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 회
제4장 한가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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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날.
팔월추석이라고도 불리우는 오늘이 명절인줄 아는지 닭들도 여느날과 달리 일찍 울어댔고 개들도 어슴새벽의 마을길을 뛰여다니며 짖어댔다. 닭울이때부터 부엌문 여닫기는 소리가 나더니 추녀낮은 집집의 굴뚝에서 푸른 연기가 서려올랐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풍속에 계절마다 명절놀이가 많았지만 어려운 살림을 겨우겨우 부지해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명절이라고 해서 별로 이채로울것도 없었다. 잊혀지고 줄어들어 명절이라고는 별반 없이 지내는 그들에게도 팔월한가위만은 그렁성저렁성 유지되여왔으니 그것은 한가위날 휴식보다도 생산과 관련된 명절인 까닭일것이다. 이날 녀인네들은 길쌈나이승부를 다투었고 저녁이면 오사리곡식을 걷어들인 뒤라 떡개나 빚어놓고 하루를 즐겼던것이다.
마당에서 비질하는 소리를 들은 망이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나서 방문을 열었다. 뽀얀 젖빛안개속에서 고비가 마당을 쓸고있었다.
마당에 내려선 망이는 말없이 다가가 고비의 손에서 싸리비를 빼앗았다.
《아이, 더 주무시지 않구.》
고비는 두손을 치마앞자락에 모두어잡으며 눈을 할기죽거렸다.
《고비가 시집가는 날인데 늦잠잘수가 있어야말이지.》
《싫수, 그런 말…》
망이의 이죽거리는 소리에 고비는 어린애마냥 짐짓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기쁨으로 웃고있었다. 포근한 안개가 낀것으로 보아 오늘은 날씨마저 맑고 밝으리라.
광솔불을 켜놓고 밤늦게까지 수수마당질을 하다보니 마당엔 검부레기가 한벌 쭉 덮였다.
《이젠 벼가을도 해야 하잖을가요?》
한자리에 오도카니 서있던 고비가 또 입을 열었다. 작년처럼 이른 우박이나 내리면 한가닥 명줄을 걸고있는 신답의 벼마저 페농할것이 아닌가.
《수수도 한알갱이 남기지 않고 다 긁어갔는데 그 벼마저 앗아가면 어쩌누.》
고비가 혼자소리처럼 시름겹게 중얼거렸다.
《무슨 방정맞은 소리.》
망이는 비질을 멈추지 않은채 가볍게 질책했다.
고비는 한숨을 내쉬고나서 쪼그리고앉아 검부레기를 손으로 그러모았다. 고비를 꾸짖긴 했지만 망이도 가슴속에 자리잡는 위구심을 어쩔수 없었다. 그러나 설마… 망이는 어수선한 마음속의 불안을 털어버리려는듯 비질을 세차게 해댔다.
《아이, 살근살근 하시지 않구. 그렇게 비질하면 복이 밖으로 나간다는데.》
고비가 웃음어린 소리로 지청구를 했다.
망이는 비질을 멈추고 허리를 폈다. 그리고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고비를 정어린 눈길로 굽어보았다. 고비도 상글상글 웃으며 쳐다본다.
《너처럼 똑똑한 애를 지어미로 데려가는 망쇠는 복을 탔지.》
《하이참, 오빠두 실없는 소리만 자꾸.》
고비는 수집은듯 무릎짬에 고개를 숙였다. 그랬어도 고운 웃음소리만은 가무리지 못했다. 슴슴하고 눅눅하고 차거운 안개발은 기쁨으로 달아오른 고비의 얼굴을 핥고나서 망이의 목덜미에 휘휘 감겨돌았다.
부엌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흠칠 놀라며 일어난 고비는 부엌쪽으로 재빨리 걸어갔다. 그는 물동이를 안고나와 사립밖으로 사라졌다.
도래샘터로 온 고비는 넙적한 돌우에 동이를 살근히 내려놓았다.
샘터의 맑은 정기를 지킨다는 노가지나무가 거밋한 형체를 드러내고 샘물흐르는 소리만 쫄쫄거릴뿐 새벽안개가 차분히 덮인 도래샘터는 고즈넉하였다.
