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 회
제6장 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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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당한 사람이 가해자를 벼르는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가해자 역시 피해자를 살피게 되는것이다.
명학소농군들에게 몹쓸짓을 한 백태는 은연중 그들을 경계하지 않을수 없었다. 도적이 발이 저리다는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것이다.
백태가 명학소의 개간답을 불사르고 돌아온 날 밤이였다.
멋모르고 엇서는 천한 놈들에게 된맛을 보여주었다는 만족과 함께 그 드물게 고운 오치연의 딸을 손에 넣었다는 짜릿한 기쁨을 벌써부터 느끼며 좀 들뜬 기분으로 그가 자기 방에 들어섰을 때였다.
황밀대촉불빛이 밝은 방아래목에 뜻밖에도 백가신이가 엄한 기색으로 틀고앉아있었다. 만일 일이 있으면 자기 방에 부르면 불렀지 결코 아들의 방에 오는적 없던 그가 이렇게 아들의 방에, 게다가 빈방에서 기다리고있다는것은 처음 당하는 일이여서 백태는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거 얼굴엔 웬 검댕이칠이며 그 갑옷은 또 웬일이냐? 불속에 들어갔다 왔느냐, 전장터에 나갔다 왔느냐?》
묻는것인지 비꼬는것인지 분간키 어려운 아비의 말에 백태는 옷도 벗지 못한채 좀 얼떠름해졌다.
그러나 들뜬 기분의 타성으로 《아닌게아니라 불속에서 왔소이다.》하고 얼뜬 웃음을 벌쭉거렸다.
《불속? 무슨 불속말이냐?》
목소리는 의연 나직했으나 아비의 넙적한 주걱턱이 앞으로 들리는것을 보고 백태는 저으기 긴장해졌다. 아비가 성날 때 하는 버릇이란것을 백태는 알고있었다.
《명학소의 개간답에…》
그는 말끝을 흐렸다.
《불을 질렀단 말이지.》
아들의 말을 마저 이어준 백가신은 턱을 잔뜩 추켜들고 꿱 고함을 질렀다.
《이놈, 그게 네 논이냐?!》
《… …》
아비가 이렇게 분기가 오른 까닭을 알리 없는 백태는 눈만 데룩거렸다.
《곡식에 불은 왜 질렀어?》
《천한 놈들이 덜되게 놀기에…》
《그럼 그 부곡놈들을 잡아족치던지 죽이던지 할게지 아까운 곡식은 왜 태워없앴는가 말이다.》
비로소 아비가 성난 까닭을 알아차린 백태는 얇은 입술우에 비웃음을 흘렸다.
《그깟 곡식 몇푼어치나 된다구… 망치가 가벼우면 못이 솟는다구 아예 버르장머리를 떼주어야지.…》
잘못을 빌기는커녕 도리여 거들거리는 아들의 태도에 더욱 분기가 치밀어오른 백가신은 볼편을 떨었다.
《야! 누군 너만 못해 가만 있는줄 아느냐! 그래 왕도에 가있으면서, 이제는 5품관이란 녀석이 배웠다는게 칼부림 하나야? 되지 못한 놈, 천한것한테서 난 놈이란…》
눈자위가 희뜩해서 고아대던 백가신은 말을 중둥무이하고 거친 숨만 씩씩거렸다.
입술을 강다문 백태는 가시눈으로 아비를 한참이나 쏘아보았다. 아비의 마지막말이 몹시도 비위를 긁었던것이다.
아들의 눈초리에 갑자기 주눅이 들어버린 백가신은 슬근히 시선을 옮기면서 중언부언하였다.
《글쎄 내가 결김에 막말을 했다마는 세상일이란 칼부림 하나룬 안되는거다. 너두 서경놈들때문에 조정에서 골치를 앓는다구 했지만 어디 지금 민란이 일어난 곳이 서경 한곳뿐이냐? 예라구 그런 일이 노상 없다구만 할수야 없지. 쥐두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구 천한것들이라구 너무 허투로 봐두 안되니라. 이제 저놈들이 무슨 작당을 할지 뉘 알겠느냐. 그러니 기찰을 잘해서 무슨 변이 생기지 않도록 애초부터 조처를 잘해라.… 그리구… 됐다. 이젠 가겠다.》
서둘러 말을 끝낸 백가신은 무엇에 쫓기는 놈처럼 가량가량한 몸을 구부정하고 황황히 문을 열고 나갔다.
