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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회


제3장 장마비가 그친 뒤

6


앵두나무울타리에 날개를 처뜨리고 앉은 잠자리들이 가을의 따스한 볕을 쪼이고있을뿐 추녀낮은 을님이네 초가집은 고요하였다. 비록 한쪽으로 기울어진 허술한 초가집이여도 바람벽은 곱게 흙매질되여있었고 넓지 않은 뜨락도 정갈했다. 망이와 함께 망쇠도 몇번 이 집을 손질해주었지만 그사이 이 집주인들이 알심있게 꾸려 쓸모없던 빈집이 제법 아담해보였다.

망쇠가 사립을 열고 뜨락에 들어서니 가락맞은 다듬이방치질소리가 울려나왔다.

뚝딱 똑딱, 뚝딱 똑딱…

풀빨래를 스루고있을 을님이의 다듬이소리는 망쇠의 걸음을 주춤거리게 했다. 이런 일에는 짜장 로인들이 나서야지 자기처럼 젊은 녀석이 참여할것이 못된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라서였다. 장가전 총각이 중신할미노릇한다는것이 아무래도 주제넘은 낯간지러운짓같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소리없이 토방에 걸터앉았다.

느티나무우듬지에 올라앉았던 가을해는 어느덧 하늘중천에 걸렸다. 소슬한 바람에 펄럭펄럭 락엽이 날아떨어졌다.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바재이는데 방안에서 을님이 어머니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얘, 건뉘집 빨래냐?》

방치소리가 작아지더니 을님의 음성이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촌정네것이와요.》

《… …》

다듬이방치질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뚝딱 똑딱…

동안 뜬 침묵이 흐르더니 무거운 한숨소리에 뒤이어 녀인의 말소리가 다시 들렸다.

《참, 엊그제 아래마을에서 범잔녀라구 이름두 별나게 부르는 녀인이 왔더구나. 이말저말 하던 끝에 슬쩍 네 혼사말을 물어보지 않겠니.…》

망쇠는 뜻밖에도 을님의 혼사말이 튀여나오는 바람에 바싹 호기심이 동해 방안에 귀를 강구었다.

《상기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그런다구 했더니 그 녀인은 글쎄 앞부락의 고비오라비 망이, 그 사람을 비쳐보더구나.》

망쇠는 이것 봐라,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일이 묘하게 들어맞는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면서 자기 먼저 선손을 쓴 범잔녀가 매우 장해보였다. 아무렴, 망이형님을 위하려는 사람이 어디 나 하나뿐이라구…

을님의 방치질소리도 가늘어졌다.

《그 집 당부를 받아서 온게 아니라면서 자기가 가만 보니 우리 두 집이 아주 합당한것 같다구 하더구나. 그러군 망이행수를 혀가 닳도록 칭찬하지 않겠니. 아무렴 그가 말 안한들 그 사람 인끔이야 우리가 뭐 몰라서. 참, 드물게 용한 사람이지. 경우 밝고 대바르고 인정깊고… 그리구 인물두 사내싸게 좀 잘 생겼느냐. 한데 내 보건대두 그 사람이 너한테 그냥 무심한것 같질 않더라. 네 보기에는 어떻더냐?》

《… …》

을님은 아무 대척도 하지 않았다. 방치질소리도 멎었다.

《이성지합은 만복지원(이성의 결합이 모든 행복의 근원)이라구 혼사란 참으루 인생의 막중한 대사이니라. 그러니 과년했다 해서 절대 덤빌 일이 아니다. 량민인 우리 집안이 억울하게 천민부락에 와서 숨어살게 되고보니 이즘은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수 없구나. 나라법에 천민부락인 부곡에 사는 사람들은 죄인이나 노비와 같은 취급을 당하게 되여있니라. 죄를 지은 사람은 부곡으로 쫓아보내지 않던. 그러니 죄인이나 노비와 한가지루 부곡민은 공부두 할수 없구, 과거두 볼수 없구, 중두 될수 없구, 병정두 될수 없다구 했느니라. 그리구 량민들과 구별을 두느라고 머리두 기를수 없게 하지 않았겠니. 글쎄 요즘은 나라의 기강이 약해졌는지 머리를 기르는것 같더라만… 이뿐이 아니다. 부곡민은 자식들두 제 슬하에 둘수가 없느니라. 관가나 주인인 량반들이 뿔뿔이 데려다 부려먹어두 말할데가 없느니라. 어디 자식뿐이냐. 몇년씩 같이 사는 부처간두 마음대루 갈라놓기두 하느니라. 그러니 부곡민이란 항차 짐승신세가 아니구 뭐냐? 게다가 한번 부곡민으루 인박히고보면 대대루 세습해서 천민신세를 면할수 없으니. 후유―》

녀인은 가슴꺼지게 탄식했다.

