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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0 회


제8장 물은 불을 이긴다

1


세홰째 우는 닭울음소리를 들은 망이는 지팽이를 짚고 밖으로 나섰다. 찬바람을 마시니 격정이 가슴뿌듯이 차오르고 손아귀에 힘이 불끈 쥐여졌다.

하늘이 무겁게 흐려있어 사위는 캄캄했으나 려명전의 정적과 고요가 깃든 새벽은 여느날과 달리 숭엄해보였다.

오늘은 병신년(1176년) 정월 스무이튿날, 그동안 원한과 분노속에 가슴을 태우고 애를 끓이며 준비한 거사의 날이 드디여 왔다.

다시금 새벽의 찬 대기를 크게 들이마신 망이는 지팽이를 뚜벅뚜벅 짚으며 마당을 천천히 거닐었다. 그는 걸으면서 몸과 마음의 힘을 가다듬고있었다. 부엌문을 열고 나온 고비가 방금 길어온 샘물을 깨끗한 옹배기에 부어 마당복판에 놓아주었다. 망이는 정화수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두손을 모아 읍을 하고서서 천우신조를 기원하는 주문을 마음속으로 외웠다. 고비가 그의 손에 애솔가지를 쥐여주었다. 망이는 그 애솔가지를 정화수에 담그어 물을 묻혀가지고는 머리로부터 시작하여 온몸에 물방울을 뿌렸다. 큰 싸움을 앞두고 몸을 정화하는 의식이였다. 말 한마디없이 침묵속에서 진행된 이 의식은 자못 엄숙한 기분을 자아냈다.

망이가 방에 들어오니 고비가 진솔바지저고리를 단정히 받쳐들고 서서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어서 새옷을 입으시와요.》

고비의 얼굴에도 여느때 없던 정숙한 표정이 어렸다.

《고맙다.》

망이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는 어쩐지 엄숙한 례식을 거행하는듯 한 기분이 들었다. 하기야 생사를 판가리하는 출전식인데 그보다 더 엄숙한 례식이 어데 있겠는가.

망이는 그간 고비가 정성들여 지은 새 바지저고리를 입고 그우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저의를 껴입고나서 넓은 허리띠를 띠였다. 허리에 칼집까지 엇비스듬히 끼우고 아래방으로 내려오니 고비가 까닭없이 당황해하며 그를 외면했다.

《이건 또 무슨 차림인가?》

고비의 차림새를 훑어본 망이가 저으기 놀란 어조로 물었다.

자기가 웃방에서 옷을 입는 사이 아래방으로 내려온 고비도 어느새 옷을 갈아입었는데 바지저고리에 머리에는 사내들처럼 두건을 쓰고 목긴 버선에 행전까지 친것이 여불없는 총각차림새였다. 게다가 잔등에는 화살통을 메고 또 손에는 활까지 쥐고있었다.

《나도 함께 가려우.》

고비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어디루?》

《다들 가시는 곳으루.》

《장난길인줄 아나?》

망이가 엄한 기색으로 말했다.

《싸움길인줄 나도 아우.》

《에잇 시끄러!》

망이가 성난 표정으로 손을 내젓자 아래목에서 보짐을 꿍지고있던 누리나가 참견을 했다.

《그애도 생각 깊어서 하는 소리니 데리고 가거라. 아무렴 도움이 되겠지 짐이 되겠나. 항차 조상들의 한많은 넋을 위무하는 길인데 남녀 구별할것두 없지.》

고비가 《그것 보지.》 하는양으로 눈을 빨았다. 그는 사내들이란 왜 저들만 큰일을 할수 있다고 뻐기는지 모를 일이였다. 좀전에 망이네 집으로 오기 전에도 남편과 이 비슷한 다툼이 있었다. 공주로 함께 가겠다는 자기 말에 망쇠는 가뜩이나 큰 눈이 화등잔같이 둥그래서 정신빠진 소리말라고, 집에 꾹 박혀있으라고 을러메지 않았던가. 새침해서 망쇠에게 밥상을 차려준 고비는 곧장 망이네 집으로 건너왔는데 녀자를 깔보긴 오빠도 남편과 한본새였다.

하지만 고비는 그들이 자기를 더없이 아끼고 사랑하는 심정에서 그런다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기에 그는 더욱 몸가까이에서 그들을 위해주고싶었다. 싸움길인데 무슨 일인들 없으랴.…

《그런데 활은 쏠줄이나 알면서 들고있느냐?》

망이는 어이없는듯 고비가 쥐고있는 활을 건너다보며 허구픈 웃음을 가볍게 웃었다.

