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회
제4장 한가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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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이는 한낮이 지나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뒤로 망쇠와 마을사람 몇이 껴묻어들어왔다.
호미동이네는 물론 범잔녀로친까지 허리를 일으켜 인사를 했다.
나이는 젊어도 부락에서 웃어른구실하는 망이를 모두가 어렵게 여겼다.
《조반전에 나간 사람이 가을중 쏘대듯 새서방까지 데리구 어델 갔다 이제 오나? 망쇠가 시장하겠네.》
누리나가 다심한 어조로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형님은 좀 가만 계시우. 그러잖아 다 생각할 사람 있는데.》
호미동이네가 부엌으로 가려는 누리나의 치마자락을 잡으며 낮은 소리로 이죽거렸다.
망쇠가 들어설 때부터 고개를 쳐들지 못하던 고비는 그만 귀밑까지 새빨개져 고개를 푹 숙이고 어쩔바를 몰라했다.
누리나도 재촉하듯 정찬 눈매로 고비를 바라보았다.
《그만두슈, 어머닌 사위를 굶겨다닐가 걱정이시우.》
망이가 먼산을 바라보고있는 망쇠의 벌개진 얼굴을 흘끔 치떠보며 한마디 했다.
《암, 그랬을테지. 한데 어델 갔다오는 길이시우?》
범잔녀가 망이에게 물었다.
《예, 신답을 좀 돌아보느라구요.》
《벼가 빼물게 잘되였지유?》
《예, 알갱이가 팥알같아요.》
《참, 다행이여. 금년가뭄철같아서는 다 굶어죽는줄 알았는데 그 신풀이논이 우릴 살릴줄이야.》
범잔녀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들은 망이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다시한번 가슴깊이 느끼였다. 정녕 그 개간답이 아니였다면 어쩔번 했는가. 또 몇해전처럼 대살년을 만나 무리죽음이 들에 깔리고 산에 널릴게 아니였는가. 그런것을 생각만해도 몸서리가 쳐지고 그럴수록 망이가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사람으로 모두의 가슴속에 자리를 잡는것이였다. 사실 망이가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궁냥을 할것이며 설사 궁냥을 했더라도 누가 그런 큰 도량으로 일을 밀고나갈수 있었으랴.
이때 호미동이를 앞세우고 서경로인이 마당에 들어섰다. 그는 말없이 녀인네들이 매놓은 베를 재여보고나서 들어올 때처럼 아무 소리없이 마당을 나갔다.
절뚝거리며 삽짝밖으로 사라지는 그의 구부정한 잔등을 의아쩍게 지켜보던 호미동이네가 눈을 크게 떴다.
《대체 어쨌다는거요?》
《낸들 알겠나. 답답스런 령감두 다 보지.》
범잔녀로친도 입을 쩝쩝거렸다.
그런데 얼마후에 서경로인은 방울소리가 절랑거리는 촌정네 윤두소를 이끌고 다시 나타났다.
커다란 눈을 슴벅거리는 암소는 꽃으로 곱게 장식되여있었다. 그뒤로 부락의 처녀들과 아이들이 와 몰려들어왔다.
마당의 사람들은 놀란 눈을 치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어쩐거야?》
소고삐를 잡고선 서눌은 고비가 오늘 베매기에서 장원을 했다고 알려주었다.
《고비가 장원이라구?… 하, 생일겹친 명절이라구 하더니 오늘은 고비가 경사에 경사를 만났구나.》
고비또래 처녀들이 그를 에워싸고 제일처럼 좋아서 콩콩 뛰였다.
누군가 고비의 머리에 들꽃으로 엮어만든 꽃관을 씌워주었다. 수집음으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다소곳하고 서있는 고비는 두눈이 기쁨으로 반짝거렸다.
《저 고비 좀 보래이, 공주같네.》
《자, 길 좀 내시우. 장원을 태우고 술레를 돌아야겠쉐다.》
부락에서는 한가위날에 길쌈을 제일 많이 그리고 제일 잘 낳은 녀인을 소잔등에 태우고 마을을 한바퀴 도는 풍습이 있었다.
《가만, 같은 값이면 새색시치장을 해서 내세웁시다그려.》
누군가의 말에 모두 좋다고 환성을 질렀다.
《그럼 아시예 시집보낼 차빌 해야겠구만.》
범잔녀가 도장수격으로 팔을 걷고나섰다.
고비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얼마안되여 녀인들에게 둘러싸여 나오는 고비를 보고 사람들은 또다시 환성을 질렀다.
《야, 아깐 공주같더니 이젠 왕후같구나.》
《저 칠칠한 머리채를 얹으면 공주성안의 량반댁마님들도 왔다 울고가겠다.》
아닌게아니라 신부차림을 한 고비는 아름답고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하얀 동정이 유표한 노르스름한 베치마저고리를 입고 머리에는 왕관같은 꽃관을 썼는데 발꿈치까지 흘러내린 치렁치렁한 머리끝에는 자주색댕기를 매였다. 비록 량반집녀인들처럼 화려한 비단옷에 얼굴가리우개는 쓰지 않았어도 오히려 청초하고 산뜻한것으로 하여 더 생신한 아름다움을 풍겼다.
