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 회


제8장 물은 불을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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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신의 집 대청앞 섬돌우에 걸터앉은 망이는 열기가 번뜩이는 어글어글한 눈으로 마당을 엄하게 내려다보며 바지가랭이의 행전을 고쳐감고있었다.

그는 목덜미를 거칫거리는 《산행병마사》기폭을 한손으로 비켜치우며 어펑돌이에게 좀 짜증어린 어조로 말했다.

《젠장, 그 기폭은 좀 멀찌감치 치우게나.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니 어디 성가셔 견디겠나.》

지금 마당에는 백가신이와 그의 하인놈들이 농민군들속에 싸여 꿇어엎드려있었다. 까투리처럼 집구석에 숨어있다가 끌려나온 놈들은 고개도 쳐들지 못하고 떨었다. 하지만 백가신이는 꿇어앉혀놓으면 악을 쓰며 일어서군 하였다. 한쪽팔소매는 어깨혼솔이 찢어져 아래로 너덜너덜 드리운것이 마치 기녀들이 춤을 출 때 입는 장삼자락같았다. 그래도 복두가 달아난 맨머리정수리에는 정히 다듬질한 거의 오이만큼 굵은 상투가 비쭉 솟아있었다.

《이놈들, 이 역적놈들,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너희같은 상것들이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이제 지옥의 염라대왕이 네놈들을 모조리 끌어다 끓는 기름가마속에 처넣지 않나 두고보아라.》

백가신이가 기가 뻗쳐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바람에 어리숙한 농군들은 더러 죄스러운 눈길을 흘끔거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행전을 다 고쳐감은 망이는 정신없이 고아대는 백가신이를 한동안 찌르는듯 한 눈길로 쏘아보기만 하였다.

몇달전에 바로 이 마당에서 그는 저 백가신에게 온몸에 피멍이 들게 매를 맞았고 무릎뼈마디를 튕기우고말았다.

《백가신이 이놈, 지옥에는 푸독사같은 네놈이 먼저 갈테니 우리 걱정은 안해도 좋아.》

비양이 섞인 어조로 느릿느릿 말한 망이는 백가신이를 노려보며 섬돌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허리춤에서 장검을 쑥 뽑아들었다. 백가신의 창백한 낯색은 대뜸 재빛으로 변했다. 그는 짐승소리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땅에 떨어진것은 그의 머리통이 아니라 상투꼭지였다. 비루먹은 개대가리처럼 된 백가신의 머리를 보고 농군들이 와 폭소를 터뜨렸다.

《이놈들, 너희는 여기에 형틀을 끌어다놓거라.》

망이는 백가신의 하인놈들에게 호령했다.

망이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놈들은 겁기가 어려 데꾼해진 눈을 가까스로 쳐들었다.

달보가 우두머리하인놈의 엉뎅이를 호되게 걷어차며 소리쳤다.

《이놈들아, 혼맹이가 빠졌느냐?》

그제야 하인놈들이 질겁하여 비실비실 형구를 가지러 갔다.

이윽고 마당에는 형장이 갖추어졌다.

《백가신이 이놈, 죽더라도 네놈이 한평생 저지른 못된짓을 뉘우치고 죽거라!》

망이의 추상같은 말에 백가신은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무릎걸음으로 벌벌기여 섬돌밑으로 왔다. 그는 좀전의 그 광기어린 허세가 씻은듯이 사라지고 비굴하고 가련한 몰골로 울상이 되여 중얼거렸다.

《내 집재산을 전부 바칠테니 목, 목숨만 살려줍시오. 제발 비오이다.》

주걱턱을 덜덜 떨며 애걸복걸하는 그 더러운 꼬락서니가 역겨워 망이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이번엔 백가신이한테 참혹히 죽은 아버지의 환영이 떠올랐다. 그리고 방금전에 숨을 거둔 그믐녀의 참혹한 모습도, 악착한 놈!…

망이는 눈을 감은채 괴롭게 말했다.

