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회


제4장 한가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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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마을길을 돌아 버드내가로 나왔을 때였다.

난데없는 말발굽소리가 울렸다. 강변을 따라 뻗어간 큰길로 말을 탄 량반행차가 먼지를 피워올리며 마주오고있었다.

고비의 머리속으로 한가닥의 불길한 예감이 번개처럼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가슴은 까닭모를 불안으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서경로인도 걸음을 주춤거렸고 복슬개마저 그 어떤 불안을 느꼈는지 기승스럽게 짖어댔다.

소잔등에서 바삐 내린 고비는 서눌과 함께 길섶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뚜버덕거리는 말발굽소리는 점점 가까와온다. 땅이 울린다. 두설거리는 말소리도 들린다.

간이 한줌만 해진 고비는 맘속으로 빌었다.

(아무일도 없었으면, 그냥 지나갔으면…)

그러나…

《뭐냐?》

말발굽소리가 고비의 이마전에서 뚝 멎으며 지어서 내는듯 한 느린 음성이 머리우에서 울렸다. 흙먼지내가 물씬 풍겼다. 고비는 더욱 깊이 머리를 숙였다.

《어서 말씀드리지 못해!》

이번엔 쇠소리같은 날카로운 음성이 정수리를 때렸다.

지어서 내는듯 한 느린 음성의 임자는 별공사 백태였고 쇠소리는 백태를 시종하는 공주 부호장이였다. 그들은 지금 팔월한가위라 들바람을 쏘이려 산천구경을 나온 길이였다.

점도록 대답이 없자 부호장이 목소리를 나긋나긋하게 가다듬어 아뢰였다.

《헤헤, 깨끼부락놈들이 혼례를 하는것 같소이다.》

《혼례?…》

백태는 능글맞게 웃으며 엎드린 고비의 자태를 훑어보았다.

고개를 숙여 얼굴모색은 볼수 없으나 미끈한 목덜미며 베옷에 감싸인 동그란 어깨, 덜퍽진 엉뎅이밑까지 흘러내린 함함한 머리채가 첫눈에도 몹시 탐스러워보였다.

《어느 집이냐?》

백태가 물었다.

《… …》

《이눔들, 어서 아뢰여라!》

쇠소리가 다시 짱 울렸다.

서눌은 고개도 쳐들지 못한채 부들부들 떨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저… 천인네… 집의 대사오이다.》

《이 계집은 어데서 데려오는가?》

《예, 저기… 나루가에서 진척일을 하던 집의 수양딸을…》

《수양딸?…》

백태가 좀 누그러진 소리로 말하자 부호장이 굿 들은 무당처럼 입이 헤 벌어져 얼른 맞장구를 쳤다.

《키워서 잡아먹으니 생물이오이다. 해해.》

그의 해망스런 웃음에 잇대여 각이한 음성으로 각양하게 웃어대는 너털웃음소리가 일어났다.

고비는 두려움속에서도 부끄러움과 분기가 치밀어올랐다.

《부호장.》

백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가위날에 배놀이도 이채로우니 우리 땀을 좀 들였다가세.》

《예예, 그리하사이다.》

말우에서 뛰여내린다.

《우리 공주의 십경으로 치면 먼저 고마강의 봄놀이와 월성산의 가을흥취, 또 웅진나루의 달맞이며 계룡산의 구름 등으로 꼽지요만 실상 이 버드내도 절경의 하나라 이를수 있소이다.》

부호장은 아양을 부리는 기생처럼 수다스럽게 입을 놀렸다.

고비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토했다. 어느새 이마며 코등에 진땀이 내솟고 잔등이 축축했다. 그런데 누런 가죽신 신은 발이 그의 눈앞에서 멈추어서지 않는가. 신끝으로 어깨를 툭툭 건드린다.

《얘, 네가 노를 젓거라.》

고비는 흠칫 고개를 쳐들었다. 검은 복두에 붉은 비단저의를 입은 키꼴이 늘씬한 젊은 량반이 검측한 눈길로 지켜보고있었다.

《헤, 고년 참 암상지게 생겼소이다. 어서 가자, 이년.》

젊은 량반의 곁으로 다가온 나배기 부호장이 헤벌쭉거렸다.

고비는 대뜸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러자 사태를 짐작한 서눌이 황황히 웃몸을 일으키며 사정했다.

《제가, 비천한 소인이 나리님들을 모시겠소이다.》

《이눔, 너는 저리 비켜!》

부호장이 서눌의 어깨를 홱 밀쳤다.

서눌이 뒤로 벌렁 나가넘어졌다.

《나루일이야 나루치의 소임이 아니냐. 그러니 나루치집의 계집이 하는게 당연하다.》

백태가 점잖은투로 뇌까렸다.

