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회


제3장 장마비가 그친 뒤

8


《쮸리, 쮸리, 쮸쥬리―》

산세험한 골짜기가 많기로 소문난 계룡산속으로 들어서자 흥도리가 새소리를 흉내냈다. 그 소리가 솔새울음소리와 너무도 방불해서 망이도 은연중 피로한 낯에 웃음을 담았다.

철이른 단풍이 빨갛게 불타고있는 수림속은 스며든 해빛마저 물감들인것처럼 불그레해졌다. 커다란 바위들이 엇쌓인 계곡의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가 소연하게 울렸다.

계룡산은 공주일대에서 제일 높은 산이요, 아름답기로 소문난 명산이였다.

명학소에서 서쪽으로 30리, 공주에서는 동남으로 40리 되는 곳에 계룡산이 우뚝 솟아있는데 이 산을 둘러싼 아근의 땅들은 모두 기름지고 토산물이 풍성한데다 물이 맑아서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고장으로 일러왔다. 그중에서도 계룡산의 동쪽에 자리잡고있는 유성과 서쪽기슭의 경천, 벌방의 리인이 으뜸으로 꼽혔다.

이고장의 부유한 사람들은 무더운 삼복철에는 피서지로, 봄이나 가을에는 유람지로 그리고 눈덮인 겨울에는 사냥터로 계룡산을 찾아오군 했다.

산세가 웅장한 계룡산은 련달은 네 봉우리뿐아니라 사방 수십리에 련련히 뻗은 지맥이 또한 많은데 남쪽지맥의 아름다움이나 산장산도 다 절승이였다. 서쪽지맥은 판치에서 끊겼다가 다시 일어나 바로 공주앞산인 월성산이 되였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도 수려했지만 골안을 진동하는 폭포소리는 가슴을 풀어헤치게 장쾌했다.

하지만 배부른 량반토호들에게는 금수강산일지라도 배곯는 백성들에겐 적막강산일따름이였다.

계곡의 바위돌을 겅정겅정 건너뛰던 흥도리가 물에 씻기고 해볕에 바래여 허옇게 색이 변한 너럭바위우에 올라섰다.

《내가 무슨 소리를 내나 알아보슈.》

흥도리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망이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흥도리란 총각이 어찌 재미있는 친군지 몇백리를 함께 가도 피로할것 같지 않았다. 그는 반나절사이에 벌써 흥도리한테 친동기같은 정을 품게 되였다.

흥도리는 계곡을 따라 뻗어올라간 오솔길로 접어들며 손을 입에 가져갔다.

《꼭, 꼭, 꼭.》

《되새.》

《우후― 우후―》

《칡부엉이일세.》

뒤를 흘끔 돌아보고난 흥도리는 다시 입안에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끼루 끼루 끼끼루― 삐이 이루 끼꼬 삐요루―》

《쇠찌르레기, 그렇지?》

대꾸없이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선 흥도리의 얼굴에는 무중 정색한 표정이 어리였다.

《게 좀 섰수.》

느닷없이 불퉁그러진 그를 보고 망이도 발길을 멈추었다.

《왜 그러나?》

《산속내를 그렇게 잘 아니 이제부턴 눈을 처매고 가야 하겠수.》

롱담으로 여겼는데 흥도리는 참말로 주머니에서 검은 천오리를 꺼내드는것이였다.

《아니, 이 사람. 알아맞췄으면 상을 줘야지 되려 벌줄셈이로구먼.》

《그래야 하우.》

흥도리는 두말 말라고 잡아떼고나서 검은천으로 망이의 눈을 감쌌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그의 두손목까지 오라줄로 묶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짓인가?》

망이는 실없는 장난끝에 이런 봉변을 당하는것이 우습기도 하고 민망스럽기도 했으나 두고보자는 심산으로 순종하고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어데까지 가는가고 묻는 말에 흥도리는 잠자코 따라오기만 하라는 단마디 대답뿐이였다.

그런즉 지금도 길라잡이의 말을 듣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오라줄에 묶여 끌려가는 죄인같은 처지가 되여버렸다.

