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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0 회


제6장 쌀

5



어느날 백태는 공주지주사의 집에 초청되여갔다가 술에 취하여 밤늦게 돌아왔다. 마당을 지나 자기 처소로 가는데 하인청쪽에서 고르로운 다듬이질소리가 들렸다. 문득 을님의 자색이 눈앞에 떠오른 그는 몽롱한 취기속에서 전신이 싸늘해지는듯 한 그 어떤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는 선자리에서 비틀거리며 무거운 칼집에 매달린 허리띠를 한번 추스리고나서 소리없는 웃음을 웃었다. 차거운 밤바람이 이마에 부딪치니 더욱 취기가 올랐다.

《이년, 오늘밤에야…》

혀굳은 소리로 씨벌인 백태는 한발 앞으로 옮겼다가 두걸음 뒤로 물러서며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송유인의 서신을 받은 다음 그에게 보낸 회답에서 백태는 《망극한 성은에 분골쇄신으로 보답하겠다.》고 너스레를 치고나서 《결초보은으로도 못다갚을 송재상의 은공을 소인이 어찌 잊으리오. 그간 미거한 소인이 로심초사하여 나라를 기울여도 고르기 어려운 가인을 하나 물색했으니 그것이 재상님을 조금이나마 안위케 된다면 생광스럽게 여기는바이라.》고 영계처럼 게정부리기 잘하는 송유인의 입을 훔쳐주었다.

그리고도 백태는 아직까지 을님이를 잡아두고있었다. 그럴 까닭은 을님이를 먼저 올려보내면 송유인이 그를 꿩구어먹은 자리로 만들고는 또 새것을 골라바치라고 트집을 부릴수 있다는데도 원인이 있었지만 보다는 백태, 자기가 아직 욕심을 채우지 못했기때문이였다.

회답을 받고 감질이 난 송유인은 지금 몸을 부스대며 느침을 흘리고있을것이다.

(침이나 흘려라. 누군 뭐 네 뒤바라지군인줄 아느냐. 침을 흘리다가 내 턱찌끼나 받아먹어라.)

검측하게 웃으며 다시 발길을 뗀 백태는 중문을 지나 하인청쪽으로 걸어갔다. 취중에도 불빛이 빨간 을님의 방이 눈에 안겨오자 정신이 좀 맑아지는듯싶었다. 바느질을 하는지 고개를 수그린 을님의 그림자가 방문에 빨갛게 어렸다.

절로 입이 벙긋해진 백태는 그 그림자를 잡을듯이 팔을 허우적거리며 한발한발 다가갔다. 남이 들을세라 조심스럽게 옮기는 걸음이건만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발은 털썩거렸다. 괜스레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잠시 숨을 몰아쉰 백태는 을님의 방문고리를 가만히 잡아당겼다. 안으로 걸었는지 열리지 않았다.

《누구시오이까?》

겁에 질린 을님이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나야 나.》

백태는 목소리에 위엄을 주느라고 했지만 혀굳은 소리가 떨려나왔다.

《… …》

《어서 문 열어!》

《밤중에 웬일이시오니까?》

목소리를 듣고 백태란것을 알아차렸는지 을님은 나직하나 차겁게 응대했다.

《어, 할 말이 있어.》

《무슨 말씀이오니까?》

《글쎄, 어서 문을 열라지 않나.》

안이 단 백태는 짜증어린, 하면서도 사정하듯 말했다.

《점잖으신 나으리께서 소녀에게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시와 깊은 밤중에 아녀자 혼자 있는 방에 들어오시려 하시나이까. 무례하오이다.》

돌연 불이 꺼지고 방안이 캄캄해졌다.

《이런 괘씸한 년!…》

목소리에 가시가 돋힌 백태가 문을 와락 잡아채려는데 중간문에서 문득 인기척이 들렸다.

흠칠 놀라 고개를 돌린 백태의 눈에 어깨를 구부정하고 가만가만히 자기쪽으로 다가오는 웬 사람의 형체가 띄웠다.

(이건 또 웬놈이야?!…)

술이 어지간히 깨여버린 백태는 문곁에서 창황히 물러나 굴뚝회첨에 몸을 숨기고 어둠속의 괴한을 지켜보았다. 그는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을님의 방문앞까지 접근한 괴한은 잠시 사위를 둘러보는듯 하더니 문을 덜컥거렸다. 그러더니 야살스럽게 소곤거렸다.

《이애 을님아, 자느냐?》

《… …》

《나다, 상호장이다.》

(뭣이, 상호장?… 아니 그럼 아버지가?!…)

너무도 뜻밖의 사실에 백태는 몽둥이로 정수리를 얻어맞은것처럼 한동안 정신이 어리뻥해졌다.

취기도 말짱 달아나고말았다.

《이애, 춥구나. 어서 문을 열렴. 응? 나라면 널 밖에 세워두지 않겠구나.》

아비의 음성은 봄날의 명주바람결처럼 부드럽고 살뜰했다.

아비한테서 으르떵떵거리는 목소리만 들어왔던 백태는 그가 이처럼 정찬 말도 할줄 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문바투 머리를 갖다대고 간살스럽게 소곤거리던 백가신은 흠칠 놀라 문에서 떨어지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더니 다시금 문에 붙어서며 입을 놀렸다.

《소리는 왜 치겠다고 하느냐. 그랬댔자 너한테도 좋은건 없지 않니? 내 말만 들으면 네 팔자는 상팔자가 되니라. 그저 내 아들만 하나 낳아주렴. 그럼 내것이 모두 네것이 되지 않으리. 나한테 아들이라군 지금 별공사로 내려와있는 백태녀석 하나밖에 없는데 칼부림밖에 모르는 불한당인 그놈에게 어떻게 이 수만금의 재산을 넘겨줄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니?… 아이구 이애야, 춥구나.》

아비는 또다시 문고리를 가만히 잡아당겼다. 열리지 않았다. 그는 정말 추운지 덜덜 떨리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백태란 녀석두 너한테 눈독을 들이고있는 모양인데 그놈의 말만 들었다간 네 앞길을 그르치고마니라. 그놈이 이제 널 개경에 끌고가 어떤 놈에게 수청들일려는지 알겠느냐. 허나 그렇게 하도록 내가 가만히 놔둔다든. 너를 내곁에, 네 부모 가까이 두자는게다. 아따, 너만 허하면 네 부모들두 호강을 시켜주지. 암 시키고말고. 흐흐…》

칼자루를 꽉 틀어잡은 백태는 살기에 차서 아비를 쏘아보았다.

그의 입술은 독살스런 조소로 일그러졌다. 그는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저깟 천한 계집이 무엇이라고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저런 추태를 부린단 말인가. 그는 아비의 몰골이 가련하고 혐오스러웠다. 아비가 원래 저런 사람이였는가. 아니면 늙어서 망녕이 들었는가.

백가신은 그리고도 한참 달콤한 말로 구슬리기도 하고 독기서린 말로 위협도 가했다.

그러나 끝내 방안에서 아무런 응대도 없자 그는 《으흐흐…》하고 신음소린지 오한에 떠는 소린지 분간못할 괴이한 소리를 내며 어정어정 중문안으로 사라졌다.

아비의 뒤꼬락서니를 쫓던 백태는 선뜻한 흙벽에 이마를 부비며 격분을 묵새기느라 모대기였다.

아비가 여운처럼 남긴 사람의 음성같지 않은 그 기분나쁜 소리가 오래동안 백태의 신경을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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