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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2 회


제5장 검은 가을

6


《신령님…》

백가신네 집의 으슥한 뒤울안, 차거운 별빛이 걸린 오동나무아래에 청수를 떠놓고 나이지숙한 녀인네 하나가 꿇어앉아 손바닥을 비비고있다.

《신령님,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괴괴한 밤의 정적을 나직이 흔들어놓으며 울리는 그 애절하고 정성스러운 기도소리는 귀신의 심금도 울릴만 하였다.

《죄많은 천비에게 벌을 주시와 부디 천비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서 마귀를 쫓아주옵소서. 비나이다, 신령님…》

청수앞에 머리를 세번 조아린 녀인은 밤하늘을 우러러 축수하였다.

《내 아들 백태의 령혼에서 어질고 착한것만 남겨두시고 악하고 사특한것은 모두 빼앗아가옵소서. 신령님, 비나이다. 간절히 비나이다.》

녀인의 눈굽에선 굵은 눈물방울이 두르르 굴러떨어졌다.

삼라만상이 깊이 잠든 가을밤에 아들의 령혼을 축수하는 이 녀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신령님, 여태껏 신령님께도 숨겨왔던 이년의 죄 오늘밤 낱낱이 고해드리옵겠으니 백천번 벌을 주어도 이년께 주옵고 불쌍한 내 아들 백태는 벌을 주지 마옵시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듯 바람은 잠풍해지고 사위는 더욱 고즈넉해졌다.

《이년의 죄 벌써 죽어마땅하나 차마 죽지 못하고 여직껏 기구한 명을 부지해오는것도 내 아들 백태가 잘되기를 바라는 어미마음때문이옵니다. 그럼 신령님, 어찌하여 백태가 나의 자식이 되옵고 내가 그의 어미 되옵는가를 자상히 여쭈오리다.… 아아, 어미가 자식을 아들이라 부르지 못하옵고 아들이 어미를 모르도록 세상을 속여온 그 사연, 차마 신령님께도 아룁기 어렵소이다. 천지간에 가득한 모든것을 다 꿰뚫어보시는 신령님, 이년의 입으로 차마 번지지 못할 죄, 부디 이년의 가슴을 헤집고보옵시오.》

녀인은 합장한 손끝을 턱밑에 가져다대고 눈을 감은채 고개를 숙이고 참회에 잠기였다.

…무더운 여름날이였다.

그믐녀는 비로암의 승방에서 숯불을 피워 화로우에 약탕관을 올려놓고 주인마님 엄씨의 보약을 달이고있었다.

엄씨는 해마다 삼복철이면 부처께 공양도 할겸 피서도 할겸 여기 비로암으로 오군 하였다. 귀여운 옥동자를 점지해달라고 극성스럽게 치성을 드리지만 가난한 집들에선 무우뽑듯 잘만 낳는 아이를 그는 삼십이 가깝도록 아직 초산도 못하였다. 남편인 백가신이가 자식을 보겠다고 자기 몰래 다른 계집들을 갈아대군 한다는것을 알고있는 그는 이즘께 와서는 치성놀음에 발광할 지경이였다. 쌀섬이나 돈천도 아끼지 않고 절간에 시주했고 승의(중의사)가 내리는 처방은 무엇이나 따랐다. 지금도 그는 덕수를 맞으면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뒤골짜기에 올라가있었다.

가뜩이나 더운 방에 숯불까지 피워놓으니 승방은 한증탕속처럼 찌물컸다. 앞뒤문을 다 열어놓았는데도 줄땀이 흘러내려 화락하니 젖은 베적삼이 잔등에 착 달라붙었다.

지금쯤 마님은 구슬같이 흘러내리는 폭포밑에서 시원한 덕수를 맞고있을것이다.

불현듯 물생각이 간절해진 그믐녀는 부엌에 내려가 함지에 찬물을 퍼담아들고 방에 들어왔다. 깊은 산속이라 올 사람도 없고 마님도 한낮이 기울어야 내려오는터여서 그는 마음놓고 저고리를 벗었다. 앞가슴만 속적삼에 가리웠을뿐 더위에 발그스름해진 뽀얀 젖색의 동실한 어깨며 포동포동한 팔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어깨며 팔을 찬물에 적신 수건으로 닦으니 대뜸 짜릿하고 상쾌한 쾌감이 전신에 흘렀다.

꾀꼴새가 우짖는 소리에 뒤마당을 내다본 그믐녀는 방시레 웃음을 띠웠다.

노란 꾀꼴새 한쌍이 구름나무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둥지를 트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방심하고 그것을 바라보던 그믐녀는 부지중 누군가 자기를 훔쳐보는듯 한 륙감에 소스라쳐 고개를 돌렸다. 뜻밖에도 능글능글 웃으며 자기를 노려보고있는 주인 백가신의 숯불같은 시선과 부딪친 그는 악소리를 지르며 드러난 살도 가리우지 못한채 바들바들 떨었다. 쥐를 덮치는 고양이처럼 백가신이가 그에게 사납게 덤벼들었을 때 무서운 생각밖에 없던 그믐녀는 눈을 꽉 감아버렸다. 꾀꼴새울음소리가 꿈속에서처럼 아슴푸레하게 들렸다. 그러나 짐승같은 백가신이가 아무일도 없었던듯 태연하고 유유하게 떠나간 후 그믐녀는 얼마나 섧게섧게 울었던가.

그는 백가신이를 볼 때마다 치를 떨었다. 하면서도 그는 자기의 위엄스런 상전이요 자기는 그한테 매인 비천한 노비라는 뿌리깊은 굴종감으로 해서 종시 아무런 용단도 내리지 못하고말았다. 게다가 벌써 몸속에서는 죄많은 씨가 자라나고있었다.

