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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3 회


제7장 칼날아래 죽을지언정

1



벽에 기대여 까닥까닥 졸고있던 고비는 문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방에 들어서던 망쇠가 문고리를 잡은채 미안쩍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늦을 땐 먼저 자라는데 왜 말듣지 않어?》

《내가 어떻게 먼저…》

고비는 어줍어하며 몸을 일으켰다. 고콜에 광솔개비를 몇가치 올려놓아 방안을 밝혀놓은 망쇠는 부엌으로 내려가는 고비를 말렸다.

《저녁은 촌개소에서 얻어먹었어.》

《그래두…》

《없는 형편에 저녁을 두번씩 먹을게 있나.》

사양하던 망쇠는 인차 고쳐말했다.

《참, 아직 저녁전이겠구려. 그럼 곁들어 함께 먹지.》

고비는 골숨하게 담은 피죽 두그릇과 김치, 소금종지를 소반에 받쳐들고 방에 들어왔다. 상을 망쇠앞에 갖다놓은 고비는 자기 죽그릇을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서눌로인이 없는 지금에 와서도 고비는 남편과 한상에서 먹기를 부끄러워했다.

《자, 건 또 왜? 어서 올려놓으라구. 상아래서 밥을 먹으면 절름발이애를 낳는단 말 못들었어?》

망쇠는 고비의 죽사발을 제가 들어 상우에 올려놓았다.

《아이.》

고비는 당황한듯 얼른 손을 뻗쳤다.

《일없어. 우리 처지에 내우나 새나.》

망쇠는 고비의 죽사발에 자기 죽을 덜어주었다.

《아이참…》

고비는 자기 죽그릇을 빼앗았다. 그 서슬에 망쇠가 상에 죽을 흘렸다.

《자, 아까운 죽을…》

망쇠는 혀를 차고나서 천천히 죽을 떠먹었다.

고비도 얌전히 숟갈을 놀렸다.

죽을 훌훌 떠먹던 망쇠가 문득 적삼주머니에서 커다란 잣송이 두개를 꺼내놓았다.

《오늘 촌개소에 가던 길에 주었지. 몸보신에 잣죽이 좋다더군.…》

병상에 누운 망이를 생각해서 하는 말일것이다.

잣송이를 보자 고비의 얼굴에는 때아닌 웃음발이 피였다.

《왜 웃나?》

《호호… 이전에 잣따러 갔다가 벌한테 쏘이던 생각이 나서…》

망쇠도 그때가 회억되는지 벙긋이 웃었다.

고비가 누리나네 집에서 살게 된 이듬해 가을이였다. 망이 못지 않게 망쇠도 졸졸 곧잘 따라다니던 고비는 그와 함께 산으로 갔었다. 나무를 헤치고 잣송이를 따가지고 돌아오던 길에 망쇠는 지게를 벗어놓더니 고비에게 산꿀을 떠주겠다면서 따벌둥지를 털었다. 그런데 그만 설건드려서 땅속으로부터 벌떼가 새까맣게 떠올라 그들에게 덤벼들었다. 고비가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터뜨리자 당황한 망쇠는 자기의 베적삼을 벗어 그의 머리에 씌워주고 자기는 지게작시미로 벌떼를 쫓느라고 고비의 주위를 매삼질쳤다.

집에 돌아와보니 벌거벗은 망쇠의 온몸은 벌떼에 쏘여 말이 아니였다. 눈두덩이 부어올라 눈까지 작아졌다. 그래가지고도 방에 드러누운 고비의 마음을 풀어주느라 잣도 따다주고 솔새며 다람쥐도 잡아다주었다. 그 시절에야 자기들이 늙은이들의 말대로 《백년해로》하게 될줄 어찌 알았으랴.

고비는 요즘 망쇠한테 이전보다 더 정이 쏠리는것을 느끼였다. 그 느낌은 고비의 가슴에 눈물겨운 기쁨과 함께 야릇한 불안이 깃들게 하였다.

망쇠는 어려서도 성미가 데설궂었지만 그래도 데면데면해서 무랍없이 대할수 있었다. 하지만 나이들어가면서 그는 뚝하고 괄괄해서 살뜰한 맛이라고는 전혀 없는 거치른 사람으로 되고말았다.

고비는 어쩐지 그를 대하기가 서먹하고 어려웠다. 이런 상태는 그와 한가정을 이룬 초기에도 여전했다. 그런데 아버지를 잃은 이후로는 웬일인지 성미가 달라졌다.

