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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3 회


제8장 물은 불을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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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나는 명학소의 천민놈들을 쫓아 관군들이 성밖으로 나갔다는 말을 듣고 흐뭇한 심경으로 방안에 앉아있던 백가신은 은연중 낯색이 변했다.

멀리 구름너머에서 울리는 봄우뢰소리같이 가슴을 서늘케 하는 소리가 문밖에서 났던것이다. 그런데 그 소리는 멈춤없이 점점 크게, 점점 가까와졌다.

《이게 무슨 소리냐?》

백가신이가 문쪽을 돌아보며 겁먹은 소리로 물었다.

《날이 흐렸으니 우뢰소리겠지유. 아유, 령감은 겁도 많으셔.》

젊은 첩 림씨가 애교흐르는 소리로 말하며 껍질을 벗긴 노란 군밤알을 백가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백가신은 성가스러운듯 밤알을 든 림씨의 하얀 손을 탁 쳐버렸다. 문밖에서 나는 소리가 우뢰소리가 아니라 심상치 않은 사람들의 함성이라는것을 그는 알아차렸던것이다.

누군가 마당으로 성급히 뛰여오더니 섬돌우에 올라서며 《상호장나리, 나리님!》하고 숨넘어가는 소리로 찾았다.

백가신과 림씨는 겁결에 서로 마주보았다. 림씨가 백가신의 가시눈길에 쫓겨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서사 림가가 엉거주춤하니 서서 풍에 걸린 놈처럼 몸을 떨고있었다.

《큰일났소이다. 포, 폭도들이 성내루…》

《뭐, 뭐라구!》

백가신이도 화닥닥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관병놈들은 뭘하느냐? 빨리 성문을 닫고 폭도들을 막지 않느냐?》

백가신은 대경실색하여 덤벼쳤다.

《이젠 늦었소이다. 그놈들의 수가 워낙 엄청나서… 게다가 내응하는 초적놈들이 군기고를 불질러놔서 관병들인들 맨손으로 어쩔수가 있소이까?》

《그, 그럼 지주사는?…》

백가신은 눈에 알리게 주걱턱을 떨었다.

《벌써 북문을 열고 도망을 갔는뎁쇼.》

《뭐뭐, 고을원이란게 혼자 살겠다구 도망을 가?!…》

백가신은 자기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혼자 살구멍을 찾아 뺑소니를 친 공주원이 찢어발기고싶도록 미웠다. 더러운 놈, 평소에는 나를 고을의 존위로 모시고 매사에 가르침을 받겠다고 곧잘 너스레를 떨더니 위급한 경우를 당해서는 마른날 나막신 버리듯 한단 말이지. 그런데 이 쓸개빠진 자식은 또 어데 가서 뒈졌나? 시럽의 자식이라고 아들치부하지 않은지 오랜 백태지만 물에 빠진 놈 지푸래기도 잡는다고 그를 찾게 되는것이였다. 그는 자기 말을 듣지 않고 성문을 열고나간 아들 백태도 미워 견딜수 없었다. 애당초 성문을 굳게 닫고 들어앉아있었더라면 제깐놈의 란민들이 별수가 없었을것이 아닌가.

《별공사는 돌아오지 않았느냐?》

백가신은 악에 받쳐 소리질렀다.

《어데 가서 뒈졌다더냐?》

속담 그른데 없다고 범이 제 소리하면 온다더니 때마침 백태가 허겁이 들린 놈처럼 안대문을 발로 걷어차며 뜨락에 뛰여들었다. 투구는 어데다 벗어던졌는지 맨머리바람에 쇠비늘이 절렁거리는 갑옷만 입고 손에 칼을 든 백태는 뜨락에 들어서는 참으로 눈에 피발이 서서 도치를 찾아 헤맸다.

《도치, 이놈 어디 갔어!》

낚시에 아가미를 꿰인 붕어처럼 어디선가 도치가 끌려나왔다.

그를 보자 백태는 먹이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사납게 덤벼들었다.

《이놈아, 너는 내 렴탐군이냐, 망이렴탐군이냐?》

도치는 겁결에 두손을 내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소, 소인은 나리님의… 윽―》

도치는 말을 맺지도 못했다. 백태의 장검이 어느새 그의 배로부터 등어리를 꿰질렀던것이다.

《아이구 령감, 이러구 있으면 어찔라오?》

마당에서 살륙을 벌리는 자식놈의 미친짓을 얼없이 보고섰던 백가신은 젊은 첩의 기급한 소리를 듣고서야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저저 하늘… 비오고 우뢰치는것 같네.》

젊은 첩은 벌써 반정신이 나간양 동닿지 않은 소리를 씨벌여댔다.