《어쿠―》

앞을 못보고 끌려가던 망이는 종내 나무뿌리에 걸채여 앞으로 넘어졌다.

흥도리가 그를 거들어 일으켜주었다.

《이 사람, 이건 롱치군 좀 과하군 그래.》

골이 난 망이는 어처구니없어 한마디 푸념을 했다.

《조심히 걸으시우.》

흥도리의 말은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망이는 허거프게 웃고말았다. 덩지 큰 자기가 조그만 총각한테 멋모르고 끌려가는것이 어쩐지 우둔한 곰이 깜찍한 여우한테 홀렸다는 옛말과 흡사하다고 생각되였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아무튼 내친 걸음이니 요지경속이라도 가볼판이였다.

그들은 내내 말없이 걸었다.

산말기에 올라섰는지 불현듯 솨 하고 솔바람이 불어왔다. 우중충한 솔숲이 한숨같은 소리를 내며 설레였다.

겨드랑이며 등골에까지 축축히 땀이 배였던 망이는 심신이 상쾌하여 가슴깊이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흥도리는 힘겨웠던지 좀 쉬여가자면서 진대통우에 망이를 앉혀주었다.

이때였다.

《사람… 살리우!―》

다급한 비명소리가 솔바람에 실려왔다. 뒤미처 들리는 쇠가 맞부딪치는 아츠러운 소리…

망이와 흥도리는 진대통우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살기띤 부르짖음이며 귀따가운 쇠소리로 미루어보아 깊은 산중에서 심상찮은 일이 생긴것이 분명했다.

《여기 가만히 계시우.》

숨죽인 소리로 당부한 흥도리가 어디론가 장달음을 놓는 소리가 들렸다. 눈가리운것을 풀어놓고 가라고 미처 소리칠새도 없었다. 망이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선자리에서 발을 옮겨짚었다. 누군가 무인지경에서 경난을 당하고있을텐데 강건너 불보듯 할수 없는 망이였다.

그는 욱 힘을 주며 손목을 비틀었다. 어떻게나 단단히 옭아맸는지 도무지 꿈쩍을 않는다. 발밑을 더듬질해보았다. 마침 모서리가 우죽비죽한 바위가 발끝에 마쳤다. 그는 얼른 바위모서리에 대고 오라줄을 세차게 비볐다. 그런 후 다시 손목에 힘을 주었다. 드디여 삼실로 꼰 오라줄이 툭 끊어지며 손목이 풀렸다.

그는 눈을 감싼 헝겊오리마저 풀어던졌다. 검푸른 솔밭이 들어찬 마우령고개말기에서 그 기분나쁜 소리가 울렸다.

망이는 그쪽을 바라보며 성급히 걸음을 옮겼다.

공주에서 유성촌으로 통하는 외통길인 마우령고개는 달구지도 다닐수 있게 제법 넓은데다가 다져질대로 다져져서 돌바닥처럼 탄탄했다. 어깨숨을 쉬며 고개마루에 올라선 망이는 우뚝 멈춰섰다.

저쯤 아래공지에서 여러 사람이 한데 엉켜돌아가고있었던것이다.

관복도 보이고 베옷도 보였으며 말탄 사람들도 여러명이였다.

《이놈, 상기 칼을 놓지 못하겠느냐!》

농군차림에 머리에는 눈만 내놓은 검은 두건을 쓴 사람이 말우에서 지르는 소리였다. 그와 칼을 겨룬 관복입은 사람 역시 만만치 않게 호통쳤다.

《이 도적놈! 내 칼을 받아라!》

섬광같은 빛을 번쩍이며 맞부딪치는 장검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길가던 량반행차가 초적패에 걸려든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싸움은 말을 탄 두사람의 승부다루기로 변하고말았는지 초적패와 관복쟁이들은 공지의 량켠에 갈라선채 자기 우두머리들의 칼부림을 아니아니한 마음으로 지켜볼뿐이였다.

