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 회


제7장 칼날아래 죽을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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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다리기에 쓸 짚을 내라고 웨쳐대는 아이들의 호기소리가 집앞에서 떠들썩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망이는 흐뭇한 웃음을 띠웠다.

거사의 서막이 오른것이다. 그가 아이들에게 줄다리기를 시킨것은 아이들로부터 시작해서 장차 온 마을사람들을 그것에 망라시키고 나아가서 이웃부락까지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공주와 같은 큰 고을을 치자면 자기 부락사람들의 힘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여서 불피코 이웃부락인 촌개소나 복수소사람들의 힘까지 얻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간 두루 알아보니 같은 천민부락인 그곳 사람들의 처지도 자기네와 별반 다를게 없었다. 그러니 이번 거사에 그들도 응해나설것은 뻔한 일인데 그러자면 줄다리기와 같은 힘겨루기놀이를 벌려야 사람들의 힘을 하나로 합하면서도 량반놈들의 이목을 피할수 있었다.

원래 줄다리기는 《애기줄당기기》라고 하여 부락간에 소동패들로부터 시작해서 점차 판이 커지면서 나중에는 온 부락의 남녀로소 거의 전부가 달라붙어 승벽내기로 줄을 당기는데 그때의 광경은 실로 장관이였다. 하지만 요즘은 모든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또 당장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렵다보니 해마다 정월대보름날인 상원연등절경에 벌리군 하던 줄다리기놀이도 흐지부지되고 다만 소동패들속에서 장난삼아 근근히 유지되여오는 형편이였다.

그는 아래방에 있는 고비를 불러 밖에서 소리를 지르는 애를 하나 데려다달라고 부탁했다.

고비는 말이 떨어지기바쁘게 사뿐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망이는 밤낮으로 자기 시중을 들어주는 고비가 못내 고맙고 미안스러웠다. 그래 어제는 줄창 내곁에만 붙어있으면 망쇠 그 사람이 좋아하겠느냐고 했더니 고비는 그런 말은 하지도 말라는것이였다. 아마 그들사이에 무슨 언약이 있은 모양이라고 짐작한 망이는 모른체 하고말았다. 그리고 망이자신도 고비가 곁에 있는것이 싫지 않았다. 아니, 그가 있어야만 마음이 안정되였다.

밖으로 나간 고비는 얼마뒤에 종이댕기를 단 장대를 둘러멘 호미동을 앞세우고 방에 들어왔다.

목이 가늘고 해사하게 생긴 호미동은 방에 들어서는참 자리에 누워있는 망이를 보더니 마치 늙은이처럼 측은해하는 빛을 담고 꾸벅 인사를 하였다.

《호미동이를 오래간만에 보는구나.》

망이는 그애의 차거운 손을 잡아 자기곁에 앉혔다.

《그래 짚을 많이 구했니?》

《어디 짚이 있어야지요.》

호미동은 침울하게 대꾸했다.

《금년은 짚이 바를테지. 모자라는 짚은 말이다, 저 들이나 산에 가서 띠풀이랑 베여다가 머루덩굴같은것을 섞어 엮으면 질긴 줄이 될게다.》

《그렇게 하려구 해요.》

《용쿠나. 너희가 잘해야 이제 어른들두 기운이 나서 접어들게다. 그래 너희가 복수소나 촌개소 애들을 이길만 하냐?》

《힝.》

호미동은 어림없다는듯이 코나발을 불었다.

《그래 꼭 이겨야 한다. 이젠 가봐라.》

고비가 일어서 나가려는 호미동이의 손에 망이의 몸보신에 쓰라고 그믐녀가 몰래 보내준 수수엿덩이 하나를 쥐여주었다.

굶주려 어웅해진 호미동이의 눈은 엿덩이를 보자 대번에 생기를 띠였다. 그러나 다음순간 어린 마음에도 앓는 사람의 음식을 얻어먹는게 안됐다고 여겼는지 주밋거리며 엿덩이 쥔 손을 도로 내밀었다. 망이는 눈을 끔뻑하며 어서 가져가라고 했다.

문을 열고나간 호미동이는 호기소리를 지른 덕분에 엿덩이까지 생긴게 기쁜 모양 사립밖으로 나가기 전부터 호기소리를 더 크게 째지게 질러댔다.

고비에게 상한 다리를 내여맡긴 망이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고비는 탈구되였던 망이의 무릎마디에 오치연이 시킨대로 솔잎과 소금과 그리고 무슨 약재를 섞어 만들었다는 찜질약을 갈아대주고있었다. 그의 정성이 은을 낸것인지 퉁퉁 부었던 무릎노리는 이젠 다 가라앉았다. 고비는 웃마을 사냥군령감네 집에 부지런히 오르내리더니 어제 낮에는 꿩도 몇마리 얻어왔다. 물론 그 꿩은 굶주리는 이웃집들에 나누어주라고 했지만 어쨌든 망이는 어린 고비를 지내 고생시키는것 같아 속이 편안치 않았다. 가뜩이나 감실한 얼굴이 요즘은 영 새까매가지고 돌아치는것을 보면 그러다가 무슨 탈이라도 생길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망이는 약을 갈아댄 자기의 무릎노리에 헝겊을 감고있는 고비의 손을 근심짙은 눈으로 지켜보았다.