고비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 망쇠가 욱하고 뛰쳐나 무슨 일을 저지를것 같아 가슴을 조였다. 친혈육으로 한분밖에 없던 아버지를 원통하게 잃었으니 그 결패스러운 성미에 참아내리라고 믿을수 없었다. 하지만 의외에도 망쇠는 참았다. 참았을뿐아니라 성미마저 차분해졌다. 차분해진 망쇠는 이전보다 더 고비, 자기를 위해주고 아껴주려고 애썼다.

잔재미를 모르고 살줄 알았던 고비로서는 이것이 눈물겹도록 고마왔다. 망쇠는 자기뿐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행동거지며 말하는 품도 퍽 너그럽고 자상스러워졌다. 망쇠는 어딘가 망이와 비슷해갔다.

반면에 망이는 이전보다 더 거벽스러워보였다. 대바르고 인정있는 망이는 눈빛이 언제나 어질고 순박했었다. 그런데 요즘 망이의 눈에는 늘 날카로운 빛이 서리고 성미도 좀 거슬거슬해지는것 같았다.

고비는 그들이 이처럼 달라져가는것이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소직성이라고 하던 망이오빤 범직성으로 되고 범직성이라던 그녁은 아마 소직성으로 되는걸가. 원 세상에 별일두…)

그러나 령리한 고비는 망이와 망쇠의 성품이 이처럼 변한것은 금년 들어와 겪은 모진 고생때문이란것을 알고있었다. 사람의 성미는 열두번 변하고 하루밤에도 머리가 하얗게 세여버릴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고비는 망쇠가 지금 자기를 대하듯이 서눌로인을 살뜰하고 공손하게 대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생각하니 지지리 고생만 하다가 세상을 떠난 그가 새삼스럽게 불쌍해졌다.

그는 목이 꽉 메여 죽을 먹을수 없었다.

망쇠는 눈갓이 빨개진 고비를 건너다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아버지의 생각을 읽은 망쇠는 저도 비감에 잠겼다.

《이제 원쑤갚을 날이 있겠지.》

상에 숟갈을 놓으며 망쇠는 무겁게 중얼거렸다.

고비는 눈물을 보일것 같아 고개를 돌린채 상을 들고 서둘러 부엌으로 내려갔다. 그는 괜한 소리를 해서 망쇠의 마음을 흐리게 한것이 미안스러웠다. 그래서 그릇가지를 부시며 말머리를 돌렸다.

《저, 아까 저녁때 술막주인이 왔댔수. 그녁이 어데 갔는가고 방안을 기웃거리더니 초상때 외상으로 쓴 술값을 내지 않는다고 앙탈을 부리지 않우. 사람이 어쩜 그리 치사스러울가. 집안 좁은건 살아도 마음 좁은건 못산다는데… 그러니 방순언니가 장참 나를 부럽다구 하지.》

이마에 주름살을 지은 망쇠는 생각깊은 눈으로 물끄러미 한곳을 바라보고있었다. 어쩐지 요즘 도치의 거동이 수상쩍었던것이다.

방에 다시 올라온 고비는 이삭주이한 바가지를 끄당겨놓고 검불을 고르며 망쇠의 기색을 곁눈질해보았다.

그는 남편의 기분을 돌릴양으로 사뭇 밝은 음성으로 물었다.

《참, 촌개소엔 뭘하러 갔댔수?》

《남정들 일을 집안기집에게 말하는게 아니야.》

《흥. 그래두 속담에 안사람 말 잘 들으면 오뉴월에도 팥밥 먹는다나.》하고 짐짓 토심스레 대꾸한 고비는 이어 입술을 감물었다.

가난뱅이신세에, 더우기 대살년이 목을 조이는 판국에 팥밥이 다 뭐 말라빠진거누. 그는 속담두 속담같지 않은게 다 있다고 속으로 고시랑거렸다.

《오뉴월 귀뚜라미처럼 알긴 잘 안다. 그건 녀편네말만 따르다간 랑패본다는 소리여.》

망쇠의 낯에도 화색이 돌았다.

《기래요?》

고비는 부끄러운듯 제풀에 웃었다.

그것이 귀여워 망쇠는 고비의 동그란 턱을 손끝으로 튕겨주었다.

