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회
제3장 장마비가 그친 뒤
5
지겨운 장마가 끝나자 어느새 가을이 왔다.
자연이 모든것에 새로 물감이라도 들인듯 하늘이며 땅이며 땅우의 나무며 강물은 유난히 선명하고 진하게 보였다.
하늘도 어찌 높고 푸른지 연분홍색을 띤 구름송이들이 흘러가는것이 아니라 푸른 심연속으로 아주 빨려들어가는듯싶었다. 이른가을의 아침해빛속에서 청신한 공기마저 물방울마냥 눈부신 해살을 뿌리고있었고 추녀낮은 초가지붕들에 반뜩거렸다.
동산우에 솟아오른 아침해는 검누른 가을대지에 눈부신 해살을 뿌리고있었고 추녀낮은 초가집들에서 피여오르는 가느다란 아침연기는 힘없이 흩어져버리군 했다.
망이는 자기대신 고비가 새벽부터 나루배를 부리고있는 버드내를 향해 걸음을 다그쳤다. 아침일찍 떠난다는것이 어느새 해가 한발이나 솟아올랐던것이다.
그는 지금 낯선 량반이 자기 집에 두고간 돈을 되돌려주기 위해 강건너 역참마을로 찾아가는 길이였다. 어머니로부터 그 엄청나게 많은 돈이 생긴 사연을 안 그날 당장 되돌려주고싶었지만 발등에 떨어진 불과 같은 홍경원의 방축쌓는 일때문에 오늘까지 미루지 않을수 없었다. 홍경원의 방축쌓는 일을 끝내고 드디여 여가를 얻어 집을 나선 망이의 마음은 여간 홀가분하지 않았다. 그는 방축쌓는 일로 발목이 잡혀있는 며칠사이 그 돈때문에 마음이 늘 무거웠었다.
달령성이란 량반이 아무래도
그러나 어머니는 그 돈을 내놓길 못내 아쉬워했고 망쇠도 한사코 막아나섰다. 망쇠는 량반들한테 빼앗기기만 하던 우리가 그들이 주는 돈을 좀썼기로 무엇이 나쁜가고 따지고들었다. 그러면서 정 되돌려주러 가겠으면 자기도 함께 가겠다고 우겼다. 그러니 지금쯤 나루터에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망이가 버들방천에 올라서자 시원한 강바람이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주며 선들선들 불어왔다.
나루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역참마을로 기어코 함께 가겠다고 벼르던 망쇠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또 고비는 방금 두셋의 나그네를 태우고 강건너편으로 나루배를 저어가고있는중이였다.
한팔로 땅을 짚고 방축우에 앉은 망이는 금빛처럼 눈이 부시고 듣기에도 흐뭇한 쇠소리를 내며 일렁이는 신답풀이의 벼이삭들을 바라보았다.
짚신발이 놓인 풀섶에서는 누런 메뚜기들이 엇뛰고 베수건을 동인 머리우에서는 빨간 고추잠자리들이 한가로이 떠돌았다.
그는 신풀이논의 벼들이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장마철까지만 해도 병든 갓난애기를 들여다보듯 얼마나 마음을 조이며 지켜보던 논벼인가. 큰물이 터져 명줄같은 논을 휩쓸어버릴것 같아 걱정이 많았고 또 홍경원의 중들이 방축을 허물겠다고 하여 안절부절못했었다. 그러나 온 부락사람들이 달라붙어 홍경원의 방축을 쌓은 지금에 와서는 마음놓고 이 논판을 바라볼수가 있었다. 방축을 쌓는 나날에 망이는 을님이와 어울려 일했고 어지간히 정도 들었다.
고비가 늘 을님이와 단짝으로 붙어다녔지만 망이는 막일에 치워나지 못했을 을님이가 무거운 돌을 다루는것이 안심치 않아 내내 관심을 돌렸다. 그는 을님이가 힘에 부치는 일을 할 때면 언제나 뛰여가 곁들어주었다. 그럴 때면 령리한 고비가 살짝 자리를 피하군 하여 그들은 단둘이 일하게 될적이 많았다.
부락사람들도 따뜻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망이가 드디여 짝을 만난듯싶어 그들은 은근히 기뻐하였다.
