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 회


제6장 쌀

7


밝기는 하나 아무런 온기도 보태주지 못하는 역겨운 겨울낮이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지겨운 밤이 문전에 발을 옮겨놓고있었다.

백태한테 당한 곤욕에 얼혼이 나간듯 종일 누워있던 을님은 문밖에 어스름이 덮이자 자리에서 황황히 몸을 일으켰다.

휘익 불어치는 찬바람에 문풍지가 울었다.

《벌써 밤이 됐어요?》

공포와 절망에 싸인 암담한 목소리였다.

조가비등잔에 불을 달아놓고 을님의 곁에 소리없이 와앉은 그믐녀는 을님의 싸늘해진 손을 잡았다. 그 손을 통해 오한이 나듯 몸떨림이 전해졌다.

《아주머니, 난 어찌하랴오?》

을님은 아침부터 하던 소리를 밤이 되도록 곱씹는다.

그믐녀는 탄식하듯 한숨을 내쉬였다.

《이 집이 무섭고 밤은 더욱 무서와요.》

을님은 체소하고 아련한 그믐녀에게 다가붙으며 두려움에 잠겨 중얼거렸다.

《더는 이 집에 있지 못하겠사와요.》

그믐녀는 수심어린 기색으로 등잔불만 물끄러미 바라볼뿐 점도록 말이 없었다. 등잔불로부터 을님이한테로 시선을 옮긴 그는 다시금 말없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쩌면 을님이는 저렇게 그림처럼 고울수 있을가. 저 달덩이같이 맑은 살갗이며 크고 검은 눈빛, 저 귀여운 코며 입술… 정말 선녀가 되려다가 사람이 됐나부다. 하지만 그는 저 남달리 아름다운 모색때문에 늘 불안속에 떨어야 하고 곡경을 겪게 되지 않는가. 백태며 백가신이가 저 고운 을님이를 가만두지 않을것은 눈앞의 등잔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더우기 아까 백태가 뇌까린 소리로 보아 을님이를 뢰물로 개경량반들한테 섬겨바칠 모양인데 그렇게 되면 그의 신세는 영영 망치고말것이다. 그러니 맹수에게 쫓겨 낭떠러지끝에 서서 떨고있는 노루같이 애처로운 을님이를 그대로 둘수는 없지 않는가.

이 험악한 세상을 피해서 갈 곳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그믐녀, 자기도 젊어서부터 동경했으나 종시 용단을 내리지 못한 미지의 세계였다.

《아주머니, 무슨 생각을 하시와요. 예?》 을님이가 그의 무릎을 흔들었다.

《난 어찌하랴오?》

그믐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나서 시름겹게 입을 열었다.

《갈곳이야 있지.》

《그곳이 어디와요?》

을님이 다우쳐물었다.

《젊은 네가 견디여낼가?…》

《가리켜만 주세요. 아무렴 여기보다 더한 지옥이 있을라구요.》

《그곳이란 속세를 떠나는 길이지.》

《예?…》

그믐녀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을님은 의혹에 찬 눈을 쳐들었다.

《절간에 들어가는 길밖에 없지.》

《절간에요?… 비구니(녀승)가 되여요?!…》

을님이는 깜짝 놀라 되묻고나서 고개를 떨구었다. 너무도 뜻밖의 말에 을님은 정신이 혼미하여 잠자코 있었다.

그는 지금 울울창창한 수림속에서 살던 사람을 갑자기 일망무제한 난바다가운데의 섬에 데려다놓았을 때 느낄 그런 위구심을 체감하고있었다. 하지만 산속에서 흉악한 짐승에게 쫓기는 사람은 섬이 아니라 물속에라도 뛰여드는 법이다.

이때 을님의 뇌리에는 문득 언젠가 어렸을적에 목격한 하나의 광경이 떠올랐다. 그는 아버지의 약심부름을 자주 다녔는데 그날도 을님은 아버지가 지은 약꾸레미를 가슴에 모두어안고 고을의 장마당근처에 있는 어느 병자의 집을 찾아 대문을 나섰다. 장마당의 어귀에 있는 푸주간앞을 지나가던 을님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서 웅성거리는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웬 늙수그레한 농부가 사릅송아지의 목덜미를 떨리는 손으로 어루쓸며 눈물을 흘리고있었다.

《자자, 이젠 그만하오. 원 자식이나 떼우는것 같소그려.》

소매를 걷어붙인 혈색좋은 푸주간주인이 이러며 소고삐를 잡아당기였다.

