애쓰는것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학자로서의 체면과 본능이랄가 아무튼 리승기는 연구보문재생에 몰두하다가는 울적한 심사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무슨 실험조작을 벌려놓고싶어졌다. 군용전화선피복에 필요한 에나멜수지를 만들어내고싶은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리승기는 응용화학자였다. 따라서 그는 지나온 나날에도 리론화학자들처럼 남의 발명과 연구들을 묶어 리론적으로 분석하고 체계화하는 책의 집필에는 그리 큰 흥미가 없었던것이니 그의 사색과 흥분, 탐구의 열정은 눈앞에서 부글부글 끓는 액체나 비커속에서 서서히 굳어져 결정분말을 이루는 새로운 물질을 관찰하는 산 실험과정자체에 있었다.

그는 청수동골안에 자리잡은 이 기와집의 뒤뜰에 쇠가마를 걸고 또 한쪽에는 풍로우에 남비를 올려놓았다. 그 양은남비로 말하면 올망졸망한 다섯아이와 만삭이 된 안해를 데리고 간고한 후퇴의 길에서 짜장 길동무처럼 되여온 물건이였다. 남비를 버리자고 했으나 안해는 한사코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 작년 7월에 서울에서 흥남으로 온 후에 안해가 두달동안 있으면서 흥남농민시장에서 새살림의 상징처럼, 기념처럼 산것이여서 그런가 했는데 실지 길을 오면서 보니 그것은 가마로도 되고 그릇으로, 점심곽으로, 물을 떠먹는 고뿌로도 되였다. 그것을 버리지 않은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기게 되였다.

그 양은남비가 지금은 지금대로 제격인것이다.

리승기는 풍로우에 올려놓은 남비에 무엇을 넣고 자꾸 끓이고 랭각시켜보는것이였다.

리승기는 공장실험실에서 주어온 헌 고무앞치마를 앞에 두르고 일찌기 화학사의 려명기를 형편없이 우회시켜버린 그 련금술자들처럼 분주히 쇠가마에서 남비에로, 남비에서 쇠가마에로 오가며 나무박죽으로 가마속을 휘저어놓는가 하면 사이다병의 뿌연 액체를 줄줄이 부어넣기도 했다.

어쨌든 《합성1》호의 연구보문들을 되살리느라 머리를 쥐여짜는것보다는 한결 쉬웠다. 그리고 탐구의 공백으로 하여 괴롭던 마음을 위안하고 안착되지 않는 어수선한 시간들을 메꾸는 어느 정도의 열정과 흥분으로 되는 이보다 더 맞춤한 일이 어디에 있으랴. 더구나 전선에서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있는 이때에 에나멜과 같은 절연물생산은 군사통신에 절실히 필요한것이였다.

해방후 5년동안에 자기의 운명에 그토록 곡절을 가져온 미국놈들을 등지고 후퇴의 길에 오른 리승기였다. 5년동안에 자기의 과학연구같은것은 말할것도 없고 서울공과대학청사를 미군히스테리병원으로 만들어버린 미국놈들이였다.

미국놈의 주구인 리승만은 나중에 대학청사를 괴뢰군 사관학교로 빼앗으려고까지 하였었다. 그러한 미국놈들이 북반부지역까지 타고앉으려고 전쟁을 더욱 확대시키고있으니 학자로서 결코 가만히 앉아있을수는 없는것이였다.

리승기는 가마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시커먼 용액을 쇠국자로 조심히 떠서 옹배기그릇안에 부어넣고는 무릎을 꺾고앉아 서서히 식어가는 그것을 들여다보고있었다.

그는 안해가 뒤뜰로 난 부엌문을 열고 다정하게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점심을 자셔요!》

리승기가 아무 대답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자 분이는 약간 짜증을 냈는데 거기에도 변함없는 사랑의 정이 푹 배여있는듯싶었다.

《아니, 언제까지 그러구 앉아있겠어요? 빨리 식기 전에 들어와 드세요.》

그래도 리승기는 옹배기속만 들여다보며 말했다.

《제발 조금만 가만있구려… 헌데 점심이라니? 내 아까 점심을 먹은것 같은데.》

분이는 남편의 등뒤에 대고서 《아침을 늦게 자시더니 그만 외꼈군요. 아이참, 아침에는 조밥을 자셨구 지금은 당신이 좋아하는 수제비국을 끓였는데. 자 얼른 일어나세요.》하고 재촉을 했다.

《내 아침에 조밥을 먹었던가. 그렇지, 조밥에 두부찌개를 먹었지.》

《두부는 무슨 두부예요? 산나물무침을 자시구는.》

그래도 그들은 서로 웃지 않았다. 제 기분들을 숨기면서 상대방을 위안하는상싶다.

안해가 약간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쨌든 이 수년어간에 처음 보는 남편의 이 실험에 대한 열중은(아무튼 그것도 무슨 실험은 실험이겠으니 말이다.) 분이를 다소 기쁘게 해주었다. 남조선에 있을 때처럼 집에 들어와 생각에 잠겨 멍하니 앉아있는 남편을 바라보기보다 이것은 얼마나 마음편한 일이랴.

승기는 옹배기안에서 엿처럼 굳어진것을 나무박죽으로 몇번 뚝뚝 두드려보고나서 머리를 기웃거리고는 집안에 들어와 밥상에 마주앉았다.

《아이들은 다 어데 갔소?》

《점심들을 싸가지고 간걸 모르는것 같군요.》

반토굴로 된 학교는 여기서 퍼그나 멀었다. 오후에 늦게까지 수업이 있는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적비행기공습때문에 방공호나 다름없는 거기에 아이들을 그냥 붙들어두려고 했다.

《그다음 쪼꼬만 애들은?》

《먼저 먹구 개울가에 나가 놀구있어요.》

《폭격에 조심해야지. 저아래 공장쪽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말이요.》

요새 적비행기들은 수풍발전소를 자주 폭격했고 그때마다 거기서 가까운 화학공장도 그냥 지나치려 하지 않았다.

《참, 내 나가봐야겠군요.》

안해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리승기는 뜨거운 수제비국을 후후 불면서 천천히 먹었다.

그런데 좀 있더니 안해의 말소리가 들린다.

《너희들은 여기 마당에서 놀아라. 들어오지 말구… 선생님, 루추하지만 어서 들어가십시다.》

이미 숟가락을 놓았던 리승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지 그를 찾아온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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