사람들은 망이가 저런 선녀같은 지어미를 만날려고 여직껏 홀아비로 지냈고 을님이도 산우의 바위같은 듬직한 망이를 지아비로 삼으려고 명학소에까지 오게 된 모양이라고 우스개소리들을 했다. 범잔녀는 손가락을 꼽아보더니 망이는 을축년, 소의 해에 태여났고 을님은 계유년, 닭의 해에 태여났다면서 그들이 연분으로 아주 잘 들어맞는다고 제 일처럼 좋아하였다. 그러나 실상 당사자들인 망이와 을님이사이에는 아직 이렇다할 말이 없었다. 말은 없어도 그들사이에 오가는 눈빛은 무심치 않았다.
망이는 얼굴도 마음도 그지없이 아름다운 을님이가 자기 가슴속에 점점 크고 뚜렷이 자리잡는것을 깨달았다. 그는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류달리 가슴이 울렁거리는 기쁨을 맛보고있었다. 그는 을님이가 곁에 없을 때에도 늘 그를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는
이런 사정은 을님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망이한테 쏠리는 자기 심정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자기 심중의 목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던 순결한 처녀는 그만 소스라쳐 놀랐다. 네가 기다리던 사람이 바로 망이, 그 사람이라고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남몰래 속삭였던것이다. 그는 자기 심중의 말소리를 그 누가 들은듯싶어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낯을 붉히는 을님이를 대하는 순진한 망이도 별스레 거북스러워했고 그러면 을님은 더욱 몸둘바를 몰라했다.
낟알이 영글어가는 가을과 더불어 그들의 정도 무르익어갔다.
아무튼 금년가을은 기쁨속에 기다려지는 류다른 계절이였다.
《이제 오시와요?》
반가움에 젖은 처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언제 되건너왔는지 나루가에 배를 댄 고비가 다가왔다.
《응, 너냐?》
상념에 잠겼던 망이는 은병을 싼 베보자기를 집어들고 방축에서 일어서며 눈에 웃음을 담았다. 도리암직하고 감실감실한 고비의 얼굴에서 까만 오목눈이 기쁨으로 빛나고있었다.
망이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망쇠가 오지 않았던?》
그는 속으로 망쇠가 오지 않은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이렇게 물었다.
그는 망쇠가 자기를 따라가서 무슨 일을 저지를가싶어 은근히 마음씌였던것이다.
《아니요.… 망쇠오빤 날 보면 괜히…》
얼굴이 유난스레 발그레해진 고비는 볼록한 가슴앞으로 넘겨놓은 긴 머리태를 만지작거리며 새침해서 말했다.
맑고 쟁쟁한, 그래서 마치 노래부르는듯싶은 고비의 그 음성은 봄하늘에서 우짖는 노고지리소리같기도 했고 가는 바람에 잘그랑거리는 석탑의 풍경소리같기도 했다.
그 누군가를 생각할 때 얼굴모색보다 목소리나 걸음새 같은것이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비도 바로 그런 처녀였다.
《왜, 망쇠가 뭐라 하던?》
망이는 우정 능청을 부렸다.
《몰라요.》
고개를 갸웃하고 할끔 망이를 쳐다보는 수태가 어린 고비의 얼굴은 락조를 받아 더욱 빨갛게 물들었다. 얄궂게 쏘아보며 베보자기를 빼앗아쥐는 그의 손길은 차거웠다. 바람부는 강가에서 퍽도 오래 기다렸으리라.
나루가를 향해 앞서걷는 고비의 애잔한 뒤모습을 여겨보는 망이는 부드럽고 따뜻한 정이 가슴굽에 련련히 서려오름을 느끼였다.
의지가지없는 외로운 처녀, 그래서 더더욱 왼심이 씌여지는 고비, 늙은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고적한 집안에 저렇듯 귀여운 고비가 있다는것은 얼마나 다행스럽고 기쁜 일인가.
망이는 이즈음 고비에 대한 육친의 정을 그 어느때보다도 강렬히 느끼였다. 그것은 아마도 고비와 한집에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깨닫고있기때문일것이다.
돈보자기를 아무런 미련도 없이 무심하게 안고가는 고비를 바라보며 망이는 까닭모를 죄스러움을 느꼈다. 그 돈이면 고비와 망쇠의 혼례도 부자집 못지 않게 차려줄수 있을게고 또 큰 살림밑천도 마련해줄수 있을것이 아닌가. 그러나 고비는 량반이 준 돈에 대해서 애당초 그 어떤 기대나 아쉬움도 품지 않았다. 그것이 망이에게는 더없이 기특하고 고맙게 생각되였다.
