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 회
제7장 칼날아래 죽을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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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대보름 연등절을 맞은 공주성안팎은 오색찬연한 등불로 불야경을 이루었다.
련련히 잇닿은 기와집들의 추녀끝에는 고운 물감을 들인 홍사청사 초롱불들이 매달려 밤바람에 흔들거리고 초가집들의 추녀에도 비록 작고 보잘나위 없어도 식구수만한 등불은 매달려있었다.
한해의 행운과 농사의 풍작을 천신에게 기원하며 번뇌와 무지로 가득찬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쳐주는 부처의 공덕을 칭송한다는 의미에서 이날 부유한 사람들은 집집마다 등을 밝게 켜놓고 술과 다과, 춤과 노래로 하루밤을 마음껏 흥청거렸다.
공주일대의 가장 큰 세력가요 부호인 백가신의 집은 그 어느 집보다 등불이 휘황했고 손님들로 흥성거렸다.
솟을대문의 네 처마끝에는 물론 담장우에도, 담장안의 여러채에 달하는 커다란 가옥의 추녀와 기둥에도 붉고 푸른 등불들이 매달려 현란함을 다투고있었다.
담장밖은 명절놀이 구경온 사람들로 붐비였다. 정월대보름때마다 백가신네 연등놀이가 제일 볼만 했기에 산에 달맞이가는 총각들이나 다리밟이가는 처녀들이 한번씩은 기웃거렸다. 구경군들로 겹담을 두른 뒤에는 몸종에게 초롱불을 들리우고 몽수로 얼굴을 가리운 량반집 녀인네들도 있었다. 오늘밤만은 그들도 규방을 벗어나 자유로이 명절을 즐길수 있었다. 그들은 담장안에서 울리는 풍류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솟을대문쪽에 우구구 모여선 거지들은 념불에는 맘이 없고 제밥에만 맘이 있다는 표정으로 행여나 대문이 열리고 시주음식을 뿌려주지 않을가 하여 추위에 이발을 덜덜 부딪치면서도 근기있게 자리를 지키였다.
이들을 쫓아내며 솟을대문앞에는 각설이떼가 밀려들었다. 각설이는 건달군, 난봉군, 부랑배, 왈짜 등 온갖 오사리잡놈들로 이루어진 거지아닌 《거지》떼였다. 이 멀쩡한 사족성한 병신들은 우야 누데기를 걸치고 바보시늉, 병신시늉을 하면서 밤새 소란을 피우는데 그 검질긴 분주탕에 견디지 못한 주인집에서 얼마간의 돈이나 재물을 내다줘야만 물러갔다. 돈을 주기 전에는 밤이 열둘이라도 물러가지 않으니 불벼룩같은 각설이떼를 만난 집은 녹아나기 마련이였다. 그렇게 돈을 빼앗아쥔 각설이들은 곧 누데기를 명주옷으로 갈아입고 술집이나 기생집으로 몰려가 새벽까지 질탕거리며 놀아대군 했다.
《에―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에―》
얼굴에 검댕이칠을 하고 누데기를 걸친 한 각설이가 몸을 별나게 비틀며 곡조를 달아 소리를 뽑았다. 그러자 수십명의 다른 각설이들이 소래기를 지르고 발을 구르고 손벽을 치면서 돌아쳤다. 이들의 소란에 백가신의 담장안의 풍류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대문이 열렸다. 하지만 각설이들에게 차례진것은 돈대신 서슬푸른 창대였다. 주인집을 잘못 택했으니 가련한 각설이들이다. 그들이 불벼룩이라면 백가신은 불벼룩의 간도 뽑아먹을
《특전》을 받고 담장안 뜨락에 불리여들어간 사람들도 호사스럽지는 못했다. 그들은 백가신에게 자기들의 장끼를 보여주고 돈, 천이나 얻어가려고 각곳에서 모여온 떠돌이재인(광대)들이거나 돌팔이무당들이였다.
넓은 대청의 섬돌아래에 웅기중기 모여선 그들은 차거운 밤날씨에 모두 퍼렇게 얼었다. 밝은 불빛이 쏟아져나오는 대청마루쪽을 지켜보는 눈초리들은 혹시 불리우지 않아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면 어쩌랴 하는 초조와 불안으로 굳어져있었다.