백태는 무거운 갑옷을 벗을념도 않고 이마살을 찌프린채 한동안 그대로 앉아있었다. 아비의 마지막말이 의연히 가슴굽에 맺혀 내려가지 않는다. 그가 만약 자기의 아비가 아니였다면 그런 비렬한 모욕을 가한 그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것이다.
그는 하졸을 부를 생각도 잊은듯 제손으로 투구를 벗어 방구석으로 집어던졌다. 놋으로 만든 투구는 깨여져나갈듯이 아츠러운 쇠소리를 내며 굴었다.
쇠비늘이 부딪쳐 잘그랑거리는 갑옷도 신경질적으로 벗어붙이던 백태는 아비의 다른 말이 상기되여 손을 멈추었다.
정말 명학소놈들이 무슨 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위구심이 똬리를 트는 뱀처럼 가슴 한구석에 자리잡았다. 그의 이런 위구심은 자기 집 마당에서 다리를 분질리우고도 불이 황황 이는 눈으로 자기를 쏘아보던 망이의 모습이 련상되여 더욱 짙어졌다. 그놈은 운신조차 할수 없는 놈이니 크게 념려할것은 없다 할지라도 다른 놈들이 또 무슨짓을 할지 어찌 알겠는가. 아무튼 만사불여 튼튼이라고 무슨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락의 동태를 렴탐할수 있는 기찰군을 하나 박아넣을 작정이였다. 맞춤한 놈으로 그후에 골라잡힌것이 바로 명학소의 주막주인 도치였다. 도치는 돈밖에 모르는데다 부락에서 따돌림을 받는다니 그곳놈들과 내통하지 않을것이요, 자기의 말도 잘 들을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서사에게 도치를 은밀히 불러들이라고 일렀다.
그로부터 며칠후 백태는 하인청쪽으로 가보았다. 자기 집에 끌어다둔 을님이가 보고싶어서였다. 얼마동안은 그를 놀래우지 않을셈으로 그냥두려고 했으나 굴속에 들어박힌 메토끼마냥 하인청밖으로 얼씬하지도 않는 그가 이제는 무척 궁금스러워졌다.
명문대가집들에서는 말할것도 없고 시골의 토호에 이르기까지 무릇 량반이나 향리의 집들에서는 하인청쪽에 발길을 하지 않는것이 하나의 법도로 되여있었다.
그러나 백태는 그런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즈음 국권을 틀어쥐고 국사를 재단하는 무신들은 그 어떤 례식이나 옛식에 구애되지 않았으니 그들은 이것을 도리여 자기들의 장끼로 여겼다. 학문에 무식하고 정사에 무능한 그들로서는 달리 행동할수도 없는것인데 세상이 엇바뀌여 무신들판이 되고보니 평소에 무신들을 깔보던 문신들중에도 은연중 그들의 본을 따서 흉내를 내는 얼간이들이 나타나 한때의 웃음거리를 만드는 형편이였다.
이전에는 아는 사람을 만나면 두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숙여 읍을 했으나 요즘은 한손을 휙 쳐드는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신을 신고 방안에 들어간다거나 술좌석에서도 잔을 받기 불편스러운 왼쪽에 기생을 앉힌다거나 이전과 달리 잡스러운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술좌석에서 칼부림이 종종 생기는 무신들의 경우에야 거치장스럽게 바른쪽에 기생을 앉힐 까닭이 없겠지만 그렇지도 않은 문신들까지 행동거지가 무신들을 닮아갔던것이다.
아무튼 법이란 권력자들이 만들어내는것이고보면 군자도 시속을 따른다고 싫던좋던 당대의 권세를 잡은 무신들의 풍을 따르지도 않을수 없는것만은 사실이였다. 그러니 무신들속에서 치여나고 처세와 출세의 요령을 터득한 백태가 그런다고 해서 과히 나무랄것도 없는 법이다.
《하고싶은대로 한다.》는것이 그들 무신들의 세상 살아가는 리치요 도리였다.
