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 회


제5장 검은 가을

8


을님이 부엌에 들어서니 화로에 약을 달이고있던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누가 왔댔니?》

《아니.》

얼결에 고개를 흔든 을님은 인차 말머리를 돌렸다.

《약은 다 달여졌어요?》

《이젠 밭으면 되겠다.》

을님은 어머니의 근심스러운 의혹이 어린 눈길을 등뒤에 받으며 시렁에서 베보자기를 꺼내였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사발우에 펴놓고 초약이 보글보글 끓고있는 장사귀를 기울여 약물을 받았다. 검고 걸쭉한 약물에서 쌉쌀한 초약내가 물씬 풍기였다.

그 약내를 맡으니 억물고있던 눈물이 저도모르게 볼을 타고 줄줄이 흘러내렸다.

《을님아, 너 왜 그러니? 응?》

어머니는 눈이 둥그래서 성급히 물었다.

《고비 오라버니가 돌아오셨대요. 그런데… 흑…》

을님은 말하다말고 갑자기 설음이 북받쳐 고개를 떨구고 흐느꼈다.

《왜? 무슨 일이 있었다던?》

어머니는 저도 울상이 되여 을님이를 지켜보았다.

한참만에 마음을 진정한 을님은 떠듬거리며 망쇠한테서 들은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어유, 어쩜 세상은 이리두 무정하다니?》

어머니의 눈굽에도 눈물이 그렁하니 고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남편에게 빨리 전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약사발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끙끙 앓음소리를 내던 오치연은 안해가 들고들어온 약사발을 보자 낯을 찡그리며 벽쪽으로 돌아누웠다.

《약을 드시우.》

어머니는 이마를 처매고 누운 남편의 머리맡에 앉아 약사발을 내밀었다.

오치연은 아무런 기척도 하지 않았다.

《저, 망이행수가 돌아왔다오.》 하는 안해의 말에 오치연은 흠칠 놀라며 웃몸을 일으켰다.

《들것에 들려왔다는데 영 몸이 말이 아닌 모양이우. 그 끌끌한 사람을 글쎄…》

《음―》

오치연은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지듯 도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당신더러 한번 와달라는데 이렇게 몸져누워있으니 어쩌우.》

오치연은 숨소리만 거칠뿐 아무 대꾸도 없었다.

《식기 전에 어서 드시우.》

을님이 어머니는 남편에게 다시 약사발을 내밀며 재촉했다.

《싫다는데 왜 자꾸 성화요.》

남편의 짜증에 그도 목소리가 좀 커졌다.

《관아에 갔다오신 후로 통 식음을 전페하시니… 무슨 탈인지 속시원히 말이라두 하시구려.》

《탈은 무슨 탈, 제발 좀 성화를 먹이지 마우.》

《어이구…》

어머니는 약사발을 방바닥에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였다.

을님은 부엌에서 들고온 랭수그릇을 약사발곁에 조심히 가져다놓고 웃방으로 올라갔다.

반짇고리를 끄당겨놓고 옷감을 손에 잡았으나 이어 그것을 무르팍에 떨구고 하염없는 생각에 쫓기였다.

그는 병고로 시달리고있을 망이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뒤숭숭해서 도저히 정신을 가다듬을수가 없었던것이다. 얼마나 곤욕을 당했으면 걷지도 못하고 들것에 실려왔으랴.

억대우같은 사람을 그렇게 페인을 만들다니?… 그는 가슴이 떨리고 피가 끓어 견딜수가 없었다.

그는 망이가 자기에게 얼마나 귀중한 사람인가를 이때처럼 깊이, 이때처럼 절절히 느낀적이 없었다. 마음같아서는 지금 당장 그한테로 달려가 그를 부여안고 속후련히 눈물을 흘리고싶었다.

이제 와서는 천민이요 량민이요 하는 자기들사이의 장벽이 하잘것 없는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을님은 망이에게 갈수 없었다. 그것이 무엇때문인지는 알수 없어도 어쨌든 그런 용단을 내리지 못하는 자신이 그지없이 미웁고 자기를 속박하고있는 보이지 않는 동아줄이 가증스러웠다.

근심과 걱정이 떠날 날 없고 불행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세상살이가 그는 지겹고 역겨웠다. 그는 아버지의 심화병도 자기와 련결된것임을 처녀의 예민한 육감으로 느끼고있었다. 자기 머리우에 드리운 커다란 불행에 대한 예감, 그 불행을 어차피 감수하게 될 자기 처지에 대한 인식, 을님은 가슴이 아팠다.

모름지기 어머니도 그것을 느끼고있기에 저처럼 안절부절 못하고있을것이다. 을님은 온 부락사람들이 릉욕을 당하는 날에 유독 자기만이 머리칼을 보존할수 있었다는 사실이며 망이는 공주에서 들것에 실려왔다는데 자기 아버지는 터럭 하나 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미루어 그뒤에 숨은 보다 무서운 환난을 예기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점도록 조용하던 아래방에서 부모가 낮은 소리로 중얼중얼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어머니가 을님이를 찾았다.

《을님아, 무얼하니?》

《네.》

을님은 까닭모를 긴장을 느끼며 대답했다.

《너 밖에 나가 닭모이를 좀 주려무나.》

얼마전에 어머니가 닭모이를 뿌리는것을 보았던 을님은 의아쩍은 생각이 들었으나 무슨 비밀히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되여 아래방으로 내려갔다. 자리에서 일어나앉은 아버지가 을님이를 보더니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을님은 부엌문을 열고 뜨락에 나섰다.

재롱스럽게 엄지닭을 따라다니던 병아리들이 삐용거리며 뛰여왔다. 그는 조겨를 한웅큼 뿌려준 후 토방에 시름겹게 앉았다.

