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 회


제8장 물은 불을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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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 백태는 자리에 누운채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이 채 밝지 않았는지 문밖이 흐릿했다.

발끝에 밀려가 걸린 비단이불을 마저 차버리고 웃몸을 일으킨 그는 갑자기 치미는 아픔에 신음소리를 내며 머리를 싸쥐였다.

간밤에 송별연을 한답시고 고을관리놈들의 아첨기 흐르는 술잔을 밤늦도록 받아마셨더니 술이 아직 깨지 않았는지 골이 쑤시고 속이 메슥거리고 입안이 깔깔했다. 머리맡의 칠소반우에 놓여있는 자리끼는 텅 비여있었다. 골살을 찌프리며 밖에 대고 소리쳤다.

《어멈.》

아무 기척도 없었다.

《어머엄!》

여전히 그믐녀의 대답소리는 없었다.

《이…》

백태는 험한 욕설이 터지려는 입을 가까스로 다물고 소반우의 은술주전자를 들었다. 물이 없으니 술로써라도 타는 목을 추기려는셈이였다. 술주전자를 든채 그는 잠시 눈을 디룩거렸다.

문득 자기에 대한 그믐녀의 태도가 예전과 다르다는 생각이 떠올랐던것이다. 그믐녀는 웬일인지 자기를 꺼리고 피하는 눈치였다. 종일 가야 얼굴 한번 보기 어려울 지경이였다. 그가 자기를 피하는데는 필경 그럴만한 까닭이 있는것이라고 백태는 단정했다. 모름지기 을님이란 년을 어디다 빼돌리고 뒤가 켕기여 그러는것이 틀림없었다.

(흥, 늙은게 나를 속이고 무사할줄 알구.…)

요즘 백태는 을님이 일로 미칠 지경이였다. 을님이가 가있을만 한 절간은 다 수소문해보았으나 어데서도 반가운 기별이 오지 않았다. 더우기 융대란 놈은 돈만 주면 살인이라도 칠 놈이기에 크게 믿고 흥경원으로 보냈는데 그놈한테서도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것으로 보아 헛물을 켠 모양이다.

이래저래 부아가 치밀어 신경이 곤두서기만 했다.

백태는 술주전자아구리를 입에다 가져다대고 술을 들이켰다. 속이 뜨끔하더니 술기가 확 퍼져올랐다. 취기로 마음이 너글너글해진 그는 한순간 을님이란 계집때문에 부심하고있는 자신이 가소롭게 여겨졌다. 꿩대신에 닭도 쓴다고 다른 계집을 끌고 올라갈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자기 눈에도 차지 않는 이 고장의 다른 계집들이 송유인의 마음에 들리 만무했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을님이를 시급히 찾아내야만 하였다.

그가 이런 생각을 굴리고있는데 의외에도 애비 백가신이가 기침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당장 개경으루 떠난다면서 아침부터 웬 술이냐?》

그는 잠시 문밖에 서서 엄한 눈길로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방에 들어와 번쩍번쩍하는 누런 문금포로 지은 길다란 저의자락을 갈라부치고 앉아서도 말없이 주걱턱을 쳐들었다.

백태는 잔에 술을 부어 아비한테 내밀었다.

《자리옷바람으루?》

아비의 노기띤 소리에 백태는 어색하여 잔을 도로 상우에 놓았다.

그는 을님이가 실종된 후로 애비의 짜증기가 더 잦아졌다고 생각하니 비웃음이 나갔다.

며칠사이 그들은 서로 말없이 지냈다. 말하지 않았을뿐아니라 적의에 차서 질시하는 형편이였다.