거스레미가 인 작고 통통한 고비의 손가락끝이 늘 빨갛게 피가 져있더니 오늘은 오른손의 다섯손가락끝에 모두 헝겊오리를 감았다.

《네 손끝이 왜 그렇게 됐느냐?》

망이가 묻는 소리에 고비는 쑥스러워하며 얼른 손을 움츠렸다.

망이는 별스레 마음이 짜릿하고 뭉클해졌다. 고비가 가여워 견딜수 없었다.

《됐다. 그건 그만하고 야장간집에 가서 풀무, 젠장 나부터가 이러지 말아야지. 거 야장간집로인을 좀 오시라구 해라.》

망이는 무언가 다정한 말을 해주고싶었으나 고비가 거북스러워할것 같아 이런 당부를 하고말았다.

고비가 떠나간지 얼마 안되여 풀무령감이 방에 들어섰다. 들어서는참으로 우는소리부터 했다.

《큰일났는데…》

작달막한 키에 머리가 커다란, 그래서 저 밭은 다리에 어떻게 그 무거운 머리를 얹고 다닐가 위태롭게 보이는 풀무령감은 귀등을 긁었다. 큰일났다는것은 늘 하는 그의 말버릇이였고 귀등을 긁는것은 그의 손버릇이였다.

망이는 반갑게 그를 맞았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우?》

《어떨게 있나. 풀무간에 거미줄 치게 됐지.》

시답잖게 대꾸한 풀무령감은 망이의 머리맡에 앉으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풀무간거미줄은 그렇다치고 이젠 생사람입에 거미줄 늘이게 됐으니 야단아닌가베. 행수, 이거 무슨 마련이 있어야지 이러다간 올겨울을 넘기지 못하네.》

《너무 걱정마시오. 그래서 령감님을 만나자는게 아니요.》

《나같은 무지렁이야 무얼 안다구. 하여간 행수가 무슨 변통을 빨리 해야 할게 아닌가?》

풀무령감의 어조며 거동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누워있는 망이에 대한 불만이 엿보였다.

《령감, 내 령감께 큰일을 하나 맡기려는데 할수 있겠소?》

망이는 정색해서 물었다.

《무슨 일?…》

《풀무간에 다시 불을 지피시우.》

《그건 왜?》

《병쟁기를 벼려야겠소.》

《응?!…》

풀무령감은 대뜸 눈이 둥그래졌다.

《령감님의 말대루 생죽음을 당할수야 없지 않소. 그래 내 백가신 이놈을 가만두지 말자는거요.》

날카로운 빛이 번뜩이는 망이의 눈을 본 풀무령감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알만하이. 내 행수의 보검을 하나 단단히 벼려주지.》

《아니, 내 칼이나 하나 벼려달라는게 아니요.》

《그럼 여러개?》

망이는 긍정하는 뜻으로 눈을 끔벅했다.

그제야 풀무령감도 망이의 속뜻을 알겠다는듯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부터라두 당장 일을 시작해야겠소.》

망이의 말에 풀무령감은 갑자기 난처한 표정으로 귀등을 긁었다.

《한데 쇠꼬치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베. 큰일났는데…》

《쇠붙이가 없어요?》

망이도 저으기 락심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는 이번 거사에 병쟁기를 마련하는것이 급선무라고 여기고있었다. 천민들이 아무리 들고일어나도 맨손으로는 창검이나 활같은 무기를 든든히 갖추고있는 공주의 관군놈들을 칠수 없었다.

《집집마다 농쟁기들은 있을게 아니우?》

《농쟁기두 어디 농쟁기같은게 있어야지. 베루개 호미두 없어 나무호미로 땅을 긁지 않는가베. 큰일은 큰일이야.》

《그래두 다문 한두가락이야 있을게 아니우. 동삼에는 농쟁기두 쓸데가 없을테니 그것으루 벼리시우. 망쇠가 가림철소나 다인철소에 가서 좀 마련해보려구 나다니고있지만…》

《근데 몇자루나 벼려야 하우?》

《많을수록 좋지우. 천개두 좋고 2천개도 좋수다.》

《그렇게 많이?…》

풀무령감은 입이 딱 벌어진다. 꺼멓게 삭은 어금이가 들여다보였다. 그는 좀 무시무시한 생각이 드는지 침을 꿀꺽 삼키고나서 겁기가 스민 눈으로 망이를 건너다보았다.

망이는 입이 헤픈 그가 일을 그르칠지 모른다는 우려를 느끼고 그에게 침을 놓았다.

《령감, 이것만은 절대 말하지 말아야 하우. 철쟁이들은 다 쇠덩이처럼 입이 무겁다는데 령감님은… 이번엔 정말 입건사를 잘해야 하우. 알겠소?》

《날 입풀무라고들 하지만 내 여태 헛풀무질한적은 없네.》

망이의 말이 자못 섭섭한듯 풀무령감의 눈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그는 쇠를 다루는 사람이여서 말은 많아도 심지는 곧고 직심스러웠다. 미안한 생각이 든 망이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수골해주시우. 늑장 부리지 마우.》

풀무령감은 자리를 일며 또 귀등을 긁었다.