《저애가 그간 사냥군령감한테 오르내리며 활쏘는 법두 배웠는데 요전날 보니 한다하는 명궁이 됐더라. 너나 제 서방에겐 일체 발설하지 말라구 당부하기에 숨겨왔다만 좀 장하냐?》

누리나의 대견스러워하는 말에 고비는 다시 얼굴을 붉히며 이마를 숙였다. 그제야 망이는 고비의 여린 손가락끝이 자주 터져 피가 흐르던 까닭을 알아차렸다. 엉뚱하다는 느낌보다는 기특하다는 생각이 더 컸다.

고비가 받쳐주는 약주까지 한잔 마시고 아침상을 물렸을 때 마침 망쇠가 왔다. 때아닌 말울음소리를 앞세우고.

《자, 형님.》

망쇠는 마당으로 내려서는 망이에게 말고삐를 내밀었다.

망이는 새벽어스름속에서도 늘씬한 체구가 드러나보이는 준마를 잠시 의혹에 차서 바라보았다. 성칼 사나운 준마는 어서 타기를 재촉하듯 갈기를 휘젓고 앞발을 연신 들었다놓군 하였다.

《웬 말인가?》

《달령성이 보낸거우다. 어서 타시우.》

망쇠가 싱글거리며 망이의 손에 고삐를 쥐여주려고 했다.

《싫네.》

《싫다니? 그럼 병마사란 어른이 걸어다니겠소. 다리까지 성하지 않으면서.》

《엽때 걸어다녔으려니 새삼스럽게 말을 탈것 없네.》

《원, 형님성민 알다가도 모르겠소.》

망이는 대꾸없이 잠시 덤덤히 있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보게, 말을 타면 아마 기분이 뜰테지?》

《거야, 글쎄…》

망쇠는 망이의 중떠보는듯 한 말에 대답을 흐리마리했다.

《사람이란 기분이 뜨면 마음이 방자해지는거요. 마음이 방자해지면 뜻이 외람되기마련이고 뜻이 외람되면 행동거지가 또한 덜되는 법일세.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두말 말게.》

페부까지 스며들도록 오금박듯 또박또박 찍어서 말한 망이는 지팽이를 뚜벅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망쇠는 그의 말뜻을 다는 알수 없었으나 언제나 돋보이는 망이의 인품에 다시금 머리숙어짐을 느끼며 저도 발길을 돌렸다. 곁으로 다가온 흥도리가 그의 손에서 말고삐를 넘겨받으며 웅얼거렸다.

《이거 우리 두령한테서 경을 치게 됐는걸. 그럴바엔 이 말에 북을 싣고 말북을 만들어야지.》

골목길에 나서니 문이 조용히 여닫기는 소리며 두설거리는 물소리며 아낙네들의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피를 내고야말 싸움, 목숨마저 기약할수 없는 싸움길로 남정들을 떠나보내는 부락의 무겁고 긴장한 분위기가 어둠속에 흐르고있었다.

망이곁에 바싹 붙어 걸어가는 고비를 자주 넘겨다보던 망쇠가 의아쩍게 물었다.

《거 형님곁에 붙어가는 조꼬만 총각은 누구요?》

《음.》

망이는 대답대신 일부러 헛기침을 깇었다.

망쇠쪽에 대고 입을 비쭉거린 고비는 쿡쿡 소리죽여 웃었다.

휘익― 어뜩새벽의 맵짠 강바람이 마주 불어왔다.

지팽이걸음이라 자꾸 뒤떨어지던 망이가 바람을 갑시며 쿨룩 기침을 깇었다.

기침소리를 들은 고비가 얼른 망이의 목에 감은 수건을 다시 여며주었다. 망쇠가 아무 소리없이 어데론가 달려갔다.

강녘의 넓은 모래불에는 먼저 나온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쟁그랑거렸다.

《거 풀무령감이 상기 보이지 않는다.》

《그 느리배기아저씨가 벌써 나와요? 이제 배가 떠난 다음에 헐떡거리며 달려오지 않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지우.》

첫소리의 임자는 호미동이의 아버지인 달보같았고 대꾸질하는것은 어펑돌이가 분명했다.