이윽하여 대청의 미닫이가 열리더니 옆구리에 베필을 낀 요술쟁이젊은이가 싱글벙글하며 마당에 내려섰다. 불붙는 초꽁다리를 입에 넣었다가 불이 켜있는채로 입에서 토해놓는 그의 신기한 재주에 백가신이도 만족했던지 상금을 후하게 준 모양이였다.
뒤이어 나온 코밑수염을 재수없이 갈라붙인 서사 림가는 오만한 눈길로 뜨락의 사람들을 잠시 일별한 후 거드름스럽게 호명했다.
《다음은 부여서 왔다는 박무당―》
《네에―》
기다렸던듯 탄성을 지르며 차림새가 울긋불긋한 무당이 성급히 섬돌우로 올라갔다. 림가는 젊고 예쁘장한 무당의 볼을 슬쩍 꼬집으며 징글맞게 씨부렁거렸다.
《네가 그렇게 령험하다지. 어서 들어가 잘하도록 해. 돌아갈 땐 나를 만나구. 알겠지?》
그들이 대청안으로 사라지자 뜨락에서는 탄식같은 한숨소리가 불안한 웅성거림에 뒤섞여 퍼졌다. 밤은 깊어가는데 아직도 호명을 기다리는 광대들이 많았던것이다.
가야금을 든 벙어리 막세도 초조한 눈으로 곁에 서있는 달령성을 바라보았으나 탈바가지를 쓴 그의 표정을 알길이 없었다. 공주성을 렴탐하기 위해 청주의 광대로 가장하고 오늘 여기로 온 그들은 낮동안 성내의 곳곳을 살핀 다음 마감으로 백가신네 집으로 왔다.
사람들의 얼혼을 빼앗는 젊은 무당의 기괴한 푸닥거리도 드디여 끝났다.
《이번엔 청주서 왔다는 탈놀이광대―》
림가의 호명소리를 들은 달령성은 안도의 숨과 함께 갈마드는 긴장을 느끼며 대청안으로 들어섰다.
색등롱을 줄느런히 달아맨 대청안은 낮처럼 밝았고 숯불이 이글거리는 청동화로를 네 모서리에 놓아두어 후끈하니 더웠다. 장지문을 떼버리고 그우에 비단휘장을 드리워 방안과 대청을 구분해놓았는데 역시 대청처럼 밝고 넓은 장판방에는 주인 백가신이며 손님량반들이 술상을 벌려놓고 앉았다.
고을에서 제노라고 뽐내는 벼슬아치들은 이 방안에 다 모여온듯 싶었다. 백가신의 곁에 앉은 풍채좋은 공주지주사는 포식을 한 모양 말없이 씩씩거리고있었다. 그는 개경에서 공주원으로 임명되여 내려온 첫해에 백가신이를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정사를 펼쳤다가 톡톡히 쓴맛을 보았다. 고을의 아전놈들과 향리들이 자기앞에서 굽신거리긴 했어도 무슨 일 하나 제대로 되지 않는것이였다. 후에야 그는 상호장 백가신이가 실은 보이지 않는 줄로 그들모두를 조종하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공주일대의 뿌리깊은 유력자요 가장 큰 부호인 백가신이와 엇서싸우는것보다는 차라리 그와 손잡는 편이 훨씬 리롭다는것을 깨달은 공주원은 이후로 무슨 일이든 그와 의논하여 처리하군 하였다. 고을원으로 부임해있는 몇해동안 공주일대를 환히 꿰뚫고있는 백가신이를 잘 구슬려 성적이나 높이고 개경으로 다시 올라가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것이다. 또 그렇게 하는것이 자기 리속을 차리는데도 좋았다. 게다가 반년가까이 별공사의 소임을 맡고 내려와있던 그의 아들 백태가 불원간 개경으로 돌아간다고 하기에 요즘은 더 낮추 붙는판이였다. 개경으로 올라가 중방의 무신들에게 자기를 깎아내리는 말이라도 하면 야단이 아닌가.
이런 불안은 지주사뿐아니라 창정(창고를 맡은 관리)이나 공수정(군사와 부역을 맡은 관리), 사옥정(감옥을 맡은 관리)할것없이 고을의 벼슬아치들이 한결같이 느끼고있는 심경이였다. 하기에 이들모두는 오늘 연등절에 백가신의 초대를 받은것을 더없이 좋은 기회로 여기고있었다.