《큰일났는데…》

방안이 어둑해졌다. 망이는 어둠속에서 눈을 번뜩이며 문밖의 소리에 신경을 돋구었다.

차거운 밤바람이 헐벗은 나무가지들을 휘갈겨대는 소리에 귀가 시렸다. 으스산한 바람소리속에서 사람의 발자국소리를 가려들으려고 왼심을 쓰는 그의 맘은 조바심으로 초조해졌다. 지금쯤은 계룡산의 달령성이를 찾아간 망쇠가 돌아옴직도 한데 아무 소식도 없는것이 어쩐지 불안스러웠다. 혹시 달령성이가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으면 큰 랑패다.

망이는 이번 거사에 달령성의 힘을 크게 기대하고있었다. 그라면 자기 뜻을 십분 리해해줄것이고 또 선뜻 나서리라고 믿었다.

마당에서는 찬바람소리만 세찰뿐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부엌동자질을 고비에게 맡겨버린 후 저녁잠이 많아진 어머니는 어느새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는지 사내들처럼 코를 골다가는 이따금 꺽꺽 숨이 막히는 소리를 냈다. 한뉘 고역과 근심속에 늙어온 어머니는 잠도 편안히 자지 못했다.

고비가 방에 올라와 고콜불을 밝혀놓고 늦은 저녁상을 들여왔다. 잣죽과 김치, 도라지며 고사리채에 무슨 고기까지 한접시 놓여있다.

보기 드문 별식이여서 망이는 저으기 놀랐다. 그는 수저들 생각도 않고 잠시 밥상을 훑어보더니만 의혹에 찬 눈길을 쳐들었다.

《이건 다 웬걸… 이 잣죽은 무어냐?》

고비는 주밋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 집에서 잣송이를 구해왔길래…》

망이는 잣죽을 보며 빙그레 웃더니 고비를 조롱어린 눈길로 쳐다보았다.

《너 조그마할 때 망쇠랑 같이 잣따러 갔다가 벌한테 쐬워 되게 혼났댔지? 허허…》

《아이참… 오빠두 그걸 잊지 않았수? 집에서두 그때가 생각나서 잣송이를 놓구 한참 웃었다우.》

량볼이 발그레해서 귀엽게 말하던 고비는 문득 망이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한데 우리 집에선 요새 무슨 일루 나다니우?》

망이는 능청스럽게 중을 떠볼려는 고비가 깜찍해서 되물었다.

《그래 너의 지아빈 뭐라고 하던?》

《남정들 일은 집안기집에게 말하는게 아니라면서 괜히 우뚤거리지 않우.》

《허허… 그 말 잘했군. 허허…》

망이는 즐겁게 웃기만 했다. 면구해진 고비는 눈을 빨며 종알거렸다.

《오빠넨 다 한등속이라니까. 말안해두 다 알우.》

한참 웃던 망이는 이윽고 정색해서 물었다.

《너희 초상때 남은 술이 아직 그대로 있지?》

《예… 술두 덥혀오라우?》

《아니, 그만둬라. 이 상두 도루 내가구.》

《왜 그러시와요? 손님이 오우?》

고비는 눈을 동그라니 떴다.

《너의 지아비가 남정들 일은 묻는게 아니라고 했다며…》

망이가 짐짓 눈을 흘기자 고비도 앵돌아진 시늉을 했다.

불현듯 마당에서 가만가만 옮기는 발자국소리가 났다.

망이는 긴장한 흥분으로 눈이 빛났다.

발자국소리는 토방아래서 멎었다.

《형님 있소?》

망쇠의 숨죽인 목소리.

재빨리 일어나 문고리를 벗겨준 고비는 밥상을 들고 아래방으로 내려갔다. 망쇠와 함께 또 한사람, 첫눈에도 인상좋게 서글서글한 웃음을 띠운 달령성이 방에 들어섰다. 그뒤로는 또 역참에서 역졸질하는 젊은 총각 흥도리가 묻어들어왔다.

무척 고대하던 반가운 사람들이여서 망이는 말보다 앞서 웃몸을 일으키며 손을 내밀었다. 망이곁에 얼른 주저앉은 달령성은 망이의 커다란 손을 잡으며 근심스럽게 물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오니까? 저 망쇠란분의 말을 듣고 무슨 소린가 했더니 참말 된통을 겪으셨구려.》

《이제 새삼스럽게 그 얘기를 해 무엇하겠소.》

웃는 얼굴로 말을 받은 망이는 꾹 쥔 달령성의 손을 한번 흔들었다.

《로형의 말을 듣지 않은 이 미련둥이를 그래도 찾아주니 고맙기 이를데 없소이다.》

《아, 별공사 그놈이 이렇게 악착한놈인줄 알았으면 형님이 말리더라도 내 요정내고말았을것인데 이거 정말 안됐소이다.》

《부끄럽소이다. 그건 내가 할 말이외다.》

후회와 자책에 잠겨 중얼거리던 망이는 낯빛을 부드럽게 바꾸었다.

《로형께선 그간 별고 없으셨소?》

《우리야 염라대왕의 직첩(임명장)을 받은 몸인데 별고가 있은들 무슨 걱정이겠소만 아직은 보다싶이 무고하외다.》

망이는 감격에 넘쳐 다시한번 달령성의 우아래를 살펴보았다.

