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 회


제7장 칼날아래 죽을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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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님은 바느질하던 옷감을 무릎에 내려놓고 잠시 고개를 들었다.

다림질하려고 인두를 꽂아놓은 화로불은 이글거리며 피여올랐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방문을 꼭 닫고있으려니 골방같이 작은 방안이 후끈했다. 그렇다고 방문을 활짝 열어놓기도 주저되였다. 공연히 뜨락앞을 지나가며 방안을 흘끔흘끔 들여다보는 중들의 눈길이 싫었던것이다.

그는 가위밥쪼박을 들어 이마전이며 코등에 내돋은 땀을 자근자근 누르고나서 다시 바느질감을 들었다. 가는 한숨소리가 탄식처럼 흘러나왔다.

환경이 변하면 기분도 달라지기마련이지만 을님은 왜선지 고적한 심경에서 헤여나지 못했다.

이제는 절간생활에 자리가 잡힐만도 한데 그는 여전히 물우에 떠있는 부평초처럼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아마도 남다른 그의 처지가 이런 상태에 처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절간에 기식하면서도 중도 아니요 속인도 아닌 그런 비승비속의 미묘한 위치에 있었다.

공주에서 그믐녀가 알려준대로 을님은 홍경원에 온 후 원주보살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녀승들의 암자에 몸을 붙일수 있었다. 그러나 을님은 부곡민이란 중이 될수 없다는것을 그만 잊고있었다.

그가 속세에서 도망쳐온 부곡민이라는것을 알게 된 원주보살은 매우 딱해하였다. 그러니 도첩(중의 증명서)을 받지 못한 을님은 중노릇도 할수 없었다.

그렇다고 되돌아갈수도 없지 않는가. 을님은 중들의 뒤치닥거리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별좌(식량맡은 중)나 채두(채소맡은 중)를 도와 부엌일도 했고 부목지기(화부)와 함께 아궁에 불도 지폈다.

그러다 어찌하여 그의 바느질솜씨가 유별나다는것이 원주보살의 눈에 띄여 그후로는 중들의 의복가지를 짓게 되였다.

중들이란 워낙 가정살림을 하지 않기에 옷이나 밥을 다 제손으로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아래두리중들이 하는 일이고 웃두리중들, 이를테면 주지나 지전, 법무, 조실(교육을 맡은 중)과 같은 절간의 우두머리중들은 이런 구차스런 노릇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량반집들에서 시주하는 좋은 비단옷을 입었으며 절간의 사노비들을 시켜 호화로운 옷들을 여벌로 지어입었다. 그들의 본을 따라 대선사, 선사, 대덕, 중덕, 대선(승려의 등급에 따르는 칭호)과 같은 법계를 받은 웬만한 중들은 다 남들을 부려먹을 궁리를 했지 제 손발을 놀릴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을님이는 주로 이들, 웃두리중들의 장삼이며 바지저고리를 지었다.

일감이 밀려 그는 밤낮으로 바늘을 놀렸다.

허무한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전생에 무슨 죄업을 쌓았기에 부모님마저 버리고 이 산속에서 고생을 해야 하는가. 그리운 부모님 생각으로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소리없는 눈물이 옷감에 얼룩을 지었다. 더더구나 망이의 모습이 불쑥불쑥 떠오를 때면 애간장이 끊기는것만 같았다. 비록 불가에 몸을 붙이고있어도 마음은 의연 속세에 가있는 을님이였다.

좁고 더운 승방이 가슴을 답답하게 조이는것 같아 을님은 앉은걸음으로 다가가 문을 반쯤 열어놓았다. 밝은 빛발이 밀물처럼 방안으로 쏠려들었다.

눈부신 해빛은 황토를 뿌려놓은 뜨락에서, 잎새없는 나무가지에서, 서기가 아물거리는 하늘중천에서 장난에 취한 아이들마냥 맘껏 뛰놀고있었다.

을님은 한순간 온갖 시름을 잊고 바깥의 광명에 심신을 맡겨버렸다.