저도모를 한숨을 호― 내쉰 고비는 동이에 맑은 물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는 숙인 이마앞에 두손바닥을 합하며 눈을 감았다. 그의 입에서는 애원의 소리가 나직이 흘러나왔다.
《신령님…》
고비는 자기의 앞길에 그리고 자기의 시집과 친정에 불행이 없기를 충심으로 기원하였다.
그다음 고비는 치렁치렁한 머리발을 가슴앞으로 넘겨놓고 댕기를 풀었다. 말그대로 삼단같은 머리가 화르르 흘러내렸다. 그 머리에 정갈한 샘물을 끼얹었다. 차거운 전률이 짜르르 등골을 훑고 지나간다. 그는 흐득흐득 목구멍이 막혔으나 오래동안 정성껏 머리를 감았다. 머리를 다 감고난 고비는 누가 볼세라 동이를 이고 종종 걸음쳐 돌아왔다.
그들이 서둘러 조반을 끝냈을 때였다.
《고비어매 계셔유?》
마당에서 애련한 목소리가 울렸다.
방문을 연 누리나는 덤비며 토방으로 나갔다.
《아니, 신새벽에 을님이, 네가 웬일이냐?》
《저…》
을님은 당황한 눈길로 웃방문을 얼핏 살펴보았다. 망이를 꺼리는 눈치였다.
《우리들뿐이니 어서 들어오너라.》
누리나는 을님의 손을 잡아끌었다.
방에 들어온 을님은 문곁에 얌전히 앉았다.
마실이라고는 별로 다니지도 않는 을님이가 이렇게 어뜩새벽에 찾아온것을 보고 누리나도 고비도 놀랍게 생각했다.
《네가 오니 우리 집이 다 환해지는것 같구나.》
누리나의 말에 을님은 얼굴을 붉혔다. 이윽하여 고개를 쳐든 을님은 들고온 보자기를 조심스럽게 앞에 내놓으며 말했다.
《낮엔 짬이 없을것 같아 일찍 왔어요.》
《그럴테지. 너희두 베를 매야 할테니까. 한데 이건 무언가?》
주섬주섬 보자기를 펼치던 누리나는 눈이 둥그래져 숙부드러운 을님의 얼굴을 다시 건너다보았다.
《아니, 이게 옷가지가 아니냐? 웬 옷가지를…》
《고비 첫날옷으루… 마음뿐이와요.》
을님은 또 이마를 숙였다.
고비는 대번에 눈굽에 미음이 핑 돌았다.
《언니…》
고비는 두손으로 을님의 손을 꼭 쥐며 목멘 소리로 불렀다.
누리나도 커다란 손으로 눈갓을 찍어내며 중얼거렸다.
《제 걱정만 하재두… 겉불안이라구 너는 어쩜맘성까지 그리… 참, 정성두 극진하지…》
코물을 홀 들이키고나서 그는 고비에게 일렀다.
《얘 고비야, 어서 입어보렴.》
어린 자기가 먼저 시집간다는데 늘 마음이 걸려있던 고비는 이런 경우까지 당하고보니 더욱 무안스럽고 거북살스러워 몸둘바를 몰라했다.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을님이가 웃음매 고운 눈으로 재촉하듯 그를 지켜보았다.
《내가 어떻게…》
고비는 얼굴이 활딱 붉어져 몸을 꼬았다.
《온, 당장 머리를 얹을 애가… 그럼 어디 을님이를 치장시켜 며느리로 맞을가.》
마음이 들뜬 누리나가 너스레를 치며 시까슬렀다. 그러나 을님이의 눈가에 얼핏 비끼는 그늘을 본 그는 인차 입을 다물었다.
그냥 낯이 붉어있는 고비에게 을님이가 새옷을 입혀주었다.
《옷이 날개고 밥이 분이라더니 옛말 그른데 없구나. 쯧쯧.》
새 치마저고리를 입은 고비가 너무도 환하게 돋보여서 누리나는 혀를 내둘렀다. 비록 열새베천으로 지은 옷일망정 노란바탕에 흰 모시로 동정을 단 품이며 다림발이 산뜻한 고름이며가 여간 곱고 알뜰하지 않았다.
