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 회


제6장 쌀

6


을님은 온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벽모서리에 오도카니 붙어앉아 공포와 수치심으로 장밤 모대기던 그는 언제 동창이 밝아오는지도 몰랐다.

악몽같이 지겹고 지루한 밤이였다. 간밤의 일을 되새기니 다시 몸서리가 쳐진다.

악귀의 소굴같은 이 집에 끌려온 후로 자기 몸에 늘 따라다니는 백태며 백가신이며 하인놈들의 그 음험한 눈길에 고개도 쳐들지 못하면서 언제나 불안과 공포속에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군 했지만 지난밤처럼 치욕스럽고 두려웁던적은 없었다. 백태가 간혹 소름끼치는 눈길로 자기를 지켜보았고 또 백가신이 자기 옷을 지으라고 몇번 제 방에 불러다가 은근한 말로 꼬드겼으나 을님은 그따위소리에 귀도 주지 않았다. 하면서도 그때마다 온몸에 얼음물을 끼얹는듯 한 오한과 불더미를 뒤집어쓰는듯 한 수통감으로 몸을 떨군 하였다.

자기같은 녀인을 악행과 고역과 향락의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그들이 장차 어떻게 나올지 생각만 해도 차거운 전률이 등골을 훑었다.

그들의 무서운 권세에 항거할만 한 아무런 힘도 자기에게 없음을 통절히 깨닫고있는 을님은 조롱속에 갇힌 새처럼 심장이 괴롭고 아프게 고동쳤다. 오직 죽음으로 자기 몸을 지키는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죽음이란 얼마나 무의미한것인가. 나라나 백성을 위해, 부모나 랑군을 위해 목숨을 지푸래기처럼 버린 아녀자들은 있을지언정 그 누구도 위함이 없이, 도리여 혈육들에게 끝없는 슬픔을 안겨줄 그런 길로 간다는것은 실상 통분할 일이였다.

늙은이는 지난날의 추억속에 살고 젊은이는 앞날의 희망속에 산다지만 앞날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미련도 없는 을님은 캄캄한 그믐밤에 천야만야한 벼랑끝에 선듯 한 아찔한 절망감속에서 몸부림쳤다.

《을님이 있나?》

그믐녀가 찾는 소리를 듣고서야 을님은 괴로운 상념에서 깨여났다.

《오늘아침은 웬일인가. 웨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

방에 들어온 그믐녀는 을님이앞에 마주앉으며 조용히 물었다.

그 동정어린 말에 을님은 불시에 왈칵 설음이 북받쳐올라 그믐녀의 무르팍에 얼굴을 묻으며 오열을 터뜨리였다.

《웨, 웨 이러나?》

인정이 헤픈 그믐녀는 공연히 저도 울먹거리며 화들화들 떠는 을님의 어깨를 다심하게 어루쓰다듬어주었다. 그는 을님의 사정을 어렴풋이 짐작하였다.

을님에게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품고있는 그믐녀는 늘 그에게 왼심을 써오는터였다. 한고향에서 끌려온 처녀여서 그런지, 그의 아름다운 용모와 착한 마음씨에 끌려서인지, 아니면 불우한 자기의 인생을 되풀이하는듯 한 그의 장래에 대한 우려와 동정때문에서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그믐녀는 그를 친딸처럼 아끼고 보호하고싶은 심정이였다.

불안속에서 외로움과 괴로움에 시달리는 을님이도 한줄기의 따뜻한 빛발과 같은 그믐녀의 육친다운 사랑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지탱하고있었다.

《아주머니…》

한참후에 을님이는 목메인 소리로 입을 열었다.

《울라구, 울고나면 맘이 한결 개운해지지.》

이런 소리로밖에 위안할수 없는 그믐녀였다. 실상 울음으로 슬픔을 덜군 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울음만이 큰 위안거리였다.

이윽하여 마음을 진정한 을님은 지난밤에 있은 일을 흐느낌이 간간이 섞인 소리로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듣는 그믐녀의 숙부드럽던 얼굴에는 강개한 빛이 어렸다.

《아주머니, 난 어찌 살랴오?》

《… …》

《난 이 집에 있지 아니하랴오.》

《그럼 어디?》

대답할 말이 없는 을님은 다시 그믐녀의 무릎우에 쓰러졌다.

떠난들 어데로 간단 말인가.

그믐녀도 땅이 꺼질듯 무거운 한숨을 내쉬였다.

이때 누군가 바삐 걸어오더니 방문을 홱 열어젖혔다.

《을님이, 을님이 있어?》

서사의 좁은 얼굴이 방안을 기웃거렸다. 밝은 곳에서 갑자기 어둠에 부딪친 그의 쪼프린 눈알은 방안의 사람들을 인차 알아보지 못하였다.

《녀인네가 있는 방문을 아무 기척도 없이 여는 법이 어디 있소? 아무리 천한 녀자들이 있기로서니…》

그믐녀가 싸늘한 눈길로 서사를 쏘아보며 꾸짖었다.