초적의 두령은 흑두건을 쓰고있어 얼굴모색이며 나이를 대중할수 없어도 줄땀을 흘리고있는 량반은 보매 무척 젊은 사람이였다. 그는 머리에 유각복두(뿔달린 관모)를 쓰고 자색공복을 입었는데 첫눈에 벌써 품위있는 무관이란것이 알렸다. 그들은 여러합 겨룬 모양같았으나 좀체로 끝이 날상싶지 않았다.

둘다 칼 쓰는 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말발통에 휘뿌려진 먼지가 자우룩한 속에서 대가리를 쳐든 말들의 요란스런 울음소리와 섬찟섬찟한 쇠소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망이는 눈길을 돌려 흥도리를 찾아보았다. 검정베옷차림이 유표한 그는 인차 눈에 띄였다. 관군쪽도 아니요, 초적쪽도 아닌 어중간에 서서 흥도리는 한손을 휘저으며 열심히 칼싸움을 응원하고있는데 그가 왼심을 쓰는것이 량반인지 아니면 초적인지 알수 없었다.

돌연 유각복두를 쓴 량반이 말머리를 돌려 고개아래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노음― 섰거라!》

초적의 두령도 고함을 지르며 재빨리 량반을 다쫓아갔다. 그는 장바를 휙 뿌려던졌다. 그 줄이 팽팽히 에워지더니 량반이 말등에서 건공잡이로 땅에 나동그라져 몇고패 굴었다. 뒤미처 달려온 초적들이 버드럭거리는 량반을 오라줄로 묶어놓았다.

《일어서라!》

말을 탄 초적두령이 올가미줄을 던지며 소리쳤다.

량반이 사로잡히는것을 본 그의 구종별배들이 슬금슬금 뒤걸음질치더니 급기야 사방으로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짐을 벗어던지며 망이가 서있는 고개쪽으로 황급히 뛰여오던 나이지숙한 사람이 망이를 보더니 급히 걸음을 멈추며 얼굴빛이 사색이 되여 부르짖었다.

《여보시우, 사람 좀 살려주시우. 저 흉악한 도적놈들이…》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그의 눈빛에는 힘꼴이나 씀직하게 체대가 거쿨진 망이에 대한 기대가 한껏 어려있었다.

망이는 오라줄에 묶이여 씨근거리는 젊은 량반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어쩐지 낯이 익어보였다.

시골에서는 좀체로 볼수 없는 량반의 요란스런 차림새가 더 인상이 깊었다. 그러자 문뜩 장마가 시작되던 날 바람세찬 버드내가에서 관군놈들을 쫓아버리고 을님이네 일가를 구원해준 바로 그 량반이라는 생각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저 량반이 아니였다면 을님이네 일가의 생사가 어찌될번 했는가. 그런데 이제야 그 생각이 떠오르다니… 은혜는 은혜로 갚으랬다고 을님이네의 은인이라고도 할수 있는 저 량반이 초적들한테 봉변을 당하는것을 보고도 가만 있어서야 사람이 아니지…

오라줄에 묶이운 량반이 갑자르며 일어서는것을 보고 망이는 그들께로 걸어갔다.

《웬놈이야?》

박달나무몽둥이를 든 초적 하나가 망이를 막아서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랬어도 망이는 일부러스럽게 눈을 부라리는 그한테로 마주걸어갔다.

《서지 못할테냐, 이놈!》

초적은 굵고 단단한 박달나무몽둥이를 불쑥 내밀었다.

초적의 박달나무몽둥이에 느닷없이 명치끝을 찔리운 망이는 갑자기 숨이 꺽 막히였다. 그는 결김에 몽둥이를 콱 잡아챘다. 그바람에 초적은 몽둥이를 놓치고 앞으로 쭉 뻗으며 넘어졌다.

《저놈 봐라!》

이 광경을 띄여본 여라문명의 초적들이 창이며 칼이며 몽둥이를 꼬나들고 망이에게로 다가왔다.