갈피를 잡을수 없는 경황에 모든것을 포기하고 체념해버렸는지 백가신은 하늘에 눈길을 주었다.

아닌게아니라 타래쳐오르는 검은 연기가 하늘을 까맣게 덮고있었다. 간담을 서늘케 하는 함성소리는 더욱 가까와졌다. 무엇이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 비명소리, 펑펑 날아다니는 눈먼화살이 기와장을 부시는 소리가 살벌했다.

《아이쿠, 앉은벼락이로구나.》

백가신은 풍덩 주저앉으며 주걱턱을 덜덜 떨었다.

《게, 누구 없느냐?》

마당에는 흰눈을 꺼멓게 물들이며 도치가 죽어자빠져있을뿐 개 한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도치의 시체를 보자 공포의 전률이 등골을 찌르르 지지며 지나갔다.

겁에 질린 백가신은 하인들을 소리쳐불렀다. 벌써 형세가 기울어진것을 알아차리고 살구멍을 찾아 어데들 숨어버렸는지 놈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놈들!》

백가신은 방안에서 악에 받쳐 소리질렀다. 이런 위급한 판에 써먹자고 먹이고 입혀온 놈들이 정작 일을 당해서는 제살도리부터 차리는것이 괘씸스러워 분통이 터질 지경이였다.

별안간 화살 하나가 마루기둥에 와 꽂히더니 깃을 푸르르 떨었다. 산이 허물어져내리는듯 한 함성은 더욱 가까와졌다. 이제는 자기를 저주하는 웨침이 귀에 똑똑히 들렸다.

《백가신이, 이놈 문열어라!》

《백가신이를 죽여라!》

바깥대문을 부서져라 두드려댔다. 안마당까지 주먹같은 돌멩이들이 날아들었다. 궁둥방아를 찧으며 물러앉은 백가신은 부들부들 떨며 방구석으로 쫓겨갔다.

《게… 게, 누구 없느냐?》

허겁이 들린 소리로 웨쳐대나 누구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아들 백태는 물론 젊은 첩년조차 종적을 감추고말았다. 백가신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방바닥을 벌벌기여 문밖에 나선 그는 맨 버선발로 뒤마당쪽으로 허겁지겁 뛰여갔다.

하인청에 이르러 무작정 아무 문이나 열고 방안에 뛰여들었다. 어둠에 눈이 익자 한쪽 구석에 누워있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그는 가끔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내고있었다.

백가신은 구원자나 만난듯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뜻밖에도 그믐녀였다. 공교롭다는 생각보다 안도의 느낌이 앞섰다.

《어, 어멈 날 여기 좀 숨겨주게.》

천천히 눈을 뜨고 또 한참만에야 백가신을 알아본 그믐녀의 흐릿한 눈에 일순 서리같이 차거운 빛이 어리였다.

《천비의… 방에… 어찌… 귀한 몸… 두시겠소이까?》

그믐녀는 숨을 헐떡이며 가느다란 음성으로 마디마디 힘겨웁게 말을 번지였다. 하지만 그 싸늘한 눈초리와 랭랭한 말투에서 거절의 뜻을 읽은 백가신은 본능적인 학대욕이 치받쳐 주걱턱을 쳐들고 포악하게 덤벼들었다.

《이, 이년 네년까지…》

《기왕… 죽인 목숨… 마저… 끊어놓으시오.》

어질고 유순하기만 하던 그믐녀의 눈에서는 불줄기가 출출 흐르고있었다. 그것은 자기의 젊음을 짓밟고 자기의 한생을 그믐밤처럼 캄캄한 어둠속에 몰아넣은 백가신에 대한 끝없는 원한과 저주와 증오의 불길이였다.

공포심으로부터 발작적인 광기를 부리던 백가신은 그 눈길에 예기가 질리고 또한 비로소 그의 찢어진 옷주제며 얼굴에 피멍이 든 참혹한 모습을 보고는 그만 무인지경에서 귀신을 만난듯 온몸에 소름이 끼쳐 초점잃은 눈망울을 허둥거렸다.

《죄는 지은대로 가기마련이란 말 못들으셨소.》

말을 가까스로 번지는 그믐녀의 목소리는 겨우 알아듣게 가늘고 기운 없었지만 마디마디가 가슴을 찌르는 비수처럼 날카로왔다.