으리으리한 량반의 차림새로 다닌다더니 지금은 흙물이 얼룩덜룩한 베옷을 걸치고 때국이 흐르는 수건을 동진게 여불없이 들일하다 돌아오는 농군의 모습그대로였다.

문곁에 앉아있던 흥도리가 무릎걸음으로 달령성의 곁으로 다가와 귀에 대고 잠간 수군거리고나서 몸을 일으켰다.

《아, 어델?》

의아해하는 망이한테 달령성이 수군거렸다.

《다른게 아니라 저 골목에서 누가 우리뒤를 따르는것 같기에 나가보고 오겠다는구려.》

《누가 뒤따른다?…》

혼자소리로 되뇌인 망이는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아래방에 있는 고비에게 나직이 소리쳤다.

《밖에 좀 나가보렴.》

고비가 마당으로 나가면서 문여닫는 소리가 난 후 방안사람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밖의 동정을 살폈다.

한참후에 다시 아래방에 들어온 고비는 웃방문에 대고 조용조용 이야기했다.

《술막주인이 삽짝밖에서 어정대더군요. 내가 어데루 마실가는척 하며 나가니까 오라버니의 병세가 좀 어떤가구 하면서 어물쩍하잖수. 그리군 제 집쪽으로 혼겁해서 가버렸수.》

《도치란 놈이?》

망쇠가 당장 눈부리가 날카로와지며 주먹을 틀어쥐였다. 그는 도치가 며칠전에도 자기 집에 와서 기웃거리더라는 고비의 말이 생각났던것이다.

(이놈이 간세질을 하는게 아니야?)

《됐네, 제 집으루 가버렸다니.》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망이의 얼굴에는 긴장이 가시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자기의 짐작이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적악을 저지른 놈들이 뒤가 저려 기필코 무슨 냄새를 맡으려고 할터인데 그러자면 도치와 같은 놈한테 손을 뻗치기가 첩경이였다.

(미친개가 또 한마리 생겼구나. 몰랐으면 모르되 알고도 물릴소냐.)

도치에 대해서 이쯤 치부해둔 망이는 다시금 온후한 표정으로 달령성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 사람한테서 대강 이야기를 들었을줄로 아오만 로형을 원로에 이처럼 뵙자구 한것은 긴히 의논할 일이 있어서외다.》

고개를 한번 끄덕거린 달령성은 들을만 하고있었다.

《우리가 저놈들과는 한하늘을 이고 살수 없는것인즉, 아니 저 놈들이 우리를 몰살시킬려고 하고있은즉 우리 또한 저놈들과 생사의 판가름을 해야 하지 않겠소. 그래서…》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하던 망이는 문득 말을 끊고 달령성의 기색을 살폈다.

달령성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였다.

《그래서 로형의 의향은 어떠하온지?…》

긴 이야기를 하려고 잡도리했던 망이는 그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이렇게 의향만을 묻고말았다.

《잘 생각하셨소이다. 그런데 병법에두 나를 알고 적을 알라 했은즉 형님께서 무슨 계략이 있으신지요?》

달령성이 침착하게 물으며 망이를 응시했다. 그 찌르는듯 한 눈길을 받은 망이는 대답을 좀 망설였다. 무슨 계략이라고도 할수 없는 자기 생각을 드러냈다가 그한테 웃음가마리가 되지 않을가싶어서였다.

《땅을 파먹고 사는 우리같은 무지렁이에게 무슨 계략이라고 있겠소이까.》

망이는 그의 눈길을 피하며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우리도 명을 내대고 하는 일이라 어찌 골을 쓰지 않고 접어들겠소. 우선적으로 말하면 공주읍의 벼슬아치들인데 그놈들은 높은 성벽안에 숱한 관군놈들에게 싸여있는 놈들로 실상 만만치가 않은줄로 아오. 그리고 우리로 볼진대 흙을 주물던 농군들이라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으나 이제 병쟁기를 마련하고 일어서면 같은 처지에 있는 린근의 농군들도 기필코 합세할테니 티끌모아 큰산이라 우뢰치듯 성을 덮치고 성내에서도 약간의 내응만 보인다면 과히 어렵지 않게 공주를 타고앉을듯 하오. 그러니 칼날아래 죽을지언정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사에 나선 우리 농군들도 어찌 만만타고 볼수 있겠소?》

망이의 얼굴은 흥분으로 벌겋게 상기되고 눈망울은 열기로 번들거렸다.

《또 한가지는…》

침착성을 회복한 망이는 다시 나직한 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릇 무슨 일이나 때를 옳게 택하는것이 승패의 관건이겠은즉 이번 거사에서두 때를 홀시할수 없을줄로 아오.

그래서 내 생각엔 이번 거사를 일으킬 사람들이 우리 농군들인고로 농한기인 늦겨울에, 가깝게는 정월대보름께로 정함이 어떨가 하오. 그때면 상원연등절이라 량반놈들도 논다니판에 잠겨 정신없이 놀아날게 아니오이까. 그리구 그때 우리가 공주를 타고앉는다 해도 지금 서경에 올라가있는 관군놈들은 그곳에 발목이 잡혀 이쪽으로 감히 회군하지 못할줄로 아오.》

망이의 흥분이 그대로 감염된듯 달령성의 눈이 류달리 빛을 뿜었다.