을님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기 명학소만 봐두 식솔이 제대루 있는 집이 어디 하나나 있느냐? 아비가 없지 않으면 어미가 없구 아니면 자식들이 없거나… 그러니 망이 그 사람두 사람이야 출중하지만 목숨없는 천민으루 태여났으니 별도리가 없지 않느냐. 게다가 나라법에 천민은 량민과 통혼하지 못하게 되여있으니 장차 망이 그 사람에게 무슨 변이 생길지 모를 노릇이 아니냐. 아무튼 우리는 량민의 집안이니 너두 잘 생각해보거라.》

녀인의 목소리는 은근스러워졌다.

《나나 네 아버진 늙었으니 이런대루 살다가 말더라두 너나 너의 자식대에 와서 천민노릇을 시키고싶지 않구나. 그리구 듣자하니 그 사람은 한번 장가를 갔다구 하더구나.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구 하필이면… 을님아, 좀더 두고보느라면 어디 알겠니? 맞춤한 혼처가 나질런지…》

이번에두 을님은 아무말도 없었다. 그대신 가는 흐느낌소리가 흘러나왔다.

망쇠는 속이 울컥했다.

(이 마누라쟁이가…)

앞뒤를 가리지 않고 욱하기 잘하는 성미인 망쇠는 저도모르는 사이에 문고리를 잡아챘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어둑한 방속에서 두쌍의 놀란 눈길이 밖을 내다보았다.

그들은 눈앞에 떡 버티고선 망쇠를 어안이 벙벙하여 쳐다볼뿐 입을 열지 못했다. 망쇠 또한 결김에 문을 열긴 했으나 할 말을 찾지 못해 한동안 씨근거리기만 했다.

《아니, 웬일이요?》

이윽하여 을님이 어머니가 노염이 실린 소리로 물었다.

《우리 천민들이 갖잖으면 이 부락에서 떠나가시구려. 누가 이 댁더러 여기서 살라구 빕디까?》

망쇠가 눈을 부라리며 내뱉자 그제야 까닭을 알아차린 녀인이 문곁으로 다가앉으며 저도 언성을 높였다.

《도대체 남의 집에 와서 이게 무슨 행악질이요?》

《행악질?… 그래, 이 댁 딸이 아니면 우리 망이형님이 장가를 못들것 같아 그러시우. 걱정말고 어서 좋은데루 찾아가시우.》

더 할 말이 없는 망쇠는 뜨락을 나서고말았다.

골목길을 털썩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망쇠는 종잡을수없이 심경이 착잡했다.

천민의 신세를 일깨워주던 을님이 어머니의 말이 뇌리속을 파고들며 자기 처지를 새삼스럽게 돌이켜보게 했다.

그는 울적했다. 고비로 하여 들떠있던 기분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이름할수 없는 비애가 가슴을 적셔내린다.

녀인의 말대로 정말 자기들은 짐승같은 처지요, 목숨없는 신세였다.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한뉘 이렇게 살아간다는것은 얼마나 원통스러운 일인가. 그는 자기에게 시집오려는 고비가 가엾었다. 한뉘 고생한 아버지도 불쌍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동정이 가는것은 망이였다. 이제 그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실망할것이며 그 심중은 또 얼마나 괴로울것인가.

망쇠는 천민에게 딸을 주지 않으려는 을님이 어머니가 가증스러웠다. 저도 천민부락에서 사는 주제에 천민을 멸시하다니…

하지만 자식의 대에 와서 천민노릇을 시키고싶지 않다는 그의 생각을 나쁘다고만 할수도 없지 않는가?

그는 골살을 찌프리며 머리를 내저었다. 갈피를 잡을수 없는 생각에 골치만 아팠던것이다.

자기들에게 불우한 팔자를 짊어지운 세상을 저주하는 길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그것만이 이 순간 풀길없는 고민을 안은 가슴속의 울분을 위안할수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망할 놈의 세상, 콱 무너져라!》 하고 웨친 망쇠는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나 주먹에 부딪친것은 허무한 바람결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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