《애매한 자네 손이야 웨 못쓰게 만들겠나. 한바탕 싸움을 앞두고말이여… 한데 난 이거 아무래두 칼이 좀 선데 자네 창과 바꾸세나.》

《언젠 칼이 낫다고 하더니 밤새 무슨 꿈을 꿨수?》

《꿈을 꿨지. 거리대루 두엄 찍어제끼듯 창으루 다 량반놈을 찔러넘기는 본때있는 꿈을 꾸었네. 근데 창대에 꿰여 허우적거리는 그눔들이 어찌 가벼운지 똑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같더라니.》

《아저씨가 꿈에선 장수됐던게로구먼.》

《글쎄… 좌우간 그래서 실지루 어떤가 한번 보자는거네. 창을 내게 주게나.》

《욕심두 많수다. 난 꿈에서두 못봤는데 실지루두 겪어 못보면 어쩌라우.》

《에, 사람두. 꿈얘긴 괜히 했군그래.》

《헤헤… 참, 그러지 말구 거 아저씨 꿈을 나한테 외상으로 파시다나.》

《아니, 그 좋은 꿈을 팔아? 게다가 뭐 외상으루?… 자네 누구한테 장가들려나?》

《생뚱같이 장가얘긴…》

《그렇게 공것을 좋아하는 녀석은 무당의 서방노릇이 제격이니까. 이불속에서는 쥐여사는 주제에.》

호호 소리죽여 웃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재미스럽게 듣고있던 고비가 그만 듣기 거북한 소리가 나오자 민망스러운 나머지 망이의 팔굽을 꼬집었다.

《허, 죄없는 내 팔굽을 왜?… 그러게 가시나가 남정들틈에 끼우는게 아니야. 하하…》

망이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싸움길에 나선 농군들이 혹시 겁을 먹지 않을가 하는 위구심이 없지 않았는데 그들의 쾌활한 말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아지고 배심이 든든해졌던것이다.

《오셨소?!》

오치연이가 곁으로 다가오며 인사를 건네였다.

그는 비록 손에 병쟁기를 들지 않았어도 머리수건에 허리띠를 동이고 행전까지 거뜬하게 친것이 보매 싸움잡도리를 단단히 하고 나섰다는것이 첫눈에 알렸다.

그를 본 망이는 좀 난처한 소리로 물었다.

《선생도 그예 가시려고?… 몸도 편찮은데 그만두시오.》

망이는 어제 그더러 나이도 많은데다 몸도 든든치 못하니 집에 그냥 있으라고 만류했던것이다.

《다들 가는데 어떻게 혼자 떨어질수가 있어야지요. 예로부터 의로운것을 보고 돕지 않는것은 비렬한짓이라 했고 불의를 보고 가만있는것은 비겁한짓이라 했는데 내 어찌 그런 너절한 위인으로 되겠소. 항차 우리 을님이를 구해야 할 싸움길에 말이요. …그새 별고나 없는지…》

오치연은 한숨쉬듯 그러나 결기있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딸을 빼앗긴 후 열에 뜬 사람처럼 늘 눈에 피발이 서 다녔다.

을님이의 말을 하니 망이도 은연중 심기가 좋지 않았다. 공주성에 그가 있어 싸움끝에 그를 만날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을님은 공주성에 있지 않으며 생사의 여부도 알수 없었다.

더우기 이런 사연을 오치연에게 말할수 없는것이 무엇보다 괴로왔다. 이 병약한 늙은이가 딸의 신상에 닥친 일을 알게 되면 얼마나 상심할것인가.

망이는 자기들에게 불행만을 들씌우는 량반토호놈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주먹을 틀어쥐였다.

《선생, 마음을 든든히 가지시우.》

망이는 오치연에게 결기있는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촌개소의 천민들도 오고 복수소에서도 올 사람은 다 모였다.

나이는 많으나 몸집이 다부진 촌개소의 행수 상두는 입이 무거운 성미그대로 망이의 손을 한번 꾹 잡았다놓는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러나 성미가 활달한 복수소의 두령 춘길은 망이를 만나자바람으로 왁자지껄 떠들었다.

《허어, 이거 너무 소래길 치지 마우. 잠자던 공주놈들이 놀라서 깨겠소그려.》

망이도 껄껄 웃으며 응대했다.

《저게 행수, 아니 병마사가 나온게 아니여?》

망이의 말소리를 들은 농군들이 그들께로 다가왔다. 고비는 살짝 자리를 피했다.

봉기군중은 망이를 둘러싸고 《우리 병마사》, 《산행병마사》 하며 환호를 질렀다. 망이는 고향사람들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려니 어쩐지 면구스러웠다.