《거 기장이며 품이며가 여불없이 맞는구나.》
누리나는 입을 하 벌리고 부끄러워 어쩔줄 모르는 고비를 바로세우고 돌려세우며 보고 또 보았다. 첫날옷도 마련할길 없어 낡은 옷을 빨아 기워놓지 않으면 안되였던 누리나는 을님의 정성이 참으로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을님이가 돌아간 다음 누리나는 마당에다 베를 맬 말뚝을 박았다. 오늘이 혼례날이라고 할지라도 베를 매지 않으면 안되였다.
어느덧 날은 횅창 밝았다. 가을날답게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이 사람은 어딜 가서 아직두 오지 않누.》
그는 말뚝을 박던 도끼를 땅에 떨어뜨리며 사립밖을 내다보았다.
조반도 먹지 않고 집을 나간 망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부엌문이 살며시 열리며 설겆이를 끝낸 고비가 치마허리를 졸라매며 나왔다.
《아가, 너는 오늘 그만두렴.》
입에 설고 귀에 선 아가라는 부름에 누리나도 고비도 동시에 어색한 기쁨을 느꼈다. 그 기쁨속에 그들은 자기들의 사이가 더욱 튼튼한 매듭으로 이어짐을 자각했다.
《어이구, 성님넨 벌써 차비를 하시우?》
얼굴이 해반주그레한 옆집 호미동이 어미가 마당에 들어서며 말했다.
《벌써라니, 늦었지 뭐야.》
누리나도 반가운 웃음을 담으며 대척했다.
《난 미리 자리잡을가.》
호미동이 어미가 두릿거리는데 뒤집의 범잔녀로친이 헐떡이며 들어섰다.
《내 자린 안남겨놓구 시작할셈인가.》
《걱정두. 성님자린 어련히 남겨놓지 않을라구요.》
새벽부터 마음이 떠있는 누리나는 또 웃음을 띠웠다.
베매기는 마당넓은 집에 여러 녀인들이 모여서 하는데 누리나네 집에는 늘 호미동이네와 범잔녀로친이 오군 했다.
범잔녀로친이 마당구석에서 삼실퉁구리를 끄르고있는 고비를 띄여보고 물었다.
《아니, 이 집에선 시집보낼 새애기까지 부려먹을 잡도린가.》
《글쎄 제가 꾸럭꾸럭 나서는구려.》
누리나의 웃음어린 말에 범잔녀로친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없는 집에서 혼례날이라구 따로 있겠나. 나두 잔치란게 뭔지 모르구 오늘까지 살아왔으려니.》
이때 벌써 어디서 수수깜부기를 따먹고 입술언저리가 새까매진 호미동이가 맨발로 뛰여들어오며 소리쳤다.
《와요, 와.》
《누가?》
호미동이는 눈을 째긋하고 절름발이시늉을 했다.
《서경집로인이?… 어이구, 그러니 다른 집들에선 벌써 시작한 모양일세.》
범잔녀로친이 이러며 안장다리가 다 드러나게 치마를 걷어붙이였다. 호미동이의 시늉대로 얼마후에 서경집로인 서눌이 다리를 절름거리며 나타났다.
팔월한가위 길쌈나이때면 부락에서는 늘 안주인이 없는 서눌을 판정인으로 내세우군 했는데 실상 그것은 녀인네가 없는 집이라야 승부를 공정하게 보아준다는데도 까닭이 있었지만 보다는 홀아비로 침울히 지내는 로인에게 이날 하루만이라도 생활의 온기를 부어주려는 인심무던한 마을아낙네들의 갸륵한 심정에 기인한것이였다.
서눌도 처음엔 질색해서 손을 내흔들었으나 한두해 끌려다니고나더니 이제는 응당한 일처럼 스스로 나서군 했다.
《아주버니 오시오?》
《예.》
누리나의 인사를 받은 서눌은 잠시 토방에 걸터앉았다.
《하, 이거 갖춘게 없어 며늘애 데려가기 부끄럽소이다.》
《뭐 갖출게 따로 있나요.》
로인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올 때처럼 말없이 절뚝거리며 마당을 나갔다.
《아니, 저 로인은 제 집 잔치걱정만 하러 왔댔나. 베매기에 대해선 왜 아무소리 없어?》
호미동이네가 곱살한 얼굴을 들고 이죽거렸다.