백태는 을님이의 방문밖에서 하던 애비의 추태를 목격한 이후로 그를 아비로 치부하지 않았다. 더우기 그날밤 아비가 수만금의 집재산을 자기에게 넘겨주지 않겠다고 을님이란 년에게 씨부렁거린 소리는 아무래도 삭여낼수가 없었다. 취중에 한 소리이긴 하지만 취중진담이란 말도 있지 않는가. 아비가 자기를 아들로 보지 않는데 자기도 그를 아비로 여길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백가신은 또 자기대로 아들에게 원혐을 품고있었다. 그는 방안에 날아든 귀여운 새와 같던 을님이가 종적을 감춘것도 백태의 작간으로 인정하고있었다. 자기의 늘그막을 기쁘게 위로해줄수 있는 그 기막히게 고운 을님이가 가뭇없이 사라진것을 생각하면 부아통이 치밀어 견딜수 없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백태가 몇달동안 집에 와있으면서 한 짓거리란 전부 제 세줄을 늘이기 위한것뿐이고 아비를 도운것은 꼬물도 없었다. 개경량반자들한테 환장을 했는지 개경에 쌀 한톨이라도 더 바치지 못해서 애를 박박 쓰지 않는가. 백태는 조세를 거둬들이다 못해 이제는 아비의 량곡까지 침해하는 형편이였다. 그것때문에 벌써 몇차례 대판들이 싸움이 있었다. 이건 도대체 제 집가산을 늘구러 내려온 자식인지 빼앗으러 내려온 자식인지 분별키 어려웠다. 게다가 거드럭거리는 꼴이란… 그 굴젓같은 명학소의 신풀이논벼를 불태워버린 생각을 하면 지금도 명치끝이 내려가지 않았다.

(이런 쓸개빠진 자식을 아들이라고 믿고있다가 한지에서 방아찧기 십상이지.)

《야, 너 떠날 때 싣고가려던 쌀은 못가져간다.》

드디여 백가신은 주걱턱을 쳐들고 천천히 그러나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아니, 또 그러시면 어찌하오이까?》

백태는 눈살을 찌프렸다.

《또라니? 언제 가져가라 했더냐?》

《조세량이 미달되여서 그런다 하지 않소이까?》

《흉작인데 별수 있느냐?》

《조정에서 그걸 알아준답디까?》

《그렇다고 아비의 가산에 손을 대야 옳으냐?》

《그깟 쌀 얼마나 손해를 본다구…》

《그깟 쌀이라니… 아, 그게 적은 량이야?》

《걱정마우. 내 이제 권세를 잡으면 몇갑절 갚아줄테니.》

백태는 코밑수염을 쓰다듬었다.

백가신은 자식놈의 아니꼬운 태도에 밸이 뒤틀렸다. 그는 바른다리를 들어 왼쪽무릎우에 올려놓으며 코웃음을 쳤다.

《흥, 권세?… 흰소리 작작해라.》

《왜, 재물이면 달것 같아서 그러시우?》

백태도 말투에 날을 세웠다.

《이눔, 재물이면 다지 뭐가 다냐?》

《재물이란 있다가도 없어지는거외다.》

《권세는 없어지지 않구 만년간다든? 너희들한테 쫓겨서 우리 고을에 내려온 문관눔들 꼴 좋더라. 그래 그 량반자들이 권세가 좀 좋았대서 지금은 거지노릇 헌다더냐?》

백태는 말문이 막혔다. 잠시 아비의 가시눈을 마주보던 그는 저도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권세가 있으면 재물두 생기는 법이우.》

《되잖은 소리루 해쌓는다. 재물이 없으면 권세두 소용없어.》

《아니우, 권세만 있으면 재물은 생기우.》

《어쨌든 재물이 있어야 헌다, 이눔.》

《아니 권세가 있어야 하우.》

《아니다. 이눔!》

《이거 계속 놈, 놈 하겠소? 아무리 자식이라도 언행을 삼가우. 정5품 중랑장에 별공사요.》

백태는 승산없는 언쟁이 지루했던지 아비의 언행에 트집을 걸었다.

《이눔, 자식눔 보구 눔이라고 못하면 뭐라구 해?》

백가신이도 되트집을 걸며 눈을 부라렸다. 백태가 자기의 자식이면서도 종년의 소생이라는 잠재의식은 그로 하여금 아들에 대한 멸시의 감정을 감출수 없게 하였다.

《이게 정말!…》

백태가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그 사품에 칠소반이 뒤집어졌다.

《이누움!― 일어서면 어쩔테냐?!…》

백가신은 손바닥으로 장판을 두드렸다.

재물에서 권세가 나오느냐, 권세에서 재물이 생기느냐로 시작된 그들의 언쟁은 결국 부자간의 인신공격으로 번져지고말았다. 하긴 《닭이 먼저냐 닭알이 먼저냐.》라는 수수께끼처럼 그들의 언쟁도 풀기 어려운것만은 사실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한참 자식을 노려보던 백가신은 주걱턱을 쳐들고 뇌까렸다.