몸을 일으킨 서눌이 다시 엉금엉금 기여오며 목메인 소리로 간절하게 빌었다.

《그렇지만 오늘이야 어떻게, 오늘은 인륜대사의 날이 아니오니까?》

《건방진 놈, 깨끼부락놈들이 당치 않게 인륜대사는 뭘 말라빠진 인륜대사야.》

부호장이 가죽신 신은 발로 서눌의 허리를 걷어찼다. 서눌은 다시 땅에 굴었다. 고비는 종내 왁살스런 군졸놈들에게 끌리워 나루배에 오르고야말았다.

서눌은 몸을 푸들푸들 떨며 땅을 쳤다. 무엇때문에 병신인 자기가 흉물스럽게 구종군으로 나섰단 말인가. 그는 자기때문에 고비가 이런 굴욕을 당하게 되였다고 후회가 막급했다.

고개를 짓숙이고 눈을 감은 고비는 노를 잡은 팔에 본능적으로 힘을 주고있었다. 량반들이며 군졸들의 탐욕에 주린 지싯지싯한 눈길이 자기 몸을 더듬고있음을 감촉한 그는 마치 온몸에 뱀이 휘감기는듯 소름이 쭉 끼치였다.

고물켠에 가앉은 백태는 배전에 몸을 거느시 기대고 고비를 뜯어보고있었다.

비록 베옷에 감싸였으나 애리애리하고 탄력있어보이는 자태, 장난치듯 물결의 반사광이 아롱거리는 가무스레한 얼굴도 실상 따져놓고보면 얼마나 귀여워보이는가. 더우기 동백기름내가 풍기는상싶은 맨주먹빛처럼 까만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저 함함한 머리채는 또 얼마나 탐스러운가.

시골녀인들은 별로 거들떠보지 않던 그에게서 고비의 존재는 하나의 이채로운 발견이였다.

계집들을 꽃이라고 할진대 저것은 비록 화려하지는 못해도 얼마나 청초하고 싱싱한 메꽃인가. 그는 메꽃의 향기를 맡고싶었다. 어쩌면 메꽃의 향기는 쌉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안에서 뭇사람들의 손길과 입김에 시들해진 모란꽃보다는 상기 이슬기가 그대로 어려있는 저 메꽃이야말로 정녕 순결무구하고 아릿다운 꽃이 아니겠는가.

그의 뇌리속에는 불현듯 고비의 자태와 엇바뀌여 분독이 올라 볼에 퍼릿퍼릿한 반점이 생기군 하던 자기 안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안해는 명문거족의 딸이요 개경장안에서도 미인으로 소문난 녀자였다.

경인년의 거사직후에 그가 무슨 일로 어느 고관대작네 후당에 들어갔을 때 련못가에서 공작새와 놀고있는 한 규수를 보게 되였다.

공작새에게 모이를 뿌려주고있던 얼굴이 해사한 그 처녀는 호기심에 찬 예쁘장한 눈으로 그를 말끄러미 쳐다보는것이였다. 누가 있으리라고 예기치 않았던 백태는 황홀할 지경으로 아릿다운 처녀와 맞다들고보니 당황하여 대뜸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였다.

그는 어줍은 웃음을 띠우고 《아씨… 소생이 그만 못들어올데를…》하고 중언부언하였다. 처녀는 방긋 웃더니 수집은듯 머리를 숙인채 땅에 끌리는 비단치마자락을 살짝 걷어잡고 그의 곁을 종종걸음쳐 지나갔다. 돌층계를 사뿐사뿐 밟고 올라간 처녀는 다시한번 그를 돌아보더니 새촘해진것도 같고 웃음을 담은것도 같은 그런 야릇한 빛이 어린 눈을 한번 해뜩거리고나서 미닫이를 꼭 닫는것이였다. 그의 곁을 지나칠 때 남긴 처녀의 향기, 처음으로 감촉한 이성의 체취는 그의 머리를 대번에 핑 돌게 만들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그는 열에 뜬듯 한 나날을 보냈다. 눈이 부신듯한 처녀의 웃음이며 취할듯싶은 향기는 종시 그를 사로잡고야말았다. 소심한 걸음으로 찾아가던 그는 차츰 대담해졌고 드디여는 달무리가 졌던 어느날 밤에 처음 만났던 그 후원초당에서 처녀를 품속에 껴안게 되였다. 그는 숨막힐듯 한 환희를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쓰디쓴 고배였음을 그후에 알게 되였을 때 얼마나 주먹이 아프게 이마를 쳤던가.

백태는 괴로운 생각을 털어버리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눈을 떴다. 처녀는 여전히 노를 젓고있었고 출렁이는 물결은 그의 얼굴에서 어리광을 부리듯 아롱아롱한 반사광을 던지고있었다.