《죄는… 지은대로… 가기… 마련이요.》

말을 마친 그믐녀는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어 엎디더니 끙끙 갑자르며 힘겨웁게 문쪽으로 기였다. 백가신은 한치한치 기여가는 그믐녀를 얼혼이 빠진 놈처럼 멍청히 굽어보기만 하였다. 겨우 문을 열고 문턱너머로 상반신을 내여놓은 그믐녀는 그만 토방돌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바깥대문이 부서지는지 우지끈거리는 소리와 함께 농군들의 성난 웨침소리가 추녀높은 집마저 무너뜨릴듯이 드세게 울렸다.

백가신은 치를 떨며 얼른 안으로 문을 닫았다.

구중궁궐같은 백가신의 집 바깥채로부터 몸채, 뒤채를 샅샅이 뒤지며 하인청에 이른 망이와 망쇠는 토방돌아래에 쓰러져있는 한 녀인을 띄여보고 급히 달려갔다.

늙수그레한 녀인의 찢어지고 덞어진 베치마저고리에는 군데군데 피자욱이 묻어있었다. 풀어헤쳐진 머리를 쓸어올리고 피멍이 든 얼굴을 들여다보던 망이는 흠칫 놀랐다.

녀인은 자기도 잘 아는, 이 집에서 평생토록 종노릇을 해오는 그믐녀였던것이다.

《아주머니!》

망이는 그믐녀의 어깨를 잡아흔들었다. 미미한 숨기는 느껴졌으나 이미 어혈독이 오를대로 오른 그믐녀는 축 늘어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 사람을 잡아먹는 이 악귀같은 놈의 집에선 오늘도 생사람 하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구나. 평생 부려먹던 죄없는 녀인을…)

우선 그믐녀를 살려야 했다. 그는 한쪽무릎을 세우고앉으며 망쇠더러 그믐녀를 자기 등에 업히라고 일렀다. 그런데 망쇠는 또 자기가 업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형님은 다리두 성하지 못한데 나한테 업히시우.》

《걱정말게. 자넨 그놈들을 빨리 찾아내게. 어쨌든 이 집안에 숨어있을테니 말일세.》

그믐녀를 등에 업은 망이는 하인청의 뜨락을 지나 본채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어깨너머로 드리운 그믐녀의 두팔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맥없이 흔들거렸다.

안마당안에서 눈에 띄운 첫 사람에게 빨리 가서 오치연의원을 데려오라고 당부한 망이는 그믐녀를 업고 곧장 몸채의 아래방으로 들어갔다. 안방구석에서 우들우들 떨고있는 몸종인듯 한 어린 처녀에게 이불을 깔라고 한 후 두툼한 비단이불우에 그믐녀를 내려놓았다. 이어 부엌에서 대야에 더운물을 담아들여온 부엌데기가 코를 훌쩍이며 수건으로 그믐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이윽하여 그믐녀의 눈까풀이 바르르 떨렸다.

《아주머니… 눈을 뜨시우.》

망이는 그믐녀의 팔을 흔들며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그믐녀에 대한 동정과 련민으로 그의 가슴은 아리고 쓰렸다. 그는 바로 이 녀인에게서 자기 아버지가 어떻게 백가신의 손에 죽게 되였는가를 알게 되였다. 그런데 오늘은 이 녀인자신이 그런 경우를 당하게 되지 않았는가. 한뉘 업심을 받고 부림을 당하다가 종당에는 짐승처럼 매맞아죽어야 하는것이 이들, 천민들의 타고난 팔자란 말인가.

그는 좀더 일찍 거사를 일으키지 못한것이 분하였다. 좀더 빨리 오지 못한것이 한스러웠다. 그랬더라면 그믐녀도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게 아닌가!

《아주머니, 정신차리시우.》

망이의 절절한 부르짖음이 감응을 일으켰는지 정말 그믐녀는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시진한 눈길을 쳐들었다.

《아》

망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망이를 알아본 그믐녀의 눈에 순간 불꽃같은것이 확 피여났다. 사무치는 격정으로 숨결도 가빠졌다. 부드러운 눈길로 망이를 이윽히 쳐다보던 그믐녀는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였소. 예, 아주머니!》

대답대신 그믐녀의 잔주름이 가득한 눈귀에 눈물이 한방울 솟아오르더니 주르르 볼을 타고 굴러내렸다.

《행수같은… 아들을… 둔… 녀인들은… 얼마나… 좋겠수.》

토막토막 끊어지는 말을 가까스로 번진 그믐녀는 더욱 가쁜숨을 톺았다. 그는 마지막말을 하듯 심신의 힘을 깡그리 짜내는듯 한 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악귀놈이… 저기… 하인청… 내 방에…》

여기까지 말한 그믐녀는 끝내 고개를 떨구고말았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망이는 가슴이 덜컥하여 그믐녀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이미 숨이 끊어진 그믐녀는 아무런 응대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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