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회
제3장 장마비가 그친 뒤
7
망이가 역참마을에 다달았을 때는 이미 해가 높이 솟아오른 뒤였다. 한가위(추석)가 얼마 남지 않은 가을철이라 해도 아직 해볕은 쨋쨋하고 따가왔다.
개버들이 듬성듬성 서있는 개장변가에 자리잡은 역참마을은 웅기중기 모여앉은 여러채의 초가집들로 이루어져있었다. 나무 한그루 없는 허허벌판에 뻘건 흙이 드러나보이는 마을은 여간 한산하고 적적해보이지 않았다. 아마 굶주린 파발말들이 풀이 돋는 족족 뜯어먹는 모양이였다.
길다란 초가집(창문도 없는것이 마구간이 분명했다.)앞에서 어정거리는 검정베옷을 입은 역졸에게 흥도리란 총각이 있는가고 물으니 개장변가를 가리켜주었다.
자갈돌이 들여다보이는 맑은 내가에서는 역시 검정베옷을 입은 여라문명의 역졸들이 말들을 씻어주느라 복닥질하고있었다.
무릎노리까지 잠뱅이를 걷어올리고 또 웃동을 벗어붙인 흥도리는 스물안팎의 홍안의 총각이였다. 그는 검정댕기를 드린 길다란 머리채로 머리를 동진 수건속에 밀어넣고 누런 밤빛이 섞인 가라말과 장난질에 여념이 없었다. 말의 목덜미를 씻어주다가는 느닷없이 말코구멍에 물을 퍼넣기도 하였다. 그러면 가라말은 귀찮다는듯 앞발을 들었다놓으며 투레질을 하였다. 흥도리는 무르팍을 치며 깔깔거렸다.
망이는 부곡민인 자기와 다를바 없는 하치상놈인 저 역졸이 자기 집에 왔던 그 량반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의아쩍었다.
그가 달령성이란 량반을 아는가고 묻자 천진스럽던 흥도리의 얼굴색이 돌연 긴장해졌다. 흥도리는 재빨리 주위를 살펴보고나서 말없이 고개를 들어 방천쪽을 가리켰다. 말을 끌고 뭍으로 나온 흥도리는 천천히 검정적삼을 입고 또 짚신을 발에 꿰고나서 여전히 말없이 앞서걸었다.
망이는 그의 행동이 얼마나 천연스럽고 어른스러워보이는지 생판 다른 총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물가에서 퍼그나 떨어진 곳에 이르러서야 흥도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달령성이란 량반을 왜 찾으시우?》
흥도리는 망이의 얼굴을 응시하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네.》
어린 총각에게 자네투의 말이 나가는것을 이상스럽게 여기며 망이는 느슨하게 웃었다.
흥도리는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아저씨이름이 뭐유?》
그는 다시 물었다.
《내 이름?… 망일세.》
망이는 문초를 당하는듯싶어 시답잖게 대꾸했다. 그러자 흥도리는 얼굴의 긴장을 풀었다.
《망이?… 그러니 금비란분이시우?》
《그렇게도 부른다더군.》
《그렇게 부르다니요?》
흥도리는 처녀애들처럼 쌍까풀진 눈을 들어 구레나룻이 거밋한 거물스러운 망이를 다시한번 쳐다보고나서야 고분해졌다.
그는 눈을 째긋하고 해를 가늠해보았다.
《말탈줄 아시우?》
《허허… 난 깨끼부락사람일세.》
흥도리는 그럴상싶은듯 고개를 끄덕거리였다. 노비나 부곡민은 말을 타지 못하도록 금지되여있었던것이다.
역참으로 온 흥도리는 마구간쪽으로 말을 끌고갔다.
그는 때마침 마구간에서 키가 늘씬한 황부루를 끌고나오는 맨발에 더덕더덕 기운 검정베옷을 입은 늙수그레한 역졸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가 번이요?》
《죽을 놈은 돼지라더니 영 재수가 없다니께…》
늙은 역졸은 주름살이 쪼글쪼글한 낯을 찌프렸다.
《몇개요?》
《세갤세.》
그는 어깨에 걸멘 커다란 가죽주머니를 손으로 탁 쳤다. 여러개의 방울이 절라당거리며 소리를 냈다.
《줄땀깨나 흘리게 됐군요.》
《땀이나 빼면 고작이게. 매벌이는 벌써 맡아둔걸.…》
늙은 역졸은 쓰겁게 내뱉으며 말등에 기여올랐다. 그는 말궁둥이에 채찍을 안겼다. 황부루는 뽀얀 먼지를 말아올리며 네굽을 안고 내달렸다.
그를 측은하게 바래주던 흥도리는 다시 마구간쪽으로 시무룩해서 걸어갔다.
망이도 역참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알고있었다.
조정에서 지방에 내려보내는 공문서나 지방관아에서 조정에 올려보내는 공문서를 가죽주머니에 넣어 전달하는데 그 용건의 중요성은 바로 주머니에 달아맨 방울의 개수로 표시하였다. 즉 지금은 세개의 방울이였고 보통때에는 하나나 둘을 달았다.