《오늘이야 며느릴 맞는 날인데 베매기야 정신이 있을라구.》
범잔녀로친이 또 빈정거리는 말을 누리나가 부드럽게 밀막았다.
《워낙 속깊은 로인이니 우리 집일이 걱정스러워 그러겠지요.》
《그래두 베매기는 승벽내긴데…》
고개를 기웃거리던 호미동이네가 좋은 수가 났다는듯이 수군거렸다.
《참, 우리 이웃집들에 간세(렴탐군)를 보낼가?》
이러는데 서경로인을 따라갔던 호미동이가 또 달려들어오며 웨쳐댔다.
《오늘은 고비누나가 시집가는 날이기때문에…》
호미동은 말하다말고 다리저는 시늉을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베매기를 일찍 끝낸다구 했어.》
《이녀석아, 너두 발등을 다쳐 다리를 절지 않겠거들랑 거 동굴속으로 들락거리는 백발로인이나 달고다녀라.》
호미동이를 핀잔준 범잔녀로친은 혼자소리로 말을 맺었다.
《정말 의뭉스러운 령감이군.》
《참, 그런데 성님넨 어쩔셈이우? 그 펄펄하던 이집 행수가 요즘은 어쩐지 데친나물처럼 풀죽어다니니…》
호미동이네가 삼실을 늘이며 시름겹게 말했다.
《거 의원집 아낙두 너무하지. 까친 까치끼리라구 아, 저두 상놈인 주제에 고비오래빌 나무래서야 쓰나. 이제 고운 을님이의 앞길을 망치지 않나 두구보래이.》
범잔녀로친이 호미동이네가 늘인 삼실을 도투마리에 감으며 왁살스런 성미대로 윽윽했다.
누리나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였다.
그때까지 고비는 말없이 일손만 재게 놀렸다.
그도 가슴이 답답해났다. 을님의 일이 참으로 남의 일같지 않았다. 모두 시름에 잠겨 묵묵히 베를 맬 준비를 다그쳤다. 삼실을 늘이고 그 삼실에 풀을 칠하여 겨불에 말려 도투마리에 감는 일이였다.
실날에 풀칠을 지내 세게 하거나 덜하여도 안되며 또 그것을 말리는 겨불이 너무 세거나 약해도 안되였다.
《시작이 절반이라…》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범잔녀가 사내처럼 걸걸한 소리로 《베틀노래》를 불렀다.
저녁달 등불삼아 베틀에 앉았더니
아으 동창에 별이 떴고야
시린손 바디쳐서 보름새 베짰으나
아으 뉘옷이 되려는지 모르매라
일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고비의 이마전에는 송골송골 땀발이 섰다. 녀인들의 고달픔이 그대로 안겨오는 《베틀노래》를 들으려니 그도 마음이 구슬펐다. 명절날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건만 왜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슬픔이 가실길 없는지, 을님이만 봐도 그렇지 않는가. 곱다면 그보다 더 예쁜 처녀가 어디 있으며 착하다면 그보다 어진이가 또 어디 있겠는가. 바느질솜씨는 또 어떤가. 그런데도 을님은 늘 울고지낸다. 그 어매가 나빠서인가.…
《아이구, 저 고비 손놀림 좀 보래.》
문득 범잔녀로친이 혀를 찼다.
실상 길쌈나이에 있어서는 온 부락치고 고비를 따를 녀인이 없었다. 고비가 맨 베는 올이 가늘고 탄탄한데다 남보다 갑절 일손이 빨랐다. 그래서 고비는 손끝이 일찍 여물었다고 칭찬을 들었다.
일손을 놓고 고비를 홀린듯이 바라보던 범잔녀가 다시 혀를 찼다.
《저 날씬한 허리를 타고내려온 함함한 머리채를 보래. 탐스럽기두 하지. 인물 천냥에 눈이 팔백냥이라지만 고비는 머리칼이 천냥이야.》
《그러게 하늘에서 고운건 별이구 녀인에게서 고운건 머리칼이라구 하잖수.》
호미동이네가 어디선가 귀동냥해 들은 말을 적절하게 써먹었다.
