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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7 회


제7장 칼날아래 죽을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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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련은 석양녘에 해를 관하느라고 마루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지는 해를 바라보느라면 그것이 북 달아맨것으로 보일 대신 어머니나 아버지 그리고 많이는 망이의 둥그런 얼굴로 보이군 하여 매양 애절한 심뇌에 잠기게 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속세와 인연을 끊는다는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럴 때마다 무련은 자기의 약한 마음을 질책하군 했다. 달마라는 천축국(인디아)의 중은 자기의 심신을 수련하고 멸신고행하느라고 십년동안이나 가부좌를 하고 앉은 자세로 밥을 먹고 쪽잠을 자면서 한번도 자리를 일지 않고 오직 일심전력으로 념불만 외우다보니 나중엔 앉은뱅이가 되였다고 한다. 그런 고명한 사미에 비하면 자기같은 유약한 비구니는 불성을 터득할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한편 곰곰히 생각해보면 불성을 닦을 여유도 없었다. 머리에는 비록 송낙(녀자중들이 쓰는 고깔)을 쓰고 또 몸에는 치마저고리대신 장삼을 입었어도 하는 일은 속세에서와 다름없는 잡일이였다. 집에서보다 더 험하고 더 힘든 일을 했다. 고역을 치르는것은 자기뿐이 아니였다. 가만 살펴보니 외형은 똑같은 중일지라도 그들속에도 속세와 같이 엄연한 구별이 있었다. 량반이나 호족은 중이 되여서도 귀한 존재로 우대를 받았고 천한 사람들은 중이 되여도 《잡승》으로 불리우면서 고역을 치르고 천대를 받았다. 결코 다같은 석가불의 제자라고 하여 평등한 취급을 당하지는 않았다.

잡승들이 불평을 부리고 꾀를 피울라치면 무광대사는 고생을 참고 견디여야 래세에 극락으로 간다고 설유하군 했다. 그래도 말 듣지 않는 잡승들은 사옥(절간감옥)에 가두고 며칠씩 굶기였다. 워낙 절간에는 감옥이란 없는 법인데 무광은 속세의 관청에서처럼 홍경원에 옥까지 만들어놓았던것이다.

며칠전에도 무련은 우연히 사옥앞을 지나다가 거기에 갇혀있는 상좌중 혜명이를 보았다. 혜명은 며칠을 굶었는지 기력없이 창살을 짚고서서 《물, 물 좀 주오.》하고 한손을 내밀며 가느다란 소리로 애걸했다. 영채가 총총하던 눈언저리가 컴컴하게 죽고 입술은 허옇게 조갈이 나있었다. 무련은 가슴이 울렁거려 잠시 망설였다.

동정심이 북받쳐 그대로 지나칠수가 없었던것이다. 그러나 결국 파수보는 중한테 쫓겨 자리를 뜨고말았다.

그날밤 잠자리에 누운 무련은 혜명의 가긍한 모습이 자꾸 눈앞에 밟혀 잠들지 못했다.

오죽 배가 고프고 오죽 목이 마르면 그처럼 구차스럽게 손을 내밀었으랴. 그런데 무슨 죄를 짓고 사옥에 갇히웠는지 몹시 궁금스러웠다. 착하고 령리해보이는 그가 파계의짓을 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옥에 갇히기 전날에도 그는 자기, 무련이를 도와주지 않았던가.

그날아침 무련이가 대중공양(공동식사)을 끝내고 암자로 막 돌아왔을 때였다. 새로 지은 주지의 버선을 가지러온 혜명은 솜버선을 찬찬히 여겨보더니 《참 곱게 지었소. 절에서 늙긴 아깝군.》하고 례의를 지어서 내는듯 한 탁한 소리로 무련의 바느질솜씨를 치하하는것이였다.