저도 어쩔수없이 싸움판에 휘말려들게 된 망이는 온몸의 긴장을 느끼며 육박해오는 초적들을 쭉 일별해보았다. 그들의 험상궂은 낯에서 살기를 느낀 망이는 어차피 대결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곁에 있는 아름굵은 소나무쪽으로 몇걸음 물러나 잔등을 의지하고 앞을 주시하였다. 망이처럼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초적 하나가 기승차게 달려오며 창을 내찔렀다. 망이는 재빠르게 몸을 피하며 몽둥이로 그의 잔등을 후려쳤다.

《어쿠―》

구레나룻의 초적은 소나무줄기에 창을 박은채 옆으로 푹 꼬꾸라졌다.

그러자 초적들이 욱하고 일시에 망이에게 접어들었다. 망이는 그들의 창이며 칼을 맞받아 굵직한 박달나무몽둥이를 세차게 휘둘렀다. 망이의 힘찬 타격에 초적들의 창대가 부러져나가고 칼이 휘뿌려졌다. 수적인 우세를 믿고 망이에게 달려들던 초적들의 눈에는 어느덧 겁기가 어렸다. 그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망이가 장사도 이만저만한 힘장사가 아니라는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던것이다.

《다들 비켜라!―》

수하의 초적들이 겁에 질려 주춤거리는것을 본 초적의 두령이 망이앞으로 말을 몰아왔다.

《이놈, 너는 웬놈인데 우리 일에 훼방이냐?》

말을 타고 망이앞에 떡 버티고선 초적의 두령은 칼끝을 쳐들며 호통을 쳤다.

《저 량반만 놓아주면 나도 순순히 물러가겠다.》

망이도 몽둥이를 지팽이처럼 꾹 짚고서서 위엄있게 대꾸했다.

《허허.…》

흑두건속에서 너털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때 다급히 달려온 흥도리가 여기에 나타난 망이를 보고 당황한 소리로 두덜거리며 초적의 두령에게 무어라고 수군거렸다. 이어 망이곁으로 다가온 흥도리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을 탄 사람이 바로 달령성두령이라고 귀띔하여주었다.

《뭐?…》

망이는 아연하여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내가 달령성이외다.》

호걸스럽게 말한 말우의 사람이 훌쩍 땅에 뛰여내리며 흑두건을 벗었다.

름름한 키꼴, 준수한 얼굴… 어머니가 말해주던, 자기 집에 왔던 그 량반의 모색과 비슷했다.

그런데?…

《왜, 놀랍소? 난 이렇게 초적의 두령노릇을 하는 놈이외다. 허허…》

그는 망이에게 불미한 장면을 보여준것이 게면쩍은듯 짓적은 웃음을 띠웠다.

《허.》

망이의 입에서는 놀람도 아니고 감탄도 아닌 그런 허거픈 소리가 새여나왔다. 너무도 뜻밖의 사실을 목격하고보니 망이도 무어라 말할수 없었다. 그처럼 으리으리하게 차리고 자기 집에 왔다던 량반이 결국 이 초적의 두령이였단 말인가?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듯 달령성은 쾌활하게 웃었다.

《하하… 량반놈들만 속는줄 알았더니 이녁도 무던히 고지식하구려.》

다시한번 껄껄 웃고난 달령성은 망이의 손을 잡아끌어 풀밭에 앉히며 자기도 그곁에 두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소?》

망이는 말없이 저고리를 들치고 허리에 띠고온 전대를 풀어내렸다.

《아니, 이게 내가 드린 활구(은병) 아니요? 왜 도루 가져왔소?》

《암만 생각해두 내가 받을수 없는 돈같아서…》

망이의 얼굴에서 진중한 표정을 읽은 달령성은 저도 정색해졌다.

《왜 초적의 돈이라서 꺼리는게 아니요?》

《그런게 아니우.》

《그럼?》

《남의 밥 먹기보다 제 죽 먹기가 마음편한 법이 아니웨까?》

《정말 고지식한 성미시구려.》

달령성의 얼굴에는 진정 감동의 파문이 일어났다.