해빛을 받아 까만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고비의 함함한 머리채는 정녕 탐스러웠다. 그 아름다운 머리칼을 두고 부락에서는 부러워하지 않는 처녀가 없었다.
누리나도 도투락댕기를 땋고 아들의 등에 업혀온 고비가 어언간 칠칠한 태머리의 처녀로 자라난것이 대견스러운듯 사내같은 웃음을 허허 웃는다.
고비는 또다시 가슴이 울렁거린다. 누리나와 망이에 대한 고마운 생각이 가슴을 친다. 그들이 아니였다면 자기는 둥지에서 떨어진 제비새끼처럼 죽어버렸을것이다. 그리고 불현듯 이제는 기억에서 희미해진 부모님들 생각도 난다. 어린 동생들 생각도… 등어리까지 치렁치렁 머리가 자란 내 모습을
《아니, 저애가 우는게 아니여?》
《왜 그러니, 고비야?》
범잔녀로친도, 호미동이네도 눈이 둥그래서 물어본다.
누리나도 가슴이 저렸다. 이런 날에 어찌 제 부모생각을 않으랴. 그러나…
《방정맞게 길한 날에 울긴.》
《고비야, 너 어매 말이 옳다. 너두 한 아낙네구실을 하려면 아시예 울음을 깨물어삼켜야 하니라. 뜯기구 밟히구 채우는 우리 구박데기들이야 그저 강심살이를 할수밖에 없지. 내 옛말 하나 할가. 내 이름이 와 범잔년가 하니. 참, 임자네들은 벌써 들었지?》
《아니요.》
범잔녀의 말에 호미동이네가 호기심이 가득 어린 눈에 웃음을 담고 인차 고개를 흔들었다.
헌걸차고 우스개소리를 잘하기로 소문난 범잔녀의 입에서 또 무슨 소리가 나올가싶어 벌써부터 속이 근질거렸던것이다.
《못들었어?… 그럼 함께 듣게나. 우리 어매가 시악씨적에 어느 량반집에서 동자아치노릇을 하댔다네. 근데 리씨라는 그댁 큰마님인가 하는이가 글쎄 누데기를 꿍져둔 우리 어매의 보따리를 매일 헤쳐봤다는거야. 뭘 훔치지 않나 해서였겠지.
참다못해 우리 어매는 몰래 바늘 몇개를 보따리속에 세워두었다지 않나. 그것두 모르구 또 보따리를 풀어보던 큰마님은 그만 손가락을 되게 찔리고 기겁을 했다지 뭐야, 호호.》
《호호… 잘코사니.》
호미동이네는 깨고소롬해서 웃었다.
《근데 앙앙불락해서 기회만 노리던 리씨는 어느날 옥지환인가 뭔가 하는 귀물이 없어진걸 우리 어매가 훔쳤다고 야단독장을 쳤다누만. 우리 어매가 아무리 발명을 해도 리씨는 한사코 토설하라고 곡달을 시키는데 머리털을 쥐여뽑고 송곳으로 찌르고 마지막엔 불에 달군 부지깽이로 단근질까지 했다누만. 너무도 분하고 원통해서 우리 어매는 눈물도 안나오더라지 않나. 그랬더니 이번엔 빌지 않는다고, 울지 않는다고 더 모질게 시달구더라는거야. 한데 글쎄 그 옥지환이 최씨라고 하는 그집 작은댁한테서 나질줄이야 어찌 알았겠나.》
《예, 드러운 년들… 그래서요?》
호미동이네는 해반주그레한 얼굴에 강개한 빛을 띠우며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래서 사단이 끝나는가 했는데 웬걸, 그 사무러운 리씨는 기어이 울어야 그만두겠다는걸세. 이런 속상한 일이 또 어데 있겠나.
