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 회


제5장 검은 가을

7


높이 들린 가을하늘에 눈덩이같이 희고 정갈한 구름송이가 둥실 떠있다.

구름송이는 살아숨쉬는 물체처럼 피여오르기도 하고 꺼지기도 하면서 시시각각으로 제 모양을 변화시키였다.

들것에 누워 집으로 돌아오는 망이는 가없는 창공을 올려다보며 뭉게구름처럼 부풀어오르는 하나의 생각을 끈덕지게 쫓았다.

(정말 팔자란 타고나는것인가?)

지금껏 이런 의문을 가져본적이 없는 망이였다.

(어디 구름아, 너 한번 대답해봐라. 우리 상놈의 팔자는 왜 이리 기구하냐?)

그러자 뭉게구름은 대답할 말이 없는지 아니면 인간세상사에는 아무 흥심도 없는지 쪼각구름으로 서서히 흩어져버렸다.

(그럴테지. 속이고 빼앗고 때리고 죽이는 이 더러운 인간세상은 짐승도 낯을 붉힐텐데 아무렴 너처럼 정갈한 구름이 차마 굽어볼수 없을테지.)

망이는 눈을 감았다.

《아프지 않우?》

고비가 그를 굽어보며 다심하게 물었다. 고비의 눈갓은 빨갛게 물들었고 울음을 참느라 입술이 떨렸다.

공주서부터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들것옆에 딱 붙어 걸어오는 고비는 오빠의 얼굴을 볼수록 가슴이 저려 견딜수 없었다.

그처럼 혈색좋던 둥그런 얼굴이 며칠사이에 딴사람의 모색으로 변해버렸다. 피기없는 낯에 구레나룻만이 더부룩한데 광대뼈가 두드러지고 두툼한 입술은 조갈이 나 터갈라졌다. 다만 우묵해진 두눈확속의 눈만이 예이제나 다름없이 정기가 흐를뿐이였다.

망이는 걱정말라는 뜻으로 눈시울을 한번 감았다뜨며 고비에게 사뭇 정답고 따뜻한 눈웃음을 보냈다. 며칠만에 듣는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는듯 한 고비의 맑은 음성이 퍽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고비는 미덥고 정겨운 오라버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소리쳐 울고싶은 심정이였다.

들것의 앞채는 망쇠가 들었고 뒤채는 백가신네 집에서 고역을 치르고 돌아가는 촌개소의 행수 상두가 들고있었다. 여러명의 명학소사람들과 함께 촌개소의 사람들도 묵묵히 들것을 뒤따라 걸었다. 그들은 그 모진 악형을 당하면서도 사나이답게 꿋꿋하던 망이의 강개한 기상을 보고 받은 감동이 컸었다.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는다는 말은 실로 망이와 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이라고 그들은 생각하고있었다. 맨뒤에는 죄인인양 고개를 푹 수그린 그믐녀가 힘없는 걸음을 옮기고있었다.

망이의 눈길은 다시 푸르른 창공으로 날았다.

산산이 흩어졌던 흰구름송이들이 엄지닭의 품속으로 모여드는 햇병아리들마냥 한덩어리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이윽하여 뭉게구름은 꽃잎모양으로 피여났다.

조화를 부리는 구름덩이를 쳐다보며 재미나는 옛말을 듣는 어린애들처럼 벙싯거리던 그의 입은 차츰 꾹 다물려지고 두눈섭이 안으로 모여졌다.

(타고난 팔자는 정말 어쩔수 없는것인가?)

허공중천처럼 막연한 생각, 그러나 공기처럼 절박한 문제에로 그의 상념은 또다시 줄달음쳤다.

불현듯 계룡산의 초적두령 달령성이 생각키웠다.

그가 지금 자기 몰골을 본다면 얼마나 가소롭게 여길것인가. 백태를 살려보내라는 자기 말에 그는 코웃음을 쳤댔지. 그런 놈을 살려두면 백성들한테 우환거리라고.

뼈저린 후회로 그는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였다. 손가락마디들이 아팠다.

그때 달령성은 이런 말도 했다. 지금 조정에 들어앉아 권세를 부리는 무신놈들중에는 비천한 출신들도 있다고, 그렇다면 고관대작이나 량반이란 따로 종자가 정해진것이 아니지 않는가. 때가 되면 누구나 할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니 결국 팔자란 미리 정해진것이 아니다. 팔자란 뭐 말라죽은것이냐!