요염한 기생을 하나씩 끼고앉은 그들의 낯은 포식과 주흥으로 기름이 번지르르 돌았다. 벌겋게 웃으며 히히덕거리던 그들은 차츰 처량하고도 아름다운 막세의 가야금소리에 웃음을 가무리고 다시 게슴츠레한 눈길을 모았다.
흐느끼듯 롱현으로 떨리다가는 장쾌한 선률로 넘어가군 하는 그 능란한 솜씨에 방안의 량반들은 저으기 놀란 표정들이였다. 게다가 달령성의 건드러진 장고의 장단이 흥을 돋구었다.
탈을 쓰고 휘장뒤에 몸을 감추고있던 흥도리가 드디여 대청복판으로 나서며 구성진 소리로 《동동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정월이라 앞내물은
아으 얼다가 녹다가 하는데
이 세상 태여난
이내 몸 외로와라
아으 동동다리
흥도리의 맑고 풍부한 음성을 막세의 가야금소리가 부드럽게 감싸고 달령성의 장고가 흥을 돋구었다.
이월이라 보름달
아으 높이 켜놓은 등불같아라
일만사람 비치실
밝은 기상이로구나
아으 동동다리
흥도리는 어깨를 움씰움씰하며 노래부르고 춤을 추면서 대청안을 흥겹게 빙글빙글 돌아갔다.
흥도리의 춤과 노래에 량반들은 손벽을 치며 좋아했고 기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삼소매를 너울거리며 춤을 추었다. 지어 웃는적이라고는 없는 백가신이도 장고나 치듯 무르팍을 두드리며 《잘한다, 잘해. 아으 동동다리》하고 소리를 뽑았다.
그러나 백태는 눈을 쪼프리고 활달하게 놀아대는 탈놀이군들을 지켜보았다. 분명 어디선가 들은듯 한 음성이고 본듯 한 행동거지들인데 좀체로 기억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의 뒤바투 붙어앉은 뚱뚱한 객사정(출장내려온 중앙관리들의 접대를 맡은 관리)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아첨기 흐르는 말을 연송 주어섬기고있었다. 좀전까지만 해도 저쪽 공주지주사의 곁에 앉아있는것을 보았는데 어느결에 자기뒤로 왔는지 모를 일이였다. 객사정은 백태더러 시골에 내려오면 의례 객사에서 류숙해야 할텐데 부친의 댁에만 계시니 자기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것이 여간 섭섭치 않다느니, 이제라도 객사에 자리를 옮기면 고적한 밤을 홀로 보내지 않도록 편의를 돌봐드리겠다고 말하며 의미있는 웃음을 히히 웃었다. 건너편에 앉아있는 지주사도 객사정이 무슨 말을 한다는것을 알고있는양 느슨한 웃음을 띠우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백태는 객사정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보다는 머리속에 잡힐듯말듯 하는 탈놀이군들에 대한 안타까운 회억에 집념하였다. 하지만 종시 생각이 나지 않았다.
탈놀이군들의 점점 건드러져가는 흥겨운 노래가락에 백태도 그만 생각하기를 단념하고 기생의 어깨를 껴안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무엇보다 이 순간을 향락하고싶었던것이다.
《또 한잔 부어라.》
백태는 자기 왼쪽에 한쪽무릎을 세우고앉은 기생에게 말했다.
《이젠 그만 드시어요. 꽃은 반쯤 필 때 보는것이 좋고 술은 반쯤 취할 때 그치는것이 좋은것이 아니오니까.》
눈귀에 잔주름 잡힌 기생은 이러며 아양을 떨었다. 이 늙은 기생이 언젠가 자기 아비곁에서도 이런 말을 하는것을 들은적있는 백태는 그의 어울리지 않는 교태가 역스러웠다.
《잔말말구 부어, 계집은 품에 안겨야 하고 술은 잔에 넘쳐야 하는거야.》
백태의 역정어린 말에 기생은 눈꼬리가 꼬부장해서 술을 치고는 앵돌아져 탈놀이군에게 눈길을 주었다.
술잔을 들어 천천히 마시면서 백태는 하필 자기한테 이런 늙은게 차례질게 뭔가 하는 새삼스럽게 불쾌한감이 들어 밸이 뒤틀렸다. 자기 아비곁에서는 예쁘장한 동기(어린 기생)가 시중들며 해롱거리고있지 않는가.