하늘은 여전히 침침히 흐렸으나 푸름한 새벽빛이 강변에 서리였다.

《의원선생, 내가 오늘의 거사를 꽤 성사시킬수 있을가요?》

망이는 오치연에게 아니라 자신에게 묻듯이 나직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두령답지 않은 말을 하시오.》

오치연이 도리여 엄한 소리로 나무랬다.

《〈손오병서〉에두 장수란 큰 산이 무너져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구 했소. 군사들과 고락을 같이하고 적을 알고 자기를 알며 진격과 퇴각을 맹호처럼 날래게 하면 백번 싸워 지지 아니한다 하였소. 그러니 마음을 굳게 가지시우.》

《고맙소이다. 내 오늘 이 사람들과 생사를 같이하겠소.》

오치연에게 대꾸한 망이는 고개를 쳐들고 힘있게 웨쳤다.

《자, 이제는 계명두 밝아오는데 기별루 움직이시오.》

그러자 넓은 강녘에서는 부르며 찾는 소리들로 한동안 소동이 벌어졌다.

어느덧 수천명농군들이 모여온 강녘은 말그대로 사람바다를 이루었다. 아들과 남편과 오라비들을 싸움터로 보내는 녀인들도수태 나와있었다.

뜻밖에도 방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대하는것을 보니 술막주인 도치였다. 그들은 여기에 나와서도 티각태각하였다.

사람들은 농사군도 아니요 또 부락일에 대해서도 별반 관심이 없던 도치가 생사의 길에 나선것을 자못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도치가 백태의 렴탐군이란것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망이의 용의주도한 준비로 도치는 오늘새벽에야 비로소 부락에 큰일이 벌어졌다는것을 알았다. 그는 당황했다. 이것도 모르고있었으니 백태가 자기를 가만두지 않으리라는 예감으로 가슴이 섬찍했다.

(흙을 주물던 무지렁이들이 공주성을 치겠다구? 닭알루 바위까기지…)

후에 부락놈들과 한몽둥이에 맞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성안에 미리 선통해야겠다고 생각한 도치는 농민들속에 섞여들었던것이다.

망쇠가 달려왔다. 그는 들것채를 든 네명의 장정을 데리고 왔다.

그뒤로 사냥군령감이 따라오고 뜻밖에도 범잔녀까지 낫을 들고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달령성은 보이지 않았다. 어제밤 공주성안에 스며들어간 그는 망이네의 공격과 때를 같이하여 성안에서 내응하기로 약조되여있었다.

《자, 형님 이제는 올 사람도 다 온것 같은데 출전합시다. 그리구 형님은 이 들것에 앉아가시우.》

망쇠는 이번에 거절해선 안된다는 투로 마지막말에 힘을 주었다.

마다할줄 알았는데 망이가 순순히 응해나섰다.

《그리합세.》

망이는 들것에 담겨 고향으로 돌아오던 생각을 했다. 백가신이는 그의 다리를 분지르고 그를 죽여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는 죽을수 없었다. 끝까지 살아서 철천의 한을 풀어야 했다.

문득 아버지가 생각났다.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그가 네살때 세상떠난 아버지였지만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 알고있다. 백가신이는 아버지를 자루속에 넣어 고마강에 던져 죽였다고 했다. 그때 아버지는 이렇게 웨쳤다고 한다.

《오늘은 네놈들이 내 명줄을 끊어놓는다만 장차 우리가 네놈들을 타고앉아 목줄띠를 누를 날이 있을게다.》

드디여 그날이 왔다. 놈들의 목줄띠를 누를 날이 오고야말았다.

(천신이여 도와주소서!)

구레나룻이 덮인 망이의 둥그런 얼굴은 벌겋게 피가 번지고 크지 않은 두눈은 열기로 번들거렸다. 그 번들거리는 눈에서 섬광같은것이 가끔 번쩍거렸다.

《형님, 이젠 떠납시다.》

조급히 서두르는 망쇠를 오치연이 침착한 어조로 제지했다.

《가만 출전식인데 어떻게 그냥 떠나겠소. 사방수호신에게 례도갖추고 또 병마사가 한마디 해야 할것 같소.》

《그러믄요. 훈사가 있어야지요.》

모두 긍정해나섰다.

농민군들이 망이의 주변에 더욱 몰려들었다.

하늘은 여전히 무겁게 침침히 흐려있었다. 그래도 동녘은 새벽다웁게 푸름해졌다. 강대안의 산탁이 거밋한 형체를 뚜렷이 드러내고 바래여가는 새벽어둠속에서 강물은 쇠빛을 띠였다.

