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회


제4장 한가위날

5


《성님, 등롱을 여기에 달가요?》

호미동이네는 부엌앞 추녀끝에 등롱을 가져다대며 물었다.

《등롱까지야 무슨…》

누리나는 잔주름얽힌 눈에 웃음을 한가득 담고 중얼거렸다. 평생에 오늘같이 기쁜 날이 처음이고 후에도 다시 없을것만 같았다.

《성님두, 오늘같은 날까지 달아보지 않으면 한뉘 언제 초롱이라구 켜보겠수. 읍안의 대가집들에선 명절밤마다 대낮같이 환하게 켜단다구 합디다.》

《좋을대루 하게나.》

이렇게 이른 누리나는 방에서 찾는 소리에 이번엔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 자주빛댕기는 어쩔가?》

《이제 머리를 얹겠는데 그건 해서 뭘하우.》

누리나는 손사래를 하고나서 마당밖을 내다보며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새색시가 올 때두 됐는데…》

없는 살림에도 한두가지씩 보태가며 잔치준비를 하고있는 누리나는 제법 명절맞는 기분이였다. 마당에서는 베를 매던 겨불에 콩을 구워먹는다고 소소리패들이 복닥거려댔다.

가난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은 서로 도와 살기마련이다. 마치도 양순한 짐승들이 무리지어 살듯이 그들은 본능적으로 자기의 생존방식을 상호부조에서 찾게 되는것이다. 방안에 모여앉은 마을아낙네들은 고비를 기다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였다.

《고비네두 금슬이 좋아야겠는데…》

누군가 말끝에 기우어린 소리를 한마디 하자 산나물이 담긴 버치에서 티검불을 고르던 범잔녀가 대뜸 언성을 높였다.

《별 걱정두, 땅 파먹는 두더지끼린데 좋고 나쁘고 할게 있나.… 내 옛말 하나 하지.》

젊은 아낙네들은 눈들이 별빛같아서 범잔녀를 쳐다보았다.

범잔녀는 산나물그릇을 앞으로 밀어내놓고 고개를 들었다.

《옛적에 두더지어른 한분이 딸을 키워 출가시킬 나이가 됐는데…》

사뭇 정색하여 이야기를 펼쳐놓던 범잔녀는 문득 남정네가 있는 웃방쪽에 눈길을 주더니 음성을 높여 말을 계속했다.

《그는 자기의 고명딸을 지체높은 집안에 시집보내야겠다고 생각하구서 제 보기에 제일 높아보이는 하늘을 찾아갔다네. 〈여보시오, 하느님. 당신네가 세상에서 으뜸인데 우리 집과 혼인을 맺읍시다.〉하고 두더지가 청혼하니 하느님은 〈그 청은 고맙소만 해님이 없으면 나도 보이지 않으니 아마도 해님이 나보다 나은가 하웨다.〉하구 대답하더라지. 그래서 이번엔 해님을 찾아가서 구혼했는데 해님이 대답하기를 내 비록 만물을 비치나 구름이 끼면 빛을 뿌리지 못한다고 하기에 다시 구름을 찾아갔다네. 구름은 또 말하기를 내 비록 해는 가리우나 바람한테는 꼼짝 못하고 내몰리니 바람이 나보다 낫다고 하기에 또다시 바람에게 구혼했는데 바람은 내가 구름을 흐트러뜨리나 밭가운데 서있는 돌부처만은 넘어뜨리지 못하니 돌부처가 나보다 낫다고 하더라지 않나. 기진맥진한 두더지서방이 돌부처를 찾아가 다시 구혼하니 무뚝뚝한 돌부처님이 골이 나서 하는 말인즉 〈자네가 날 골려주러 왔나. 내가 바람따위는 겁내지 않지만 임자네 두더지족속들이 내밑을 뚫으면 꼼짝 못하고 넘어지고마는데 내가 젤이란 말이야?〉하더라지 않나. 온 천지를 헤매다가 구경에 이 말을 들은 두더지서방은 무릎을 치며 〈세상에 우리 두더지보다 잘난게 없는데 내 헛수고를 했구나.〉하고 탄식하고는 의젓한 두더지총각을 골라 사위를 맞았다는걸세. 하하.》

말을 마친 범잔녀가 사내들처럼 큰소리로 웃어댔으나 그를 따라웃는 사람은 몇명 없었다. 그들은 범잔녀가 지금 웃방에 있는 오치연이더러 들으라고 한 소리임을 알아차렸던것이다.