《이눔, 이번에 올라가거든 다시 여기루 내려오지 말아.》

백가신이가 신경질적으로 미닫이를 열어제치는 서슬에 한쪽 미닫이문이 떨어져나갔다. 그는 뒤짐을 지고 문턱밖으로 발을 옮겨놓으며 또 씨벌였다.

《종년의 속에서 나온 새끼니…》

장대에 빨래를 걸쳐놓은듯 한 애비의 가량가량한 뒤잔등을 불이 이는 눈초리로 쏘아보던 백태는 이 말에 저도 어쩔새없이 칼집이 걸려있는 벽쪽으로 뛰여갔다.

하지만 그의 손은 칼자루보다 먼저 술주전자를 집어들었다. 선채로 숨도 쉬지 않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래, 이 시굴에 다시 내려오지 않으마.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이 집과 재물, 아니 너의 그 말라비틀어진 개다리같은 몸뚱아리까지 내 손아귀에 쥐여지게 된다는걸 잊지 말어라. 흥, 재물?… 이놈?… 종년의 새끼?!…)

백태는 걷잡을수없이 치미는 울기와 분기와 취기로 은주전자를 힘껏 쥐여뿌렸다. 벽에 부딪쳤다가 방바닥에 나떨어지는 바스라지는듯 한 아츠러운 쇠소리가 났다.

백태는 밖으로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까짓 쌀이 뭐야? 이제 송유인에게 을님이만 안겨주면… 그런데 젖어멈, 계속 고집을 부릴테야! 어디 오늘두 입을 열지 않고 견디는가 보자.)

백태는 얄팍한 입술을 악물고 걸음을 내짚었다.

갑자기 방안의 가장집물들이 한쪽으로 넘어질듯이 기우뚱거렸다. 흠칠 놀란 백태는 몸을 뒤로 젖혔다. 그랬더니 금시 넘어지려던 자개박이장농이며 문갑들이 바로 서는것이였다. 그가 한발을 내짚자 또다시 가장집물들이 기우뚱거렸다.

(젠장, 이것들두 취했어?)

백태는 팔을 뻗쳐 눈앞의 장농을 힘껏 밀어던졌다. 장농이 바닥에 태를 치는 소리가 방안을 들었다놓았다.

그는 문에서 떨어진 미닫이짝을 짓밟으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마루에 나섰다. 흐리터분한 하늘에서 진눈까비가 날렸다. 처마밑으로 날아들어온 차거운 진눈까비들이 취기로 달아오른 백태의 낯에 처덕처덕 들어붙었다. 찬바람과 눈발은 가뜩이나 열뜬 그의 심기를 더욱 광포하게 만들었다.

장농이 구들장을 깨는 요란한 소리를 듣고 눈들이 떼꾼해서 뜨락으로 뛰여나온 하인놈들을 본 백태는 그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야, 이놈들!―》

《예에―》

하인놈들은 덴겁하여 허리를 수그렸다. 그들은 자리옷바람에 얼굴이 시뻘개서 광기를 부리는 별공사가 그 무슨 염라국에서 온 죽음의 사자같이 무시무시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이놈들, 당장 저 하인청에 가서 그믐녀를 여기루 끌어오너라.》

허리에 두손을 얹고 다리를 벌려선채 눈을 지릅뜨고 서있던 백태는 우직스러운 하인놈들에게 잔등을 떠밀리면서도 태연하고 침착한 걸음으로 뜨락에 들어서는 그믐녀를 보자 저도모르게 눈을 꾹 감아버렸다. 취기가 깨는것 같은게 웬일인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좀더 마시지 않고 술주전자를 던져버린것이 후회되였다. 취하지 않고서는, 술기운으로 미친짓을 하지 않고서는 이제 그믐녀에게 취하려는 자기의 행동이 속박을 받게 되리라는것을 그는 은연중 느끼고있었던것이다. 오늘은 문초를 해서라도 그믐녀로부터 을님의 행처를 알아내야겠다고 속치부하고있는 백태였다. 그래서 인정사정 보지 말자고 아까부터 일부러 더 술을 마셨고 광기를 부렸던것이다.

하인놈들에게 끌려와 섬돌아래에 선 그믐녀는 배허벅우에 두손을 포개잡고 고개를 수굿하고있었다.

《어멈.》

백태는 목소리에 위엄을 주며 불렀다.