그의 눈앞에는 불현듯 을님이의 기막히게 아릿다운 자태가 떠올랐다.
《개경으로 갈 때도 되였는데 망할년 어데루 달아났어.》하고 중얼거리던 백태의 눈에는 독기가 어렸다.
《제깐년, 뛰여야 벼룩이지.》
백태는 을님이를 놓쳐버린것이 복통이 터지도록 분하고 안타까왔다. 자기의 공물짐가운데서 을님이가 가장 귀한 보물중의 하나였는데 정작 개경으로 떠나게 된 마당에서 놓쳐버리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더우기 송유인은 천하절색을 하나 물색했다는 자기의 서신을 받고 며칠전에 보내온 회답에서 좋은 벼슬자리가 나졌는데 어서 개경으로 올라오라고 독촉했다. 아마 감질이 난 송유인은 지금쯤 자기를, 아니 을님이를 고대하고있을것이다. 그러니 긁어부스럼이라고 공연히 입빠른 소리를 해가지고 화를 입게 되지 않았는가.
이래저래 울화가 치밀어 요즘은 술로 날을 보내는 판국이다. 하면서도 아무때건 자기 손에 걸려들지 않나 두고보라고 이를 갈았다.
… …
잠에 들어서도 어지러운 악몽에 시달리던 백태는 불길한 예감에 눈을 떴다. 눈을 뜨고도 잠시 비몽사몽간을 헤매이던 그는 불빛에 번쩍이는 비수를 본 순간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 비수와 함께 두억시니같은 시꺼먼 괴한이 덮칠듯이 앞으로 다가왔다.
취기로 달아오른 이마가 선뜻하더니 쳐들었던 고개는 도로 베개우에 떨어지고 무서운 힘으로 내리누르는 중압감을 느끼는 순간 백태는 이 모든것이 요즈음 밤마다 자기를 괴롭히는 악몽의 되풀이가 아니라는걸 깨달았다. 술기운이 말짱 달아나버린 그의 눈에 문앞을 막아선 두번째 괴한의 모습이 보였다.
《이놈 백태야, 그간에 저지른 네 죄를 알고있느냐?》
나직하나 서리발이 풍기는 음조에 백태는 가뜩이나 흰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리고 온몸이 떨렸다. 소리를 치재도 눈앞에서 번뜩이는 칼이 먼저 목에 떨어질것 같아 그러지도 못했다.
《네놈의 더러운 목숨은 이 칼끝에 달렸다. 하지만 우리는 네놈의 목숨을 바라고 여기에 나타난것이 아니니 그것만은 안심하여도 좋다.》
목숨을 건드리지 않겠다니 우선 안도의 숨이 나갔다. 어쩐지 오늘은 재수없고 불길한 날이라는 의식이 골수에 사무친다.
《한데 네 목숨대신 우리에게 약조할 일이 몇가지 있다. 그렇게 할수 있겠느냐?》
흑두건속에서 두눈빛이 백태를 찌르듯이 노려보았다.
《오냐. 그리하마.》
백태는 괴롭게 내뱉았다.
《자, 그럼 듣거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했거늘 나라의 국록을 받아먹으면서 네 어찌 백성을 못살게 시달구느냐. 네 소행으루 명학소를 비롯한 공주아근의 농군들이 다 굶어죽게 됐으니 네가 진정 네 죄를 무겁게 여긴다면 마땅히 나라의 창사를 터쳐서라도 그들을 구제해야 할것인즉 그렇게 할수 있겠느냐?》
《… …》
《왜 대답이 없느냐?》
뾰족한 칼끝이 미간에 와닿았다. 백태는 피가 이마로 쏠리는듯 한 짜릿한 전률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리… 하마…》
백태의 얇은 입술우로 가냘픈 대답이 뜨직뜨직 새여나왔다. 그렇게 하고싶지도 않고 또 할수도 없는 백태였으나 눈앞의 위기를 모면해야겠기에 이렇게 말하지 않을수 없었다.
