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회


제3장 장마비가 그친 뒤

3


오치연이가 방문을 열고 토방에 나서니 을님이가 비내리는 뜨락에서 노끈으로 치마허리를 졸라매고있었다.

《돌나르는데루 갈려니?》

오치연은 딸의 발치에 놓여있는 삼태기를 보며 물었다. 며칠전에 새로 구해준 삼태기가 벌써 귀떨어진 헌것으로 되여버렸다.

《아버님은 새벽부터 어델 가실려구?…》

고개를 쳐든 을님이가 토방앞으로 다가오며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얼굴에는 아직 병색이 짙은데 상일 나가는 차림새로 머리에 수건까지 동지고나서는 품이 못내 마음놓이지 않아 하는 기색이였다.

《소일거리삼아 야장간으로 가보련다.》

오치연은 딸의 마음을 풀어줄양으로 웃음을 띠웠다.

《상기 약을 더 쓰셔야 할텐데…》

《밥보다 좋은 약은 없는데 밥이란 오륙을 놀려야 당기는법 아니냐.》

《그럼, 인차 들어오시도록 하시와요. 점심진지는 가마안에 놓아두었어요.》

량식말이라도 바꿔보겠다고 안해가 이것저것 꿍져가지고 어뜩새벽에 집을 나갔기에 을님이가 점심걱정까지 하는것이였다.

《오냐. 너두 조심해서 일해라. 자고로 돌다루는 일이 제일 힘들다구 했느니라.》

사립밖에서 딸과 헤여진 오치연은 야장간이 있는 아래마을쪽으로 스적스적 걸음을 옮겼다.

그는 병세가 좀 숙어지자 이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의 병도 빠개놓고보면 심화병인고로 마음속만 개운해지면 더 누워있을 까닭도 없는것이였다.

오치연은 명학소에 쫓겨온 초시기만 해도 극도의 절망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여러날이 지나는 사이에 그는 어쩔수없이 자기의 처지에 순응하게 되였다.

비록 천민부락이라 해도 이웃들의 진정에 넘치는 도움은 만가지 약보다도 더 큰 효험을 가지고 그의 멍든 가슴을 진정시켜주었던것이다.

더우기 망이가 자기 집을 처음으로 다녀간 다음날에 있은 일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추억으로 그의 가슴속에 깊은 인상을 새겨놓았다. 장마비가 구질구질 내리던 그날저녁 마당에서 주인을 찾는 소리에 방문을 열어보니 전날에 왔던 망이가 지게에 커다란 물독을 지고 서있었다. 망이는 부엌으로 들어와 지게를 벗어놓은 다음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있는 집사람들에게 사연을 띠염띠염 말하는것이였다.

그 말을 듣고서야 오치연은 장마비로 배를 띄울수 없기에 그가 여러날 쓸 약물을 유성촌에 가서 길어왔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생판 남인 자기를 위해 그 무거운 물독을 지고 그 먼길(망이가 60리길이나 에돌아왔다는 사실을 안것은 그후의 일이였지만)을 갔다오다니?!… 느슨한 웃음을 띠운 그의 얼굴에서 흐르는것이 비물만이 아닌 줄땀이란것을 알아차린 오치연은 가슴이 뭉클하고 눈굽이 달아올라 무어라 감사의 말도 하지 못했다.

마누라도 을님이도 그저 눈물이 글썽하여 서있을따름이였다.

그후에도 망이는 기울어진 벽에 기둥도 버티여놓고 또 망쇠란 젊은이까지 데리고와서 아래웃방의 구들장도 새로 놓아주었다.

아마도 그때문인지 모른다. 자기가 병상에서 일어나고 침울하던 집안에 화기가 돌게 된것이 그리고 아마도 이래서 사람 살 곳은 골골마다 있다고 말하는지 모른다.

부락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저녁마다 그의 집에 마실을 왔다. 그들은 곤궁한 살림에도 가사에 보탬을 하라고 무엇이든 한가지씩은 들고왔다.

그들은 오치연이 의원이란것을 알고는 가끔 앓는 애들을 업고오기도 했다. 약이나 침통과는 담을 쌓기로 작정한 그도 이럴 때면 어쩔수없이 소매를 걷어붙이지 않을수 없었다. 학식있고 의술이 높은 오치연은 부락에서 귀한 존재로 떠받들리게 되였다.

이제는 그도 부락사람들을 찾아다니였고 을님이나 안해도 마을일에 삐치게 되였다.

을님은 벌써 며칠째 점심도시락을 싸들고 홍경원의 방축쌓는 일에 나갔다. 이듬해부터 놀틀의 신답풀이를 얻어 농사라도 지으려면 도리상 그렇게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커다란 물황철나무가 서있는 아래마을어귀에 들어서자 듣기에도 가락맞는 쇠벼림질소리가 들렸다. 귀맛좋은 그 소리에 걸음이 절로 빨라지는것 같았다.

좁은 골목에서 뛰여다니던 배꼽 드러낸 애녀석 하나가 그를 보고 벌쭉거리며 알은체를 했다.