은병을 싼 묵직한 베보자기를 가슴에 모두어잡고 종종걸음치던 고비는 뒤를 상큼 돌아보며 방싯 웃었다. 그것은 어린 소녀가 손꼽아 기다리던 아버지나 오라비를 만났을 때의 그런 애된 웃음이였다.
강녘에 매놓은 나루배는 굼니는 물결을 타고 흥떵거렸다.
날렵하게 배전에 먼저 오른 고비가 노대를 잡았다.
《허, 이젠 제법 나루자치가 다된것 같구나.》
망이는 어이없는 웃음을 띠우며 배에 올랐다.
《난, 뭐 진척일하는 집안사람이 아닌가.》
고비가 눈을 할긋 흘겼다. 단 둘이면 곧잘 어리광을 부리는 고비다.
《그럼, 어디 호사를 좀 해볼가.》
망이는 시까스르며 이물에 가앉았다.
진척노릇을 하는 천한 집안에서 자라났으니 어차피 그도 이 노릇을 면할수 없었다. 더우기 단출한 식구여서 망이가 손포가 딸리는 농사일을 돌볼 때나 지금처럼 어디로 바쁜 걸음을 하게 될 때면 자연 고비가 그를 대신해서 나루일을 하기마련이였다.
삐걱삐걱… 나루배는 물결을 가르며 강우를 떠간다.
연약한 팔, 부드러운 손길, 처녀의 몸으로 나무배를 다루기란 조련치 않은 일이다. 노대에 매여달리다싶이 안깐힘을 쓰는것이 애처로와 망이는 종시 몸을 일으켰다.
망이에게 노대를 빼앗기고 이물에 가앉은 고비는 고개를 다소곳하고 흘러가는 강물에 눈길을 주었다.
아침볕을 받아 금빛으로 번쩍이는 물이랑에 눈이 시글고 간단없이 배전을 찰싹거리는 물결소리에 귀가 솔갑다.
기쁨에 취한 자기를 야즐거리는 해빛이며 물결이며 바람이 놀려주고 골려주는상싶다. 고비는 마치 간지럼탈 때처럼 몸을 오소소 떨었다.
그는 흥떡이는 배전에 몸을 기댄채 눈을 감았다. 얼마나 좋은가. 이대로 아주 먼곳, 고통도 시름도 없다는 극락세상으로 가버리면 얼마나 좋을가.…
고비는 눈을 살며시 뜨고 망이를 훔쳐보았다. 한손으로 스적스적 노를 젓고있는 망이는 생각깊은 표정이였다.
따가운 해볕과 차거운 강바람에 거칠어진 검은흙빛살결, 거밋한 구레나룻이며 생각에 잠겼을 때조차 번뜩이는 눈빛으로 해서 나이보다 더 지숙해보였다.
베돌찌속에서 어깨박죽이 망돌처럼 꿈틀거렸다.
(망이… 이름도 참 별나지?)
그러나 이름처럼 듬직하고 웅심깊은 그를 오빠로 모시고있다는것이 더없이 기뻤다.
역참마을로 가는 망이와 헤여진 후 다시 배를 저어 버들방천으로 건너온 고비는 조반을 먹고나오려고 집쪽으로 뻗은 동뚝길로 걸음을 옮겼다. 호리호리한 몸을 한들거리며 걷는 그의 주위에서는 비릿한 물내에 실려 낟알익는 구수한 냄새며 가을다운 들크무레한 떫은 냄새가 풍겼다. 잔잔한 강물에는 강빛으로 곱게 물든 쪼각구름들이 떠있고 건너편 강뚝에는 엄지소곁에서 엇뛰는 송아지의 음메소리가 화평스럽게 울렸다.
이즈음에 와서 별스레 다감해진 고비는 저도 몰래 자연을 감탄하며 감상하였다. 발밑에서는 하얀 꽃을 피운 구절초들이 아침바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비.》
《어마!》
느닷없는 소리에 고비는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키가 훤칠한 망쇠가 눈앞에 우뚝 서있었다.
그는 먼길갈 행장으로 짚신감발에 손에는 지팽이삼아 막대기까지 쥐였다.
《간떨어질번 했네.》
고비는 눈을 빨며 고개를 들었다.
《놀라긴…》
망쇠도 좀 게면쩍어 했다.
《망이형님 못봤어?》
《방금전에 역참마을로 간다구…》
《그럼 어서 따라가야지.》
망쇠는 급급히 자리를 떴다.