망이는 신의 계시처럼 번쩍 떠올라 뇌리를 때리고 흉벽을 치는 충동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자기가 지금껏 바람따라 흩어지기도 하고 덩어리지기도 하는 허망한 구름처럼 덧없이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덧없는 인생이란 시궁창의 지렁이와 무엇이 다를것인가. 그는 가슴속에 무쇠기둥같이 든든한 그 어떤 응어리가 자리잡는것을 느꼈다.

온 부락사람들이 떨쳐나 망이를 맞아주었다.

망이는 눈물을 머금고 자기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따뜻한 눈인사를 보냈다. 그 정상이 더욱 눈물겨워 사람들은 소리없는 울음을 집어삼켰다.

망이를 들것채로 방안에 들여다눕혔다.

이불우에 옮겨눕히느라 그의 몸우에 덮었던 홑이불을 들치고 피로 얼룩진 낡은 베옷을 벗겼을 때 방안의 사람들은 경악의 웨침들을 지르고 혀를 찼다.

어느곳 하나 성한데없이 온몸이 터지고 찢겨 피딱지가 말라붙었는데 탈구되였던 무릎마디는 보기도 끔찍하게 퉁퉁 부어올랐다.

눈을 뚝 부릅뜨고 아들의 상한 몸을 지켜보는 누리나는 아무말도 없었다.

고비가 끝내 참지 못하고 누리나의 무릎에 쓰러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무슨 죄를 졌다구… 오빠를… 이렇게 만들었나요.… 흐흑…》

누리나는 자기 무릎우에서 세차게 들먹이는 고비를 일으킬념도 하지 않고 망연한 자세로 흙벽만 바라보았다. 이윽해서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는 무슨 죄, 상놈으루 태여난 죄지.》

허탈감에 잠긴 누리나의 목소리는 빈 독에서 울리는 소리처럼 궁글었다.

울기가 올라 뚱 하고 앉아있던 망쇠는 밖으로 획 나와버리고 말았다. 방안에 있다가는 상소문을 들고갔다가 꼴좋게 됐다고 분김에 꿰진소리를 할것만 같았다. 마당에 나온 망쇠는 다리아래서 맴돌아치는 복슬개의 배허벅을 공연히 걷어차기도 하고 발에 걸채는 돌멩이를 집어 사립밖으로 휭 던져버리기도 했다. 무엇이든 들부셔버리지 않고는 가슴속에 괴여오르는 울분을 묵새길것 같지 않았다.

부엌에서는 호미동이네가 코를 흘쩍이며 아궁에 생솔불을 지피고 가마를 부셔냈다.

범잔녀는 함지에 물을 떠들고 웃방으로 올라가 망이의 상처를 씻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문곁에 앉아있던 그믐녀가 나직이 떨리는 소리로 누리나를 불렀다. 울어서 불그레해진 그의 눈언저리에는 아직도 눈물자리가 질척했다. 들것에 담겨가는 망이를 따라 여기까지 왔으나 자책감과 죄감으로 알은체를 못하고 지금껏 구석에 옹크리고있었던것이다.

그믐녀는 백가신의 집에서 함께 종살이를 하던 어금바우가 버드내의 진척이 되여 누리나와 살림을 시작한 후에 그를 알게 되였다.

그때에도 그믐녀는 누리나네 집을 몇번 오갔지만 어금바우가 백가신의 집으로 다시 끌려온 뒤에도 여러번 명학소를 다녀가면서 퍼그나 자별한 사이로 지내였다.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어려서부터 백가신의 종살이를 해온 그믐녀는 무던한 어금바우의 보살핌을 각별히 받았기에 그가 죽은 다음에도 그의 식솔인 망이네한테 고마운 심정을 품고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누리나는 흐린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말 뵈올 낯이 없어유.》

그믐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용케 왔구만.》

그제야 그믐녀를 알아보았는지 누리나는 심드렁하게 대척했다.

몇년만에 만나는 사람들의 인사치고는 너무도 무심했다. 하긴 인사범절을 차릴 경황도 아니였다.