눈여겨보니 며칠전에 먹은것이 얹혔다고 해서 명치끝에 침대를 박아주었던 녀석이였다. 그때는 죽는다고 생지랄을 쓰던 녀석이 이처럼 뛰여다니는것을 보게 되니 웃음이 났다.

울바자안에 달구지바퀴며 가대기며 깨진 가마따위의 잡동사니들이 여기저기 쌓여있는 야장간집은 밖에서부터 단내와 쇠내가 풍기는상싶었다.

두칸살림집에 잇대여 지은 야장간은 세벽만 가리고 한쪽벽은 터쳐놓아 밝고 너렁청한데 그안에서 메질소리가 세차게 울렸다.

그가 기침소리를 내며 야장간안에 들어서니 집게로 벼림쇠덩이를 모루우에서 뒤집고있던 《풀무령감》이라고 불리우는 집주인이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내려오시우?》

《예, 일찍들 시작하셨소이다.》

오치연은 무흠한 태도로 마주 인사했다. 그는 이미 집주인령감과 구면지기처럼 친숙한 사이였다.

《완코.》

풀무령감은 머리에 수건을 동진 두 메질군에게 소리치고나서 다 벼린 쇠덩이를 곁에 있는 물통에 집어넣었다. 물통에서는 칙 소리가 나면서 흰김이 물씬 서려올랐다.

허리를 펴는 메질군들을 보니 의외에도 방축쌓는데 가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망이와 망쇠였다.

《밤새 안녕하셨소이까?》

먼저 인사말을 건늰 망이는 머리수건을 벗어 이마의 땀을 훔치였다. 망쇠도 허리를 굽석했다.

《예, 덕분에…》

오치연은 이들을 만난것이 별로 반가왔다. 마음같아서는 언제든 망이를 따라다니며 거들어주고싶던참이였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풀무로 숯불속에 바람을 불어넣는 머리태 기다란 야장간집 아들은 주위엔 아랑곳없이 풀무질만 계속했다.

풀무령감이 불길이 펄펄이는 숯불속에서 시뻘겋게 단 쇠덩이를 집어내며 어줍게 웃었다.

《쇠는 단김에 두드리라구 이걸 마저 벼릴테니 앉아 좀 쉬시우.》

그는 벽에 붙여놓은 널평상을 고개로 가리켰다.

《예, 어서.》

오치연은 벽쪽으로 물러서며 자기가 거들어줄 일이 없나 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 신코―》

풀무령감의 소리에 따라 망이와 망쇠는 다시 쇠메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일을 시작하라는 《신코》며 그만두라는 《완코》라는 말이 귀에 익었지만 처음 이 야장간을 찾아왔을 때만 해도 귀에 선 그 소리가 매우 의아스럽게 들렸다.

작달막한 키에 머리가 커다란 풀무령감은 겉모양부터가 좀 우스운편이지만 행동거지며 말너름새도 여간 구수하고 익살스럽지 않아 퍽 재미있는 로인이였다. 그는 입을 쉴새없이 놀리고 또 입심이 좋아서 《입풀무》라는 별명을 달고다녔다. 말인즉은 야장간집에 풀무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숯불속에 바람을 보내는 바람풀무이고 다른 하나는 그 힘든 야장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사설을 늘어놓는 대장쟁이 입풀무라는것이였다.

한쪽에서는 바람풀무가 풀떠덕거리고 다른쪽에서는 입풀무가 주절대고… 그래서 볼 일도 없으면서 심심풀이로 야장간을 찾아오는 축들이 많았다.

아마 이래서 오치연이도 야장간을 자주 찾게 되는지 몰랐다.

《왼쪽발에 나막신 신구 바른발엔 갖신을 신었구나. 잘두 간다. 찌쿵, 찌쿵.》

풀무령감이 노래가락조로 비양하듯 주절거렸다.

오치연은 이 말이 바른켠의 메질군과 왼켠의 메질군이 고르롭게 메질을 못한다고 탓하는 소리임을 알아차렸다.

《완코―》

또 길다란 쇠덩이를 물통에 집어넣었다.

그것은 끝을 뾰족하게 벼린 정대였다.

망쇠가 웃동을 벗어 구석쪽에 훌 집어던졌다. 힘살이 울뚝불뚝한 검붉은 그의 상체는 마치 벼림질이라도 한듯 단단하고 억세보였다.

망이도 웃저고리를 벗고 등거리바람으로 쇠메를 잡았다. 그의 팔뚝은 오히려 망쇠보다 더 굵었는데 서까래감만치나 실해보였다.

오치연은 망이에게 무슨 정대를 아침부터 이렇게 많이 벼리는가고 물었다.

《방축돌이 딸리는군요. 그 흔하던 돌도 다 동이 나서 큰 바위를 깨야겠기에 이렇게…》

망이는 씁쓰름히 웃었다.