의관을 차리고 점잖게 앉아있던 오치연은 얼굴이 좀 뜨끈했지만 시치미를 떼고 덥지도 않은데 손부채질을 했다.

《음…》

풀무령감이 언짢은 기침소리를 냈다. 그는 주책머리없는 범잔녀로친의 못생긴 입이 실없는 소리를 해서 대사집의 분위기를 다 깨쳐놓는다고 속으로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미꾸라지 한마리가 물을 다 흐린다더니… 입심이 세다는 풀무령감도 암사자처럼 드센 범잔녀앞에서는 늘 굽이 질려 쩔쩔매는 편이여서 뒤에서 욕하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거북하고 송구스러워한것은 망이였다. 그도 오치연이네 집안에서 을님이와 자기 관계를 두고 공론이 많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리고 이때문에 당자인 을님이도 고민하고 오치연이도 괴로와한다는것을 알고있다.

무더운 여름날 내가에서 물싸움에 열중한 아이들마냥 환희에 차있던 망이는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가슴이 미여지는듯이 아팠다. 그러나 불행에 익숙된 망이는 이 마음속의 고통도 이겨내리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래서 을님이도 더 스스럼없이 대해주고 그의 부모들도 더 너그럽게 대해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을님이 부모들을 원망하거나 고깝게 여길 까닭이 없다는것을 느끼고있었다. 애오라지 을님이를 위해서, 그 딸의 앞날을 그르치지 말자고 지조를 지키다가 뜻밖에도 천민부락에까지 쫓겨와 욕되게 사는 그들이 아닌가. 그런 그들을 동정하면 동정했지 결코 멀리할수는 없었다.

《하, 이거 신부행차가 지내 늦는다. 이 로인이 흥에 겨워 며느릴 태우고 공주성에 갔다오는게 아니여? 큰일났는데…》

풀무령감이 방안의 따분한 분위기가 답답했던 모양 너스레를 치며 귀등을 긁었다.

이때 그의 말에 대답이나 하려는듯 뜨락에서 인기척이 났다.

《여보시우들―》

문밖에서 느닷없이 울리는 부르짖음에 흥성거리던 방안은 갑자기 물속처럼 조용해졌다. 불안과 의혹에 찬 눈빛들만 오갈뿐 누구도 대답하려 하지 않았고 또 문을 열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가슴이 섬찍한, 너무도 암울한 목소리였던것이다.

마당으로 털썩거리며 걸어오는 소리가 나더니 끙 힘겹게 토방으로 올라선다. 문이 펄쩍 열려졌다.

《아니?!》

방안사람들은 놀란 입들을 다물지 못했다.

사색이 된 서경로인의 어깨에 기대선 고비의 주제가 말이 아니였던것이다. 짚신도 없는 맨버선발에 치마며 저고리에는 온통 흙탕이 게발렸는데 꽃관을 썼던 머리에는 누데기같은 수건을 감고있었다. 새옷차림에 그처럼 환하던 고비의 아름답던 자태는 어데로 갔단 말인가?…

《아니, 이게 웬일이냐?!》

누리나가 몸을 일으켜 황급히 고비를 방안으로 안아들였다.

벽에 기대앉은 고비는 실심한 기색으로 멍하니 한곳을 응시하였다.

서경로인은 방에 들어올념도 않고 그대로 문밖에 고개를 푹 떨구고있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응. 그런데 머리에는 왜 이런걸 썼니?》

눈길을 허둥거리며 고비의 손발을 주무르던 누리나가 그의 머리에 쓴 누데기수건을 벗겼다.