그는 나이가 어려도 매사에 경우바르게 행동하는 고비가 기특하고 대견스러웠다. 나어린 동생으로 치부하던 이전에도 그랬고 또 아버지가 계시던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저 눈썰미있는 똑똑한 녀자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고비가 집안일을 도맡다싶이하는 요즘와서 살펴보니 참으로 여간내기가 아니였다. 낮에는 병상에 누운 망이를 대신하여 자기와 번갈아 그 힘든 나루배를 부리고도 저녁에는 아버지가 하시던 들일을 해치우고 밤에는 또 산에 올라가 나무단을 해이고 내려오군 했다.

자기가 거사준비때문에 밖으로 많이 나돌아다니게 되면서 집안일의 부담이 고비에게 전부 쏠렸으나 그는 군소리 한마디 없었다. 게다가 망이네 집일도 시집오기 전과 별반 다름없이 거들어주었다. 이렇게 두 집살림을 도맡아하면서도 고비는 힘든줄도 피곤한줄도 모르는것 같았다. 그 연약한 작은 몸집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가싶어 망쇠는 놀랍기만 했다.

가만보니 고비는 두세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는 재간을 가지고있었는데 빨래를 하면서 푸성귀를 다듬는다던가 밥을 하면서 절구를 찧는것은 집안에서 볼수 있는것이지만 바깥일은 아마 더 손재게 해치울것이 틀림없었다.

산에서 땔나무를 해이고 내려온 어제저녁에는 송기를 담은 바구니에 살찐 재빛산토끼 한마리까지 곁들고 왔었다. 오빠의 병세가 위중한데 너무도 대접할게 없어 그새 옹노를 놓았더니 마침 한마리 걸렸다는것이 아닌가. 망이의 병세때문에 오죽 애가 말랐으면 그런 궁냥까지 다 했으랴싶어 망쇠는 가슴이 뜨거웠다.

그뿐이 아니다. 생각하는 품이며 말하는양이 얼마나 어른스러운지 벌써 마을아낙네들속에서 도장수노릇하는것이 력력했다. 젊은 녀인들은 말할것 없고 나이지숙한 녀인들까지 고비를 찾아와 온갖 대소사를 다 의논하는데 귀여겨 들어보면 여사여사하라고 이르는 고비의 말이 제 듣기에도 여간만 신통하지 않았다. 나배기녀인들이 어린 고비의 훈계를 듣고 흡족해 돌아가는것을 보면 우습기도 했지만 한편 대견스럽기 그지없었다.

어제밤 잠자리에서 망쇠는 고비더러 《너무 빨리 여문 올종자.》라고 비양스런 소리를 했더니 고비는 《그녁은?…》하고 입을 비쭉거렸다. 그리고는 머리를 가지런히 대며 《나두 그녁을 닮아야 하잖우.》하고 수집게 속살거리는것이였다.… 어쨌든 망쇠는 힘도 약하고 나이도 어린 고비에게 은연중 의탁하게 되는 자신을 의식하였다. 남정들은 장가들어야 비로소 녀인의 현숙함을 알게 된다는것이 결코 우연한 말이 아니였다.

《여보, 고비.》

망쇠가 문득 정색한 낯으로 고비를 불렀다.

《녜!…》

순간 고비의 얼굴은 부끄러움과 기쁨으로 확 피여올랐다. 처음 듣는 여보란 소리가 놀라와서였다. 그의 안해면서도 그보다 너무도 어리고 철없다는 자격지심에 늘 잠겨있는 고비로서는 그 부름이 진정 고맙고 기쁘지 않을수 없었다.

아직도 거벽스러운 망쇠를 대하려면 지아비라기보다 오빠나 아버지처럼 어려움과 의존심이 앞서고 망쇠 또한 자기를 의연히 나어린 동생으로 치부하고있음을 그는 알고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를 안사람으로 인정하고있지 않는가.

《여보.》

망쇠는 느닷없이 살갗이 붉어지고 눈정기가 빛나는 고비를 의아쩍게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 그녁에게 간절히 당부할게 있소.》

기쁨에 취한 고비는 그 말도 듣지 못한상싶었다.

《내 말 듣소?》

좀 높아진 망쇠의 어성에 문득 정신을 차린 고비는 그제야 점직해져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들어요.》

《형님을 말이요. 망이형님을 좀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게 해줄수 없을가?》

《예?… 왜 무슨 일이 생겼수?》

고비는 놀랐고 다음에는 긴장해졌다.