이밖에도 역참은 지방파견관원이나 특수물자의 수송도 맡아보았다.
이를 위해 고려전국의 5도량계(고려시기 행정구획)에 걸쳐 22개의 도로에 525개의 역참을 두었는데 그 역할에 따라 여섯개의 등급을 나누어 그에 해당하는 역졸과 역마를 배치하였다.
교통량이 많은 제일 큰 역에는 75명의 역졸을 두었고 가장 작은 역에는 7명의 역졸을 잡아두었다. 이렇게 하여 개경의 첫 역참인 청교역에서 떠나면 이 역참에서 다음역참으로 이어달리는 식으로 나라의 곳곳에 전달되게 했던것이다.
마구간에 말을 들여다매놓고 나온 흥도리는 이번엔 절반은 기와를 이고 나머지 절반은 띠풀로 지붕을 이은 비교적 크고 깨끗한 집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망이는 역참마을을 둘러보았다.
건너편에 보이는 나무기둥을 버틴 다 찌그러져가는 초가집앞에서 파파 늙은 로파가 손자인듯싶은 아래도리를 벗은 사내애의 밑구멍을 꼬챙이로 후비고있었다. 애녀석은 아프다고 엉엉 소리내여 울었다. 아마도 맨 송기만 먹다보니 밑이 멘 모양이였다.
《이녀석아, 좀 참아라. 소나 말은 풀만 먹어도 잘 사는데 인총은 곡기를 못하면 이 모양이니 짐승보다두 못하지.…》
로파는 시름겨운 푸념을 늘어놓았다.
길이고 밭이고 마을은 온통 너저분히 깔린 말똥천지였다. 나무가 바른 고장이여서 땔감으로 쓰는 마른 말똥이 어느 집 부엌앞이나 무드기 쌓여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웃도리는 벗고 몽당치마만 걸친 일곱살쯤 났을 계집애가 동생인듯한 발가숭이 사내애의 손을 잡고 망이를 빤히 쳐다보고있었다. 자기 동네에서도 늘 보아오는 정상이지만 이곳의 살풍경은 새삼스럽게 가긍하고도 처량한 생각이 들게 했다.
한참만에 달려온 흥도리는 빙글거렸다.
《됐어요. 역참지기를 구슬리느라 에― 땀뺐군. 가만, 이젠 이애를 찾아야 요기감을 장만할텐데…》
흥도리는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꽃메― 꽃메―》
푸성귀를 담은 함지를 이고 내가에서 종종걸음쳐오던 애된 처녀애가 흥도리에게 눈을 흘겼다.
《수닭고기를 먹었나, 밤낮 꿱꿱.》
《닭고기야 웬걸. 대신 열무나 먹어볼가.》
흥도리는 흥감스럽게 이죽거리며 함지우에 손을 뻗쳤다.
《이앤 밉다니까…》
오달져보이는 처녀애는 흥도리의 손을 탁 뿌리쳤다. 했으나 숫기 좋은 흥도리는 어느새 집어냈는지 열무를 어적어적 씹으며 처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의 입에서는 처녀애를 골려주는상싶은 건드러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앞마을 물레방아는
사시장철 물살안고
뱅글뱅글 잘도 도는데
우리 집 서방님은
날 안고 돌줄 모르나
노랑머리에 파뿌리상투를
언제나 길러서 내 랑군 삼나
… …
흥도리의 흐물떡거리는 몸짓도 구경스러웠지만 목청이 또한 얼마나 청청하고 구성지게 들리는지 망이는 입이 절로 벌어졌다. 정말 명창이라도 이만저만한 명창이 아니였다.
얼마뒤 흥도리는 베보자기를 들고 벙글거리며 뛰여왔다.
《요기감도 생겼으니 이젠 일행천리합시다.》
벌거벗은 계집애와 사내애의 눈길이 베보자기에 가 박혔다. 입에 손가락을 물고.
《자네 그 손에 든게 뭔가?》
망이의 물음에 흥도리는 보자기를 쳐들며 벙싯했다.
《주먹밥.》
《그걸 나 한개 주게나.》
《아니, 아침을 굶으셨수?》
《글쎄.》
흥도리는 의아쩍어하며 보자기속에서 보리주먹밥 한덩어리를 꺼내 망이의 손에 놓아주었다.
망이는 그것을 두개로 쪼개여 눈초리가 기쁨으로 긴장해진 애들에게 반쪽씩 나누어주었다.
《쳇, 그런 적선이 소용있나요. 5도량계아이들이 다 굶고있는판에.》
심드렁하게 말하던 흥도리는 된장에 게발린 주먹밥을 어느새 삼켜버리고 다시금 눈이 매롱매롱해서 쳐다보고있는 애들에게 나머지 주먹밥을 다 털어주고나서 벌씬 웃었다. 그를 마주보며 망이도 소리없는 웃음을 띠웠다.
그들은 서로 친밀감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