《엉?! 이게 무슨 변이냐?》

누리나는 수건 든 손을 와들와들 떨며 꽉 잠겨드는 목을 가까스로 터쳐 부르짖었다.

고비의 머리모양이 너무도 처참해서였다. 그 윤기가 자르르 흐르던 치렁치렁한 머리채는 간데없고 중의 번대머리처럼 번번하지 않는가. 아니, 중의 머리보다 더 험상궂게 보였으니 마치 비루먹은 말잔등처럼 듬성듬성 머리털이 쥐여뜯긴것이 참으로 눈뜨고 볼수 없는 처참한 모습이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우?》

누리나는 너무도 억이 막혀 말조차 번지지 못했다.

서눌은 물먹은 흙담벽처럼 주저앉으며 강변에서 겪은 봉변에 대해 걸그렁한 음성으로 띠염띠염 이야기했다.

《…내가 죽일 놈이웨다. 그래두 나같이 박복한 놈이 구종군으로 나서면 액풀이가 될줄 알았는데 되레 이런 변을 당할줄이야…》

《저런 불악귀같은 놈들, 혼례집을 초상집으로 만들지 않나. 그래 오늘이 혼례날이란걸 알구두 그런짓을 했단 말이우?》

범잔녀가 몸을 부르르 떨며 다우쳐물었다.

《그랬지유.》

《먹지 못하는 감 손가락으로 찔러놓는 심사로군.》

누리나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저애가 그 잰 입때문에 언제건 입덕을 입게 되리라고 했더니만 량반놈들한테 이런 화를 당할줄이야…》

격분한것은 아래방의 녀인들만이 아니였다. 사이문을 열고 머리칼이 뜯기우고 옷이 찢기고 게다가 흙탕투성이가 된 고비를 내려다보는 남정네들은 경악에 질려 말들을 못했다.

망이는 분격으로 몸을 부르르 떨더니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서눌로인이 황급히 그의 소매를 붙잡으며 만류했다.

《그만두슈, 말탄 놈들을 무슨 수로 따른단 말이우.》

서눌로인에게 잡힌 팔소매를 잡아채며 방으로 도로 들어온 망이는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해서 씨근거렸다. 꽉 깨문 두입술귀가 푸들푸들 떨리고 피발이 선 두눈은 불이 일것처럼 사납게 번쩍거렸다.

전에 보지 못한 망이의 그 험악한 기상에 질려 술렁거리던 방안이 조용해졌다.

망이는 천근만근의 무게가 느껴지는 한숨을 토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오치연이도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효경〉에 이르길 〈신체발부는 수지부모하니 불감훼상이 효지시야라〉 했소이다. 무슨 소린고 하니 우리 몸은 부모가 준것이기때문에 터럭 하나라도 상하지 않는것이 효도의 첫째란 말인데… 이런 무도한 일이라구, 어!》

《이 악착한 세상에 뭣때문에 우리가 살아있수. 예? 짐승처럼 말이우, 흑―》

그예 호미동이네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분함을 못이겨, 설음에 겨워 훌쩍이는 소리들이 났다. 그 소리를 듣자 지금껏 실심해 앉아있던 고비가 오연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가장자리가 파르끼레해진 그의 눈에서 불같은것이 출출 흘렀다.

《왜들 이래요? 뭣때메 울어요? 우리가 언젠 사람대접받고 살았나요.》

페부를 찌르는 고비의 이 침착하고 서늘한 말에 방안에는 삽시에 정숙이 깃들었다.

고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실겅에 앉힌 버들고리속에서 베수건 하나를 꺼내였다. 그것으로 머리를 정성스레 감싼 고비는 누리나의 얼굴을 감사의 정어린 눈길로 한동안 바라보더니 나부시 절을 했다.

《어머니, 집난이의 절 받으시와요.》

《아가…》

누리나는 자기의 넓은 가슴에 고비를 꽉 껴안고 그 커다란 손으로 나긋나긋한 고비의 등을 언제까지나 쓰다듬고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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