한동안 조용히 수군거리던 방안의 목소리가 차츰 높아졌다.

《그게 정말이시우?》

놀라서 부르짖는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후―》

아버지는 한숨을 토했다.

자리를 피하려던 을님은 어쩐지 그들이 자기 말을 하는것 같아 도로 주저앉아 귀를 강구었다.

《누가 그럽디까?》

어머니가 따졌다.

《개경에서 내려온 백가신의 아들놈이지.》

《개는 낳는 족족 짖는다더니… 그놈이 그애 머리만 남겨두는게 어쩐지 꺼림하다 했지. 아이구, 이 일을 어쩜 좋수. 예?》

《글쎄, 말룬 침모라구 하던데…》

《침모가 될지 무어가 될지 누가 안다우.》

《후―》

《난 못보내겠소.》

《그러자니 뒤미칠 화를 무슨 수로 당하겠소. 우리 한집안의 일이라면 그런대로 무관하겠지만 온 부락사람들의 생사와 관련돼있으니 말이요.》

《아무렴 우리 애를 바치지 않는다고 부락사람전부를 굶겨죽이기야 하겠소?》

《그러기가 십상이지. 그놈들이 어디 법을 아는 놈들이요.》

《설마 그런들 우리가 이 부락사람들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애를 제물로 바친다는거요. 원 말두, 말같지 않는 말을 다 하시오.》

《상관이야 왜 없겠소. 우리가 이 부락신세를 좀 적게 졌소. 인정으로 보나 의리로 보나 모른다구야 할수 없지.》

《망이행수한테 말했수?》

《언제 말할새나 있었소. 더우기 몸이 그 모양된 사람한테 어떻게 그런 말까지… 그러게 내가 뭐랍디까. 왼고집을 부리더니 그예 이런 변을 당하지 않소. 아무튼 그 사람과 의논해봐야겠소. 병도 봐줘야겠구…》

《어이구 내 팔자야… 흑…》

《이거 그치지 못하겠소. 애가 듣겠는데.》

을님의 손에서 바가지가 툴렁 떨어져 버선발등에 조겨가 들씌워졌다.

병아리들이 좋아라 삐용거리며 그의 발등을 쪼았으나 을님은 얼없이 땅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예기했던 불행은 오고야말았다. 그러나 이처럼 갑자기, 이처럼 잔혹하게 닥치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했었기에 을님은 이 사실이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별안간 엄지닭이 불안스럽게 구구거리며 울밑으로 뛰여가고 병아리들이 기급하여 엄지닭을 뒤따랐다.

을님은 무심중 하늘로 눈길을 주었다.

커다란 소리개가 검은 깃을 쫙 펴고 중천을 빙 날아돌고있었다. 그랬어도 빨래줄에 앉아 꼬리를 초싹거리는 제비들은 강남갈 날이 다가왔다고 즐겁게 우짖었다.

을님은 제비가 부럽고 닭이 불쌍했다. 제비는 소리개도 사람도 겁냄이 없이 제맘껏 날아예는데 착하고 온순한 닭은 저처럼 겁에 질려 울어대지 않는가. 소리개나 산짐승무리가 언제나 업신여겨 못살게 구니 어느 하루 마음 놓지 못하는 가련한 닭의 신세, 다같은 날짐승이건만 어찌하여 닭의 신세는 그리도 불우할가.

그러자 문득 을님은 무거운 바위가 가슴을 누르는듯 한 압박감과 그 짓눌린 가슴을 비수로 에이는듯 한 쓰라린 비애를 절감하였다.량반들의 진지상에 오르는 닭의 신세나 다름없는 자기의 기구한 처지에 대한 애달픔으로 심장이 아프게 옥죄여들었다.

그날밤,

조개껍질등잔에 불을 달아놓은 을님은 바느질감을 손에 잡았으나 마음을 진정할수가 없었다.

망이네 집에 간 아버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저녁을 드는둥마는둥하더니 자리에 누워 끙끙 앓음소리를 냈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니 이번에는 어머니가 그자리에 드러눕고말았다. 자기때문에 근심하는 부모들이 불쌍하고 측은했다. 옛말에 나오는 지은이처럼 효녀는 못될망정 부모들에게 근심과 걱정만을 끼쳐드리는 자신이 그지없이 죄스럽기만 했다. 부모들의 여생을 복되게만 해줄수 있다면 을님은 자기 한몸을 그 어데건 내던질수 있었다. 그것이 설사 지옥에 있다는 기름불가마속일지라도.

소슬한 가을바람에 문풍지가 드르르 울리고 뒤산에서 접동새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온다.

그러자 부지중 망이가 지금 병상에서 신고하고있으리라는 생각이 떠올라 못견디게 가슴이 쓰렸다. 아, 그이가 이 사실을 안다면… 을님은 머리를 저었다. 어차피 알게 될 일, 무엇하려 벌써부터 그의 가슴까지 아프게 하랴.

동창이 훤해졌다.

을님은 저도 어쩔수 없는 힘에 이끌려 방문을 열었다. 밝은 달빛이, 유정한 달빛이 마당 한가득 흐른다.

어쩌면 이 밤이 그와 만나는 마지막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한순간 그를 휩쌌다. 처녀의 젊은 넋은 정든 사람의 그 뜨거운 숨결을 감촉하고싶은 욕망으로 불탔다. 그는 문을 열고 나섰다.

그러나 망이네 집에 이르러 창문에 비낀 불빛을 보자 을님은 어깨가 나른해져 걸음을 주춤거렸다.

(쓸데없는짓이야. 그랬댔자 달라질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는가.)

그의 심혼은 여기서 또다시 망설이였다. 그는 끝내 발길을 돌리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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