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회
제5장 검은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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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이네는 이튿날 저녁때에 마을의 동구길에 들어섰다.
며칠째 무겁게 드리웠던 구름장이 빠금히 열리고 그 짬으로 노란 여우볕이 가닥가닥 쏟아져나왔다.
신답의 벼들이 가을걷이를 재촉하듯 가는바람에 술렁술렁 흔들렸다. 비바람에 군데군데 넘어진 벼들도 있었다.
어펑돌이에게 망쇠를 부축해서 먼저 집으로 가라고 말한 망이는 이어 논창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물속에 잠긴 벼들을 일으켜세워 묶어놓기 시작했다. 무겁게 드리운 벼이삭이 손바닥에 닿을 때마다 그는 크낙한 희열과 쾌감을 맛보았다.
재롱을 부리는 귀여운 자식들을 볼 때 온갖 시름을 잊어버리는 부모의 심정과 같이 육신의 피로와 마음속원한이 풀리는듯싶었다. 손과 다리의 흙을 씻어버리고 다시금 논벌을 바라보던 그는 문득 이 넓은 신풀이논에 한사람도 보이지 않는다는데 생각이 미치였다.
지금쯤 가을걷이 나선 집들도 있으리라고 믿었던 그는 아직까지 벼를 세워둔채로 있다는 사실에 의혹이 갔고 더우기 비에 넘어진 벼들도 그 누구 하나 손질하지 않았다는것이 무척 의아쩍었다.
마을도 별스레 괴괴하였다. 어쩐지 사람사는 부락같지 않게 조용하고 한산하였다.
망이는 집에 이르러서야 이 모든 까닭을 알게 되였다. 그새 관가에서 벼를 빨리 베여 조세를 바치라는 령이 내렸다는것이 아닌가.
어머니로부터 이 말을 듣는 순간 망이는 가슴속에서 피가 끓어번졌다.
애오라지 명줄을 걸고있는 그 신답의 곡식마저 앗기우는 날에는 몇해전처럼 무리죽음을 당할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량반토호들이 사람가죽을 쓴 짐승일지라도 어찌 이런 사정을 모르겠는가. 그리고 아무리 나라법이 엉망진창이 된 세월이라 해도 어쩌면 이렇게도 뻔뻔스럽게 농군들을 속일수가 있는가.
억이 막힌 망이는 망쇠네 집에 가보려던 생각도 잊고 벽에 기대앉아 방바닥만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형님!》
별안간 방문이 벌컥 열리며 망쇠가 비통스럽게 부르짖었다.
《소식 들었수?》
《들었네. 그런데 자넨 그 몸으로…》
《어디 누워있게 됐소.》
방에 들어온 망쇠는 불같은 한숨을 토하며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망이가 돌아왔다는 말을 들은 마을사람들이 찾아왔다. 모두 침울한 기색이였다.
《어쨌음 좋겠소? 무슨 궁냥이 없소?》
호미동이의 아버지 달보가 괄괄한 성미대로 망이에게 들이대고는 그의 입을 쳐다보았다. 망이가 침묵을 지키자 이번에는 오치연에게 얼굴을 돌렸다.
《오록사가 좀 말해보슈. 그래 나라법에 이런 경우도 있소이까?》
오치연의 몇대조가 록사벼슬을 지냈다. 해서 부락에서는 흔히 그를 오록사라고 불렀다.
뒤더수기로 손을 가져가던 오치연은 상투가 없어진지 오랬다는것을 깨닫고는 침울한 표정을 띠웠다.
《나라법에야 어디 그렇나요. 숙종7년(1102년)에 나온 손실담험법에는 수재나 한재로 흉작이 들어 4분이상의 손실을 본 곳에 대해서는 조를 면제해주고 6분이상이면 조조를, 7분이상이면 역도 모두 면제해준다고 했지요.》
《허참, 법은 그럴듯하군. 빛좋은 개살구라더니…》
달보가 쓴 입을 다셨다.
《죄없이 죄인취급 당하는 하치상놈들에게 법은 무슨 법.》
망쇠가 역정스럽게 내뱉았다. 그는 이런 형국에서까지 법을 따지려드니 오치연이를 못마땅스러워했다.
오치연이도 망쇠의 빈정거리는 소리에 흘낏 치떠보았다. 젊은 사람이 덜되게 구는것이 언짢았지만 을님이때문에 그러리라 짐작되여 모르는체 하고말았다. 그는 두어번 헛기침을 하고나서 망이에게 말했다.