이처럼 자기 행동에 대한 아무런 구속이나 자극도 받지 않는 백태가 중문을 지나 하인청의 뜰에 들어섰을 때였다. 그는 저도모르게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한 처녀(백태는 그가 을님이라는것을 첫 순간에 직감하였다.)가 돌아서서 발돋움하며 바지랑대를 뻗친 줄에다 빨래를 널고있었다.
비록 뒤모습이였으나 함함한 머리채가 동그스름한 어깨를 지나 잘룩한 허리를 타고 흘러내린 그 녀자의 날씬한 자태는 그의 눈부리를 대번에 빼앗고도 남음이 있었다.
빨래를 너느라고 키를 솟굴 때마다 소매속에서 눈같이 희고 생물처럼 신선한 두팔이 드러나고 초신우로 달걀같은 발꿈치가 쳐들리군 했다.
백태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안이 깔깔하게 마르는것을 느꼈다. 그는 도적놈처럼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물속같이 조용하다. 처녀의 얼굴모색을 보고싶은 욕망에 발을 저겨디디며 앞으로 걸었다.
인기척을 느낀 처녀가 흠칠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렸다. 뜻밖에도 눈앞에 막아선 어마어마한 개경량반과 마주선 더구나 이상한 광택으로 번쩍거리는 그의 음험한 눈길과 부딪친 을님은 공포와 불안으로 눈동자가 허둥거렸다. 이어 공포심이 수치심으로 변해버린 처녀는 불길을 받은것처럼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아미를 푹 숙였다.
손에 쥔 빨래가지에서 눈물인양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발등을 적셨다.
백태도 낯이 벌기우리해져 잠시 그대로 서있었다. 못된짓을 하려다 들킨 놈들이 매양 그렇듯이 그의 낯에는 열적은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잔기침을 한번 깇고나서 입을 벌리려 했으나 목이 잠겼을 때처럼 말이 나가지 않았다. 천한 계집앞에서 말문이 막히는
이럴 때면 그는 흔히 언젠가
백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체면이 아직까지 자기에게 한쪼각이나마 남아있다는것을 저으기 부끄럽게 여겼다.
이윽고 을님이를 조소어린 눈길로 빤히 훑어보던 백태는 이새로 내뱉듯 나직이 소리쳤다.
《고개를 쳐들어!》
을님은 입술을 옥물었다. 수통감으로 관자노리가 팔딱팔딱 뛰는것이 알렸다.
백태가 히물거리며 다가서더니 그의 턱에 손을 가져다댔다.
진저리를 치며 그 손을 탁 쳐버린 을님은 얼른 뒤로 물러섰다.
《이년 봐라.》
백태가 독살스럽게 뇌까리며 다시 다가섰다.
다행히도 이때 중문안에서 서사가 백태를 부르며 달려왔다.
《뭐야?》
아첨기가 흐르던 서사의 낯은 백태의 날카로운 시선에 질리여 굳어졌다.
《저, 명학소에서 도치란 놈을 끌어왔삽기에… 헤.》
《방정맞은…》
백태는 서사를 꾸짖는것인지 을님이를 욕하는것인지 분간못할 소리를 한마디 뇌까린 후 중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넓은 대청아래에 도치가 꿇어엎드려있었다. 가뜩이나 체소한게 옹송그리기까지 하니 똑 고슴도치만 해보였다.
백태는 도치따위는 안중에 없는듯 대청에 앉아서도 먼눈을 팔고있었다. 을님의 자태가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년이 가시가 센걸.)
그는 을님이와 같은 계집은 생나무 꺾듯 해선 안된다는것을 알고있었다. 목숨보다도 순결과 지조를 더 귀중히 여기는 그런 처녀들을 서뿔리 건드렸다가는 우물속에 뛰여들거나 부엌서까래에 목을 매기가 십상이였다.
그런즉은?…
《소인 문안드리오이다.》
좀전에 인사를 받은것 같은데 도치가 또 혀아래소리로 괴여올렸다.
(그놈 되게 좀이 쑤시는 모양이구나.) 하고 속으로 웃으며 백태는 서사에게 도치를 방안으로 불러들이라고 이르고나서 자기도 안방으로 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