토방에 놓인 새 짚신에 자그마한 버선발을 얌전히 꿰는 고비앞에 서눌이 소를 끌어다 세워주었다.
《원, 로인두 망녕이시우. 아, 시아비될 이가 며느리의 구종군노릇을 할려우?》
범잔녀가 소고삐를 잡고 흐뭇이 서있는 서눌에게 핀잔을 주었다.
성미가 어진 서눌은 좀 면구스러워하더니 변명하듯 어줍게 중얼거렸다.
《뭐 대순가요. 맘같아서는 며늘애를 잔등에 업고다니고싶은데유.》
우스개소리로 한 말이 아니라는것이 표정이며 말투에서 력력히 엿보였다. 구차스런 홀아비집에 녀자가 들어온다는것을, 그것도 고비같이 알뜰한 새애기가 자기 며느리로 된다는것을 꿈처럼 여기고있는 서눌이였다.
그는 오직 오늘을 위해서 평생 그 험한 가시덤불길을 헤쳐온듯 한 생각이 들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어쩌면 궁해빠진 자기 집에도 복이 깃들것 같았다.
그래서 늘 침울하던 로인의 얼굴에는 실없는 웃음이 저도모르게 벙싯벙싯 떠오르군 했다.
그를 언짢게 보던 호미동이네가 누리나에게 귀속말로 하필이면 길한 날에 서경로인에게 구종군노릇을 시킬게 뭐냐고 나무람했다. 다리를 저는것도 그렇지만
그러나 누리나는 호미동이네의 말을 가볍게 밀막고나서 서경로인에게 온정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어조로 당부했다.
《아주버니, 그럼 돌봐주시우.》
《예, 그리하리다.》
서눌은 머리를 깊이 수그렸다. 자기의 진정을 알아주는 누리나의 말이 못내 고마왔던것이다.
누리나에게 나볏이 절한 고비는 부끄러워 잠시 머뭇거리다가 소잔등에 얌전히 올라앉았다. 그러자 배가 불룩하게 새끼를 밴 암소는 《음메―》하고 영각소리를 질렀다.
《어이구. 이 암소두 자기네 새 안주인을 알아보는구려.》
범잔녀가 다시 너스레를 떨었다.
《암소두 송아지를 낳구 또 고비두 래년쯤에 옥동자를 낳을테니 서경집엔 복이 막 굴러들게 됐구려.》
가뜩이나 부끄러워하던 고비는 범잔녀의 말에 몸둘바를 몰라하며 소잔등에서 내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서눌이 소의 궁둥짝을 철썩 때렸다.
《에라, 이 소야―》
서눌의 흐느러진 소리에 이어 절랑! 소방울소리가 자못 호기있게 울렸다.
아이들이 와아― 환성을 지르며 마당에서 뛰쳐나갔다.
고비를 태운 암소는 절랑절랑 방울소리를 울리며 느리고도 힘찬 걸음을 옮겨놓았다. 처녀들이 방글거리며 뒤따르고 복슬개도 이런 경사에 자기도 빠질수 없다는듯이 꼬리를 저으며 껑충거렸다.
앞서가는 웃동벗은 조무래기들이 수수대를 휘저으며 량반행차의 길라잡이처럼 갈도소리를 웨쳐댔다.
《술레 술레 억술레―》
《우야 술레 억술레―》
그 소리에 야트막한 초가집들의 방문들이 열리며 맨발벗은 로인들이며 아낙네들이 길바닥으로 나왔다.
《아야나, 고비가 장원을 했구나.》
《저거야 신부행차가 아니요?》
《참말, 오늘 그 집에서 대사를 치른다 했지.》
《저렇게 차려놓으니 얼마나 이쁘오?》
《그러게 잘 먹고 잘 입어 못난이가 없다잖수.》
《고비는 삼순구식을 죽만 먹어두 이름처럼 곱기만 하우.》
할머니들이 눈물이 글썽하여 고비의 무르팍도 쓰다듬고 버선발도 만져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앞길에는 자기들같은 불행이 없기를, 복만이 있기를 무수히 기원하면서. 고비는 부끄럽고 거북스럽기도 했지만 보다는 즐겁고 기쁜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자기 감정을 숨길줄도 꾸밀줄도 모르는 순진하고 발랄한 처녀는 사뭇 고개를 숙인채 상글상글 웃고있었다.
화사한 날씨였다. 해볕은 다양하고 바람은 산들거리는데 저 멀리 련줄련줄 흘러간 산줄기에는 봄날의 아지랑이같은 서기가 어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