《상호장에게 등장(상소문)을 내는게 어떻겠소?》
《상소문이요?》
여직껏 말없던 망이가 고개를 들었다.
《흥, 상소문.》하고 빈정거리는 망쇠에게 망이가 눈을 부라렸다. 그 눈길에 겁이 질리면서도 망쇠는 신풍스럽게 흥흥거렸다.
《어쨌든 앉아서 굶어죽을순 없는노릇이니 공주관아에 등장을 내봅시다. 상호장이 말을 듣지 않으면 개경까지라도 상소를 해볼 판이지.》
망이의 눈길이 예지롭게 번뜩이였다.
구레나룻이 거밋한 그의 거물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제야 안도의 숨들을 내쉬였다.
《선생이 상소문을 한장 잘 써주시우. 관아에는 내가 갈테니.》
《그럽시다.》
망이의 부탁을 오치연이 흔연히 받았다.
《거 량반자들이 희뜩 놀라게 쓰시우. 우리 깨끼부락에두 문장이 있다는걸 알게 말이우.》
달보가 무릎걸음으로 나앉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주먹으로 턱을 고이고 이들이 하는 양을 마뜩잖게 바라보던 망쇠가 또 참녜를 했다.
《개구리잔등에 찬물 끼얹기지. 그놈들이 왼눈이나 꿈쩍일것 같수. 그저 오늘밤중으로라도 와락 베여다 먹어버리는게 상수지.》
《자넨 아까부터 뭘 그러나. 그래 제가 지은 곡식을 도적질해먹듯 해야 옳겠나?》
망이가 엄한 기색으로 탓했다. 그는 망쇠가 왜 꿰진소리만 하는지 아직 모르고있었다.
《그럼 여태껏 남이 지은 곡식을 빼앗겼수?》
망쇠도 굽어들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하도 심각하고 그 말투가 하도 진중스러워 다른 사람들도 은연중 신중해졌다. 비록 나이는 젊어도 옳은 일이라면 칼날우에라도 올라서는 대바른 성미를 가진 그를 헐하게 볼수가 없었다. 도리여 성칼이 드센 그를 두려웁게 대하는 형편이였다. 하기에 부락에서는 망이를 소직성이라고 했고 망쇠는 범직성이라고 했다.
십여년전의 동지날 밤이였다. 잘사는 집들에선 팥죽을 쑤어 밤샘을 하며 명절밤을 즐겼지만 명학소의 가난한 농군들은 바가지에 동치미를 담아놓고 잠자면 눈섭이 센다는 동지밤을 윷놀이로 지새웠다. 그때 달보네 집에 놀러 왔던 망쇠도 저도 한몫 끼우려고 하였다. 그는 마을어른들이 망이는 무랍없이 대하면서도 자기를 어린애로 치부하는것이 불만이였다. 어미없이 자라는 그를 늘 측은하게 여기는 마을사람들은 윷판에 부득부득 들어앉은 망쇠더러 버드내의 얼음물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어른들틈에 끼울수 있다고 우스개소리를 했다. 아무 소리없이 밖으로 나간 망쇠는 오래동안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 집으로 가버린 모양이라고 여겼는데 얼마후에 낯색이 퍼렇게 질린 망쇠가 이발을 덜덜 떨며 다시 나타났다. 꽛꽛이 언 홑베적삼과 바지는 소가죽처럼 비걱거렸다. 그가 참말로 얼음을 까고 강물속에 들어갔다 나온것을 알았을 때 나배기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통에 망쇠는 며칠 감기로 되게 앓긴 했지만 어쨌든 그후로는 어른들의 일에 빼놓을수 없는 존재로 인정되였다.
《긴말 할것없이 수고스러운대루 선생이 오늘밤 상소문을 한장 잘 써주시우.》
망이의 신중한 말에 방안은 정숙해졌다.
《헌데 행수 혼자서야…》
달보가 고개를 기웃거리더니 다시금 오치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놈들과 혹 문서싱갱이를 하더라도 먹물깨나 먹은 사람이 함께 가야 할텐데…》
사람들의 기대어린 눈길이 일시에 오치연에게 쏠렸다.
《당찮은 소리요. 선생은 우리 부락에 적을 둔 사람도 아닌데 무슨 화라도 당하면 어찌겠소.》
망이가 달보의 말을 밀막아버렸다.
《아니, 괜치않소이다. 여러분들이 바란다면 나도 가보리라.》
의외에도 오치연이가 흔연하게 맡아나섰다. 그는 부락사람들의 후더운 인정을 늘 받아안으면서 이런 일에서까지 모르쇠를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