《형님은 정말 지략이 출중하외다.》

달령성의 말에 망이는 게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달령성을 마주보며 소심하게 물었다.

《내 생각이 과히 치졸하지는 않소?》

《치졸하다니?… 관복만 입히면 형님은 상장군이나 병마사감이외다. 허허…》

《원, 당치않은 말씀… 좌우간 난 로형이 웃지 않을가 걱정했구려. 허허…》

망이도 마음이 풀려 즐겁게 웃었다. 한참 웃던 망이는 문득 능청스러운 빛을 띠우고 물었다.

《참, 로형은 벌과 곰이 싸운 옛말을 알고있소?》

《옛말이라니요?》

달령성은 느닷없는 옛말소리에 웃음을 가무렸다.

《과히 길지 않은 이야기니 한번 들어보시우. 어느 산속에 크고 미련한 곰서방이 있었다나요. 이 곰은 제 우직한 힘을 믿고 작은 짐승들을 곧잘 구박했더라오. 어느날 곰서방은 꿀통을 발견하고 그것을 정신없이 파먹지 않았겠소. 벌들은 붕붕거리며 저희들의 겨울량식이니 제발 다치지 말아달라고 사정했다우. 곰서방은 눈에 차지도 않는 작은 벌들이라 왼눈도 끔쩍안하고 그냥 퍼먹었소이다. 그러자 벌들은 떼를 지어 곰서방에게 달려들어 침으로 눈통두 찌르고 코등두 찌르고…》

망이는 말하다말고 망쇠를 돌아보았다.

《참, 이 사람이 언젠가 벌떼한테 쏘이고 되게 혼난적 있지.》

망쇠는 엉겁결에 손을 내저었다.

《허허… 쩔쩔매는 사람보구 벌쐰 사람같다고 하지만 하여간 그 곰서방은 너무 급해서 달아나다가 벼랑에서 굴렀다던가… 죽었겠지. 허허…》

《알만하외다.》

달령성이 삐주름히 웃음을 띠우며 입을 열었다.

《약한 사람들두 한꺼번에 덤벼들면 강한 놈을 이길수 있다 그말이겠구려.》

《아니, 그것뿐이 아니외다.》

망이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달령성을 쳐다보았다.

《벌떼가 이길수 있은건 왕벌이 있었기때문이 아니겠소. 그런데 우리 농군들한텐 두령이 없구려. 그런즉…》

망이는 잠시 눈을 감았다뜨며 정색하여 말을 계속했다.

《외람된 청이오나 로형이 우리 농군들을 좀 통솔해달라는것이외다.》

달령성은 단호히 머리를 흔들었다.

《천만의 말씀이외다.》

《절을 하리까?》

《형님이 계시면서 뭘 그러시오?》

《우리야 무예에 숙맥이 아니우?》

《그대신 형님에겐 지략이 있지 않소?… 나두 옛말 하나 하리까?》

이번엔 달령성의 눈길이 능청스러워졌다.

망이는 허거프게 웃고말았다.

망이의 웃음이 끝나길 기다려 달령성이 진지하게 말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을수도 없거니와 형님은 무얼 두려워하시오. 덕망이 높겠다, 지략이 뛰여나겠다 그리고 또 힘도 장사겠다. 난 형님이 농군들의 병마사로 가장 적중하다고 생각하오이다.》

《지당한 말이우.》

망쇠가 제꺽 맞장구를 쳤다.

《형님은 우리 부락의 〈산행계〉행수가 아니시우. 아따, 행수대신 병마사라고 부릅시다그려. 〈산행병마사〉라구 말이우.》

《이 사람, 자넨 좀 가만있게.》

망이가 신중한 기색으로 망쇠의 말을 막았다.

《이분의 말이 지당하외다. 나부터가 이젠 형님을 산행병마사라고 부르겠소이다. 허허…》

달령성은 더 의논할게 없이 그렇게 락착되였다는듯 호탕하게 웃었다. 망쇠도 흡족한듯 덩달아 웃더니 아래방에 대고 소리쳤다.

《여게!》

그는 당초 배가 고파 견딜수 없었다. 잠잠했다.

《이 사람이 자나, 여게!》

망쇠는 좀더 큰소리로 불렀다. 그랬어도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고비는 자지 않았다. 자지 않을뿐아니라 눈이 초랑초랑해서 웃방에서 울리는 사나이들의 말을 듣고있었다. 그 말을 들으며 자기 오라비와 남편에 대한 뿌듯한 긍지로 가슴을 설레이는데 망쇠가 느닷없이 《여게》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좀 뾰로통해졌다. 여느때는 정답게 《여보》라고 곧잘 부르면서도 오늘밤처럼 외간사람들만 있으면 사내들끼리나 하는 소리인 《여게》라고 하는것이 귀거슬렸던것이다. 그래 어쩌는가 보자고 입에 웃음을 물고 대척하지 않았다.

《젠장, 어델 갔나? 여보!》 하는 망쇠의 목소리는 짜증기가 어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쩐셈인지 《여보》라고 했다.

그제야 고비는 기다렸단듯이 《녜.》하고 얼른 대답했다.