고비는 그가 자기를 피하려고 그런다는것을 감촉했다. 그는 입술을 감물며 망쇠의 넙적한 잔등을 쏘아보았다.
(맹꽁이같이 방금전이라구 말할게 뭐람… 흥, 그리구 저는 또 뭐야. 내가 뭐 저를 잡아먹는댔담. 달아나긴…)
짓숙인 이마너머로 망쇠를 쏘아보던 고비는 저도모르게 소리쳤다.
《망쇠오빠.》
고비는 그와 조용히 만나려고 벼르던 참이여서 이렇듯 좋은 기회를 놓치고싶지 않았다.
부지런히 걷던 망쇠는 화살에나 맞은듯 어깨를 흠칫하더니 서버렸다.
《?》
망쇠는 고개만 뒤로 돌렸다.
《저, 인젠 가두 소용없수.》
《웨?》
《언제 갔다구. 보리밥 한솥 짓고도 남게 지났는걸.》
망쇠는 천천히 되돌아왔다.
《정말?》
《내가 언제 저를 속이댔나?》
고비는 천연스럽게 거짓말을 하고있는 자기가 우스웠다.
《젠장, 뭐가 급해서 벌써 가버린거야…》
망쇠는 손에 든 막대기를 빙글빙글 돌리며 두덜거렸다.
《그만큼 함께 가자구 당부했는데…》
고비는 속이 조마조마했다. 그래도 겉으론 태연한 낯색을 지으려고 애썼다.
《되돌아간다?》
《별수 있수?》
《그러니 행차뒤 나발이란 말이지.》
망쇠는 쓰거운 웃음을 짓더니 손에 든 막대기를 강쪽으로 훌 집어던졌다.
고비는 망쇠와 마주서있기가 짓적어 먼저 발걸음을 뗐다.
망쇠도 스적스적 따라걸었다.
고비는 이즈음에 와서 별스레 서먹해지고 또 까닭없이 등을 진 자기들의 사이를 두고 생각에 잠겼다.
례사롭게 말도 하고 웃기도 하지만 예전과 달리 자기들의 사이에 확실히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장벽이 높이 쌓여진것을 느끼였다.
그들 서로가 넘겨다보기 두려워하는 그 장벽의 량쪽을 그들보다 먼저 기웃거린것은 누리나와 망이였다. 고비를 살피듯이 바라보는 누리나의 눈에는 때아닌 시름이 어렸고 망이의 눈에는 그답지 않은 능청스러움이 비끼군 했다.
고비는 자기의 속을 들여다보는듯 한 그들의 눈길이 자못 두려웠다.
그런데 며칠전 저녁 그가 돌박산에서 돌아오니 부엌아궁에 불을 때던 어머니가 밑도끝도없이 이런 말을 했다.
《풀죽이나마 나눠먹으면서 너를 벌써 아홉해나 키웠구나.》
《… …》
여느때와 달리 신중한 누리나의 태도에 고비는 야릇한 긴장을 느꼈다.
《너도 머리를 얹을 때가 된것 같은데 그냥 내가 해주는 밥을 먹을수야 없잖니?》
(머리를 얹다니?… 그러니 시집가란 소리가 아닌가? 시집?!)
고비는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리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당황하고 부끄러워 어쩔바를 모르던 그는 이윽고 어리손을 쳤다.
《왜 어매가 해주는 밥을 먹어? 지금두 밥은 내가 하는데…》
《미련을 부리지 말아. 시집을 가라믄 좋아서 춤을 출 년이…》
누리나는 입귀를 실룩거리며 빈정거렸다.
《시집, 새집?… 새집에 가는데 좋아안할 년이 어디 있수?》
《얘, 네년 하군 도제 씨먹은 소리를 할수가 없으니… 제 서방앞에서두 저럴가?》
《서방인지 동방인지, 건 또 뭘 말라빠진거누.》
《두구봐라. 네년이 그 잰 입때문에 이제 입덕을 입지 않나?》하고 지청구를 한 누리나는 다시금 신중한 기색으로 말했다.
《너도 알고있겠다만 망쇠는 내 아들이나 다름없느니라.》
《… …》
《그래 네 의향을 듣자는거다.》
누리나는 워낙 우물쭈물하는 성미가 아니였다. 고비는 가슴이 울렁거려 고개를 떨구었다.