천성이 철면피한 백가신은 그후로는 그믐녀가 도리여 의아할 정도로 더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것이 그믐녀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하지만 그믐녀의 몸에 이상이 생긴것을 알아차린 백가신은 무슨 속셈에서인지 그와 엄씨를 불공드리러 보낸다는 구실로 다시 절간으로 보냈다.

이듬해 봄에 그믐녀는 절간에서 사내애를 낳았다.

새암바리인 엄씨는 무슨 짐작이 갔던지 누구의 종자인가고 몸풀고 누워있는 그를 밤낮으로 조련질하며 못살게 굴었다. 그믐녀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자 이번에는 절간에 들린 백가신에게 귀신같이 달려들어 시집올 때 지참품으로 가져온 토지와 노비를 몽땅 절간에 시주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엄씨의 토지와 노비가 자기 재산의 태반을 이루고있었던것만큼 백가신이도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 다음날아침 엄씨가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까닭모르게 죽어버린것이였다.

백가신은 엄씨가 해산하다가 죽었다고 장례를 요란스럽게 지낸 다음 그믐녀와 그가 낳은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왔다.

《이년, 아이를 젖먹여 잘 키우거라. 하지만 지금이나 이담에나 네가 이애의 에미란 소리를 한마디라도 입밖에 냈다간 그날로 모가지 없는 귀신이 될줄 알아라.》

이리하여 아이 못낳은 둘치였던 횡사한 엄씨는 어린애의 친어머니로 둔갑하고 멀쩡한 애어미인 그믐녀는 홀지에 젖어멈으로 전락되고말았다.

만약 절간에서 그믐녀의 해산을 도와 산파노릇을 한 원주보살(절간의 살림을 맡은 녀자중)이 아니였다면 그믐녀는 백가신네 집에서 쫓겨난지 오랬을것이다. 백가신의 사람됨됨을 잘 알고있는 원주보살은 백가신을 법당안의 부처앞에 꿇어앉히고 그믐녀를 집에서 내쫓거나 학대하거나 하는 따위의짓을 일체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언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 천벌을 받을것이며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는것을 루루이 설교하였다. 원주보살이 무슨 속심으로 이렇게 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녀승들의 우두머리인 그의 존재를 신성시하고있던 백가신은 그의 훈계를 따르지 않을수 없었다.

자신을 독실한 불도로 자처하고있는 백가신이로서는 불가에 죄를 짓고싶지 않았던것이다. 그의 이런 처사는 한겨울 눈덮인 계룡산수림속을 노루며 토끼사냥으로 싸다니며 살생을 즐기다가도 방생불사의식때에는 자비를 베풀어 강에서 잡은 잉어를 절간의 련못에 놓아주는 행위와 비슷한것으로 설명할수 있었다. 어쨌든 그믐녀는 자기의 살붙이인 백태를 품에 안아 키울수 있는것을 다행으로 여기였다.

엄씨가 죽은 후 이어 부자집 딸을 후실로 맞아들인 백가신은 그믐녀의 존재를 잊어버렸는지 간혹 집안에서 부딪치게 되더라도 마치 처음 대하는 사람을 보듯이 빤히 쳐다보기가 일쑤였다.

참으로 매정하고 뻔뻔스러운 인간이였다.

그런 백가신이도 백태에게만은 야박스럽게 굴지 않았으니 터밭이야 아무렇든 거기서 자라는 씨앗만은 자기 뒤를 이을것이 틀림없다고 내심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백가신에게 침을 뱉아버린지 오랜 그믐녀는 애오라지 아들애에게만 정을 쏟았다. 그애가 웃을 때 자기도 웃었고 그애가 울면 자기도 울었다.

어린시절의 백태는 얼마나 곰살궂게 자기를 따랐던가.

때가 되여 백태는 개경으로 공부하러 떠나갔다. 자기 기쁨의 전부였고 자기 슬픔의 전부였던 아들, 아니 자기의 모든것이였던 그 아들을 품에서 놓쳐버린 그믐녀는 졸지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나 어느날 꿈속에서 귀인이 된 아들의 선덕비를 쓸어만져본 이후로는 그가 과거급제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해 어진 정사를 베푸는 큰 인물이 되여 돌아올 날을 매일 손꼽아 바라게 되였다. 그리고 어미가 천비란것이 드러나면 아들이 벼슬길에 나서지 못한다는것을 알고는 아들이란 말, 어미란 소리를 자기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 영원히 묻어버리였다.

이렇게 그는 자기 머리에 흰오리가 섞이는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십여년만에 벼슬을 하고 돌아온 아들은 과연 자기가 꿈속에서 보던 그런 모습이였던가.…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천신령께 비나이다…》

그믐녀는 고개를 쳐들고 별빛이 사위여가는 밤하늘을 우러러 다시금 자기 소원을 절절하게 빌었다.

두홰째 우는 닭울음소리에 뒤이어 멀리 가람에서 울리는 쇠북(종)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짐승도 낯을 붉힐 이년의 죄, 이제는 신령님도 아시였으니 처분대로 하옵시오. 이 몸 죽어 지옥에 간들 무슨 원한있으리요만 적악의 길로 줄달음치는 저 미거한 아들을 두고야 이 몸 어찌 저승길로 먼저 갈수 있사오리까?

비나이다, 신령님, 천신령님, 내 아들 백태를 귀엽고 착하던 그 시절에로 되돌아가게 해주옵소서. 그애의 품속에서 아비의 피를 없이하고 내 피만이 남게 하여주옵소서. 왕도에서 들린 마귀를 쫓아버려주옵소서. 신령님, 불쌍한 이년을 가상히 여기시와 부디 복을 내려주옵소서. 대자대비하신 신령님, 천신령님, 길이길이 굽어살펴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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