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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회


제4장 한가위날

1


저녁어둠이 깃을 편 버드내가에서 모닥불이 타오르고있었다. 빨래를 삶느라고 돌우에 건 가마밑에 지핀 불이다. 불빛은 주변을 밝히면서 강물을 빨간 빛갈로 물들여놓았다. 강웃녘에서는 밤고기잡이하는 조무래기들이 광솔불을 켜들고 쭐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팔월 한가위를 며칠 앞둔 밤이여서 강녘에는 빨래하러 나온 녀인들이 많았다. 궁핍한 살림속에서도 기운 옷일망정 깨끗이 빨아입는것이 이 나라 녀인들의 미덕이였다. 하기에 고려를 다녀간 서긍이라는 송나라의 한 사신도 고려사람들은 정결한것을 좋아하여 목욕을 자주하며 옷을 깨끗이 빨아입고 다닌다고 감탄하였다.

곰바지런한 고비는 망이나 누리나의 옷에 곤때라도 묻을세라 빨래터로 자주 나오기에 늘 빨래감이 적었다. 그런데 오늘은 여느때와달리 빨래감이 많았다. 한가위날에 성례를 하려니 이것저것 손질할것이 많았던것이다.

물이 끓기 시작한 가마안에 삶을 옷가지를 하나하나 넣던 고비는 망쇠의 커다란 베등거리가 손에 쳐들리자 흠칠 손길을 떨구었다. 까닭없이 가슴조차 두근거렸다.

그는 곁에 있는 을님이를 살짝 훔쳐보았다.

을님이는 말없이 불을 지피고있었다.

(내가 왜 이럴가. 늘 내 손으로 빨던 옷가지를 가지구.)

고비는 제풀에 피식 웃었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저로서도 알수 없는 기쁘면서도 두렵고 무섭기도 한 야릇한 심경에서 헤여날수 없었다.

망이오빠가 달령성이란 량반을 만나러 갔다온 후로 망쇠도 웬일인지 통 말이 없었다. 원래 말수가 적은 편이지만 요즘은 별스레 더 입이 무거워졌다.

말없는 사람들앞에서 느끼기마련인 그런 초조감에 잠긴 고비는 그가 더 어렵게만 여겨졌다. 그리고 자기가 이 집을 떠나 망쇠의 안해가 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두렵기만 했다.

(안사람이 뭐 별게람. 이전처럼 아니 이전보다 더 정성껏 오빠로 섬기면 될테지.…)

이렇게 단정하고보니 아닌게아니라 어려울것도 두려울것도 없을것 같았다.

《엑, 따가.》

생각에 잠겨 가마에서 빨래를 건지던 고비는 얼른 귀불을 만지며 호들갑을 떨었다. 불빛을 받은 그의 얼굴은 잘 익은 꽈리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꼬챙이로 흰김이 물씬 피여오르는 빨래를 건져내여 차거운 강물에 담그었다. 물속에서 한동안 빨래를 헹구던 그는 점도록 말이 없는 을님이쪽을 돌아보았다.

《언니, 빨래가 눌지 않겠수?》

《일없어.》

무릎을 휩싸고앉아 돌멩이우에 건 빨래가마에 너겁쪼각을 지피고있던 을님은 고개를 기울어뜨리고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온몸이 붉게 물든, 애수가 어린듯한 얼굴이며 어깨를 나슨하게 떨구고앉은 그의 자태는 비천도(하늘로 날아가는 선녀를 그린 불교그림)의 미인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왔다.

고비는 인물곱고 마음씨 착한 을님이에게 홀딱 반해있었다. 그래서 오늘도 밤빨래를 함께 하자고 여기로 이끌고나왔다. 하기는 자기의 혼례문제를 이야기해야겠다는 사정도 있고 해서.

《언니.》

《응?》

을님은 긴 살눈섭을 살풋이 쳐들었다.

《언닌 어쩜 그리 곱수.》

《이앤…》

북쪽으로 얼굴을 돌린 을님은 눈을 곱게 흘겼다.

《난 막 시샘이 나는걸.》

고비는 귀엽게 입을 비쭉했다.

《난 네가 되려 부럽더라.》

《아유―코막히네.》

《정말.》

《이 가무잡잡한 상판에 오목눈이 부러워?》

《오목눈에 복이 깃든다더라.》

《피―》

《얼굴이야 아무런들 너처럼 늘 밝은 마음을 지니면 얼마나 좋겠니.》

《그래두 얼굴은 아녀자의 목숨이라지 않우.》

《거야 량반댁 궐녀들이나 그럴테지.》

《어쨌든 나두 한번 언니같이 고와봤음 좋겠네.》

고비는 늙은이처럼 시름겹게 중얼거렸다. 고비의 그답지 않은 말투에 을님의 입가엔 절로 웃음발이 피였다.