《그래, 그댁이 거기 있으면서 사람이 저 지경되도록 놔뒀단 말이요. 아무리 종살이기로서니…》

《할 말이 없어유. 그렇지만 아주머니는 애당초 그런 놈에게 저 사람을 왜 떠나보냈어유? 백가신이, 그놈이 무슨 사람이라구. 그놈한테 저 사람 아배가 잘못됐는데 이제 그 아들마저 잘못되는걸 보고싶어 그래유?》

걸그렁해서 말하던 그믐녀는 입술을 강물었다. 잔주름잡힌 입귀가 떨렸다.

《그게 무슨 말이우. 저 사람 아비가 어쨌다구?》

누리나의 눈초리가 날카로와졌다. 그 눈빛을 본 그믐녀는 변명조로 황황히 중얼거렸다.

《아니와요. 내가 괜한 소리를…》

《무얼 숨기려구 그러우. 나두 그렇게 됐으리라구 대강 짐작은 했었지.》

그믐녀는 고개를 떨구고 소리죽여 울었다.

《어서 말하우.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야 원귀라두 보살필게 아니우.》

누리나의 거듭되는 재촉을 받고서야 그믐녀는 고름으로 눈굽을 훔치고 얼굴을 들었다.

그믐녀의 머리속에는 세월의 강태에 묻혀버려 기억에서 희미해진 망이의 아버지 어금바우에 대한 추억이 설피여지는 안개속에서 드러나는 물체처럼 차츰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백가신네 집에서 종살이를 함께 하던 망이의 아버지 어금바우는 망이처럼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였다.

그는 죄없이 백가신이한테 매를 맞고있는 어린 노비를 두둔해나섰다가 참변을 당하였다.

《쇠나라는 잔심부름하는 몸종이 있었지유. 그날저녁 쇠나는 커다란 대야에 상호장이 발씻을 물을 떠갔는데 대야에 발을 잠그던 상호장은 물이 뜨겁다면서 글쎄 대야채로 들어 그 더운물을 쇠나의 얼굴에 들씌우지 않았겠나유.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그놈은 벌겋게 데서 울고있는 그애를 대야로 정수리며 잔등을 마구 두들겨패댔지유.

울음소리를 듣고 마당에 모여든 숱한 종들은 머리가 터져 얼굴로 피를 줄줄 흘리는 그애가 끔찍하고 불쌍했지만 어쩌지 못하고 그저 우들우들 떨기만 했지유. 그놈은 쇠나의 머리태를 잡아휘둘러 땅에 쓰러뜨리고는 차고 밟고… 금방 그애의 숨이 넘어갈것만 같았지유.

그때 저 사람 아배가 앞으로 나서며 철없는것을 한번만 사정봐달라고 빌었지유. 그러자 백가신은 종놈이 주제넘게 주인의 일에 간참한다구 어깨패들더러 그를 묶으라고 하잖겠어유. 그리군…》

그믐녀는 억이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아주머니, 이야기를 계속하오.》

웃방에 누워 그믐녀의 말에 신경을 도사려 듣던 망이가 재촉했다.

망이의 상처자리를 미지근한 소금물로 씻어내고 또 더운물에 적신 수건으로 부어오른 무릎마디를 찜질해주던 범잔녀도, 부엌과 웃방을 오가며 심부름하던 고비도 더운물 담긴 함지전을 잡은채 그믐녀를 긴장해서 바라보았다.

《그 참경을 차마 어떻게 입으루…》

그믐녀는 여전히 말하기를 주저했다.

《일없수. 소금에 절대로 전 사람들이 간장물을 피하겠수. 어쨌든 속내를 알고있어야 백가신한테 은혜를 갚던지 원쑤를 갚던지 할게 아니우.》

범잔녀가 자기들보다 차림새도 깨끗하고 살색도 멀끔한 그믐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백가신이가 밉던나머지 그 집에서 종살이하는 그믐녀까지 온곱지 않은 모양이다.

그믐녀는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눈줄 곳을 몰라하며 입을 무겁게 열었다.

《그를 마당의 오동나무에 묶어놓고 반주검이 되도록 때리고… 며칠간이나 물 한모금 주지 않았어유. 흑… 그랬어두 그는 두눈을 부릅뜨고 백가신이한테 장차 내 아들이 네놈의 명줄을 끊을 날이 올게라구 소리질렀어유. 그날밤에 백가신이는 그를 자루속에 넣고 고마강의 깊은 물속에 빠뜨렸지유. 흑…》

그믐녀는 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오열을 터뜨렸다.