《아니 있으면서도 대척을 안해?》

아마 속으로 손님들이 간 다음에 어디 보자고 윽벼르고있을것이다.

고비는 웃음을 문채 목을 움츠리며 재빨리 부엌으로 내려갔다. 뒤말은 더 들어보나마나한것이 아닌가. 이제는 입안의 혀처럼 놀아야 버릇없이 군 제 잘못을 덮어버릴수 있다는것을 알고있는 고비였다. 잠간뒤에 아래방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고개를 푹 수그린 고비가 음식상을 웃방에 디밀었다.

기다린듯이 상이 들어오는것도 놀라왔지만 상우에 차린 음식이 더욱 희한해서 사나이들은 눈이 둥그래졌다.

먼길을 갔다오느라고 배가죽이 등에 가붙은 망쇠가 걸탐스럽게 상우를 둘러보더니 망이한테 놀란 눈길을 쳐들었다.

《나한테 물을게 있나? 벌써 쥐여사는게 아닌가? 그렇다면 처가집말뚝에 절을 해야지. 제 집사람…》

망이가 생게맹게한 소리를 했다.

아마 더 걸쭉한 말로 칭찬삼아 놀려줄셈이였는데 손님이 지켜보고있기에 이렇게 얼버무리는 모양이다.

망이는 시무룩이 웃었다. 그도 속으로 고게 참 별것은 별것이라고 여겼다. 어느새 눈치채고 보리밥 한솥을 새로 지어 김오르는 밥 네그릇을 상우에 담아놓았는지 무척 대견스러웠다.

《가만 이거 누구덕인지 알고 먹어야겠다.》

달령성이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아래방에 계신이가 어느분의 안댁이시우?》

망쇠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아하, 망쇠형의 안사람이시구려. 그럼 이 집 형수께선?…》

《별공사란 놈이 공주읍으로 끌어갔소이다.》

망쇠가 무겁게 대답했다.

《별공사라니?… 백태란 놈이 또?…》

달령성은 심각해졌다. 그러나 망이의 얼굴에 얼핏 비끼는 괴로운 표정을 보자 안색을 바꾸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듯 아래방에 대고 점잖게 인사했다.

《아주머니, 대접 잘 받겠소이다.》

벽에 베개를 세우고 기대앉은 망이는 사발에 술방구리를 기울였다.

망쇠의 눈이 빛나고 코가 벌름거렸다. 망이는 술사발을 들어 먼저 달령성이에게 내밀었다.

《아, 저는 할줄 모르외다.》

달령성이 손사래질하며 사양하는것을 망이는 무가내로 권하였다.

《이거 권주가가 없어서 그러시오. 자 어서.》

《흥도리, 너 내대신 형님의 술 한잔 받거라.》

달령성이 이렇게 말해서야 망이는 좀 의아쩍은 눈길로 그를 다시금 찬찬히 여겨보았다.

《정말 못하시오?》

《면목없소이다.》

《거 두령답지 않다. 호걸치고 주색에 범연한 사람이 없다던데…》

《그래서 우리 애들이 먹고싶은 술도 못먹을 때가 많소이다.》

《허허, 그럼 애들처럼 단것을 좋아하시오?》

망이는 우스개소리를 하며 머리맡에 있던 엿그릇을 들었다.

《옳소이다. 단것이라면 이 흥도리의 입에 들어간것이라두 빼앗아먹소이다.》

《헛허허.》

사나이들의 호방한 웃음소리가 방안에 흘러넘쳤다.

한참 웃어제끼던 달령성이 문득 웃음을 가무리며 입을 열었다.

《실은 나도 술에 들어서는 남에게 짝지지 않는 놈이외다. 지고는 못가도 먹고는 간다는 술군이였소이다.》

달령성의 뜻밖의 말에 함께 웃던 망이와 망쇠는 어안이 벙벙하여 웃던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럼 그렇겠지. 로형처럼 살갗이 맑은 사람들이 실상인즉 더 술부대라고 합디다.》

망이가 흡족한 웃음을 다시 띠웠다.

《워낙 우리 부친이 무서운 술군이였소이다. 우리 부친두 광대였는데 한푼이 생겨두 술, 두푼이 생겨두 술, 정말 술때문에 패가할 지경이였소이다. 구경엔 술때문에 잘못되였지만…》

달령성은 서글픈 기색을 짓고 무릎을 쓸어만졌다.

《어떻게?》

망쇠가 우묵한 눈확에 신중한 빛을 띠우며 물었다.

《내가 어렸을적 일인데 어느 추운 겨울날 아침에 밖에 나서니 글쎄 우리 부친이 사립밖의 맨땅에 누워있는것이 아니겠소. 따스한 아래목인양 팔베게를 베고 말이외다. 잠든 부친을 깨워 방에 들여가려고 흔들었더니 이미 온몸이 돌덩이처럼 꽛꽛이 얼었더군요. 어느 량반집의 대사에 가서 놀이를 해준 값으루 받은 과줄이며 지짐따위의 음식꾸레미를 품에 꼭 껴안은채 말이외다.》

달령성은 불같은 한숨을 토하고나서 다시 말했다.