《호호, 그러잖아 고운데 누구한테 더 곱게 뵈려구?》

《누구한테긴…》

《고비야, 너 참 시집간다지?》

《어마나, 누가 그래?》

고비는 눈을 크게 뜨며 을님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벌써 알고있었구나. 그런걸…)

말하지 않을수도 없고 말하자니 쑥스러워 바재이던것을 그가 먼저 꺼내놓으니 더 당황해지는 고비였다. 한동안이 지난 후 고비는 가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언니, 난 어떡해?…》

《애두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참 잘됐다. 다들 좋아하더구나.》

을님은 정겨운 눈매로 고비를 마주보며 말했다.

어둠이 덮인 고즈넉한 강녘에는 서로끔 생각에 잠긴 두 처녀의 빨래방치질소리만 울렸다.

기쁨이 찰랑이는 고비의 마음처럼 창창 울리는 그의 방치질소리는 빠르고도 되알졌고 근심이 자오록한 을님이는 방치질소리마저 느리고 시진했다.

을님이의 눈앞에는 망이의 모습이 커다랗게 밟혀왔다. 사내다운 넓은 가슴이, 정기로 빛나는 검은 눈이… 그 대쪽같이 굳고 결바른 마음, 그 후더운 인정미, 그것이 을님에게는 좋았다.

그러나 을님은 어머니의 말도 거역할수가 없었다. 아니, 어머니의 말을 좇아서만이 아니였다.

그의 가슴속에는 그로서도 어쩔수 없는 고민이 있었다.

물론 그도 망이가 이미 장가를 갔던 사람이란것을 알고있었다. 그리고 그의 처자식이 여러해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것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숫총각도 많은데 하필 궁상스럽게 홀아비를 마음에 두고있다고 자기를 나무라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어머니가 고개를 흔드는 리유중의 하나도 그것이다. 그러나 을님은 오래전에 죽은 처자식을 두고두고 잊지 못해하는 망이의 바로 그 마음이 돋보였다. 도리여 그 갸륵한 마음을, 그 멍든 가슴을 자기의 온정으로 부드럽게 위무해주고도싶었다. 그는 자기도 과년한 처녀의 처지에서 망이가 홀아비라는 허물을 탓하고싶지는 않았다. 보다는 불우한 자기 처지, 량반들의 눈을 피하여 천민부락에 숨어살면서도 천민과는 짝을 무을수 없는 자신의 기막힌 처지가 한스러웠다.

나라법에 천민은 량민과 혼사할수 없다고 엄하게 금하고있어 만약 이를 어길 때에는 큰 벌을 받는다고 하니 자기는 물론 장차 망이에게 무슨 변이 생길지 어찌 알겠는가. 애달픈 생각은 이뿐이 아니였다. 자신의 남다른 처지를 깊이 자각하게 된 이마즘에 와서 을님은 생각이 많아졌다. 설사 관가몰래 망이와 가정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그들사이에 태여날 자식들도 불피코 자신들과 같은 불우한 길을 걸어가게 될것인데 자기들이 걸어온 그 지긋지긋한 인생을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준다는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였다. 사람으로 태여나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 지겹고 눈물겨운 운명의 멍에를 어찌 자식들의 어깨에까지 짊어지을수 있으랴. 복을 받지 못할 인생은 태여나지 않음만 못한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한생을 독신으로 사는것이 낫지 않을가.

망이를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그와 한생을 같이할수 없는 이 모순된 현실속에서 그는 번민하였다.

《언니.》

고비의 맑은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나아…》

《… …》

《나아… 시집가문 잘살것 같수?》

고비가 문득 고개도 돌리지 않은채 수집게, 그러나 장한듯 말했다.

사랑에 취하면 장님이 되고마는가. 뇌심어린 을님이의 얼굴을 보았더라면 그리고 북받치는 오열을 삼키느라 감쳐문 파들파들 떨리는 그의 입술을 보았더라면 고비도 차마 이런 퇴매한 소리는 하지 못했을것이다. 하지만 봄날의 높은 하늘에서 우짖는 노고지리처럼 밝고 맑은 기쁨의 종소리가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울리고 보라빛 아침노을처럼 황홀한 공상의 채운이 눈앞을 가려버린 고비는 그 무엇을 더 보고 듣고 느낄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것이다. 을님이가 생활을 심각하게 대하는 처녀라면 고비는 보다 단순하게 직선적으로 대하는 처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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