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회
제5장 검은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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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개소의 촌정이 명주 열필에 흰모시 일곱필, 백성 리세진이 꿀 다섯통에 병풍…》
《됐어, 복수소에선?》
서사가 장부책을 펼쳐놓고앉아 공주관하의 각 현과 부곡들에서 징수한 공물목록을 아뢰였고 백태가 듣고있었다.
《촌정이 생비단 여섯필에 참기름 두방구리, 백성 모종쇠가 은가락지 하나에 먹 한자루…》
《뭐뭐, 먹 한자루?…》
《머리칼 달비가 하나 더 있소이다.》
《달비? 그놈의 깨끼부락놈들은 상기두 머리를 달고다니나?》
《웬걸요. 그 달비는 고조할미때부터 가보로 전해오던거라던지…》
《그런것들밖에 없나? 그 저…》
《그 저?…》
《그, 이음현의…》
《예예, 이음현의 백성 고아지가 나리님의 시중을 들게 하시라구 예쁜 가시나 하나를, 헤헤…》
《음, 갸륵허다. 그 백성 량민으로 면천시켜주도록 하지.》
《저, 그런데 고아지는 량민이올시다.》
《천민이 아니야? 그럼 량…》
량반을 시켜주겠다는 말은 백태도 선뜻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넓은 사랑방의 웃목에 꿇어앉아있는 오치연은 자기를 불러온 까닭도 또 이런 점고놀음의 영문도 알길없어 두고보자고 머리를 수그리고있었다.
후끈한 화기가 감도는 방안에 켜놓은 여러개의 황밀대불빛은 비단병풍을 등지고 모직보료우에 앉은 백태의 눈같이 희고 부드러운 명주바지저고리며 그보다 더 창백하게 보이는 얼굴을 비치였다.
서사를 돌려보낸 백태는 오치연이쪽으로 돌아앉았다.
《너는 오늘 형을 받지 않았지?》
《황송하오이다.》
오치연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백태는 오치연이를 보면서 이런 구차스런 천민에게 어쩜 을님이와 같은 고운 딸이 있을가 하는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하긴 련꽃도 어지러운 감탕물에서 피는 꽃이지…
《너 이음현의 그 백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슨 말씀이온지?…》
《보달을 바쳤다는 그 기특한 백성말이다.》
《… …》
오치연은 고개를 쳐들었다. 탐욕스러운 눈이 그를 지켜보고있었다.
(그러니 우리 을님이를?!…)
오치연은 비로소 백태의 흉심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닫자 가슴속에 무거운것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쩌면 량반놈들이란 이렇게도 한등속으로 악착한 놈들뿐인가.
《왜, 벙어리가 됐나?》
백태가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 …》
《너두 보달이 있다지?》
《… …》
《여기 상호장댁으로 들여보내라. 침모로 쓸란다. 듣자하니 바느질솜씨가 여간아니라면서…》
백태는 씨물씨물 웃었다.
그 웃는 낯짝에 침을 뱉아주고싶은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오치연이 입을 열었다.
《그렇겐 아니되겠소이다.》
《안되다니?…》
백태는 의외라는듯 눈이 둥그래졌다.
《우리는 이댁의 노비도 아니요 또 빚진 일도 없는데 무슨 언턱으루 딸을 침모로 바칠수 있겠소이까?》
백태는 성낼대신 도리여 씨물씨물 웃었다.
《음, 그것말인가? 바느질값은 후하게 주도록 하지.》
오치연은 백태의 능갈친 웃음속에 가리워진 음험한 그림자를 보고 그가 순순히 물러서지 않으리라는것을 느꼈다. 이리를 피하니 범을 만난다고 례산현 현령놈의 마수에서 벗어나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더 악착한 량반놈에게 걸려든셈이였다.
어찌하여 자기 딸에게는, 자기 가정에는 이런 화만 겹씌워지는지 그는 억이 막혔다.
이럴줄 알았으면 천민이건 뭐건 사람좋은 망이에게 을님이를 출가시킬걸 잘못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러자 문득 을님이가 이미 출가한것으로 이 젊은 량반놈을 속여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오치연은 마음을 다잡고 백태를 넌지시 건너다보았다.