망이는 엄숙하게 동녘을 향해 칼을 땅에 꽂은 후 그앞에 무릎을 꿇고앉았다. 그를 뒤따라 수천명의 농민군도 땅에 무릎을 꿇었다.

강변에는 잠시 긴장한 침묵이 깃들었다.

이윽하여 망이는 동녘을 간절한 눈길로 우러르며 입을 열었다.

《동, 청―룡―!》

웅글은 소리로 절절히 부르짖은 망이는 동쪽 수호신인 청룡에게 경건히 절을 세번 하였다.

《바―이―》

농민군들도 일제히 화답하며 절을 하였다.

마치 깊은 굴속에서 울려나오는듯싶은 저력있는 묵중한 소리가 건너편산에 메아리치며 새벽의 푸른빛이 서린 강반에 서서히 울려퍼졌다. 망이는 서켠으로 돌아앉아 칼을 꽂고 서쪽 수호신을 또 절절하게 불렀다.

《서, 백―호―!》

《바―이―》

그의 선창에 뒤따르는 웅글은 화답소리.

망이도 농민군들도 가슴속이 찌르르 저려들며 눈굽이 뜨끔하였다.

다음으로 망이는 남쪽으로 돌아앉아 《주작》을 부르고 계속해서 북쪽의 《현무》를 불렀다. 이렇게 동서남북의 네 수호신을 불러오는 의식은 엄숙하고 경건하게 진행되였다.

하늘에서 선뜩선뜩한것이 떨어졌다. 진눈까비였다.

비도 아니요 눈도 아닌 그것은 화끈 단 화로전에 물방울을 뿌렸을 때처럼 흥분한 사람들의 기세를 더욱 돋구어주었다.

망이는 얼굴에 처덕처덕 들어붙어 녹아내리는 진눈까비를 세면이나 하듯 손바닥으로 뻑 훔치고나서 갈린듯 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농군들, 우리는 두더지처럼 평생 흙을 주무르는 백성들이요. 흙을 주물러 낟알을 내여 사람들을 먹여살리는것이 우리 업이였소.

그러건만 우리는 한뉘 헐벗고 굶주리고 천대를 받아왔소. 피와 땀으로 쌀을 내여 세상을 먹여살리는 우리는 굶어죽게 되고 손끝에 흙 한점 묻히지 않는 저 백가신이같은 공주성의 량반토호놈들은 술과 고기더미에 싸여 개, 돼지에게도 쌀밥을 퍼먹이고있소.》

망이의 음성은 높지 않았으나 사람들의 가슴깊이 파고드는 절절한 그 무엇이 있었다.

망이는 머리에 동여맨 수건을 풀어내렸다. 그러자 정수리에만 겨우 솔잎상투라고 삐죽할뿐 온통 거푸시한 더벅머리가 드러났다.

《자, 이 머리털을 보시오. 량반토호놈들은 우리것을 빼앗다못해 이제는 부모가 준 이 머리칼마저 빼앗고 기르지도 못하게 하고있소. 사람으로 태여나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고 살다가 이제는 굶어죽게까지 되였으니 이보다 더 원통한 일이 어데 있겠소?… 벌도 침이 있거늘 그래 우리가 그대로 죽어야 옳겠소?… 아니 그럴수 없소. 우리를 죽이려는 놈들을 요정내야 하오. 물이 불을 이기듯이 선한 우리는 악한 그놈들을 이기기마련이요. 기운들을 내시오. 공주성을 물에 잠가버리듯이 공주의 량반토호놈들을 쓸어버립시다.》

이글거리는 눈길로 군중을 둘러본 망이는 지금껏 손에 쥐고 흔들던 머리수건을 땅에 던져버렸다.

그의 말에 격동된 군중들도 머리수건을 풀어 땅바닥에 던졌다.

솔잎에 덮이는 눈처럼 갓 돋기 시작한 까시시한 그들의 머리칼에 진눈까비들이 내려앉았다. 망이의 호소에 열렬히 호응하는그들의 머리우로 창이며 칼이며 몽둥이며 쇠스랑이들이 숲처럼 솟아오르고 기폭들이 나붓겼다. 말그대로 충천의 기세였다.

망이는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아들고 강건너편으로 힘있게 내리그었다. 어펑돌이가 《산행병마사》기폭을 높이 쳐들고 흥도리가 말등에 달아맨 북을 둥둥 기운차게 울렸다.