올적마다 인차 자리를 뜨지 않고 또 시큰둥한 소리를 곧잘하는것이 언짢아 무련은 대척하지 않고 일감을 마르기 시작했다. 볼일을 봤으면 어서 갈게지 녀승의 방에 뭣때메 머물러있단 말인가. 별 렴치없고 눈치없는 사람도 다 있다고 속으로 아니꼽게 여기고있는데 문득 혜명이가 자기더러 속세에서 부르던 이름이 을님이가 아닌가고 묻는것이였다. 자기의 본래이름까지 알고다니는것이 하도 어이없어 무련은 잠간 고개를 쳐들어 혜명이를 쏘아보았다. 그런데 의외에도 혜명의 표정은 심중하였다.

《글쎄 어쩐지 내 짐작이 그럴것만 같아서…》하고 중얼거린 혜명은 백태라는 벼슬아치를 아는가고 물었다.

잊으려고 애썼고 또 잊어버리기도 한 그 이름을 또다시 듣자 무련은 저도모르게 진저리가 쳐졌다. 무련이를 지켜보던 혜명은 문쪽을 흘끔 돌아보고나서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앉아 숨죽인 소리로 하는 말이 어제저녁에 공주에서 돌아온 융대가 주지스님에게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백태란 량반이 홍경원의 비구니들속에 을님이란 녀인이 없는가고 묻더라는것이였다.

《주지스님께선 뭐라고 하시더이까?》

무련은 가슴이 두근거려 다우쳐물었다.

《일체 발설하지 말라구 오금을 박으시더군.》

무련은 안도의 숨이 나갔다. 고마운 주지스님…

《좌우간 그리 알구 문간수를 잘하시우.》이렇게 당부하고나서 혜명은 자리를 떴다.

무련은 자기를 위해 이처럼 왼심을 쓴 혜명이가 지금 옥에 갇혀있는데 아닌보살을 할수가 없었다.

저도 어쩔수 없는 힘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난 무련은 어둠속에서 옷을 찾아입었다. 그러나 다음순간, 혜명이가 장실(남자중)이란데 생각이 미쳐 도로 주저앉아버렸다. 가뜩이나 시비질을 잘하고 뒤소리를 좋아하는 융대와 같은 중들이 자기와 혜명이를 두고 몹쓸 추문을 퍼뜨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어서였다. 할일없이 건들거리는 장실들은 그렇지 않아도 녀승들에 대해 온갖 잡소리를 다하는판이였다.

무련은 다리를 모두어잡고앉아 세운 무릎우에 고개를 숙였다. 잠은 말짱 달아나버리고말았다.

수림을 흔드는 찬바람소리가 귀가 시리게 울렸다. 방안은 싸늘하게 랭기가 풍겼다. 한지나 다름없는 사옥에서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시달리고있는 혜명이가 몹시도 불쌍하게 생각되였다. 파수보는 중도 지금쯤 추위에 쫓겨 승방에 들어가 잠에 곯아떨어졌을것이다.

무련은 더 참고 견딜수 없어 목도리를 두르고 문을 열었다.

밖은 아궁속처럼 캄캄했다.

손더듬질로 짚신을 찾아신은 무련은 토방아래에 내려서서 잠시 다른 승방의 동정을 살폈다.

쌕쌕거리는 젊은 비구니들의 코고는소리, 쿨쿨거리는 늙은 비구니들… 극락에서 헤매는지 지옥에서 헤매는지 녀승들은 깊은 잠에 들었다.

그래도 마음을 놓을수 없는 무련은 숨소리를 죽여 발볌발볌 부엌으로 다가갔다. 어두운 부엌에서 저녁에 먹다남은 대궁밥을 조심스럽게 찾아내여 베보자기에 담았다. 밥속에는 된장도 한덩이 박아넣었다.

밖에 나선 무련은 사옥쪽으로 종종걸음쳤다. 가슴은 불안과 무섬증으로 몹시 두근거렸다. 사옥이 가까와질수록 심장이 더욱 세차게 쿵쿵거렸다. 심장이 뛰는 소리를 누가 들을것만 같았다. 그는 사옥의 뒤모퉁이에 붙어서서 가쁜숨을 몰아쉬며 파수중을 찾아보았다. 인기척이 없었다. 이렇게 추운 밤에 누가 밖에서 떨고있겠는가.