남의 손에 쥐여있는 떡까지도 빼앗지 못해 아득바득하는 각박한 세상에 이런 사람이 아직 있다는것이 그에게는 무어라 말할수 없이 고맙고 기뻤던 모양이다.

성현군자라고 거들먹거리는 숱한 사람들을 보아왔지만 망이처럼 강직하고 정직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 과연 하나나 있었던가. 망이는 비록 토스레베옷을 걸쳤을망정 속에는 보석같은 심정을 지닌 참사람이였다. 옛 성현들도 재물의 부자가 되지 말고 마음의 부자가 되라고 했지만 망이야말로 성현이요, 군자라고 이를수 있는 사람이라고 달령성은 생각했다.

그는 감동어린 눈으로 망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외람된 물음이오나 어느해 태생이시오?》

《을축(1145년)생이외다.》

망이의 대답에 달령성은 몸가짐새를 바로가지더니

《나는 무전(1148년)생이니 게서 형님이시구려. 자, 동생의 절을 받으시우.》 하고 망이앞에 넙죽 엎드렸다.

망이는 바쁘게 맞절을 하면서 이 사람이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는 생각을 더욱 굳히였다. 그는 자기를 형님으로 괴여올리는 그의 태도에 당황하고 송구스럽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초적의 두령한테서 형님소리를 듣는다는것이 그닥 기분좋은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 망이는 고개를 쳐들고 면구스러운 어조로 띠염띠염 말했다.

《예로부터 10년지차는 부자지간이요, 5년지차는 형제지간이요, 3년지차는 붕우(친우)라 하였거늘 미거한 소인이 어찌 형님소리를 듣겠소.》

《지내 겸양한 말씀이오. 선성은 이미 들어왔지만 오늘에야 형님의 존안을 뵙게 되는구려. 형님같은분을 알게 되여 정말 기쁘오. 오늘밤은 여기서 나와 함께 회포나 나눔이 어떠하오?》

《말씀은 고맙소만…》

《하, 웬걸 또 사양이시오. 도적굴에서 밤을 새기가 께름해서 그러시는게로군.》

《무슨 그런 말씀…》

아닌게아니라 지금 망이의 머리속에는 착잡한 생각이 고패치고있었다. 초적들이란 어쨌든 떳떳치 못한 사람들로 여겨온 망이였다.

그는 량반행세하고다니는 이 달령성이란 사람도 그닥 탐탐치 않게 생각되였다. 어쩐지 속히운것 같은 까닭모를 분한 생각조차 일어났다. 죽는 날까지 근실하게 살아야 사람의 도리지 하필 할짓이 없어서 길목을 지켜 나그네의 보짐을 턴단 말인가.

그는 초적질하는 주제에 량반옷을 입고다니며 거짓량반행세하는 달령성의 그 점잖다던 태도가 다 위선으로 느껴졌다. 이자리에서 더 머물러있고싶지 않았다. 그는 빈 전대를 허리에 둘렀다.

《그예 떠나실 작정이요?》

《예.》

《참, 고집두…》

섭섭해서 중얼거리던 달령성의 눈굽에는 날카로운 빛이 서렸다.

《암만봐야 형님이 우리를 초적이라구 꺼리는 모양같은데 마음을 놓으시우. 도적이니 초적이니 하고 욕되게 부르는것은 량반놈들이 우릴 미워서 하는 소리고 우린 의적일지언정 결코 도적은 아니요.》

그의 얼굴에는 강개한 빛이 어리고 목소리는 흥분으로 높아졌다.

《여기 우리 애들이 백도 넘게 있지만 나나 저애들이 뭣때문에 산속에 숨어 이노릇을 하는지 아시오. 세상이 우리를 버렸기에 우리도 세상을 버린거요. 세상을 등진 우린 언제건 칠성판에 오를 목숨이지만 아무러면 뭐라오. 음지의 인생인걸.》

무엇인가 가슴에 마쳐오는 달령성의 말에 망이는 정색해졌다.

달령성은 건너편 산을 바라보며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땅속의 지렁이처럼 가늘고 길게 사느니 나무우의 매미처럼 짧더라도 맘껏 사는게 낫지. 형님, 그렇지 않소?》

말을 마친 달령성은 망이쪽에 얼굴을 돌렸다.