《어서 이놈을 형틀에 묶어놓고 우선 매 쉰대만 쳐라.》

《아이구… 다시는 못된짓 안할테니 한번만 살려줍시오.》

징징 울며 손을 비비는 백가신이에게 하인놈들이 달려들어 일으켜세웠다. 그놈들은 몸부림치며 앙버티는 그를 개처럼 질질 끌어다가 형틀에 묶어놓았다. 그리고는 우두머리하인놈이 굵직한 몽둥이로 볼기를 호되게 내리조겼다. 조금도 사정없는 도리여 여느때보다 더 기승스러운 매질이였다. 그래야만 자기 목숨을 건질수 있다고 믿었는지 모른다.

자기가 먹여살리운, 자기의 손때묻은 노복들에게 이처럼 치도곤을 당하리라고 백가신이 꿈엔들 생각했으랴.

《아구구― 이놈들아―》

백가신의 입에서는 당장 비명이 터져나왔다.

《주인의 발꿈치를 문다더니… 아이쿠 나 죽는다.》

농민군들은 물론 하인놈들의 얼굴에도 엄살과 야료를 부리는 백가신에 대한 혐오의 기색이 력력했다. 그것이 밉상스러워 하인놈들은 더 호되게 매를 내리쳤다.

그런데 어쩐셈인지 몇대 치지 않아 백가신은 체념해버린듯 잠잠해지고말았다.

그만두라는 망이의 말에 하인놈들은 한쪽으로 물러섰다.

형틀로 다가간 망이는 백가신의 머리를 쳐들어보았다. 눈에는 흰자위가 희번득하게 뒤집히고 목매단 개처럼 시뻘건 혀가 한자나 흘러나와있었다. 결국 매 몇대에 숨이 끊어진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기가 약한 놈도 있는가? 이런 허재비같은 놈이 여직껏 우리를 타고앉아 명줄을 누르고있었단 말인가?!)

《허허…》

망이는 그만 실소를 터뜨렸다. 한참 허거프게 웃던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잠시 그자리에 서있었다. 한껍질 비단옷만 벗겨놓고보면 비지자루나 다름없는 이런 무골충같은 놈에게 자기들이 지금껏 굽실거리며 개, 돼지처럼 눌려살아왔다는것을 생각하니 치욕감으로 뼈가 저렸다. 분했다. 고통스러운 자책으로 복통이 터지는듯 했다.

이 등신같은 놈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속에 살아왔는가.

섬돌우에 다시 주저앉은 망이는 구름이 걷히는 하늘을 망연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농민군들은 속이 후련하게 분풀이도 못해본채 너무도 빨리 숨져버린 백가신이를 보고 분해하는 기색들이였다.

어깨가 처져내린 망쇠가 무겁게 걸어오더니 망이곁에 퍼더버리고앉았다.

시름겹게 고개를 떨군 그를 흘끔 곁눈질해본 망이는 오늘싸움에서 범같은 망쇠도 어지간히 지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비호처럼 몸을 날리며 좌충우돌하던 그가 눈앞에 되새겨져 새삼스럽게 장해보였다.

《저…》

자기를 찾는 소리에 망이는 상념에서 깨여났다. 어느 결에 왔는지 고비가 울상이 되여 손가락을 비틀고있었다.

《저…》

웬일인지 고비는 입열기를 몹시 주저했다.

백가신의 시체를 끌어내가는 하인놈들을 지켜보던 망이는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니?》

《을님언니가… 보이지 않우.》

고비의 눈에는 물기가 핑 돌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알고있는 일이지만 고비를 보니 새삼스레 을님이가 생각나 망이도 심란해졌다.

망이의 곁으로 온 망쇠도 고비와 같은 말을 했다. 그는 방이란 방은 다 뒤져보았고 거의 모든 노비에게 물어보았으나 을님이는 그림자도 볼수 없고 또 종적조차 알수 없다는것이였다.

을님이를 되찾기 위해, 망이와 을님이를 한시바삐 상봉시켜주기 위해 줄달음쳐온 싸움길이 허사로 된듯싶어 망쇠는 침울한 기색이였다.

이윽하여 망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공연히 찾느라구들 했네.》

《공연히라니요?》

망쇠가 매눈을 흡떴다.