《저, 계시오이까?》

인기척에 놀란 을님은 소리나는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뜨락아래에 주지암자에서 상좌노릇하는 젊은 중 혜명이가 조심스러운 미소를 띠우고 서있었다.

서둘러 앉음새를 고친 을님은 낯색이 쌀쌀해졌다.

혜명은 을님에게 그중 자주 다니는 중이였다. 을님이가 주지 무광대사의 옷을 지으면서 그 심부름을 들고올 때도 많았지만 볼일없이 올 때도 가끔 있었다.

을님이 나이벌은 되였을 혜명은 처녀처럼 곱살하고 깔끔하게 생긴 비구(남자중)니였다. 그는 을님이를 대하면 별스레 어줍어하며 낯을 붉히군 했다. 능글맞은 여느 중들과는 달리 눈빛도 그 어떤 간절한 뜻을 담고있었다. 말하는 품이며 행동거지를 보아도 확실히 여느 중들과는 다른 정겨운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을님은 혜명의 이런 태도가 오히려 더 두렵고 불안스러웠다. 그래 일부러 랭정스럽게 쌀쌀히 대하였다.

토방우에 올라와 마루에 천천히 걸터앉던 혜명은 덴듯이 몸을 도로 일으켰다. 하마트면 얼룩고양이를 깔고앉을번 했던 모양이다. 혜명은 쑥스러워하며 손을 맞비볐다.

을님이도 어색해서 고개를 돌렸다.

다시금 방안을 기웃이 들여다보던 혜명은 놀란 소리로 물었다.

《또 한벌을 다 지었소?》

을님이는 대꾸없이 새로 지은 장삼을 한쪽으로 밀어치웠다. 그는 젊은 상좌중이 비위좋게 던적거리는것도 불쾌했지만 그 지어서 내는듯 한 탁한 목소리가 무엇보다 싫었다. 사내싸게 보이느라고 일부러 더 그렇게 말하는 모양이다.

혜명은 자기에게 곁을 주지 않는 을님이를 자못 섭섭하게 여겼는지 시무룩해졌다.

《나하구 어디 좀 가야겠수.》

《어디?…》

혜명의 생뚱같은 소리에 을님은 눈을 크게 떴다.

《주지스님이 부르시오.》

《?…》

을님은 더욱 놀랐다. 주지스님이 부르시다니?… 주지라면 온 절간의 중들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마치 생불(살아있는 부처)마냥 공경하여 섬기는 로승이다.

을님이도 그를 먼빛으로 한번 얼핏 보았을뿐 아직까지 가까이에서 면대한적이 없었다. 그런 지엄한이가 자기같은 천한 녀자를 부른다니 아무래도 얼른 믿어지지 않았다.

을님의 눈빛에서 짙은 의혹의 빛을 읽은 혜명이가 엷은 웃음을 띠웠다.

《그녁에서 새로 지은 옷이 흠뻑 마음에 드신가보이다. 바느질솜씨가 알뜰하다고 거듭거듭 치하를 하시였수. 그러니 상금이라도 주실런지 알겠소.》

혜명이의 말을 믿어야 할지 어쩔지 종잡을수 없어 잠시 망설이던 을님은 마음을 다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옷깃도 여미고 치마에 묻은 실밥도 털어냈다. 어쩐지 기쁘면서도 두려운 생각이 든다.

홍경원에서 제일 큰 법당들인 관음전과 대웅전, 명부전 앞뜰을 지나 산탁으로 올리뻗은 고샅길에 들어섰다. 한참 올라가니 주지가 거처하는 련화암이 나타났다.

문을 쫙 열어붙인 승방에 들어앉은 무광대사는 목탁을 들고 가볍게 두드리고있었다. 거적눈을 내리뜨고 까딱 움직임없이 앉아있는 모양새로 봐서는 흡사 조는듯싶은데 목탁질하는 손길로 봐서는 역시 자지 않는것이 틀림없었다.

