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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5 회


제5장 검은 가을

9


오치연은 망이의 상한 다리를 소금물로 씻어내고 짓찧은 약풀을 갈아붙이고나서 베천오리로 동여매였다. 상처가 너무도 크고 험해서 그의 손은 가볍게 떨렸다. 그런데도 망이는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몹시 아프지요?》

오치연은 동통을 용케 참는 망이의 강직한 성미가 돋보여 감동어린 음성으로 나직이 물었다.

《아프외다. 다리가 아니라 마음이 아프외다.》

이렇게 말하는 망이의 얼굴에는 고뇌의 빛이 가득했다.

《우리때문에 등장하러 갔다가 선생이 욕을 보았소이다.》

망이는 오치연의 손을 잡았다.

《무슨 말, 내야 이렇게 신수 펀펀해서 돌아왔지만 행수가 참말루…》 하며 망이의 상한 몸을 다시금 훑어보던 오치연의 눈에는 눈물이 어렸다. 평생 의원노릇을 하며 숱한 병자들을 보았지만 죄없이 악형을 당해 이처럼 온몸이 참혹하게 상한 사람은 처음보는 그였다.

《량반토호놈들이란 어쩜 그리두 하나같이 악착한지…》

오치연은 불현듯 딸 을님이의 신상에 미친 불행이 생각나 가슴이 옥죄였다.

《나두 지금 그 생각이외다. 그 악착한 놈들한테 개, 돼지처럼 수모를 받으며 살아온걸 생각하면 돌벽에 머리를 짓쫏고싶은걸요.》

망이는 또 그대로 자기 생각을 토설했다.

《내 먼저번에 홍경원의 절간에 가서두 느낀 생각이지만 량반토호놈들이나 융대같은 놈들이나 할것없이 발바닥이나 손바닥에 흙을 묻히지 않고 살아가는 놈들은 다 악독하다는것이외다. 손에 연장을 쥐고 제 육신을 놀려 벌어먹는 사람들은 제힘을 믿고 사는고로 남한테 악한짓을 할 까닭이 없으나 놀고먹는 놈들은 남을 속이고 남의것을 빼앗지 않으면 살아갈수 없으니 악착할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이런 놀고먹는 놈들에게 속히우고 뜯기운다는것이 얼마나 통분한 일이우.》

원래 과묵한 망이건만 이날은 별스레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의 말마디들이 가슴을 파고들어 오치연은 저도모르는 사이 딸의 생각을 잊고 망이의 말속에 끌려들어갔다.

그의 머리속에는 지난날 자기가 상종하였던 각이한 사람들의 모색이 떠올랐다. 본업이 의원이다보니 그에게 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람여를 타고온 거드름스러운 벼슬아치도, 말을 타고 눈을 부라리는 칼찬 무관도, 몸에서 거름내가 나는 농부도, 비린내를 풍기는 어부도, 녀종을 두셋씩 달고다니는 귀한 집 아씨도, 배를 내밀고다니는 장사치도, 팔다리에 피딱지가 말라붙은 나무군도, 분내가 코를 찌르는 기생도, 목탁을 두드리는 중도… 한마디로 빈부귀천의 별의별 사람들을 다 대면하여보았다. 이 과정에 그는 사람들을 선한 인총과 악한 인총으로 구분할수 있었으나 어찌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선한데 놀고먹는 놈들은 악한가 하는데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하였다.

망이의 말은 옳았다. 아니, 출중한 생각이였다.

농군인 망이가, 천민인 그가 이런 세상철리를 깨치고있다는것이 놀랍기만 했다.

한동안 눈을 감고 깊은 상념에 잠겨있던 망이가 다시 눈을 뜨고 천정의 한 곳을 응시하였다.

《옛적부터 농부 한사람이 밭을 갈지 않아도 굶주리는 사람이 생기게 되며 녀인네 하나가 베를 짜지 않아도 헐벗는 사람이 있게 된다고 하였는데 저 량반놈들은 손가락 하나 놀리지 않으면서도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잘먹고있으니 이런 놈들과 어찌 한세상을 살아갈수 있겠소.》

망이의 말은 낮으나 무게있게 울렸다.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오치연에게는 망이의 인품이 돋보이기만 하였다.

이처럼 비범한 사람이 한뉘 천민으로 인박혀 짐승처럼 학대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오치연이도 울분이 솟구쳤다. 이 사람이 누구의 뺨이라도 한대 때렸단 말인가. 남에게 죄될짓이라도 했단 말인가. 죄는커녕 남을 도와주고 남에게 덕만 입히지 않았는가. 하기에 뭇사람들이 그를 가물에 단비와 같은 존재라고 해서 《금비》라고 부르지 않는가. 자기 식솔이 이 부락에서 오늘까지 명을 부지하고있는것도 알쭌히 망이의 덕택이 아닌가.

오치연의 가슴속에는 자기의 늙은 한몸을 바쳐서라도 젊은 망이를 위해주고싶은 충동이 고패쳤다. 은혜는 은혜로 갚는것이 인간의 떳떳한 도리라고 할진대 지금이야말로 몸져누운 망이를 도와나설 때라고 오치연은 생각했다.

이때 아래방에서 두설두설하는 아낙네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녀인들의 음성은 오치연에게 지금껏 감감 잊고있던 자기 딸 을님에 대한 생각을 되새겨주었다.

그는 가슴속에서 터져나오는 불같은 탄식을 입술로 악물고 참았다. 그러나 어쩔수 없는 신음소리가 새여나왔다.