저으기 마음이 놓인 무련은 그래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사옥앞으로 가만가만히 다가갔다. 굵은 참나무창살이 손에 잡혔다. 사옥안도 조용했다. 혜명이가 잠든 모양이다.

무련은 다행이다싶어 재빨리 품에 안고온 밥보자기를 창살틈으로 디밀어 바닥에 놓았다.

《거, 누가?!…》

별안간 겁에 질린 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혜명이는 자지 않고있었다. 하긴 이 추위에 한지에서 잠들수 있으랴.

무련은 흠칫하고 창살에서 비켜섰다.

《누구시우?》

혜명이가 떨리는 소리로 재차 물었다.

무련은 대척하지 않았다. 단지 동정에 지나지 않는 자기 거동을 그가 이상하게 여기고 남다른 생각을 품게 될가봐 두려웠던것이다.

비실비실 뒤걸음질로 물러서던 무련은 반달음을 놓다싶이 암자로 돌아왔다.

무련은 다음날 밤에도 남몰래 밥덩이를 가져다주었다.

이틀뒤, 무련이가 간밤에 내린 마당의 싸락눈을 쓸고있는데 혜명이가 찾아왔다. 사옥에서 풀려나오는참 곧바로 오는 길이라고 했다.

며칠사이에 몰라보게 살이 빠지고 낯색이 퍼렇게 언 혜명은 별로 어줍어하며 말없이 다가와 무련의 싸리비를 빼앗아쥐고 제가 마당을 쓸었다.

뒤전에 물러난 무련도 거북스러움을 느끼며 찬손을 주물고 서있었다.

수걱수걱 비질을 하던 혜명은 허리를 펴더니 무련을 이윽히 바라보며 밑도끝도 없이 한마디 했다.

《고맙수.》

《… …》

그가 말하는 뜻을 짐작한 무련은 얼굴이 좀 뜨끈했다. 그랬어도 아닌보살하고 대꾸하지 않았다.

《그 밥이 아니였다면 난 죽었을지 모루.》

《무슨 밥?…》

그냥 잠자코 있을수가 없어 무련은 놀라는 시늉을 했다. 침묵은 긍정하는것으로 되기때문이다.

《숨기지 마우. 그녁이 아니고 누가… 난 다 아우.》

정기가 빛발치는 혜명의 눈빛은 감사의 정만이 아닌 그 어떤 의미심장한 뜻을 담고 무련이를 쳐다보고있었다. 심상찮은 눈빛… 무련이가 두려웁게 생각한 그것이 바로 혜명의 눈에서 엿보였다. 무련은 서둘러 그의 속뜻을 부정해나섰다.

《장실이가 무슨 말씀 하시는지 난 도제 모르겠어요. 어서 가셔요.》

무련의 매정스러운 말에 비자루를 땅에 떨어뜨린 혜명이가 갑자기 앞으로 다가서며 그의 두손을 잡았다.

깜짝 놀란 무련은 기급해서 그의 손을 뿌리치며 뒤로 화딱 물러섰다. 그는 혜명이가 다시한번 이따위 짓거리를 할 때엔 뺨이라도 때릴 잡도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더욱 놀란것은 혜명의 다음말을 들었을 때였다.

《언니!…》

《?!…》

혜명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고 눈에는 난데없는 눈물이 그렁거렸다.

《무련언니, 난… 장실이가 아니라 언니같은 비구니와요.》하고 가까스로 말한 혜명은 얼굴을 돌렸다.

말씨가 달라졌다. 녀자다웁게 부드럽고 맑은 음성이였다.

지금껏 사내로 알고 경계해오던 혜명이가 별안간 녀승이라고 하는 바람에 무련은 당황해졌다. 그는 의혹이 짙은 눈길로 고개를 떨구고 서있는 혜명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쏙 빠진 해사한 목, 동실한 어깨며 봉긋한 가슴… 그러고보니 혜명이가 녀인이란것이 대뜸 알렸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무련은 여직껏 속은것이 어처구니없었다. 속아도 여간만 속았는가. 바보처럼 알쭌히 속아넘어가지 않았는가. 혜명에 대한 노여움이 가시처럼 그의 가슴을 찔렀다. 어쩌면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사람을 그렇게 속일수 있담.…

《언니, 욕하지 마시와요.》

이윽고 고개를 쳐든 혜명은 애원하는 눈길로 무련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또한 하도 애처로와 무련은 가슴이 아팠다. 비구니가 장실이노릇할 때에는 피치 못할 사연이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저…》

무련은 갑자기 말투를 바꾸려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아 좀 우물거리다가 말없이 먼저 승방쪽으로 향했다.