《흠이라면 나이터벌이 좀 많은건데 것두 사느라면 별 차이가 없니라. 나많은 서방이면 귀염두 더 받구 외려 좋지. 응?》
누리나는 한무릎 나앉으며 다짐하듯 물었다.
《내가 알우.》
간신히 입을 연 고비는 이마를 더욱 깊이 숙일뿐이였다.
이렇듯 엄청난 일에 급작스레 부닥치고보니 어쨌으면 좋을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고비자기는 망쇠네 집 사람이 되여야 한다는것, 그러자면 이 집을 떠나야 한다는것을 무심중 깨닫고있었다. 단지 이제껏 오빠로 부르던 망쇠를 지아비로, 아저씨로 부르던 서경집로인을 시아버지로 불러야 한다는것이 어쩐지 아직 어리고 순진한 그의 심경에 인차 납득이 되지 않았을뿐이였다. 그리고 인정깊은 누리나며 의젓한 망이의 곁을 떠나고싶지 않았다.
마음이 산란해진 고비는 별안간 말없는 처녀가 되고말았다. 때로는 애수에 잠긴듯 한 눈가에 가랑가랑 맺히는 눈물도 보였다.
천성이 다감한 처녀들은 눈물이 많은 법인데 그것을 탓할 까닭은 없다. 그들은 말못할 심정을 눈물속에 표현하는것이니까.
어쨌든 이 가을안으로 그의 운명은 결정되여야 했다. 고비의 인물이 똑똑하고 령리한데 탐을 낸 멋모르는 이웃부락에서 누리나한테 중신할미들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너그러운 누리나는 어디까지나 고비의 결심에 모든것을 맡겨버린듯싶었다.
이제 와서 고비는 자기 속맘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들이 도리여 야속스러웠다.
(그런 말을 어떻게 내 입으로 한담.)
그러나 누리나처럼 고비 역시 옴니암니하는 성미가 아니였다. 부끄럽더라도 자기 의향을 비칠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고비는 어느때든 조용한 기회를 타서 먼저 망쇠에게 자기 속을 터놓아보리라고 속다짐하고있었다.
그런데 성미가 씨원씨원하고 데설궂은 오빠마냥 스스럼없이 굴던 망쇠도 어인 일인지 얼마전 밤, 학바위에서 헤여진 이후로는 자기를 피하는것 같은 눈치여서 좀체로 기회를 마련할수가 없었던것이다.
말없이 걷던 망쇠가 뒤짐을 지더니 고비쪽에 고개를 돌렸다.
고비는 까닭모를 불안과 기대로 가슴을 두근거리며 살며시 얼굴을 들었다.
《어머니가 너에게 무슨 말을 했지?》
웬일인지 성난듯싶은 망쇠의 음성에 고비는 놀란 사슴처럼 눈을 호동그라니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
망쇠가 무엇을 암시하려는지 알아차렸으나 짐짓 모르쇠를 했다.
《저, 그런 말 말이야.》
《그런 말이란게 무슨 말이예요?》
《젠장, 그런 말.》
《젠장, 그런 말이란게 무슨 말?》
《에잇, 요런.》
《호호…》
고비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처녀들이란 두렵거나 부끄럽거나 긴장한 순간을 웃음으로 굼때려는 경우가 종종 있는 법이다.
입을 다물어버린 망쇠는 뒤짐을 풀고 걸음을 좀 빨리했다. 실없는 소리를 했다고 여겼는지 모른다. 고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바보처럼 웃어버릴게 뭐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더 들어보지도 않고…)
한발 떨어져 망쇠를 뒤따르던 고비는 한숨을 호 내쉬고나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망쇠오빠.》
망쇠는 무겁게 걸음만 옮길뿐이다.
《이자 무슨 말을 하려 하댔수?》
《… …》
《어매가 글쎄 나한테… 호호…》
고비는 말하다말고 일부러스럽게 웃어댔다. 그랬어도 망쇠는 대척하지 않았다.
(입에 빗장을 질렀나.)
고비는 실쭉해졌다. 오누이같던 자기들의 사이가 어성버성해진것이 안타깝고 요새따라 망쇠가 더 무뚝뚝해진것이 못내 서운했다.
수심에 잠겨 발을 끌던 고비는 하마트면 망쇠의 가슴에 머리를 찧을번 하였다. 여전히 성난듯 한 기색으로 망쇠가 내려다보았다.
《고비, 너 내 말을 잘 새겨들어라.》
망쇠가 입을 여니 고비는 또다시 가슴이 한줌만해졌다.