《그 말을 왜 이제야 하시우?》

망이가 침통하게 입을 열었다.

망이의 말을 듣지 못한듯 한동안 비탄의 눈물을 흘리던 그믐녀가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 일을 입밖에 내면 나도 이 집안도 도륙을 내겠다고 그놈이 침을 놓는 바람에, 또 원쑤를 갚겠다고 하다가 저 사람까지 잘못될가봐…》

《어유― 어쩜 못사는것들은 등신들뿐인가. 업신받아 싸지 싸!》

범잔녀가 불같은 한숨을 토하며 탄식했다.

웃방에 있던 고비는 조용히 아래방으로 내려와 누리나의 곁에 붙어앉았다. 어머니가 기절이라도 할가싶어 걱정스러운지 근심이 가득해서 어머니의 손을 어루만졌다.

누리나는 정신을 잃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눈이 서늘해지고 버릇처럼 입귀를 실룩거렸을뿐이다. 깡그리 타버린 재무지같이 온갖 비애와 고통에 시달릴대로 시달린 누리나의 가슴속에는 더 퍼낼 한숨도 눈물도 없었다.

오직 망연, 그것만이 유일한 자세였다. 모름지기 사람들은 미치기 직전에 이런 상태에 처하게 되는지 모른다.

그러나 망이는 울음을 터칠것 같았다. 그는 북받치는 오열을 가까스로 악물고있었다. 아버지가 그처럼 원통하게 세상떠난줄 모르고 지금껏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여지는듯이 아파 견딜수 없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죽인 원쑤인 백가신이 그놈한테 등장하려 상소문을 들고갔으니 자기야말로 얼마나 쓸개가 쑥 빠진 놈인가.

망이는 엽때 그런 악귀같은 놈에게 속혀 살아온것이 참으로 통분스러웠다.

모든 고통과 불행을 억누르고 억누르며 숙명처럼 그것을 감수해오던 망이는 비로소 밖으로 뿜어져나오는 힘의 충동을 느꼈다.

부락사람들이 그를 소직성이라고 하는 말이 우연치 않았다.

그는 원래 참을성이 강한 사람이였다. 그는 굶주림에 습관되듯이 불행에도 쉬 익숙되여버리군 했었다. 소처럼 묵묵히, 소처럼 수걱수걱 그는 모든 아픔을 참고 견디기만 했다.

하지만 참는데도 한도라는것이 있는 법이다. 반면에 이처럼 순종만 하던 사람이 한번 성내거나 반발하는 경우 그 힘은 실로 막강한것이다.

쉬 끓지 않는 가마가 일단 끓기 시작하면 오래도록 식지 않는것처럼 이런 사람들은 끝장을 볼 때까지 싸운다.

(이놈들, 어디 한번 겨뤄보자!)

속으로 이를 사려무는 망이의 기상은 성난 황소처럼 무서웠다.

그는 어떻게든 아버지의 원쑤를 갚고 부락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야겠다고 각오했다.

그리고 당장은 놈들이 조세를 탕감하지 않는 한 신답의 벼를 가을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절대로, 어느 한 집도 벼를 베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마당에서 서성거리고있는 망쇠를 찾았다.

《왜 그러슈?》

망쇠는 퉁명스럽게 대척하며 토방앞으로 걸어왔다.

《자네 마을어른들을 저녁켠에 우리 집에 좀 옵시라구 전갈해주게.》

망이의 신중한 당부를 묵묵히 듣고있던 망쇠는 마뜩잖은 눈길을 쳐들었다.

《공론끝에 몸이 그 모양 돼가지구두 무슨 공론을 또 하려구 그러우?》

《무슨 말이 그리 많나?》

망이의 눈빛이 범상찮게 번쩍거렸다.

《그렇게 하리다. 하지만 의원부터 불러오겠소.》

망쇠는 성난 모양새로 사립밖으로 나갔다. 울퉁불퉁한 달구지길로 고개를 짓수굿하고 걸어가던 그는 마주오는 도치네 부부를 만났다. 나들이옷차림을 한 도치는 술방구리를 올려놓은 지게를 지였고 노랑저고리에 반물색치마를 입은 방순이는 보자기를 덮어놓은 함지를 이였다.

아마 술청을 찾는 손님이 없어 예전처럼 들병장사길에 나선 모양이였다.