《저 그런데…》
《그런데 어쨌단 말이냐?》
오치연의 태도에 저으기 조바심이 난 백태는 낯색이 시퍼래졌다.
《우리 애는 이미 출가한 몸이여서…》
《뭣이?!…》
백태는 놀람에선지 아니면 화가 나선지 웃몸을 솟구었다. 하더니 두눈을 쪼프리며 살기찬 웃음을 띄웠다.
《천한 늙은게 누굴 속일려구?… 내가 그만한것두 모르는줄 알아!》
백태는 별안간 언성을 높이며 오치연을 표독스럽게 쏘아보았다. 늙은것이 생각했던바와 달리 만만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곡놈치고는 어딘가 기개가 있는 선비처럼 느껴지는 오치연을 강박만 해서는 통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백태는 낯색을 바꾸며 의논조로 말했다.
《네가 딸을 침모로 들여보내면 네가 등장하려는바대로 너희 부락의 신답에서 조세를 받지 않도록 하겠다. 그러니 잘 생각해봐라. 네 딸 하나에 온 부락놈들의 명줄이 달렸으니 말이다.》
백태는 어디 아직도 할 말이 더 있느냐 하는 득의만만한 시선으로 오치연을 지켜보았다.
오치연은 고개를 쳐들지 못했다. 금시 말문이 막혀버린 그는 가슴답답함을 느꼈을뿐이였다.
자기가 참견하지 말았어야 할 일에 끼여들었다는 생각과 함께 등장하려 자기가 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막급했다. 더우기 자기는 례산현에서 도망쳐온 량인으로서 부곡마을에 숨어사는 사람이 아닌가. 하기에 그는 자기의 처지를 까밝힐수도 없었다.
《이젠 물러가도 좋아.》
백태의 방을 나선 오치연은 다리가 후들거려 걸음을 옮길수 없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일을 당하고보니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빚값에 딸을 떼우는 경우는 더러 보았지만 이처럼 밑도끝도 없이 강짜로 귀한 처녀를 빼앗겠다는 날불한당같은짓이야 또 어데 있겠는가. 그러나 이 억울한 사연을 어데 하소할곳도 하소할수도 없는 그는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였다.
(아아, 이 일을 어쩌면 좋을고!…)
그의 입에서는 불같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한편 백태는 만족한 웃음을 띠우고 방안을 거닐고있었다.
참기름을 먹여 알른알른하게 대우를 낸 노란 장판바닥에 그의 그림자가 비껴 얼른거렸다.
그는 좀전에 오치연의 앞에서 진상물품점고를 한것이 잘되였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별공사로 떠나기에 앞서 송유인에게서 배운 방법이였다.
송유인은 백태가 보는 앞에서 자기 집 청지기를 불러 지방관들이 올려보낸 진상품을 점고했었다.
너도 공주로 내려가거든 이렇게 진상해야 한다는것을 깨우쳐주는 무언의 훈시였다.
그날 송유인은 백태에게 이런 이야기도 했었다.
자기 어머니는 빨래한 뒤끝엔 꼭 아들인 자기더러 빨래를 짜게 했는데 그것은 젊은 자기가 힘주어 짤수록 빨래의 물기가 잘 빠지기때문이라는것이였다. 그 이야기를 한 뒤끝에 송유인은 이렇게 뇌까렸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겠나. 백성들도 빨래처럼 비틀어짜야 한다는것일세. 사정보지 말고…》
그의 말대로 백태는 별공사로 내려와있는 기간 공주관아의 고을들과 마을들에 대한 수탈을 모질게 하였다. 가물과 큰물로 어디나 흉작이였지만 그런 사정은 보지도 않았다. 송유인을 위해 마련한 봉물짐가운데서 을님이는 참으로 이채로운것이였다.
송유인의 손에 자기 앞길이 달려있다고 믿고있는 백태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에게 잘 보여야겠다고 다짐하고있는터였다. 송유인이 무엇보다 탐내는것이 계집인즉 경국지색을 골라바친다면
한참 즐거운 공상을 무르익히고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도련님.》
《뭐야?》
백태는 문밖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꿱 소리질렀다.
《쇤네와요.》
젖어멈 그믐녀의 목소리를 알아차린 백태는 좀 누그러졌다.