망이는 그의 찌르는듯한 눈길을 피했다. 사실 자기야말로 땅속의 지렁이나 다름없는 그늘속의 인생이 아닌가. 그는 처음 들어보는 달령성의 준절한 말에 공감을 느꼈다.

이때 사로잡힌 량반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짐승같은 도적놈들아, 량반을 릉욕하고 무사할줄 아느냐!》

망이는 량반쪽을 돌아보았다.

《놈이 꽤 염통이 크거든. 대낮에 우리 산속을 산책하다니…》

량반을 응시하며 달령성이 쓰겁게 내뱉더니 망이를 보고 말했다.

《저놈은 개경에서 여기 공주로 별공사의 직첩을 받고 내려온 백태란 놈인데 5품무관인 중랑장벼슬을 한다니 꽤 큰놈이 우리께 걸렸지요. 이놈이 오늘 산으로 온다는 기별을 받고 길목을 지키면서도 설마했는데 정말 나타나더란 말이요. 개경장안에서만 살던놈이니 시골맛을 몰랐던게지.》

달령성은 통쾌한듯 풀대를 꺾어 손바닥을 툭툭 때렸다.

망이는 영특해보이는 달령성의 눈을 마주보았다. 량반이 나타나리라는 기별을 미리 받고 길목을 지켰다는것을 보면 달령성의 눈과 귀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것 같았다. 역졸노릇하는 흥도리도 아마 그런 기찰군의 하나일게라는 짐작이 갔다.

《길목이나 지키는 좀도적놈! 비겁한 놈!》

량반이 다시 눈을 부라리였다. 그들의 말을 엿듣고있은 모양이였다. 그가 눈을 부라리는것은 오라줄에 묶였을망정 고관의 체모를 잃지 않으려는 속심일게라고 망이는 생각했다.

《요즘 세상이 왜 더 말세가 되여가는지 아우.》

달령성이 량반을 독살스럽게 쏘아보며 말을 계속했다.

《저 공복입고 칼찬 무신놈들이 조정을 가로타고앉아 권세를 부리기때문이우. 경인(1170)년에 상장군벼슬하던 정중부가 무신란을 일으켜 숱한 문관들의 목을 베고 임금마저 갈아치우고는 국정을 좌지우지하더니 재작년이후로는 시골의 하관말직까지 말짱 저희들, 불한당같은 놈들이 가로타고앉지 않았겠소. 붓을 든 문관이나 칼을 찬 무관이나 그놈이 그놈이지만 거지가 밥술이나 뜨게 되면 거지 밥 한술 안준다고 문관들한테 천시를 받던 무관들이 권세를 쥐더니 백성들한테 더 극악하게 군단 말이우다. 지금 문하시중이 되여 나라의 권세를 독차지한 정중부는 원래 해주에서 병졸노릇을 하던 천한 놈이였는데 한번 국권을 쥐더니 문관들보다 더 토색질을 하지 않겠소. 불법무도한 이놈은 백성의 집과 재물을 빼앗고 토지를 빼앗아 제 배만 불리우고있소이다.》

《병졸질하던 사람이 문하시중이 되였단 말이요?》

망이는 달령성의 말이 다 놀라왔지만 하졸이 고관대작이 되였다는 말은 더욱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놈이 어디 그 하나뿐인줄 아시우? 무신란에 칼부림으로 벼락출세한 리의민이란 놈은 원래 경주에서 소금장사하던 천한 사람의 자식이지요. 그 에미는 영일현의 옥령사라는 절간에서 종노릇을 했다던가. 그런데도 이놈은 뚝심 하나를 믿고 백성들한테 세상 못된짓을 다하지 않소.》

달령성은 방금 잡아놓은 량반이 리의민이기나 한듯이 사나운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망이는 머리가 복잡하여졌다. 달령성의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할지 어쩔지 그로서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던것이다. 보다는 무신란이요 뭐요 하는 이야기들이 땅을 파먹는 자기와는 관계없는 세상밖의 일처럼 여겨져 흥심이 없었다.