《을님이가 없어진건 벌써 오래 됐으니 말일세.》

《오빤 알구있었수?》

고비도 의혹에 찬 눈을 둥그렇게 떴다.

망이는 침통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니, 형님은!…》

격하기 잘하는 성미인 망쇠는 뒤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이런 사실을 알고있으면서도 자기에게 말하지 않은 망이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한편 큰일을 위해 망이가 자신의 괴로움을 혼자 묵새겼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매사에 철덩이처럼 무거운 망이로서는 십분 그럴수 있었던것이다.

《이제는 싸움에서 이겼으니 을님을 찾아보자구.》

이렇게 말한 망이는 다심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리구 오치연선생이 너무 락심하지 않도록 잘 위무해주게. 고비 너두.》

망쇠와 고비는 말없이 고개들만 끄덕거렸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에 망쇠가 갑자기 생각난듯 성급히 말했다.

《참, 그런데 백태란 놈을 끝내 찾지 못했소.》

《뭣이?!》

자리를 차고일어난 망이는 골살을 찌프렸다. 상한 다리가 쑤시기도 했지만 백태를 놓쳤다는 소리가 못견디게 통분스러웠다.

어디에 숨어있던 서사가 뒤덜미를 잡히워 끌려나왔다.

《이노옴!―》

느닷없이 지르는 망이의 고함소리에 처마가 즈렁 울렸다. 그 웨침은 마치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폭포소리처럼 주위의 소음을 대번에 삼켜버렸다.

마당꿇림을 당한 서사는 오한을 만난 놈처럼 온몸을 떨었다.

《백태란 놈이 어디 숨었는지 이실직고해라!》

《소인은 모르오이다. 뉘앞이라고 감히…》

서사는 눈물을 짜보려고 두눈을 갑짝거리나 어째 눈물도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이놈, 그럼 명학소에서 끌어온 처녀가 어찌되였는지도 모르느냐?》

《예예… 제발… 죽었다는… 아니… 도망쳤다고… 예예… 정말…》

얼혼이 나갔는지 서사는 고개도 쳐들지 못하고 동에 닿지 않는 소리를 씨벌거려댔다.

찌르는듯 한 눈길로 서사를 한참 노려보던 망이는 불같은 한숨을 톺으며 섬돌우에 풀썩 앉았다. 고비의 숨죽은 흐느낌소리만 간간이 울릴뿐 마당안은 새벽처럼 조용했다.

《형님, 우리 천지간을 뒤져서라두 을님이를 꼭 찾아냅시다.》

망쇠의 음성도 걸그렁했다.

이때 대문밖이 떠들썩해졌다. 조금뒤에 호탕한 웃음을 앞세우고 달령성이 마당에 들어섰다.

호방하고 쾌활한 달령성을 대하는 망이의 입귀도 어느덧 벙싯해졌다.

《아, 형님은 어두워질 때까지 이 마당에서 굿을 하려오? 허허…》

《허허, 어데 갔다 이제야 오시오?》

망이도 웃으며 되물었다. 그리고는 감사의 정어린 눈으로 그의 모습을 다시한번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참, 오늘 그녁에서 고생이 많았겠구려.》

《고생이야 60리를 달려온 형님네가 했지요. 눈이 오는 사품에 불지르는 일이 좀 지체되였소이다. 애가 타지 않으셨소?》

정겨운 웃음을 띠운 달령성은 망이곁에 앉으며 그의 무릎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래 어떻소, 형님? 량반자들과 맞다들어보니?…》

《허허… 짚으로 만든 제웅(허수아비)같더군.》

《허허…》

한참 마주웃어대던 달령성은 자리에서 움쭉 일어섰다.

《자, 어서 밖으로 나갑시다. 량반놈들에게서 빼앗은 쌀이며 천가지를 백성들에게 나눠줘야 할게 아니요.》

《그리하세나그려.》

그들은 환호성이 끊임없이 울리는 곳으로 힘있는 걸음을 옮겼다.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흐렸던 하늘은 어느새 말짱 개이고 축복의 빛발인양 봄볕같이 밝고 따사로운 해빛이 함뿍 쏟아져내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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