《…부친을 닮아서인지 나두 철들면서 술을 즐기기 시작했소. 아니, 세상의 멸시를 잊으려고 입에 술을 대였지요. 술만 들어가면 가슴속에 서리고 얽힌 만난시름이 가신듯이 없어지더군요. 그때에야 나두 우리 부친이 왜 그리 술을 즐겨했던지 그 까닭을 알겠더군요. 아무튼 나는 공술 한잔 바라고 삼십리를 따라가는 위인이 되였소이다. 그리구 술에 취하면 조카 기와집 사준다는격으로 통이 커져 우리 광대패가 한달동안 벌어모은 돈을 거지들에게 다 뿌려주기도 했소이다. 어머니도 또 우리 패의 광대들도 날더러 술을 작작 마시라고 울며 빌었지만 나는 여전히 깨성을 못하고 술에 휘감겨 살았소이다.》

달령성은 잠시 말을 끊었다. 술이라면 오금을 못쓰는 망쇠는 달령성의 말이 비위에 거슬리는지 아니면 저도 가책을 느끼는지 씩씩 거친 숨소리를 내였다.

《우리 녀편네도 나처럼 광대였는데 고을에서 소문난 일색이였소이다.》

다시 말을 시작한 달령성은 낯을 좀 붉히였다.

《과자는 반치요 과처는 천치(자식 자랑하는것은 반쯤 머저리요 처자랑하는것은 완전한 머저리)라는 말은 있지만 사실 우리 녀편네 보섬이가 춤을 출 때면 침을 흘리지 않는 사내들이 없었소이다. 그중에서두 우리 고을에 있던 오입쟁이 향리녀석 하나가 검질기게 우리 보섬이한테 추근거렸소이다. 좌우간 뭇사람들이 우리 광대패의 한 패당으로 여길만큼 그놈은 우리가 놀이하는 곳마다 따라다녔으니깐요. 보섬이는 그녀석이 무섭다고 다른 고을로 이사가자고 했지만 나는 그까짓 생쥐같은 향리놈때문에 피해다니고싶지 않더이다. 자연 나와 그녀석사이는 개와 고양이처럼 앙숙이 될수밖에 없었소이다. 그런데 하루는 그녀석이 제집 노복한테 술이며 안주감을 지워가지고 와서 화해술을 나누자는게 아니겠소이까. 보섬이는 집에 받아들이지 말라고 귀띔했지만 나는 사내랍시고 그놈과 마주앉았소이다. 그놈은 자긴 주량이 약하다면서 나한테만 사발들이로 권하더이다. 나는 술도 변변히 못하는 시라소니같은 녀석이라고 속으로 은근히 그놈을 깔보면서 호기를 부려 놈이 주는대로 곱들이로 술을 마셨소이다. 술에 곯아떨어져 정신없이 자던 내가 눈을 뜬것은 이튿날 중낮때였소이다. 머리가 지끈거려 견딜수 없었던 나는 부엌에 있을 보섬이한테 랭수를 떠오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아무 인기척도 없지 않겠소이까. 웬일인가싶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둘러보니 술상은 뒤집어지고 방안이 온통 란장판이 되였는데 보섬이는 그림자도 안보이지 않겠소. 나는 앞집으로 뛰여가 그집 늙은이에게 밤중에 우리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보섬이를 보지 못했는가고 물어보았더니 글쎄 그 늙은이 말이 보섬이가 울며 어디론가 가버리더라고 하면서 녀편네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못난 사내라고 나를 탓하는게 아니겠소이까. 정신이 펄쩍 들어 집에 와서 보니 아까는 보지 못했던 방바닥에 떨어진 보섬이의 옷고름이며 또 향리놈의 두건같은것이 눈에 띄이더이다. 그제야 간밤에 향리놈이 한 짓거리가 가늠되여 나는 분김에 그놈의 집으로 달려갔소이다. 하지만 향리놈은 지은 죄가 있는지라 어디론가 벌써 몸을 피하고 없더이다. 나는 놈대신 놈의 녀편네한테 욕을 보일 심산으로 안방으로 들어갔소이다. 한데 앙탈을 부릴줄 알았던 향리놈의 녀편네는 되려 해죽거리면서 제먼저 옷고름을 푸는것이 아니겠소이까. 나는 쓰겁고 더러워 문을 걷어차고 나와버렸소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내가 술을 좋아한다는것을 안 향리놈은 이날 나를 술독에 취하게 한 후 보섬이를 손아귀에 넣을 흉계밑에 내가 먹을 술에 닭의 똥을 풀었던것이외다.》

달령성은 괴로운듯 골살을 찌프렸다.

《그래 보섬인지 하는 안댁은 어찌되였소.》

망이가 달령성의 아픈 곳을 찌를가봐 저어하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달령성은 눈을 꾹 감았다뜨며 시름겹게 뇌이였다.

《며칠후에 강에서 시신을 찾았지요.》

《음―》

망이도 괴롭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여직껏 홀몸으루 계시오?》

《계집은 해 무엇하오. 항차 사자밥을 지고다니는 형편에… 내 명이 진할 때까지 이놈세상과 겨뤄보자는 배심밖에 없소이다.》

결기에 넘쳐 부르짖은 달령성은 무릎우에 놓인 주먹을 꾹 부르쥐는것이였다.