또다시 안해의 생각이 떠오른다. 여기 공주로 떠나오기 전날 칼찬 동료들은 송별연회를 한답시고 그의 집에 모였었다. 몇순배 잘돌아 술들이 거나해졌을 때 상장군 송유인은 그의 어깨를 껴안더니 후텁지근한 목소리로 《이 사람, 자넨 도적놈일세그려. 저런 절대가인을 혼자 독차지하고있으니 말일세.》하고는 구지레한 입술을 그의 볼에 갖다대는것이였다. 백태는 자기 볼에 곰팡이같이 끈적끈적한 그 어떤 오물이 묻는듯싶어 골살을 찌프렸다. 하면서도 그는 송유인이 맞은켠에 앉아 교태를 부리는 자기 안해에게 한쪽눈을 찡긋거리는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징그러운 입술이 지금쯤 자기 안해의 분독이 오른 그 핑핑한 뺨을 문대고있을지 어찌 알랴. 그는 온몸이 싸늘하게 식는것 같았다.

《너희는 나를 도적이라 하지만 나는 너희놈들모두를 도적으로 여긴다. 아, 이건 지옥이다. 지옥! 절대가인! 흥, 미인이라는 계집을 데리고사는 놈은 결국 지옥에다 명운을 내던진 놈이야.》

의처증에 걸린 백태는 정신병환자처럼 목을 비틀며 괴롭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제 소리에 놀라 눈을 뜬 백태는 의혹에 찬 눈길들과 부딪쳤다. 자기 약점을 드러내길 좋아하지 않는 그는 은연중 다른자들의 시선을 돌릴 필요를 느꼈다.

그는 씁쓰름히 웃으며 천천히 눈알을 굴렸다. 이제는 체념해버렸는지 무심한 표정으로 노를 젓고있는 고비에게 시선이 가멎은 백태는 눈을 가늘게 쪼프리고 야비하게 시까슬렀다.

《내가 계집의 배우에 올라탔군 그래.》

《예?…》

백태의 말뜻을 몰라 잠시 눈섭을 치켜올리던 부호장은 이어 알만 하다는듯 가살을 떨었다.

《예― 헤해, 헤해해…》

그러자 다른자들도 덩달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이 왜 웃는지 영문을 알길없는 고비는 어리둥절하고 당황해졌다. 그는 짓숙인 이마너머로 그들을 잠간 훔쳐보았다. 고비는 그들의 징그러운 웃음소리며 게슴츠레한 눈빛에 음탕한 그 무엇이 흐르고있음을 감촉했다. 그의 얼굴에는 수통스러움으로 피가 빨갛게 번져올랐다. 그는 저도모르는 사이 감쳐물었던 입을 열어 야무지게 내쏘았다.

《나리님은 누구의 배안에 있나이까.》

《엉?》

(배안에 있다니?… 그러니 제년의 자식이란 소리가 아닌가?!…)

처음 한순간 고비의 말귀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놈들은 이어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이 발칙한 년, 뉘앞이라고 감히!》

《이런 철퇴로 때려죽일 쌍년을 봤나?》

서슬푸른 칼들을 뽑아들었다. 당장 무슨 일이 터질듯 잔혹한 살기가 풍겼다. 배가 몹시 흔들거렸다.

노젓던 손을 멈춘 고비는 오연한 자세로 서있었다. 그의 머리속에는 문득 아까 범잔녀가 하던 옛이야기가 되새겨졌다.

(오냐, 나 역시 죽을지언정 네놈들앞에 굽어들지는 않을테다.)

놈들을 쏘아보는 고비의 눈에서는 불꽃이 튕겼다.

백태의 얇은 입술우에 실뱀같은 잔인한 미소가 흘렀다. 두눈을 쪼프리고 고비를 한참 노려보던 그는 이윽고 얼굴표정을 바꾸며 짐짓 흔연한 어조로 내뱉았다.

《고정들 하오.》

그의 말에 다른 놈들도 더 어쩌지 못하고 칼들을 거두었다. 흥취가 다 깨여진 그들은 배를 물녘으로 대라고 호통질했다. 배가 나루가에 멎기 바쁘게 뭍에들 뛰여내렸다.

삭줄을 끌어 말뚝에 비끄러맨 고비는 눈길을 내리깐채 표일한 태도로 서있었다. 백태는 마감으로 배에서 내렸다. 조소하는듯 한 독살스러운 랭소를 얇은 입술우로 흘리며 스적스적 고비의 곁으로 다가왔다. 슬며시 장검을 뽑아든 그는 들짐승의 멱살을 무는 맹수의 아가리같이 쫙 벌린 왼손으로 처녀의 머리채를 휘감아쥐였다.

해빛에 번쩍하는 서리발을 본 서눌은 그만 눈을 꽉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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