방안에 들어가 이야기하자는 뜻을 알아차린 혜명이도 지척지척 그를 뒤따랐다.

방에 들어온 혜명은 무릎을 모으고 얌전히 앉았다. 둘사이에는 서먹하고 따분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전 언니가 우리 가람에 첨 왔을 때부터 언니와 사귀고싶었어요.》

혜명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언닌 저한테 통 곁을 주지 않더군요. 하긴 내가 자기를 숨겼으니 그럴수밖에 없었겠지요.》

《한데 왜 장실이구실을 했수?》

무련은 혜명의 아픈 곳을 건드릴가 저어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혜명은 무련을 한번 쳐다보고나서 눈길을 내리깔았다.

《그렇게 됐어요.》

혜명은 한숨을 내쉬였다.

그가 대답을 피한다는것을 알아차린 무련은 말머리를 돌렸다.

《한데 사옥엔 왜 갇히웠댔수?》

《그저… 그렇게 됐어요.》

혜명은 또 대답을 피했다.

말못할 사연이 있는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한 무련은 무슨 말을 더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는 말없는 혜명이가 까닭모르게 측은해졌다.

불행한 사람들은 대체로 말이 적은 법이다. 하기에 말많은 사람들은 시비와 비난의 대상으로 되지만 말없는 사람들은 동정을 받게 되는지 모른다.

《밤이여서 누군지 분간할수 없었어도 난 언니인줄 인츰 알았어요. 언니가 아니구야 우리 가람에서 누가 그런 적선을 베풀겠어요?》

구태여 숨길 필요가 없다고 여긴 무련은 그의 말을 막았다.

《고생하는 사람을 돕는거야 인륜의 상정인걸요.》

《하지만 세상인심이 어디 그래요?》하고 말한 혜명은 갑자기 얼굴을 싸쥐고 끅끅 흐느껴울기 시작했다.

그가 우는 영문을 알길 없는 무련은 달랠 말을 고르지 못해 그저 갑자르기만 했다.

《언닌 왜 비구니가 됐어요?》

얼마후 울음을 멈춘 혜명은 손등으로 눈굽을 훔치며 물었다.

무련이가 대답을 망설이자 혜명은 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나서 물기어린 소리로 말했다.

《난 어려서 멋모르고 이길에 들어섰지만 언닌 왜서 세상을 버렸어요. 여기가 뭐 사람 살 곳이라구… 난 원래 황려현에서 살았는데 열살났을적에 빚값으루 여기 홍경원에 끌려왔어요. 광대노릇하던 아버진 날 여기에 데려다줄 때 3년후에는 꼭 도로 데려간다구 하면서 힘없이 걸음을 돌리더군요. 홍경원에서두 내가 3년만 주지의 곁에서 심부름을 해주면 놓아보내겠다고 약정했다나봐요. 그런데 어디 그렇게 돼요. 지금껏 10년이 되도록 이 모양인걸…》

《여기 온 후로 부모님들을 못보았수?》

혜명은 서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문에 들으니 역병에 돌아갔다구두 하고 세상을 등진 초적이 됐다고도 하구… 흥도리라는 사내동생두 있는데 그애가 보구싶어 못견디겠수.》

혜명의 눈에는 한없는 애수의 빛이 담겼다.

무련이도 부지중 그리운 부모님들생각이 떠올라 가슴이 찌르르 저려났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나서 위안조로 말했다.