《저 량반을 어쩰셈이요?》

망이는 말머리를 돌렸다.

《저 별공사요?》

달령성은 시답잖게 되묻고나서 손에 쥐고있던 풀대를 툭 꺾어치웠다.

《그깐놈 없애고말지요.》

《그러니 죽이겠단 말이우?》

《살려줘야 백성들 등살이나 더 긁혔지 소용있소?》

《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구?…》

《복두를 썼으면 죄지 별게 죄나요?》

의혹에 찬 두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이때 젊은 량반이 느닷없이 간절한 소리로 그들을 불렀다.

《여보시오!》

망이와 달령성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젊은 량반은 착잡한 고뇌가 어린 눈빛으로 망이에게 구원을 청하고있었다.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공포와 절망과 애원으로 떨리는 그 눈빛을 보는 망이의 마음도 언짢고 괴로왔다. 그 눈빛은 언젠가 그가 보았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슬픔에 잠긴 눈빛과 비슷하였다.

《나는 아직 백성들에게 못된짓을 한적이 한번도 없소.》

젊은 량반은 울상이 되여 중얼거렸다.

《이놈, 거짓말말어라. 네놈이 못된짓 않고 어떻게 이런 품계에 게바라올랐겠느냐?》

달령성은 량반의 허리에 차고있는 은어를 가리키며 내쏘았다.

《정말이요. 나는 어머니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요. 지금 집에는 늙은 홀아버지와 나를 키운 유모가 내가 오기를 눈빠지게 기다리고있소. 우리 유모도 당신들같이 천민, 아니 상사람이요.》

생사의 기로에서 흥분하여 애달피 호소하는 젊은 량반의 눈에는 물기가 번들거렸다.

망이는 절망에 잠긴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량반을 놔주시구려.》

그는 을님이를 생각해서라도 젊은 량반을 꼭 살려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형님은 괜히 량반의 편역을 듭니다그려.》

달령성은 마뜩잖아하는 기색이였다.

《량반두 유만부동이겠지. 무턱대고 죽여서야 사람의 도리라구 할수 없지 않겠소?》

망이의 말소리는 낮았으나 질책이 스민 위엄이 풍겼다.

《형님은 부처같구려.》

달령성은 비양조로 뇌까렸다. 그리고나서 곁에 서있는 흥도리에게 량반의 오라줄을 풀어주라고 일렀다.

흥도리는 심히 불만스러운듯 망이한테 눈을 찔 흘겼다.

《어서 가지 못해!》

달령성은 자기 말에 쫓겨 내키지 않는 발길을 옮기는 흥도리를 바라보며 침통하게 말했다.

《저애 아비 막세만 해도, 요전날 형님집에 갔을 때 데리고갔던 말구종군하던 나배기가 있소. 그 사람이 간노루 풍악잡이를 하댔는데 량반놈들한테 몇마디 말대꾸를 했다고 혀를 잘리우지 않았겠소. 그래서 한다하는 소리군이던 그 사람이 졸지에 벙어리가 되였구려. 그러니 저런 놈한테 철천의 한을 품지 않겠소.》

망이는 놀란 나머지 뒤말을 잇지 못했다.

《나도 이노릇을 하고싶어 하는게 아니외다.》 하고 말한 달령성은 망이를 넌지시 건너다보며 물었다.

《형님, 내가 뭘 해먹던 놈같소?》

《글쎄요.… 점쟁이가 아닌담에야 알수 있나요.》

량반은 아닌게고 그렇다고 자기와 같은 농사군같아보이지도 않는 이 달령성이란 사람은 참말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망이는 알수 없었다.

《난 광대(배우)외다.》

《광대요?》

달령성의 뜻밖의 말에 망이는 놀란 소리로 물었다.

《마상재를 하던, 말하자면 말등에서 재주를 부려 밥을 벌어먹던 놈이외다.》

이제야 그의 정체가 리해되여 망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좀전에 량반과 말타고 싸울 때 달령성의 말타는 재주며 칼쓰는것이 비상하던것도 리해되였다.