을님은 섬돌아래에 서고 혜명이만 토방우로 올라갔다.

《주지스님, 불렀소이다.》

혜명의 말에 무광은 고개만 천천히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지루한 동안이 지나도록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다음 분부를 듣기 전에 물러갈수 없는 혜명이도 초조했지만 첫 눈에도 심히 거룩해보이는 주지를 처음 대하는 을님은 두렵기만 하였다.

이윽해서 무광대사는 천천히 눈거죽을 들어올렸다. 그 눈거죽밑에서 천천히 돌던 흐릿한 눈망울이 을님이를 보는 순간 번쩍 빛을 뿜었다. 그것은 마치도 두터운 구름장이 들리면서 그 짬으로 밝은 해빛이 반짝 슴새여나오는것처럼 보였다.

《이리 올라오너라.》

무광이 목탁을 들어 을님이를 가리키며 귀속말같은 음성으로 느릿느릿 말했다.

을님은 당황하여 몸둘바를 몰라했다. 그는 저도모르게 자신의 초라한 옷주제를 훑어보았다.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수그리고 서있는 을님에게 혜명이가 어서 올라오라고 나지막한 소리로 재촉했다.

혜명의 재촉을 받고서야 을님은 고개를 수그린채 계단우로 한발한발 옮겨놓았다. 마루밑에 이르러 그는 손을 합장한채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이리, 이리루…》

무광대사는 목탁으로 방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을님은 구원이나 청하듯 혜명이를 건너다보았다. 너무도 초라한 자기가 어떻게 저렇게 호화로운 방에, 더우기 주지스님 가까이 간단 말인가.

《어서!…》

나직하나 거역할수 없는 위엄이 풍기는 어조였다.

용기를 내여 가까스로 문턱을 넘어선 을님은 문곁에 조심스럽게 옹송그리고 앉았다. 그리고는 무광대사의 조용한 음성이며 느릿한 어조가 어딘가 귀익다는 생각이 들어 살며시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눈시울을 내리뜬 모습도 퍼그나 인상적이였다.

(이 스님을 어데서 보았더라…)

아리숭한 기억을 더듬던 을님은 불현듯 어린시절 아버지의 약심부름으로 장마당어귀의 푸주간앞을 지나다가 목격했던 사실이 상기되였다. 도살장으로 가던 소를 살려준 스님, 그 갸륵한 스님이 분명했다.

그사이 십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무광대사는 그때보다 별로 더 늙어보이지 않았다. 둥실한 얼굴이며 벌기우리한 낯빛으로 하여 오히려 그때보다 더 원기왕성해보였다.

을님은 외지에서 가까운 친지를 만났을 때마냥 반갑고 기뻤다.

잠시후 무광대사는 언제 어떻게 되여 불가에 들어왔는가고 퍽 다심하게 물었다. 그 너그러운 음성이며 인자한 풍모에 더욱 친근감을 느낀 을님은 집을 떠나 여기 홍경원에 오게 된 경위를 간단히 이야기했다.

《가여운 일이로다. 가여운 일이야.…》

무광대사는 동정에 잠긴 어조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동정 한마디에 설음이 북받친 을님은 자기 신세를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무광대사가 위엄이 풍기는 주지스님이란 생각보다도 인자하고 자비로운 부처님처럼 여겨졌다.

울먹이는 을님이의 하소연을 듣는 무광대사는 념주를 주무르며 입안소리로 념불을 외웠다.

《아하, 속세란 참으로 고세계로다. 대자대비 남무관세음보살…》

말을 마친 을님은 고개를 돌리고 저고리고름으로 눈굽을 훔쳤다.

무광대사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한데 불가에 들었으면 불도가 됐어야지 왜 상기두 속인구실을 하고있는고?》

《소녀는 부곡에서 왔사옵니다. 나라법에 부곡민은 승적에 오를수 없다고 했사오니 소녀인들 어찌 하겠나이까?》

《불법은 국법보다 너그럽도다.》

《그럼…》

을님은 자기의 소원이 풀릴것 같은 예감을 느끼며 긴장과 흥분으로 떨리는 눈길을 쳐들었다.