《왜 왔나?》
《긴히 말씀드릴 일이 있사와요.》
《들어오게.》
조심스럽게 미닫이를 열고 들어온 그믐녀는 문곁에 단정히 꿇어앉았다.
그사이 모직보료우에 올방자를 틀고앉은 백태는 초불에 유표하게 반짝이는 그믐녀의 흰머리카락에 눈길을 주었다.
《무슨 일인가?》
《저…》
고개를 쳐든 그믐녀의 눈이 뜨겁고 축축한 광택으로 번들거렸다.
목소리도 물기에 젖어있었다.
《졸경을 치르고… 저 광속에 갇혀있는 명학소의 망이를 살려주옵시오.》
《응?》
《제발… 살려주옵시오.》
《어멈이 관여할바 아닐세.》
백태는 랭랭하게 말을 던졌다.
그믐녀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이윽하여 다시 얼굴을 들었을 때 그의 볼로 두줄기 번들거리는것이 흘러내렸다.
《도련님은 어쩜… 망이는 쇤네가 신세를 많이 입은 사람이와요. 그리구…》
울먹이는 소리로 떠듬떠듬 말을 번지던 그믐녀는 무엇인가 더 말할듯이 입을 우물거리다가 손으로 눈을 가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깨가 세차게 물결쳤다.
《신세라니, 무슨 신세를 졌단 말인가?》
《그걸 어찌 한말루 다야… 그저 쇤네를 살려주는셈으루 보살펴주옵시오.》
그믐녀의 눈빛이나 어조에는 간절한 념원이 어려있었다.
백태의 얼굴에도 착잡한 표정이 비꼈다.
(그믐녀는 또 언제 망이의 신세를 입었는가? 하긴 오지랖넓게 남을 도와나서길 잘하는 녀석이니 그럴법도 한 일이지. 그러니 이 일을 어쩐다?…)
그는 말없이 얇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망이를 자기 손으로 없애버릴 작정이였는데 그믐녀의 사정을 듣고나니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얼마전에도 그믐녀에게 자기를 애지중지 키워준 젖어멈의 신세를 잊지 않겠노라고, 젖어멈의 일은 자기가 잘 돌봐주겠노라고 말했었다. 그 말 한마디에 감읍하여 눈물을 흘리던것이 지금도 눈앞에 삼삼했다.
(하긴 다리부러진 장수라고 운신도 못하는 제깐놈이 집에 간들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을라구. 그만하면 혼맹이가 빠졌을테니 다시는 분수없이 놀지 않겠지.)
이렇게 생각한 백태는 선심이나 쓰듯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 연고라면 진작 얘기할걸 그랬네. 그녀석에게 언감 다시는 관령에 엇설짓을 말구 어서 조세를 바치라구 이르게. 그건 그런데…》하고 의혹이 비낀 눈길로 그믐녀를 찬찬히 뜯어보던 백태는 다시 말을 이었다.
《방금 무슨 말인가 더 하려던것 같던데…》
《… …》
《어멈이 나한테 뭘 숨기는게 있잖나?》
흠칠 놀라 소스라쳐 고개를 쳐든 그믐녀는 낯색이 창백해졌다.
찌르듯이 응시하는 백태의 시선앞에서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갈팡거렸다.
《아니와요. 그런게 아니와요.》
빠른 말씨로 황급히 중얼거린 그믐녀는 급작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쇤네는 그리 알고 물러가겠사와요.》
문바람에 초불이 흔들렸다. 그 흔들리는 불꼬리처럼 백태의 생각도 한동안 이리기울 저리기울하였다.
백태는 뭘 숨기는게 없는가고 묻는 말에 그믐녀가 왜서 그리 당황해하고 또 그렇게 황황히 자리를 피했는지 영문을 알수 없었다.
확실히 그는
(정말 나한테 숨기는것이 있지 않을가. 그렇다면 숨기는것이 과연 무엇일가?)
자기와 관계되는 그 어떤 말못할 사연을 그믐녀가 가슴깊이 묻어두고있는것이 분명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할수 없기에 백태는 더욱 안달이 났다. 그것은 마치 몸의 어딘가 꼭 가려운 곳이 있는데 그 부위가 어딘지 딱히 몰라 씨원히 긁을수 없는 안타깝고 짜증스러운 경우와 비슷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