《멀쩡한 사람의 생눈알도 뽑아가려는 이 량반놈들의 세상에서 늘 흐리멍텅한 정신으루 살았으니 나한테 무엇이 남아있을수 있었겠소. 내 그래서 술과 담을 쌓기로 작정했던것이외다. 흔히 술을 먹어야 기운이 솟는줄로 알지만 사실 맑은 정신으로 세상을 봐야 담이 더 커지는 법이외다.》

달령성의 회고담은 망이와 망쇠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사실 정신을 번쩍 차리지 않고는 량반놈들한테 목숨조차 보존할수 없는 세상이 아닌가.

망이가 눈빛을 번뜩이며 말했다.

《우리 세사람은 피차 이 세상을 용납할수 없는 사람들이니 오늘밤 무슨 언약을 맺어야겠소. 세상에 나온 날은 서로 달라도 죽을 때는 같은 날에 죽자고 말이요.》

《옳은 말이요. 칼날아래 죽을지언정 끝까지 해봅시다.》

망이의 말에 망쇠가 결연한 태도로 호응했다. 그는 아래방에 있는 고비에게 옹배기를 하나 가져오라고 이르더니 그것을 받아 거기에 방구리의 술을 하나가득 부은 다음 달령성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 술도 마시지 않겠소?》

《그런 언약주야 왜 마다하겠소? 그런데 언약주를 마시기 전에 한가지 말할게 있소.》

여느때와는 달리 심각한 달령성의 태도에 망이와 망쇠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형님은 을축생이라 했던가요?》

달령성의 물음에 망이는 언젠가 오래전에 한번 대준 자기의 생년을 그가 여적 잊지 않고있다는것을 고맙게 생각하며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구 망쇠형은?》

《난 병인생이요.》

망쇠의 대답까지 들은 달령성은 고개를 끄덕이고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망이형님은 을축년(1145년) 소해에 태여났고 망쇠형은 병인년(1146년) 범의 해에 태여났고 나는 무진년(1148년) 룡의 해에 태여났소그려. 그러니 나이로 치면 망이형님이 서른살, 망쇠형이 스물아홉, 그리구 내가 스물일곱이요. 거의나 년년생이요.》

《거참 신통한 일일세그려.》

망이도 흥미있다는 표정이였다.

《우린 나이도 다르고 직성들도 다르오. 망이형님은 소직성이요. 망쇠형은 범의 직성이요. 나는 외람되게도 룡의 직성을 타고났구려. 우리가 태여난 날도 다르고 또 성미들도 다르지만 이제부터는 한몸이나 다름없구 또 이자 망이형님두 말했지만 죽을 땐 같이 죽어야 할것이요. 난 두 형들과 지옥길도 기쁘게 가겠소. 자, 이젠 그 옹자배기를 이리 좀 주시오.》

달령성이 신중한 기색으로 말하고나서 망쇠가 주는 술옹배기를 받아 자기 무릎앞에 놓았다. 그는 허리춤을 들추더니 늘 품고다니는 세치길이의 칼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잠시 망이와 망쇠를 일별한 후 자기의 왼손 집게손가락끝을 날이 시퍼런 칼로 툭 치는것이였다. 금시 빨간 피가 손끝에서 솟아나더니 방울져 뚝뚝 술옹배기에 떨어졌다. 말간 술이 붉은 물감을 풀었을 때처럼 불그레한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달령성은 칼을 망쇠에게 주었다. 칼을 받아드는참 망쇠는 자기의 두손가락끝을 썩 베였다. 그의 손끝에서는 더 많은 피가 솟아나와 술옹배기속으로 떨어져들어갔다. 망이도 손가락을 베여 술옹배기에 잠그었다. 세 대장부의 피가 섞인 술은 아예 피빛처럼 검붉은 색으로 변하였다. 망쇠가 그 술옹배기를 들어 망이에게 내밀었다.

《자, 형님부터 마시우.》

달령성도 눈빛으로 어서 들라고 권하였다.

술옹배기를 두손으로 받쳐든 망이는 눈을 꾹 감고 입을 열었다.

《우리 세 형제는 이 시각부터 한몸이 되였으니 천지신명님, 굽어살펴주옵소서.》

그는 옹배기에 담긴 혈주를 꿀꺽꿀꺽 몇모금 들이킨 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망쇠와 달령성은 누구도 그것을 먼저 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도그럴것이 두번째로 술옹배기를 드는 사람이 둘째가 되는 셈인데 나이로 따지면 응당 망쇠가 들어야 할 술이였지만 그는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두사람의 눈치만 살폈다. 망이의 동생노릇은 이왕부터 해오는터여서 새삼스러울게 없다쳐도 갑자기 달령성의 형님이 된다는것이 어쩐지 거북스럽게만 생각되였던것이다.

《어서 망쇠형부터 드시우.》

술옹배기는 다시 달령성이쪽으로 옮겨졌다.

망이가 둘째를 지목하는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그는 잠시 생각던 끝에 망쇠에게 먼저 들라고 말하였다.

《죽을 때까지 형님을 따르겠소.》하며 망쇠는 술옹배기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달령성은 망쇠가 마시고 넘겨주는 옹배기를 받아 아직 절반이나 남아있는 혈주를 숨 한번 쉬지 않고 쭉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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