《예.》

그믐녀는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대답했다.

《내 오늘 마감으로 묻겠는데 을님이가 간 곳을 대오.》

그믐녀는 동안이 지나서 그러나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대꾸했다.

《모르는 곳을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어머엄, 정말… 이러겠나, 엉!》

《… …》

백태는 성난 짐승처럼 마루우를 왔다갔다하며 씨근거리다가 도로 제자리에 멈춰서서 그믐녀를 내려다보았다.

휘익― 불어치는 찬바람에 그믐녀의 누런 베치마자락이 펄럭이고 이마우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래 어멈은 내가 더 중한가, 을님이란 년이 더 중한가?》

《… …》

《어디 대답하게.》

백태는 기대가 어린 자못 너그러운 목소리로 재촉했다.

그믐녀는 천천히 고개를 쳐들고 백태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차분한 음성으로 찍어말했다.

《초록은 동색이라 나한텐 불쌍한 을님이가 더 귀하고 중하오.》

《뭐, 뭐라구?!…》

그믐녀의 뜻밖의 말에 백태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인놈들도 그믐녀의 대답이 깨고소한모양 숙인 이마너머로 서로 눈들을 끔벅거렸다.

백태는 이 순간 이상하게 온몸의 맥이 쑥 빠지는것을 느꼈다. 자기를 젖먹여 키운 그믐녀가, 자기를 그토록 정깊이 사랑하던 그믐녀가 이렇게 매정하게 자기를 저버릴줄은 몰랐다. 백가신이가 자기를 아들로 치부하지 않는다는것은 이미 알고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의 젖어멈인 그믐녀까지 자기를 남보다 더 먼 존재로 여기지 않는가. 백태는 허탈감에 휩싸였다. 그의 뇌리에는 불현듯 좀전에 백가신이가 《종년의 새끼》라고 멸시에 차서 욕질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백가신한테서 이런 소리를 벌써 여러번 들었다. 그의 말대로 자기가 진정 천한 종의 자식이라면… 그는 공포에 가까운 전률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럴수가 없다. 그럴수가 없어. 나는 종의 자식이 될수가 없다! 그는 발작적으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취기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적충격때문인지 그는 머리가 몹시도 어지러웠다. 그는 뻘겋게 충혈이 진 눈으로 성긴 눈발이 어지럽게 날리는 뜨락에 한본새로 서있는 그믐녀를 노려보았다.

(가재는 게편이라더니.… 어디 나보다 얼마나 더 을님이를 위하는가 보자.)

백태는 하인놈들에게 을님이의 행처를 댈 때까지 그믐녀를 문초하라고 뇌까리고나서 방으로 씽 들어가버렸다.

방바닥에 퍼더버리고앉은 백태는 하졸을 불러 술을 가져오게 하였다.

뜨락에서는 을님이가 간곳을 대라고 따지는 하인놈들의 악청과 함께 무지스러운 매질소리가 울리고 그믐녀의 신음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한가닥 량심의 가책이라 할 죄의식을 느낀 백태는 그것을 잊으려는 심산에서 술만 더 퍼마시였다.

그는 출세를 위해서는 자기 앞길에 거칫거리는 모든것을 사정없이 쳐버려야 한다고 스스로 자신을 위안하였다. 권세란 누가 가져다주는것도 아니요 스스로 찾아오는것은 더욱 아니니 오직 피비린 싸움으로 걷어쥐여야 하는것임을 십여년간의 개경생활에서 골수에 사무치도록 체득한 백태였다.

지금 국권을 좌지우지하는 권세가들중에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그 자리를 차지한자가 하나나 있는가. 친우지간에는 말할것도 없고 형제간이나 부자간에도 권세를 두고 칼부림을 하는것이 례반사였고 지어 리의민이 같은자는 전임금 의종을 죽이고 대장군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던가.

(권세를 쥔 사람한테는 죄를 묻지 않는다고 누가 말했더라?… 그렇지. 송재상이 한 말이지.)

권세욕에 환장한 백태의 눈에는 살기가 뻗쳐올랐다.

장농이 뒤번져지고 주전자가 나딩굴고 문짝이 떨어져나간 어수선한 방안으로 찬바람이 몰려들어왔다. 한지나 다름없는 음산한 방에서 자리옷바람으로 정신없이 술만 마시는 백태는 흡사 낮도깨비같았다.