《음―》

갑자기 낯색이 창백해진 오치연이를 띄여본 망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시오?》

《아, 아무일도 아니외다.》

오치연은 망이의 꺼칠한 얼굴을 보자 차마 자기 딸의 신상에 닥친 사연을 말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페부속까지 꿰뚫어보는듯 한 그의 예리한 눈초리앞에서 오치연은 자연 마음이 허둥거렸다. 지꿎게 파고드는 망이의 눈길에 오치연은 끝내 자기의 마음속을 파헤치지 않을수 없었다.

《실은 내 딸년일로 가슴이 터질지경이외다.》

눈길을 떨어뜨린 오치연은 괴로운듯 주먹으로 이마를 툭툭 때렸다.

《말씀하시우.》

망이는 눈확에 심각한 빛을 띠우며 재촉했다.

《글쎄 별공사란 놈이 우리 을님이를 제 애비의 집으로 들여보내라지 않소.》

《언제요?》

《등장하러 갔을적에.》

《백태, 그 개놈이!…》

망이는 낮으나 칼날같이 서슬이 오른 어조로 한마디 내뱉았다.

동안이 든 침묵이 흐른 뒤에 오치연이가 좀 면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래 내 생각엔 기왕 혼사말도 있던차제라 행수가 우리 을님이를 아예 맡아달라는거웨다.》

이 말은 부지불식간에 나온 말이 아니였다. 더러운 량반놈들의 노리개로 딸의 앞길을 망치느니 차라리 천민이라 할지언정 사람다운 망이에게 주어 마음고생없이 살게 하는것이 천만번 나으리라고 작정한지 오랬다. 또 늦게나마 이렇게 하는것이 처음 혼사말이 있을 때 선뜻 응하지 못했던(물론 마누라의 고집때문이기도 했지만) 잘못을 회개하는셈으로도 될것이였다.

망이는 생각에 잠긴듯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하긴 아무리 담대한 사나이라 할지언정 어찌 이런 혼사말에 제 속심을 서뿔리 드러내랴.…

하지만 오치연이 들은 대답은 너무도 뜻밖의 말이였다.

《그렇겐 할수 없소이다.》

남의 말하듯 하는 태연한 소리에 오치연은 좀 어리둥절해졌다.

《웨, 노여워서 그러시오?》

망이같이 주대있는 사내로서는 노여움을 탈만도 하다고 오치연은 생각했다. 가볍게 고개를 흔들던 망이는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오치연은 그가 상처의 아픔때문에 그러는지 아니면 을님이로 하여 그러는지 알수 없어 송구스러웠다.

《아파서 그러시오?》

《괜찮소이다.》

망이의 낯은 다시 평온해졌다.

오치연은 딸의 혼사말을 다시 꺼내기 거북하여 묵묵히 앉아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의지하고있던 마지막지탱점마저 허물어내리는듯 한 락심을 느끼였다. 그는 망이가 이런 태도로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설마 사내의 마음이 그렇게 쉽사리 변할수가 있을가. 하기사 우리 을님이한테만 매달려있으란 법두 없지. 그러니 이젠 우리 을님이 일이 다 틀어지고만단 말인가.

갈마드는 착잡한 생각으로 마음을 썩이고있는 오치연은 망이 역시 마음의 흥분을 눅잦히고있는줄을 알지 못했다.

망이는 천민인 자기에게 딸을 맡기려는 오치연을 고맙게 여겼다. 그런데 어쩐지 을님이가 곤경에 빠진 지금과 같은 경우에 그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는것이 떳떳치 못하게 생각되였다.

더우기 을님이나 그의 부모들은 천민도 아닌데 자기 부락에 살면서 이런 고통을 당할 까닭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지금 그들을 놈들의 마수가 뻗치기 전에 타곳으로 빼돌릴 궁냥을 하고있는중이였다. 문득 초적두령 달령성이와 연줄을 통하면 어느 안전한 곳에, 하다못해 계룡산속에라도 피신시켜줄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달령성은 의리가 깊은 사람이니 자기 당부를 꼭 들어줄것 같았다.

이윽고 망이는 뼈마디가 두드러진 오치연의 손을 더듬어잡았다.

《나를 믿어주니 고맙소이다. 허나 급한건 혼사가 아닌줄로 아오.》

망이의 진정어린 말에 오치연이도 가슴이 뭉클했다.

《내 이미 별공사 그놈한테두 을님이를 출가시켰다고 말했소그려.》

오치연은 망이의 마음이 동하는것을 보고 서둘러 말했다.

망이는 심각한 생각에 잠기더니 잠시후 머리를 가볍게 저었다.

《그랬다고 놈들이 순순히 물러서겠소. 선생네는 우리 부락 호적에 오른 사람들도 아닌데 이곳을 뜨면 그만이 아니겠소. 내 맞춤한 곳을 정해드릴테니 며칠만 말미를 두시우.》

오치연이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참말 그렇게만 하면 시끄러운 일이 없을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순간 자기들이 부락을 떠나버리면 망이와 을님의 혼사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경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들로 될수도 있지 않는가. 하지만 망이는 눈을 감고 무거운 상념에 잠겨있어 오치연은 다시 말을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망이는 을님이네 일가를 피신시킬 일을 상의하려 달령성이에게 망쇠를 급히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있었다. 늘 동분서주하는 달령성이가 지금은 어데나 있을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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