《좋다. 다음 둘째로 죄없는 남의 집 처녀를 끌어와 그 부모들의 가슴에 멍이 들고 몸에 병이 나게 하는것이 어찌
《… …》
이 말에 대답할수 없는 백태는 도리여 묻는듯 한 눈길로 괴한의 두건쓴 머리를 빤히 쳐다보기만 하였다. 위급한 속에서도 쓴웃음이 새여나왔다. 생각같아서는 을님이란 그 계집은 당신들보다 나한테 더 긴요한데 어데 있는지 좀 알려줄수 없겠소 하고 되묻고싶었다.
하지만 을님이가 없다는것을 알면 이 괴한들이 무슨짓을 저지를지 알수 없기에 잠자코 있기로 작정했다.
《왜 대답이 없느냐?》
괴한이 언성을 높여 물었다.
《… …》
《이놈, 상기두!》
또다시 칼날이 눈앞에서 번쩍했다.
백태는 제 목숨이 경각을 다투는 이 순간을 면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비상한 계책이 필요하다는것을 의식하였다.
《그 계집이 소용이라면 맘대루 해라. 그렇지 않아도 어디다 팔아버리던지 하려던 참이였으니 아까울게 없다. 여봐라, 밖에 누구 없느냐!》
백태는 문쪽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행랑채에서 상직잠을 자던 하인 하나가 뛰여들어왔다.
괴한은 칼을 거두고 하인에게 내려질 백태의 분부를 기다렸다.
《너 이분들을 을님이한테 데려다주어라.》
하인은 어서 가자는듯 문가로 먼저 다가갔다.
하인의 뒤를 따르지 않을수 없게 된 괴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는 우리도 떠나가겠다. 우리 손에서 너는 두번씩이나 목숨을 건졌다만 세번째에는 나무독에 담근 장이 될줄 알거라. 관속의 송장이 된단 말이다. 알겠느냐?》
괴한의 말에서는 얼음처럼 싸늘한 랭기가 풍겼다. 이어 두 괴한은 소리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열릴 때 밖에 있던 또 한명의 괴한이 얼핏거렸다.
그러자 불현듯 백태는 자기가 두번씩이나 목숨을 건졌다고 하던 괴한의 말이 귀전에 마쳐오면서 번개의 섬광과 같이 눈앞에 번쩍 떠오르는것이 있었다.
그는 이불을 걷어제끼고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놈이다. 그놈! 계룡산의 초적!)
입술을 악물고 이불속에서 뛰쳐일어난 백태는 자리옷바람으로 문을 열어제끼며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초적이다. 저놈들을 잡아라.》
솟을대문안에서 추위에 우들우들 떨며 파수를 서던 두놈의 하인이 이미 중문을 지나 솟을대문쪽으로 걸어오는 달령성과 막세, 흥도리앞에 창대를 내대였다.
백태의 악청을 듣고 마음의 준비를 가다듬고있던 달령성은 막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막세는 재빨리 가야금통속에 감추어가지고다니던 두자루의 장검을 꺼내였다. 막세의 손에서 칼을 받아쥔 달령성은 비호처럼 몸을 날려 단칼에 앞길을 막아선 두놈을 처치해치웠다.
솟을대문을 밀어제끼고 밖으로 나선 그들의 등뒤에서 놈들의 웨침소리며 발자국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등불이 밝은 거리로 놈들을 달고다니다가는 기필코 재미없는 일이 생기리라고 단정한 달령성은 첫 골목길에 접어들자 담모퉁이에 지켜서서 뒤따르는 놈들을 기다렸다.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막세가 성급히 가야금통속에서 활과 전대를 끄집어내여 그에게 주었다.
달령성은 하인놈들이 활 한바탕거리안에 들어오자 서서히 시위를 당겨 초롱불을 들고 맨 앞장에서 달려오는 놈을 견주었다. 놈들은 밤길에 등불까지 들고있어 과녁으로서는 안성맞춤이였다.
핑, 푸르륵―
힘껏 당긴 활줄에서 놓여난 화살은 어둠을 헤가르며 날아갔다.
앞서오던 놈이 등불을 떨구고 풀써덕 그 자리에 꼬꾸라졌다.
핑, 푸르륵―
또 한놈이 쓰러졌다. 이렇게 몇놈을 제끼니 사납게 날뛰던 놈들은 어디서 화살이 날아오는지 몰라 한동안 공포에 질려 갈팡질팡하며 돌아치다가 슬금슬금 꽁무니를 사리기 시작했다.