신총을 꿰고나온 망쇠의 밤알같은 엄지발가락만이 눈에 밟혔다.
《너 어매의 말씀을 전혀 개의치 말어라. 아무렴 내가 어린 너를… 그러니 마음을 푹 놓고있어라. 이제 너한테 좋은 혼처가 나질 때까지 말이다.》
말을 마친 망쇠는 안도의 숨인지 탄식인지 까닭모를 한숨을 푹 내쉬였다.
고비는 가슴이 쓰리고 아렸다. 자기가 듣고싶었던것이 결국 이런 말이였던가. 이런 말이 아니였다. 이런 말일수가 없었다.
어쩜…
고비는 왈칵 치미는 설음에 풀썩 그자리에 주저앉고말았다.
《흐윽…》
손가락짬으로 새여나온 뜨거운것이 손목을 타고 발등에 떨어졌다.
《고비, 너 왜 그러니?》
놀라움에 잠긴 망쇠의 굵은 음성이 머리우에서 울렸다.
자기 어깨우에 놓이는 망쇠의 묵직한 손을 흔들어떨군 고비는 더욱 서럽게 우는 어린애마냥 아주 목을 놓아 흐느끼였다.
《갑자기 왜 그러니? 엉!》
망쇠는 엉거주춤해서 걱정스럽게 다시 물었다.
발딱 자리에서 일어선 고비는 흐느낌섞인 소리로 약이 올라 부르짖었다.
《몰라서 물우?… 흑… 내가 가면 어딜 간다구. 갈데나 있수?…》
고비는 등을 홱 돌려댔다.
《망쇠오빤 상기두 내가 철딱서니없는 기집애로만 뵈지?… 나두 다 할줄 아우. 밥두, 빨래두… 이담 애기가 생기면 정말 애기도 잘 키울테야.…》
활이야 살이야 내쏜 고비는 제 말에 저도 부끄러워 또 얼굴을 싸쥐였다.
고비의 의외의 말에 망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당돌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솔직하고 진정이 넘치는 어조였던것이다.
그는 술기운처럼 온몸에 서서히, 그러나 뜨겁게 흘러퍼지는 훈기와 취기를 느끼였다.
그것을 느끼자 때아닌 눈물이, 일찌기 체험한적이 없는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피잉 눈굽에 서리였다.
불쌍한 고비, 사랑스런 고비…
《고비야―》
자기 목소리같지 않은 음성으로 나직이 부르짖은 망쇠는 새처럼 떨고있는 고비의 가냘픈 두어깨를 잡아 자기쪽으로 돌려세웠다.
《망쇠오빠…》
고비는 망쇠의 가슴을 파고들며 떨리는 소리로 속삭였다.
망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때 무슨 말을 할수 있겠는가. 할 말도 없고 할줄도 모르는 망쇠였다. 그는 귀여운 한마리 새를 놓쳐버릴가 저어하듯 두팔로 고비를 껴안고있을뿐이였다.
크나큰 신뢰의 정을 느끼면서 한동안 망쇠의 넓은 가슴에 안겨있던 고비는 문득 소스라치듯 놀라며 그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죄스러운듯 한 수심이 비낀 눈빛으로 망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순간 행복의 무아경에 잠겼던 망쇠도 숫저운 기분을 느꼈다.
《왜 또 그러니?》
《우린 그런데… 울 오빤…》
《… …》
고비의 심정을 깨달은 망쇠는 침울해졌다. 고비의 말이 옳았다. 자기들 둘은 기쁨에 취해있지만 망이형님은 어떤가.
망쇠는 거북스러웠고 죄스러웠다. 그는 망이가 웃마을에 있는 오치연의 딸 을님이를 마음에 두고있음을 알고있었다. 을님이 또한 망이를 더없이 사모하고있는줄도 안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까지 서로 외롭게 지내고있다. 중이 제 머리를 깎지 못한다는 격인가. 그렇다면…
《에잇.》
망쇠는 풀대나 자르듯 손으로 곁의 개버들가지를 한번 후려치고나서 성큼 걸음을 옮겼다.
《갑재기 어딜?》
고비가 황급히 소리쳤다.
《어디 좀 갔다올게. 어서 집으로 가라구.》
망쇠는 바람을 일구며 웃마을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오치연이나 을님을 만나 망이와 같은 의젓한 사람을 놓치지 말라고 직방 들이댈 잡도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