《어찌겠어요. 불가의 몸이 됐으니 속세를 잊어야지요. 부처님을 독실하게 믿으면 가슴속상처두 아물겠지요.》

이것은 혜명이보다 무련이 자기 심중에 대고 하는 말이였다. 그런데 혜명의 눈빛이 느닷없이 날카로와지고 숨결도 거칠어졌다.

《부처를 믿어요? 흥, 언닌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난 뭐 첨부터 부처를 믿지 않으려구 한줄 알아요. 어디 믿게 되여야지요. 주지스님이란이두 겉으룬 세상 거룩한분같아도 알고보면 얼마나 음충맞은 늙으데기라구… 겉에는 승의를 걸치구있어두 실상 중은 아니예요. 참말루 수도하는 스님들이야 어디 그래요.》

혜명의 뜻밖의 말에 무련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예요. 주지스님이 사미(중)가 아니라니?…》

《사실 그래요. 언젠가 나한테두 자기는 사미가 아니라 속인이라 하던데요. 무엇때문에 사람으루 태여나 사람할노릇을 못하고 산속에만 처박혀있겠는가고 하면서… 죽어서 극락간다는건 다 쓸개빠진 소리구 살아생전에 락을 보는것이 자기가 할 일이라면서 말이예요. 지금두 시주 받으러 사처로 떠돌아다니는건 다 구실이고 실은 속세에 있는 자기 첩들 집을 다니러 가는거예요. 그래서 다른 절의 스님들은 우리 홍경원에선 사미아닌 속인이 〈주지〉노릇한다구 얼마나 흉을 보는지 몰라요.》

《설마…》

무련은 혜명의 말이 도대체 믿어지지 않았다.

《설마가 뭐예요. 내가 버젓한 비구니가 되지 못하구 엽때 장실이노릇하는것도 실은 다 그 늙은이때문이야요. 내가 열살나서 이 절에 첨 왔을 때부터 그 늙은인 나한테 사내옷을 입히고 사내흉내를 내도록 하지 않겠나요. 말투까지 총각애들처럼 데퉁스레하라고 강박하면서. 그러찮음 뭐 범이 잡아먹게 산속에다 버리겠다나요. 난 정말 그렇게 될가봐 겁이 나서 억지루 사내흉내를 내게 됐어요. 그러다보니 나두모르게 사내번지개가 됐나봐요. 어려서 철없을 땐 미처 몰랐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다 음충한 계책으로 그랬더군요.

요새 난 하루도 살고싶은 생각이 없어요. 지옥인들 이보다 더한 지옥이 어디 있겠나요. 낮이면 저 굴속에 있는 로망하는 옛 주지스님의 시중으로 들볶이고 밤이면 무광대사의 시중으로 시달쿠고… 다리를 주물러라, 잔등을 긁어라, 그리구… 그 늙데긴 제 말을 듣지 않는다구 며칠전에두 날 사옥에 가둔거예요. 남들이야 나를 사내로 아니 주지가 그따위짓을 하리라고 꿈에나 생각하겠어요. 남의 눈을 속이는데 정말 이골이 난 늙은이라우. 글쎄 생각 좀 해보라요. 스님두 아닌게 스님흉내를 얼마나 잘 내나… 이 절에 자주 오는 융대란 놈두 실은 무광이와 꼭같은 족속이야요. 사미두 아닌게 지장행세를 하면서 말이예요.》

혜명의 말이 너무도 뜻밖이여서 무련은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수 있는가. 선행을 그처럼 도도하게 설유하던 거룩한 주지스님이 그리고 개미조차 밟을가봐 그처럼 걸음마저 조심하던 갸륵한분이…

무련은 혜명의 말을 사실로 믿으려니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그러나 믿지 않을수 없는것이 혜명이의 눈빛이며 어조가 너무도 심각했던것이다.

그는 지탱해보려고 애쓰던 마음속기둥이 끝끝내 허물어져내리는것을 느꼈다. 허무감이 그의 가슴에 서리를 쳤다. 그것은 꿈속에서 그 무엇인가 한없이 크고 귀중한것을 얻고 기뻐하다가 잠에서 깨여났을 때 느끼는 그런 아쉬움이나 허무감이 아니였다.

무련은 어쩐지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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