칼이며 활을 다시 가야금통속에 감추고난 후에 그들은 서서히 그 자리를 떴다. 곁에서 걷던 막세가 《어, 어》하고 혀짧은 소리를 냈다. 아마도 달령성이 명궁이라고 감탄하는 모양이였다.
하지만 달령성은 씁쓰름히 웃을뿐 대척하지 않았다.
(백태, 이놈 어디 보자!)
그는 백태에게 또다시 속은것이 분하고 괘씸스러웠다.
달령성이가 백태의 하인을 따라 하인청의 을님이방으로 갔을 때 이미 그 방은 텅 비여있었다. 인기척을 듣고 옆방에서 나온 늙수그레한 녀종의 말이 을님이가 이 집을 떠나간지 벌써 여러날 된다는것이였다. 게다가 을님의 행처는 누구도 모른다는것이였다. 백태에게 속은 분김을 참을수 없어 놈을 요정내려고 달령성이 막 되돌아서려던 찰나에 백태의 고함소리가 터지고 집안팎이 벌컥 뒤집혔다. 그리하여 하는수없이 자리를 뜨고말았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백태에게 속은것이 분하고 놈을 요정내지 못한것이 한스러웠다. 더구나 이제 망이에게 을님이가 공주성에 없다는 사실을 전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망이는 그에게 공주성의 형편을 기찰할뿐 일체 서뿌른짓을 하지 말라고 미리 당부했던것이다.
귀로에 오른 달령성은 내내 고개를 떨구고 걸었다.
한편 달령성이네를 놓쳐버린 백태는 분이 꼭뒤까지 치밀어 온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지난밤 가슴 서늘한 일을 겪고난 직후에 집에서 부리는 놈들은 말할것 없고 관아의 관졸들까지 풀어 성내를 샅샅이 뒤지게 했으나 아직 초적들을 잡았다는 소식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 펄펄나는 놈들이 상기까지 성안에 있을리 만무하였다. 집안놈들이 끝까지 쫓아갔더라면 영낙없이 잡았을것인데 우둔하고 비겁한 하인놈들이 화살에 몇놈 거꾸러지자 겁에 질려 돌아서고마는 바람에 다 잡은 놈들을 놓쳐버리고말았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분이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새벽에 어깨가 후줄근해 돌아온 놈들에게 된매를 안기며 한바탕 야단독장을 부렸으나 분기는 그냥 창끝처럼 치받쳤다. 무엇으로든 골풀이를 하지 않고는 미쳐버릴것만 같았다. 덫에 갇힌 짐승처럼 씨근거리며 방안을 돌아치던 백태는 머리에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혹시 을님이가 절간에 들어가 숨어버리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이였다.
그는 얼마전에 그믐녀에게 을님이의 행처를 정말 모르는가고 지꿎게 따졌더니 그믐녀가 조르다못해 애원하는 소리인즉 을님은 속세에 없으니 더 찾지 말라고 하는것이였다. 그때는 미처 그 말뜻을 헤아리지 못했으나 지금 곰곰히 되새겨보니 그것은 속세를 떠나 불가에 들어갔다는 소리로 짐작되였다. 그렇다면…
백태는 그믐녀를 다시한번 구슬려 을님의 행처를 꼭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더우기 초적들과 내통하는게 분명한 명학소놈들이 을님이를 찾아내기 전에 자기가 먼저 서둘러야겠다고 작정했다.
자리에서 웃몸을 일으킨 그는 문밖에 대고 소리쳤다.
《어멈―》
《네에―》
기다리고있었던듯 그러나 별로 서두르지 않는 대답소리와 함께 신발끄는 소리가 났다.
《랭수…》하고 소리친 백태는 고쳐생각하고 다시 말했다.
《거 도소주를 데워다주게나.》
이윽하여 그믐녀는 술주전자와 잔 그리고 유밀과와 건포접시, 양념장을 놓은 간소한 주안상을 차려들고 들어왔다.
명주속옷바람으로 술상에 다가붙은 백태는 잔에 미처 부을새도 없이 은주전자의 주둥이에 입을 대고 걸탐스럽게 꿀꺽꿀꺽 술을 들이켰다.