《한데?…》

《어떻게 초적이 되였나 그 말이겠구려.》

달령성은 추연한 기색을 짓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리 광대들은 무리를 지어 사는데 내가 우리 광대패의 패두노릇을 했지요. 우리 패에는 재간있는 사람들두 많구 또 소리 잘하고 춤 잘 추는 예쁜 계집애들두 여럿이 있었소. 한곳에 붙박혀있어서는 벌이가 안되는고로 말등에 짐을 싣고 이고을 저고을로 떠돌아다니며 광대놀이를 해가지군 돈천이나 쌀되박 같은것을 받아 그날그날을 살았소. 그러니 손가락질인들 얼마나 받았구 수몬들 또 얼마나 당했겠소. 거지패라고 비웃고 지어 어떤 마을에선 풍기를 문란시킨다구 우릴 아예 동구밖에서 몰아내기도 했소. 그러던 우리가 몇해전에 관성현에 들렸을 때 마침 그곳 현감이란 놈이 제 생일잔치에 와서 놀아달라고 부르지 않겠소. 그래 우리는 좋은 벌이가 생겼다구 한달음에 달려갔구려. 현감이란 놈은 무신란때 칼부림을 잘한덕에 공을 세워 고을수령이 되여 내려온 놈인데 토색질을 어떻게나 극성스레 했는지 갑부도 이만저만한 갑부가 아닙디다그려. 우리는 후한 상금을 바라고 마상재도 놀고 소리도 하고 춤도 추면서 량반놈들의 흥을 돋구어주었지요. 하, 그런데 글쎄 잔뜩 취기가 오른 그 짐승같은 현감놈이 우리 광대패의 계집애들더러 벌거벗고 춤을 추라는것이 아니겠소. 그애들이 말을 듣지 않자 우악스런 관노들을 시켜 억지루 옷을 잡아벗기려드는구려. 계집애들은 사람살리라고 울고불고… 나는 더는 참을수 없어 점잖은 량반님네들이 이게 무슨짓인가고 막아나섰소. 그랬더니 량반놈들이 천한 광대들이 관장에게 항거를 한다고 관군까지 풀어 우릴 잡으려들기에 나도 칼을 뽑아들고 다른 애들도 아무 쟁기나 집어들고 그놈들과 한바탕 싸움을 벌렸구려. 결국 현감놈의 잔치놀이는 개판이 되고 우리도 중과부적으로 관군놈들의 오라줄에 묶이고말았소. 성이 독같이 오른 현감놈은 우리를 죽도록 때려 옥에 가두지 않겠소. 파수군놈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나를 아예 죽여버릴 심산이였소.》

말을 끊은 달령성은 감회어린 표정으로 솔바람부는 솔숲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래 어찌 되였소?》

그의 이야기에 어느덧 정신이 팔린 망이는 조급증에 사로잡혀 뒤말을 재촉했다.

달령성은 다시 입을 열었다.

《다행히 그때 놈들한테 잡히지 않은 한 애가 그날밤에 옥문을 바수고 우리를 건져주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 이렇게 형님과도 상면하지 못했을번 했소그려. 그냥 성을 빠져나오자니 어디 발이 떨어져야지요. 량반놈들한테 저간에 받은 모든 수모가 울기처럼 뻗쳐오른 나는 도루 동헌으로 들어가 잠에 곯아떨어진 현감놈을 그예 요정을 내고말았소. 그랬더니 다음날루 나를 잡으라는 방과 함께 내 용모파기가 고을마다 나붙는것이였소.

그래서 나는 집으로 가겠다는 애들을 돌려보내고 나머지 애들을 데리고 산으로 들어오고말았소. 이렇게 초적이 된거외다.》

달령성은 고개를 들고 젊은 량반이 사라진쪽을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내 지금껏 살며 봐도 량반놈치고 사람같은건 하나두 없었소. 아무튼 형님두 오늘을 후회할 날이 있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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