《저같은 천민도 비구니가 정녕 될수 있나이까?》

《부처께옵서는 대자대비하시다. 상원연등절(정월대보름의 불교명절)도 멀지 않았으니 래일 득도식을 올리도록 하자.》


을님이가 중이 되는 이른바 득도식은 극락전에서 행하기로 했다. 극락전은 래세를 주관한다는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이다.

령혼불멸설을 주장하는 불교는 인간은 삼생을 차례로 도는 존재로 인정하는데 사람이란 전세에 따라 현세에 이르고 또 현세를 거쳐 래세에 도달한다는것이다. 현세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전세의 삶과 수양에 의해 명운이 정해졌으며 또 현세의 업적에 따라 래세의 명운이 달라진다고 하였다. 즉 착한 업을 쌓은 사람은 래세에 극락으로 가며 죄업을 쌓은자는 반대로 지옥으로 간다고 하였다. 그러니 극락에 가자는것이 이들, 부처를 섬기는 불도들의 지향이요 념원이였다. 득도식에 앞서 극락전뜰에서 삭발의식(머리를 깎는 의식)부터 하였다.

극락전을 마주하고선 을님은 두손을 합장한채 고개를 수그렸다.

을님이앞에는 주지 무광대사가 키넘는 석장(지팽이)을 짚고서있고 그 량편에는 지전스님과 법무스님이 읍을 한 자세로 서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좀 떨어진 자리에 혜명이와 삭발승으로 뽑힌 융대가 서있었다.

혜명이가 을님이앞에 청정수가 담긴 삭발대야를 가져다놓았다.

을님은 전날에 지전스님이 가르쳐준대로 천지신명에게 올리는 례로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향해 두번씩 큰절을 하였다.

그가 자리에 앉자 무광대사가 석장을 짚으며 느릿느릿 걸어와 삭발대야에 손을 잠그어 을님의 머리우에 청정수를 뿌려주었다.

그리고 혜명이가 받쳐주는 가위를 들어 을님이의 머리앞부분을 세번 잘랐다.

가위소리와 함께 까만 머리칼이 눈앞으로 날아떨어지는것을 본 을님은 흠칠 몸을 떨었다. 한없이 귀중한 그 어떤 보물이 몸에서 영원히 떠나버리는것만 같은 허무감과 절망감이 일순 온몸을 휩쌌다. 눈굽에 미음이 들면서 눈앞이 확 흐려졌다.

무광대사가 혜명이가 들고있는 쟁반에 가위를 놓고 물러서자 이번에는 법무스님과 지전스님이 다시 가위로 돌아가며 을님의 머리를 세번씩 잘랐다. 그들도 제자리로 물러가자 마지막으로 융대가 을님이의 머리채를 거머쥐고 썩둑썩둑 자르기 시작했다.

자기의 긴 머리칼, 맑은 샘물에 깨끗이 감고 향기로운 동백기름을 발라 정히 비다듬던 머리칼, 그 귀중한 머리칼이 죽은듯이 땅에 떨어지자 을님은 눈을 꽉 감아버리고말았다. 이것을 슬픔이라 해야 할지 기쁨이라 해야 할지 그로서는 아직 가늠키 어려웠다.

머리를 다 깎은 을님은 스님들을 따라 극락전으로 들어갔다.

혜명이가 얼른 부처앞의 향로에 향불을 피우고 초에 불을 밝히고나서 다기물을 갈았다. 그러자 무광대사가 먼저 부처앞에 절을 하며 례경을 읊었다.

《지심 귀경례 보문사현 원력홍심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례경에 이어 《반야심경》(불교경전)과 천수경(불교경전)을 독경하고 부처에게 공양(음식)을 올렸다. 공양식마저 끝나자 스님들은 법좌에 가부좌를 하고앉았다.

을님은 그들앞에 꿇어앉았다.