《형님은 지금 한시도 누워있어서는 안되우. 공주의 량반놈들이 우릴 다 굶겨죽이려 하는데 우리가 이러고있을수만 없지 않소. 아까 벌이야기도 했지만 벌도 건드리면 쏘는데 사람으로 생겨나 어찌 앉아서 생죽음을 당하겠소. 그런데 형님은 우리 부락에서 왕벌과 같은 사람이란 말이우. 왕벌이 없이야 벌떼도 없는게 아니겠소? 내 말 알겠소?》

고비는 오늘처럼 의기에 차있는 망쇠를 엽때 본적이 없었다.

심중의 흥분을 누르느라 가끔 몰아쉬는 거센 숨소리, 열광으로 빛나는 눈빛… 고비는 두려워졌다. 저이가 무슨 생각을 품고 저러실가.…

그러나 망쇠나 오빠가 그 어떤 큰일을 가슴속에 품고있다는것만은 짐작할수 있었다. 남정들의 일을 꼬치꼬치 캐여물어선 뭘하랴. 때가 되면 자연 알기마련인데…

이렇게 생각한 고비는 몸가짐새를 고쳐 단정히 앉았다.

《그래서 그녁이 형님의 몸이 추설 때까지 형님의 곁에서 떠나지 말구 병구완을 해주면 좋겠다는거요. 난 요새처럼 형님이나 그 집 어머니가 귀하고 중하게 생각된적은 없었소. 고비도 신세를 많이 졌지만 나야 그 어머니가 아니면 이 세상에 살아남아있었겠소. 내가 이만큼 자라 한 장정구실을 하게 된것은 순전히 그 집 어머니나 망이형님 덕분이지. 가만 보면 망이형님은 전수 남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란 말이우. 형님의 몸이 왜 저 모양이 되였소. 그것두 부락사람들을 위하다가 그렇게 된게 아니우. 사람들이 형님을 〈금비〉라고 하지만 형님은 정말 가물에 약비같은분이우. 난 글귀는 모르지만 옛적부터 형제지간은 우애가 중하구 친우지간에는 신의를 지키라고 했다는데 사람으로 태여나 사람의 도리를 지킬줄 모른다면 그게 무슨 사람이겠소. 짐승이나 다름없지. 그래서 고비, 사족이 이렇게 싱싱한 우리가 형님이나 어머니의 손발이 되자는게요. 마음이야 더 말할게 없지만…》

망쇠는 흥분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 얼굴을 정겹게 바라보는 고비의 눈굽에는 눈물이 고였다.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인가, 고비는 그가 이런 말을 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노상 우둘렁거리는것 같아도 심지는 얼마나 깊고 곧은 사람인가. 범잔녀로친은 언젠가 자기더러 사람복을 타고났다고 했었다. 그 어머니말대로 고비, 자기는 참으로 사람복을 타고났다. 누리나와 같은 어머니나 망이와 같은 오빠의 슬하에서 자라난것도 그렇지만 망쇠와 같은 지아비를 만날줄이야 또 어떻게 알았으랴. 고비는 고마왔다. 누리나도 망이도 망쇠도… 그들모두가 고마운 나머지 자기자신까지 고마울 지경이였다.

《내 말대루 하지, 응, 고비?… 래일아침부턴 형님네 집에 가서 조석으로 형님의 시중을 들어주.》

망쇠는 한무릎 나앉으며 곡진히 당부했다.

《그녁은 어짜고…》

고비는 정겹게 말하며 아미를 숙였다.

《내 걱정은 마우. 나야 한술 먹어두 되고 안먹은들 뭐라우. 난 그저 고비가 내 사람이란것만 생각해두 배가 부를테니까.》

《아이참…》

고비는 응석기어린 눈을 곱게 흘겼다.

《난 형님을 보면 죄스러워 못견디겠소. 저는 여적 홀몸으로 있으면서도 나한테 고비를… 나같이 막돼먹은게 무슨 사람이라구 고비, 그녁같이… 곱다시 키운…》

망쇠는 말끝을 흐리였다. 그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물기가 어려 번들거렸다. 말을 맺지 않았어도 고비는 그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수 있었다. 그것은 자기 심정도 그와 같았기에.

망이를 위하려는 망쇠의 마음을 단순히 형제간의 정이라고만 볼수 있을가. 고비는 까닭모를 눈물이 솟구쳐 얼굴을 싸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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