푸주간으로 끌려가는 사릅송아지는 겁기어린 눈을 더부럭거리며 《음메― 음메―》하고 애처로운 영각소리를 질렀다. 소고삐를 놓쳐버린 농부는 땅에 퍼더버리고앉아 꺼이꺼이 흐느껴울고 이 광경을 지켜보는 장군들도 심란하고 구슬픈 표정이였다.

농부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 애지중지 키우던 송아지를 팔았을것이고 푸주간주인은 고기장사를 하려니 그 소를 샀을것이지만 을님은 웬일인지 그가 밉고 소와 농부가 불쌍해서 견딜수 없었다.

그런데 이때 등에 바랑을 지고 손에는 긴 참대지팽이를 잡은 중 하나가 목탁을 두드리며 처량한 소리로 《대자대비 남무관세음보살》을 외우더니 푸주간주인에게 다가가 묻는것이였다.

《이 소를 얼마에 샀소이까?》

《얼마에 샀으면 왜 스님이 값을 물어줄테요?》

푸주간주인은 별참견을 다한다는투로 중을 아니꼽게 흘겨보았다.

중은 눈시울을 내리뜨고 조용한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하였다.

《죄없는 송아지를 왜 죽이려 하오이까? 부처께서 가르치시옵기를 세상에 목숨보다 더 귀한게 없다고 했소이다. 그런즉 산 목숨을 빼앗는것이 가장 큰 악행으로 되옵고 목숨을 이어주는것이 선행으로 되는게 아니겠소이까?》

하더니 중은 등에 진 바랑을 벗고 그속에서 시주로 받은 돈꿰미를 꺼내여 푸주간주인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어안이 벙벙해있는 농부에게 소고삐를 쥐여주며 어서 집으로 가라고 이른 후 긴 지팽이를 휘적휘적 짚으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죽음의 문전에서 살아난 사릅송아지는 기쁨에 겨워 음메소리를 질렀고 농부도 고경한 스님의 처사에 감읍하여 또 눈물을 흘렸다.

병풍처럼 둘러서서 이 광경을 보던 사람들도 모두 갸륵한 스님이라고 그 중을 칭찬하였다.

그때 깊은 인상을 받은 중의 자비로운 말을 을님은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

음험한 량반토호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면 그 어데라도 가야 할 절박한 심정인 을님에게는 절간이야말로 리상적인 은신처라고 생각되였다. 세상을 등진 산속의 절간이 비록 고독하고 외로울지라도 몸만은 깨끗하고 마음 또한 평온을 얻을것이 아닌가.

이윽하여 얼굴을 쳐들고 그믐녀를 마주보는 을님의 크고 검은 눈에는 랭정한 기색이 서리였다.

《가겠사와요.》

마침내 을님이가 수긍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어찌나 침착하고 태연스러웠던지 그믐녀가 도리여 놀라 물었다.

《늙을 때까지 한뉘 중노릇한다는게 어떤건지 알기나 하나?》

《아수라같은 속세보다 나을테죠.》

《글쎄… 하필 곱게 태여나서 남에 없는 고생을 하는구나.》

그믐녀가 혼자소리로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아주머니, 그런데 저하고 한가지 언약을 하시와요.》

《무얼?》

《누구한테건 내가 불가에 들어갔단 말 하지 마시와요. 우리 부모님들한테도…》

을님의 마음을 짐작한 그믐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눈에는 물기가 어려있었다.

문밖에서 불어치는 차거운 바람에 헐벗은 나무가지들이 울고 처마끝의 풍경들이 세차게 달그랑거렸다.

《오늘밤중으로 이곳을 떠날수 없을가요?》

을님의 얼굴에는 겁에 질린 어두운 그림자가 다시 몰려왔다.

《오늘밤에야 어떻게?》

《하루늦어 신세 그르치는 일이 없을라구요.》

《딴은 그렇다마는…》

그믐녀는 말끝을 흐렸다.

두 녀자는 드디여 길떠날 차비를 시작했다. 기승스럽게 불어치는 바람소리가 그들을 재촉했다.

그믐녀는 밖에 나갔다오더니 사내의 베바지저고리 한벌을 안고왔다.

《이걸 입어야겠구먼. 오늘은 파수보는 하인놈들이 눈을 부라릴테니.》

그믐녀는 낯을 찡그리는 을님이에게 가져온 옷을 내밀었다.

마지못해 그것을 받아들고 펼쳐든 을님은 때국이 흐르는 사내의 저고리가 살에 닿자 그만 진저리를 치며 손을 털었다.

《자라한테 혼나면 가마뚜껑 보고도 놀란다더니 사내라고 이름붙은것들한테 되우 혼이 난게로구먼.》

그믐녀가 씁쓸히 웃었다.