그것들은 우리 천한 사람들의 웃음도 미워하는 족속들이니 늘 울어야 직성이 풀리는게지. 그래 우리 어매는 오냐, 내 죽어두 울지 않으마 하고 속으로 강심을 먹었다는거야. 그러니 판이 점점 커질수밖에. 나중엔 그 집주인 량반이란 작자까지 팔을 부르걷고 나섰는데 이렇게 지독하고 도고한 종년은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면서 매맞은 얼로 기신못하는 우리 어매를 깊은 산중의 눈구뎅이에 내다버렸다지. 네가 범한테 물려가도 울지 않는가 어디 보자면서. 그래두 우리 어매는 울지 않았다는거야. 아니, 저세상에 갈 때까지 난 한번두 우리 어매의 얼굴에서 눈물을 보지 못했네.》
범잔녀의 얼굴에는 추연한 기색이 어리였다. 모두 묵묵히 일손들만 놀렸다.
이윽하여 호미동이네가 그런데 범잔녀란 이름은 어떻게 생긴거냐고 다시 일깨워주었다.
《참, 그 말 하쟀댔지.… 그뒤 한해가 지나서 우리 어매가 다시 마을에 나타나지 않았겠나. 배가 남산만해서말이지. 마을에선 우리 어매가 범과 자서 아이를 뱄다고 수군거렸는데 아닐세라 이내 가시나를 하나 낳았지. 그 가시나가 바루 날세. 그래서 내 이름이 범잔녀로 된거야. 흐흐.》
《호호… 온, 성님은 거짓말두 그럴사하게 하우. 배가죽 늘어나겠네.》
호미동이네가 입을 싸쥐고 웃었다.
《와? 중말이야. 아, 옛적 고망년에 태백산 박달나무밑에서 태여나 우리 나라를 세우셨다는 단군이란이두 곰의 소생이라구 하잖나?》
《성님은 식자두 많수다.》
《식자는 무슨 식자, 실상인즉은 말이지…》
범잔녀는 의미있는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고나서 목소리를 죽여 수군거렸다.
《그때 우리 어매가 산속에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초적이였다누먼. 그 사람덕분에 살아났다는거야. 그가 우리 아배였는지 모르지.》
《그러니 성님은 가친두 모르시우?》
《몰라.》
호미동이네는 혀를 차고나서 저도 사위를 둘러보더니 음성을 죽여 말했다.
《참, 지금두 저 계룡산속에 초적이 있다는 말 들으셨수?》
《쉬―》
범잔녀가 얼른 그의 말을 막았다.
《우리한테야 와 초적이겠누. 의적이지.》
《하긴
《근데 우리 상놈기집들은 다 이름이 있는데 와 량반댁마님들은 이름이 없수, 그저 김씨, 리씨 하잖습디까?》
범잔녀가 잠시 대답을 고르는데 이제껏 느슨한 웃음을 띄운채 잠자코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누리나가 입을 열었다.
《거야 우리 상사람집나인들은 일시킬려니 이름을 지어부를수밖에 없지만 량반댁에서야 어디 그런가. 즘생을 봐두 부리는 짐승은 누렁이요 점백이요 하지만 우리속에서 놀고먹는 돼지한테야 이름붙일 까닭이 없지 않나.》
《거 동세가 식잘세. 참, 그래. 그것들은 밤자리에만 소용닿는 물건짝이니께니 흐흐.》
범잔녀의 말에 지순한 호미동이네는 꿈보다 해몽이 그럴듯하다고 또 입을 싸쥐였다.
《일에는 소리가 날개라더니 어느새 해가 저렇게 올랐다.》
범잔녀가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중천에 높다랗게 떠오른 해는 따스한 가을볕을 아낌없이 뿌려주고있었다. 새벽부터 껑충거리며 뛰여다니던 복슬개도 지쳐버렸는지 토방밑에 쭈그리고앉아 느침을 흘리며 풀그릇만 탐욕스레 지켜보고있었다. 고비는 재빨리 도투마리를 감고는 소나무의 잔뿌리로 만든 풀솔로 베실에 풀을 먹여나갔다.
풀이 마르면서 베실은 거문고줄처럼 팽팽하게 메워졌다. 그는 이미 다른 녀인들보다 배나 일감을 축냈다. 그는 시간가는줄도, 피로도 모르고 일했다. 그는 온넋을 일에 쏟아붓고있었다. 젊고 건강하고 탄력있는 그의 육체는 로동의 희열과 쾌감을 느끼였다.
《오늘두 고비가 상등을 할가부다.》
고비의 일솜씨를 황홀하게 바라보던 범잔녀가 다시금 감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