법좌에 석장을 짚고앉은 무광대사는 구성지고 랑랑한 소리로 우주만유의 불법을 차근차근 설유했다.

《모든 범부(보통사람)는 마음이 열하고 천안을 얻지 못하여서 멀리 보지 못하나 부처님의 법력으로 내 너로 하여금 극락세상을 보게 하리라. 그럼 어떻게 해야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볼수가 있는가? 위선 해를 관하라. 해를 어떻게 관하는고? 일체 중생이 배안병신이 아니고 눈이 있는자이면 누구나 해지는것을 볼것이니 온전한 생각으로 단정히 서향하고 앉아 정신이 흔들리지 않게 하고 해를 자세히 관하면 지는 해가 북 달아맨것처럼 보이게 되느니라. 해를 본 후에는 눈을 뜨나 감으나 늘 그것이 분명히 나타나게 해야 하느니라. 이렇게 하는것을 일관이라고 하니라. 다음에는 물을 관해라.…》

을님은 머리속으로 매일 석양녘마다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는 무광대사의 설법대로 해를 관하고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아닌게아니라 그러느라면 인생의 고통도, 세파의 고충도 모두 잊을듯싶기도 했다. 그는 속세를 떠나 불가의 몸이 된다는것이 어떤것인지 어렴풋이 깨달아졌다. 설법을 끝마친 무광대사는 법좌에서 일어나 을님에게 《사미십계》(중이 지켜야 할 열가지 계률)를 주었다. 무광대사의 곁에 앉아있던 법무스님과 지전스님도 법좌에서 일어섰다.

《극락국토에 나고저 하는이는 관하는것과 함께 마땅히 열가지 착한 업을 닦아야 하나니 살생안코, 도적질안코, 음행않는것은 몸으로 행하는 착한 업이요, 거짓말, 악한 말, 두가지 말, 꾸민 말 안하는것은 입으로 행하는 착한 업이며 탐욕스런 마음이 없고 어지러운 마음이 없고 부끄러운 마음을 없게 하는것은 뜻으로 행하는 착한 업이니 사미(중)가 되려는이는 매일 밥먹는것을 잊지 않듯이 이 십선계를 언제든 잊어서는 안되느니라.》

끝으로 무광대사는 을님에게 무련이란 승명(중의 이름)을 지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온갖 내물이 바다로 들어가면 한결같이 짠맛으로 되듯이 모든 중생도 불도에 들어오면 다같이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로 되는고로 사미는 오로지 석씨라는 하나의 성만을 가지는 법이라 이제부턴 속세의 성과 이름을 버려야 하느니라.》

법무스님과 지전스님은 을님을 향해 합장을 하고 허리를 굽혔다.

《성불하소서.》

을님은 그들을 향해 경건하게 합장을 하며 머리를 숙였다.

《성불하옵시오. 성불하옵시오.…》

을님은 감격으로 목소리가 떨리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법당에서 나가 조심조심 발을 저겨디디며 뜨락을 걸어가는 무광대사의 뒤모습도 흐릿하게 보였다. 누군가 주지스님은 부주의하여 개미라도 밟아죽일가싶어 저렇게 걸음도 조심스레 걷는다고 하던 말이 되새겨졌다.

아, 얼마나 갸륵하고 거룩한분이신가. 을님은 멀어져가는 무광의 뒤에 대고 다시금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날밤은 달이 밝았다.

달밝은 밤에 불탑주위를 돌며 자기가 바라는것을 발원하면 소원이 성취된다는 말을 들은 을님은 암자의 마당에 있는 팔층탑의 주위를 돌았다. 푸른 달빛을 받은 돌탑은 은은히 빛났고 주렁주렁 매달린 풍경들은 축복의 종소리인양 잘그랑잘그랑 신비로운 소리를 냈다.

속세를 떠난 무아의 경지를 찾는 을님의 마음속에 부드러운 달빛같고 달작지근한 풍경소리같은 향수와 우수가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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