《아, 어멈두 있었나? 난 또…》

서사도 그믐녀가 백태의 젖어멈이래서 다른 노비들처럼 하대하지는 못했다.

《무슨 일이유?》

《별공사나리께서 저 을님이를 부르신다네.》

《아주머니!》

을님이가 온몸을 와들와들 떨며 그믐녀에게 매달렸다.

《웨 부르시우?》

그믐녀도 을님이를 마주 껴안으며 서사에게 물었다.

《내사 아나.》

《내가 가리다.》

그믐녀는 을님이를 가볍게 떼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을님이는 물론 서사도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 어멈이?… 누굴 경치게 할려구…》

《걱정마옵시오.》

문을 막아서는 서사를 가볍게 떠밀고 밖으로 나선 그믐녀는 귀중한 보물을 잘 간수하려는것처럼 방문을 도로 꼭 닫아주었다. 그리고는 방안에서 울리는 을님이의 숨죽인 흐느낌소리를 들으며 단정하고도 힘있는 걸음으로 중문안으로 들어섰다.

《쇤네 아침문안 여쭈오이다.》

《어인 일인가?》

백태는 아닌 때에 자기 방에 나타난 그믐녀에게 온당치 않은 눈길을 던졌다.

어지러운 악몽속에 헤매다가 잠을 깬 순간 그의 머리에 문득 떠오른것이 바로 을님이생각이였다.

어제밤 자기의 추태, 아비의 비행, 게다가 자기네 부자를 릉멸하던 을님의 방자한 태도까지 한꺼번에 되새겨진 그의 얇은 입술우에는 조소하는듯 한 독살스러운 비웃음이 실뱀처럼 그물거렸다.

《네깟 천한 년이?… 그래, 어디 얼마나 도고한가 보자!》

혼자소리로 뇌까리며 이제나저제나 하고 을님이를 기다리던차에 난데없이 먼저 나타난 그믐녀가 반가울리 없었다.

《도련님, 을님이를 왜 부르시오니까?》

세운 한쪽 무릎우에 두손을 올려놓은 그믐녀는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그러나 격한 심정을 억물고있다는것이 그 음성에서 엿보였다.

《뭣이?… 어멈은 웬 참견이 그리 많은가? 방자하게…》

《도련님, 쇤네를 보시와 을님이를…》

《을님이가 어멈한테 또 어떻게 되는가? 언젠가 망이를 놔달라고 하더니… 그래 명학소것들을 다 두둔할셈인가?》

백태는 차고 쓰거운 비웃음을 얇은 입술우에 흘렸다. 그믐녀의 사정에 못견디여 망이를 놓아준 생각을 하면 지금도 후회가 막심하였다.

《어멈, 다시는 주책머리없이 굴지 말게. 그리구 지금은 방에서 당장 나가게.》

이렇게 떠벌인 백태는 방미닫이를 탁 열어붙이며 섬돌우에 읍을 하고 서있는 서사에게 째지게 소리질렀다.

《이놈, 너는 뭘하는 놈이냐! 그래 이따위 늙은일 끌어오라구 했더냐!》

그믐녀는 눈앞이 흐리마리해져 밖으로 쫓겨나왔다. 비청거리며 섬돌아래로 내려서서 중문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을님이를 앞세운 서사가 중문을 벗어나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믐녀와 마주친 을님이는 걸음을 멈추고 애원어린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주머니…》

서사에게 등을 떠밀리운 을님은 말을 맺지 못한채 안방쪽으로 끌려갔다.

을님이의 눈길에, 그 목소리에 발목이 잡힌 그믐녀는 가슴이 화들거려 그자리에 못박아선채 더 움직이지 못했다.

을님이가 백태의 방에 끌려들어간지 얼마 안되여 위협하듯이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백태의 청높은 음성이 울려나왔다.

그믐녀는 저도 어쩔수 없는 힘에 이끌려 방쪽으로 성급히 걸어갔다.

이때 방문이 벌컥 제껴지면서 을님이가 사색이 되여 굴듯이 뛰쳐나왔다. 그뒤로 얼굴에 벌겋게 피가 몰린 백태가 유난스런 광택으로 번뜩이는 눈을 치뜨고 을님이를 뒤쫓아 달려나왔다. 그러나 자기를 쏘아보는 그믐녀의 불붙는 눈길에 굽이 질리여 더 나가지 못하고 멈춰선 그는 맨발바람에 중문밖으로 달아나는 을님을 노려보기만 하였다.

《이년, 당장 개경으로 보내고말테다. 개경량반들한테 가서두 그렇게 생매처럼 노는가 어디 보자. 네깐년 털도 벗기지 않고 삼켜버릴게다.》

매몰차게 씨벌인 백태는 볼따귀로 손을 가져갔다. 할퀴운 손톱자리에서 피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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