재물에 대한 끝없는 탐욕은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들뜬 공명심도 인간을 타락시키는 법이다. 하지만 인간을 철저히 타락시키는것치고 권력에 대한 야심보다 더한것이 또 어데 있겠는가.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던 백태는 갑자기 소스라치듯 놀라며 그것을 무르팍에 떨어뜨렸다.

자기로서도 뜻밖의 생각을 하고 놀랐던것이다. 그것은 지금 마당꿇림을 당하고있는 녀인, 자기를 젖을 먹여 키웠고 여직껏 정성다해 돌봐주는 젖어멈이 혹시 자기의 친어머니가 아닐가 하는 생각이였다. 그러나 빠개놓고말하면 이것은 오늘 비로소 처음 느끼는 생각이 아니였다.

그는 이미전부터 이러한 의혹속에 살아오면서도 그것을 캐여볼 용기가 나지 않아 애써 피해왔었다. 그러나 귀신을 몹시 두려워하면서도 귀신을 보고싶어 안달이 나하는 호기심많은 계집애들처럼 이 의혹을 종시 머리속에서 털어버리지 못했다.

서로 상대방의 속을 빤히 꿰뚫어보면서도 자기의 속을 털어놓지 못하는 그들은 마음속으로만 말을 주고받을뿐이였다.

(어멈, 어멈이 내 친어머니가 아니요? 아니라고 하지 마오. 어멈의 모색은 내 턱이며 내 딸애의 눈에 그대로 드러나있소이다. 아니, 아니, 그것만이 아니요. 무엇을 숨기는듯 한 어멈의 거동에, 그 죄스러워하는 눈빛에 그것이 다 드러나있소이다.)

(그러마, 숨기지 않으련다. 하긴 이제야 무엇을 숨기며 숨긴들 무엇하겠느냐?)

(왜 이제야 그 말을 하시오. 내 어렸을적에 얼마나 어머니라 부르고싶었는지 아시오이까?)

(그때야 네가 설마 이런 몰골이 될줄 어찌 알았겠느냐? 천비의 자식이라고, 계집종의 아들이라고 량반들의 손가락질 받고 벼슬살이도 못할가봐 혀를 깨물며 참았구나. 아, 그런데 량반의 무리에 섞여 벼슬살이 십년에 네가 이 모양으로 될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느냐? 악을 행해서 귀해지면 무엇하며 선을 행해서 천해진들 어떠냐?)

(아, 괴롭소이다. …허나 그렇게 할수 없소. 더 말하지 마오. 10년 쌓은 공을 어찌 나무아미타불로 되게 하겠소.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나보오. 어멈두 거짓말을 했지?… 아니, 아니, 거짓말이라고 하오. 내 그래두 친어머니처럼 돌봐줄테니 어멈, 제발 나를 낳았다는 소리를 하지 마오. 이전대루 삽시다.)

정신병환자처럼 눈을 감고 상념의 세계를 헤매던 백태는 자기를 찾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나으리, 별공사나으리…》

문밖에 하인놈이 읍을 하고 서있다.

《뭐야?》

《저어, 어멈이…》

《어멈이 어쨌다는거야?》

백태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숨기가… 끊어진것 같소이다.》

《으응?!…》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선 백태는 섬돌아래 뜨락을 내려다보았다. 형틀에 묶이운 그믐녀가 고개를 한옆으로 늘어뜨리고있었다. 백태는 저도 모를 힘에 끌리여 뜨락으로 내려가 그믐녀곁으로 급히 다가갔다.

풀어헤쳐진 머리, 피멍이 든 얼굴, 찢어진 옷… 매질을 당한 그믐녀의 정상은 차마 눈뜨고 볼수 없게 처참하였다.

그믐녀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하인놈 하나가 바가지에 찬물을 퍼들고와 그믐녀의 얼굴에 끼얹었다. 그제야 그믐녀의 입에서 가는 신음소리가 슴새여나왔다.

《어멈, 어멈!》

백태는 그믐녀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믐녀는 눈을 뜨고 잠간 백태를 치떠보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고뇌의 빛이 어려있었다.

《똑똑히 듣거라.》

갑자기 그믐녀가 입을 열었다.

《너를 내가 낳았다만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량반의 개종자!…》하고 낮은 소리로 부르짖은 그믐녀는 다시 의식을 잃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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