길차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내차림에 머리수건을 눈섭까지 내려쓰고 목수건은 코언저리까지 감아놓아 눈만이 빠금히 내다보이는 을님의 모습은 이쁜 총각같았다. 등에 진 보짐속에는 옷가지와 그믐녀가 마련해준 얼마간의 로자가 들어있었다.

《오늘밤에는 멀리 가지 말구 아무 집에서건 하루밤 주인을 정하고 래일 새벽 일찍 길을 떠나게나. 우선 가야사에 들렸다가 차차 홍경원으로 가라구. 다른 절간엔 비구니들이 얼마 없지만 홍경원에는 비구니들이 득실거린다네. 그곳에 가면 내가 잘 아는 원주보살도 있으니 여러모루 도움도 받을수 있을거네. 한가지 께림한건 홍경원이 이 집의 단골절이여서 래왕이 좀 있는건데 아무렴 뭐라나. 머리를 깎고 승이 된 다음에야 저들이 어쩔텐가?…》

《알겠사와요.》

《이담 부처님께 기도드릴 때면 내 명복두…》

그믐녀가 갑자기 코메인 소리를 했다.

《아주머니, 앓지 말구 부디 오래 사시와요.》

손을 맞잡은 두 녀자는 눈물이 그렁해서 마주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믐녀가 눈굽을 찍어내며 말했다.

《자, 이젠 떠나라구. 세상에…》

《잠간만 더 앉았다 가겠사와요.》

을님은 자기가 거처하던 방안을 구슬픈 눈길로 둘러보았다. 불안과 공포와 악몽에 시달리는 멍든 넋을 지켜주던 새장같은 방이였다. 그는 명학소가 자리잡은 동남쪽을 향해 한쪽무릎을 꿇고앉아 머리를 숙였다. 기약할수 없는 길로 영구히 떠나가며 부모들에게 하직을 고하는 그의 심장은 옥죄듯 아팠다.

그는 망이에게도 마음속 작별을 고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운 내 님, 그간 별고 없었나이까. 불초한 소녀는 속세를 떠나며 마지막절을 하나이다. 부모님 모시고 님의 사랑을 받으며 세세년년 복락하고픈 소녀의 심정 예나 이제나 변함 있으리오만 부모가 준 이 몸조차 간직할길 없사와 모진 마음 먹었으니 님은 부디 용서해주옵시오. 소녀는 누구도 원망치 않소이다. 타고난 팔자소관 소녀인들 어찌하리오. 팔자도망 못한다 옛말에도 있거니와 속세에 정해진 이내 신세 소녀도 고달프고 님도 애태우고 구차히 기다려야 앞길도 망연하니 차라리 불가의 몸이 되여 래세에나 복운을 타고날가 하나이다.)

을님은 저도모르는 사이 두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먼길 떠나는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묽어선 안되느니.》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그믐녀는 그의 용단이 못내 장해보였다.

그는 을님에게 자기가 앞문에서 파수군과 수작을 붙일테니 그사이 뒤문으로 몰래 빠져나가 골목에서 기다리라고 당부한 후 자리를 일었다.

개털등거리에 창대를 겨드랑이에 끼고 대문간에서 추위에 옹송그리던 늙수그레한 파수군은 그믐녀에게 한마디 했다.

《밤중에 어딜 가려구?》

《예에, 도련님이 아프다기에 약점엘 가외다. 원약점주인이 잠자리에나 들지 않았겠는지…》

《혼자 먹지 말구 우리나 좀 나눠주었으문 앓지두 않지.》

《배탈이 아니라 고뿔이라우.》

메주해서 어슬렁어슬렁 물러서는 파수군을 뒤에 떨구고 대문밖으로 나섰다.

그는 먼저 빠져나와 골목에서 기다리고있던 을님이와 함께 얼마큼 걸어갔다. 차거운 밤바람이 썰렁한 길우로 검부레기를 몰아갔다.

추위에 얼어붙은듯 밤하늘에 널린 별들도 차겁게 번뜩거렸다.

수건으로 귀를 감싼 사람이 초롱불을 들고 옹송그리며 그들의 앞을 종종걸음쳐갔다. 아늑한 방안의 따스한 아래목을 찾아가고있을것이다.

《아주머니, 이젠 들어가시와요.》

을님이가 걸음을 멈추고 쓸쓸하게 말했다.

《이 춥고 캄캄한 밤길을 처녀의 몸으로 어떻게 갈텐고…》

그믐녀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근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부디 잘 가라구.》

《편안히 계시…》

을님은 울음이 쏟아질것 같아 얼른 허리를 숙여 깊은 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믐녀는 축축해진 눈으로 어둠속에 사라지는 을님의 희끄무레한 자태를 바래고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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