《작은 행수께서 얼루 행차합시오?》

도치는 좀상스러운 낯을 쳐들고 잘망스럽게 웃었다. 그는 부락의 공기가 험악해진 이즈음에 와서 그중 두려운 존재인 망이와 망쇠를 부락의 큰행수, 작은행수라고 불렀다. 얼굴이 발그레해진 방순이는 고개를 떨구고 서서 점직해했다. 그 녀자는 마을사람들을 대하면 늘 이렇게 죄지은것처럼 송구스러워했다.

《참 큰행수가 몹시 다쳤다던데 실상이우?》

도치는 가장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띠우며 혀를 찼다.

망쇠는 온 부락사람들이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는데 저 하나의 영리에 눈이 어두워 돌아치는 도치가 역스럽기만 했다.

《걱정마우.》

무뚝뚝하게 한마디 내뱉은 그는 눈길을 내리깐채 귀밑까지 빨개 서있는 방순이를 한번 흘끔 쳐다보고는 발길을 돌렸다.

《왜 멍청히 서있어?》

방순이를 보고 지청구하는 도치의 뒤틀린 목소리를 등뒤로 들으며 망쇠는 걸음을 다그쳤다.

그들을 만난것이 까닭없이 불쾌한만치 그들로부터 멀리 벗어나고싶었다.

앵두나무울타리를 둘러친 인적없는 마당에서 가랑잎 하나가 마음놓고 굴러다니였다. 그 가랑잎을 햇병아리들이 작은 다리를 재게 놀려 따라다니였다.

이때 집옆의 박우물쪽에서 무슨 인기척이 났다.

마침 무릎을 세우고앉은 을님이가 꼴똘한 생각에 잠겨 무우를 다듬고있었다.

정작 이렇게 호젓한 곳에서 그를 대하고보니 숫기좋은 망쇠도 좀 거북해졌다. 얼마간 그대로 서있던 그는 주위를 한번 둘러본 다음 마음을 다잡으며 헛기침을 했다.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든 을님은 난데없이 나타난 망쇠를 보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미를 숙이고 서서 옷고름만 만지작거렸다.

망쇠는 박우물로 다가가 손박으로 샘물을 한웅큼 떠마시였다.

《저, 여기 조롱박이…》

을님이가 얼른 조롱박을 집어주었다.

《응, 됐소. 록사 집에 계시오?》

망쇠는 손등으로 입을 훔치며 눈짓으로 집쪽을 가리켰다.

을님은 아무 대꾸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아버지를 별명으로 부른다고 못마땅해하는 그에게 시무룩히 웃어보이며 망쇠는 옆의 빨래돌에 앉았다.

을님은 그를 외면한채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망이형님이 그대를 보고싶다고 하기에…》

《실없는 말씀 마시구… 전 집에 들어갈랴오.》

정말 자리를 뜰셈인지 을님이는 다듬던 무우를 자그마한 함지에 걷어담았다.

《내 말 듣소.》

가슴을 섬찍하게 하는 망쇠의 날카로운 부르짖음에 을님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망쇠는 잠시 거친 숨을 몰아쉬였다. 그는 망이에 대한 을님의 태도가 못내 섭섭하고 언짢았다. 어머니가 그런다고 설마 그의 마음까지 아주 변했단 말인가. 망쇠는 을님이가 뭇처녀들과 달리 속이 깊어 자기 마음을 서뿔리 드러내는 성미가 아니라는것도 알고있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는가.

《어디 말 좀 해보시우. 왜 망이형님을 피하우?》

망쇠의 격한 음성에 고개를 쳐든 을님이의 원망어린 그리고 애원이 깃든 눈에 물기가 핑 고였다.

그 고운 눈매, 물기가 감도는 처녀의 눈을 보자 망쇠는 대번에 그가 가없어졌다.

망쇠는 빨래돌에서 일어났다.

《아버지에게 망이형님집에 좀 오시란다구 일러주오.》

을님은 숙였던 고개를 쳐들고 간절한 눈길로 망쇠를 쳐다보았다.

《그럼 공주성에서?…》

《운신도 못하는 몸이 되여 들것에 실려왔소.》

《어쩜!…》

을님은 놀라움에 잠겨 두손을 맞잡았다. 그는 낯색이 파랗게 질리고 입술이 떨렸다. 그는 망쇠가 터덜거리며 언덕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점도록 움직일념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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