잠자리를 조심스럽게 치우던 그믐녀는 백태의 거동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해정술에 취한다는데…》
그믐녀는 요즘 밤낮으로 술에 휘감겨있는 아들이 못내 민망스럽고 또 탈이 생길가봐 애가 말랐다. 술을 지내 마시면 속에서 불이나 죽는다는 말도 들었던것이다. 그리고 주정군들을 볼 때마다 품게 되는 역스러움을 아들에게서 느끼게 되고 그로 해서 정이 떨어질가봐 은근히 두렵기도 했다.
《걱정말라구, 어멈. 내 술시중두 오래지 않았으니.》
어느새 낯색이 불깃해진 백태는 얇은 입술에 웃음을 흘렸다.
《그러니 개경으로 가시오니까?》
백태는 건포쪼각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간 어멈의 시중으로 편안히 지냈네그려.》
《언제 또…》
말끝을 흐리는 그믐녀의 잔주름 잡힌 눈귀에 눈물이 고였다.
젖어멈의 자기에 대한 사랑을 모르지 않는 백태도 어쩐지 가슴이 알근해졌다.
《참, 나와 함께 개경으로 가지 않으려나?》
그믐녀의 물기어린 눈에 기쁨의 불꽃이 확 피여올랐다.
《쇤네가 어떻게…》
《어멈의 여생을 내곁에 두고싶어 그러니 그리 알고 차비하게. 그런데…》 백태는 문득 말머리를 돌렸다.
《을님이란 년이 얼루 도망쳤는지 정말 모르겠나?》
그는 술기운으로 뻘개진 눈을 쪼프리고 그믐녀를 쏘아보았다. 그 눈길은 마치 나는 어멈을 끔찍이 위하는데 그래 어멈은 나를 끝까지 속일 작정인가 하고 질책하는듯싶었다.
그믐녀는 속이 뜨끔했다. 그러나 애써 태연한 안색을 지었다.
《모르오이다.》
《그러지 말구 내게 대달라구. 어멈한테야 젖을 먹여 키운 내가 더 가깝지 설마 그년이 더 가깝지야 않겠지?》
《… …》
그믐녀는 입을 다물고있었다.
《섭섭하군. 그년도 개경으로 가면 팔자를 고칠텐데.》
백태는 그믐녀의 거동을 곁눈질하며 혼자소리하듯 종알거렸다.
《도련님, 을님이를 개경으루 끌고가선 어쩔려구 했소이까?》
문득 그믐녀가 정색한 낯빛으로 물었다.
《권세있는 량반에게 섬겨바칠려구 했지.》
《그래서 도련님께 좋은게 무엇이오니까?》
《벼슬자리가 높아지지.》
무심히 대꾸하며 그믐녀를 바라보던 백태는 푸른 기운이 도는 그의 낯색을 보고 눈이 둥그래졌다.
《구차스럽소이다.》
그믐녀가 천만뜻밖에도 노기띤 음성으로 백태를 꾸짖었다.
《뭣이?》
일찌기 보지 못한 그믐녀의 돌변적인 태도에 어안이 벙벙해진 백태는 한동안 눈만 멀뚱거렸다.
《아스시오. 도련님, 그러면 못씁니다.》
재차 꾸짖는 그믐녀의 눈초리는 날카로왔고 목소리도 이전처럼 애원하고 하소하는투가 아니라 원망과 질책과 분노로 차있었다.
백태가 그간 공주에 내려와 저지른 잔혹한짓들이 한꺼번에 되새겨져 그믐녀는 실망과 절망으로 눈앞이 확 흐려졌다. 이제는 더는 자기의 자식이라고 볼수 없는, 영영 남이 되여버린 아들을 눈앞에 보는것만 같아 그는 못견디게 가슴이 아팠다. 자식은 겉을 낳지 속을 낳는것이 아니라는 말처럼 그는 너무도 아들을 모르고있었다는것을 비로소 절실히 깨달았다. 그런데도 그믐녀는 그가 어진 선비가 되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그것을 바라서, 어미가 천비란것이 드러나면 벼슬길에 나서지 못할가싶어 지금껏
(아, 어찌하여 저런 자식을 낳았던가!… 아아, 신령님, 무슨 죄로 천비에게 이런 벌을 주시나이까?…)
하지만 이것은 너무도 때늦은 후회였으며 자책이였다. 그는 마치도 언덕밑으로 내리구는 수레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있는 사람의 심정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