《우여!》

격동된 농민봉기군은 거센 흐름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점 굵게, 점점 세차게 퍼붓는 눈발은 격양된 봉기군들의 기세를 더욱 흥분케 하였다.

《젠장, 밀치지 말라구.…》

물녘으로 달려간 사람들은 서로 먼저 배에 오르겠다고 분주탕을 피웠다.

《제길, 한꺼번에야 다 탈수 없지 않나. 그렇게 서둘께면 왜 외할미 배속에서 나오지 못했나.》

《자자자 물에 떨어진다아―》

정말 밀각질에 누가 물에 떨어지는지 첨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웃음소리, 욕지걸소리…

이런 소요속에 무슨 궤짝같은것을 짊어진 풀무령감이 강녘으로 비집고나왔다.

《히히, 내 뭐랍디까. 손에 장을 지지지 않나 보라구.…》

어펑돌이가 히물거리는데 달보는 풀무령감의 팔을 붙들었다.

《아니, 령감 공주로 황아장사하러 가려오?》

《큰일났는데.》

풀무령감은 달보의 손을 털어버리고 그냥 앞으로 비집고나갔다.

《등에 진건 대체 뭐요?》

달보는 따라나가며 물었다.

《늬들 무지렁이들이 종자를 베고 죽을 때 난 풀무를 베고 죽으련다.》

풀무령감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소리쳤다.

《병쟁기가 무디면 누가 벼려준다든? 그러니 전장가까이에 야장이 있어야 할게 아닌가?》

《그러니 입풀무가 바람풀무를 지고가는군, 허허.》

《풀무령감이 거 료량 잘했다.》

혀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풀무령감을 통해서도 새로운 감동을 받았다.

붐비는 사람들속에 끼워버린 고비는 저도 어쩔수없이 물녘으로 떠밀리워갔다. 농사군들의 흙냄새, 땀냄새가 풍겼다. 빨리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거칠게 잔등을 떠밀면서 어디서 요렇게 조그마한게 다 끼워들었다고 비양하는 축들도 있었다.

고비는 병마사가 된 오라버니의 곁에 붙어있을걸 공연히 떨어져서 이런 난통을 겪는다고 속으로 옹알거렸다. 그는 혹시 남편이라도 보이지 않을가 해서 고개를 쳐들고 두리번거렸다.

《이거 정말 이렇게 밀치겠어?》

역증을 내며 뒤로 팔굽질하던 어펑돌이는 물큰하고 팔굽에 마쳐오는 류다른 감촉에 얼핏 고개를 돌려보았다. 눈섭에 맺히는 물방울을 털어버리고 고비의 얼굴을 떼꾼해서 들여다보던 어펑돌이는 저도모르게 환성을 질렀다.

《고비?! 아니, 아주머니까지 다… 야 이거, 헤헤… 무섭지 않수?》

《쉿.》

고비는 질색하여 어펑돌이의 말을 밀막았다. 사내들속에 끼운것이 드러날상싶어 부끄럽기도 했지만 보다는 녀자라고 해서 자기를 얕보고 동정하려드는것이 싫었던것이다.

그의 마음을 알았다는듯 능청스럽게 눈을 끔벅인 어펑돌이는 고비의 곁에 붙어서서 사람들이 근접 못하도록 왁살스럽게 떠밀었다.

고비는 그가 보호자연하는것이 더욱 민망스러워 픽 소리내여 웃으며 고물쪽으로 빠져나가 노대를 잡았다.

《엉?…》

놀란것은 어펑돌이뿐이 아니였다. 진눈까비가 휘뿌리는 속에 노대를 잡고 어엿이 서있는 담대한 《소년》, 사람들은 그가 망이대신 이 나루배를 부리군 하던 아녀자인 고비란것을 알아보았다.

웃음소리도, 실없는 롱지거리도 없었다. 숭엄한 기분에 휩싸인 침묵이 흘렀다. 이 침묵속에서 그들은 오늘 거사의 큰뜻을 새삼스럽게 가슴뿌듯이 느꼈던것이다.

큰배, 작은배 할것없이 아근의 배들을 다 끌어다가 강을 건넌 농민군은 이어 공주로 가는 큰길에 올랐다.

들것우에 높이 앉아가는 망이의 뒤로 《산행병마사》기폭이 휘날렸다.

강물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커지듯이 유성촌을 지나 공주로 가까이 가는 사이에 주변의 농군들이 합세한 대오는 자꾸만 불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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