홍경원의 전장때문에 공연한 신역을 겪는것이 그도 어이없는 모양이였다. 울며 겨자먹기로 홍경원의 방축을 쌓게 된 그들은 산에서 돌을 캐서 등으로 져날라 근 백보길이의 방축을 석자높이로 덧쌓는 일에 달라붙었다.

황페지였던 놀틀의 신답을 어떻게 풀었다는것을 자상히 알고있는 오치연은 망이의 말을 들으며 낟알내는 일이 과연 간단치 않다는 생각을 새롭게 하였다.

《또 신코―》

풀무령감의 먹임소리에 따라 메질소리가 더 드세차게 울렸다.

머리태 긴 총각은 시종여일하게 풀떠덕풀떠덕 풀무질만 했다.

《정머리를 때려라. 휑야, 창끝처럼, 좋지…》

풀무령감이 노래가락조로 먹임소리를 건드러지게 했다.

《이 정대가 휑야, 무슨 정댄고 휑야, 막돌까는 휑야, 쇠정댈가 휑야, 극락천도할 휑야, 복정대란다 휑야…》

오치연은 저만 무료하게 앉아있을수가 없어 숯가마니에서 쇠소리를 내는 까만 참나무숯을 몇웅큼 꺼내여 삼태기에 담았다.

그것을 들고 쇠를 달구는 곳으로 다가가 숯불이 활딱 핀 속에 새 숯덩이를 덧놓았다. 이제는 그도 야장일에 얼마간 미립이 튼셈이였다. 풀무령감이 눈에 따뜻한 웃음을 띠우며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는 다시 모루쪽에 고개를 돌렸다.

《좀더 때려라. 이쪽, 다시한번 때려라… 하하, 오늘은 어째 그냥 발을 맞추지 못하는군…》

풀무령감은 문득 노래가락조로부터 사설조로 넘어가더니 망이와 망쇠를 갈마보았다.

《왜 상기두 그 량반의 돈때문에 의논이 맞지 않아 그러는가?》

의아해하는 오치연의 얼굴에 눈길을 준 풀무령감은 자못 심각한 기색으로 말했다.

《선생은 요새 저 망이행수집에 은혜갚음이란 명색으루 큰돈이 난데없이 생긴 옛말같은 얘기를 들으셨소?》

오치연은 뜻밖의 소리에 고개를 흔들었다.

《하, 글쎄 며칠전 밤에 웬 량반이 구종군과 같이 망이행수집에 찾아와서 자기 모친을 살려준 값이라며 굉장히 많은 돈을 주고 갔다지 않소. 작년 장마통에 웬 안로인을 망이행수가 물에서 건진것두 사실이구 또 그 량반이 준 돈도 진짜배기 활구(은병)가 틀림없는건 사실이오나 아무튼 고금에 없는 꿈같은 얘기가 아니우. 하기사 사냥군에게 쫓기던 사슴이 자기를 살려준 사람에게 무슨 보배를 상으로 주었다는 옛말은 있지만서두 그건 말그대루 옛말에나 있을 일이지 어디 실지루야 있을법한 일이웨까? 한데, 그 돈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걸로 망이행수와 저 사람사이에 좀 옥신각신이 생겼소이다. 망이행수는 그 돈은 자기가 쓸 돈이 아니라며 되돌려주어야 한다는게고 또 망쇠 저 사람은 그걸 되돌려주는건 머저리짓이라는게로구려. 그러니 선생은 어쨌으면 좋겠소?》

《글쎄요.…》

오치연은 어정쩡하게 대꾸했다. 처음 듣는 소리여서 놀랍기만 했던것이다.

《풀무령감, 그게 무슨 자랑거리라구 소문을 놓으시오?》

망이가 메질을 멈추고 풀무령감을 언짢게 흘겨보았다.

《왜? 자랑이라면 그게 좀 자랑거린가?… 하기사 그 소문이 공주성에 들어가면 야단이지. 우리 등깝대기를 벗기지 못해하는놈들이 가만있을리 없지.》하고 풀무령감은 입맛을 다시였다.

풀무령감의 말을 들으니 오치연은 문득 그 비슷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것은 이런 이야기였다.

어떤 형제가 길을 함께 가댔는데 아우가 뜻밖에 황금 두덩이를 얻었다. 아우는 그것을 형과 함께 하나씩 나누어가졌다. 강에 이르러 같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다가 복판에 이르렀을 때 아우가 갑자기 황금덩이를 물속에 던지는것이였다. 형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까닭을 물으니 동생이 대답하는 말이 《저는 평소에 형님을 무척 존경하여왔습니다. 그런데 금덩이를 나누어가진 뒤로 웬일인지 형님을 꺼리는 마음이 갑자기 싹트니 이건 상서롭지 못한 일입니다. 금덩이로 형님과의 사이에 금이 가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버렸습니다.》라고 하였다. 동생의 말을 들은 형은 머리를 끄덕이며 《네 말이 옳다.》하고 자기도 황금을 강물속에 던져버렸다는것이였다. 형제간의 우애가 금보다 더 중하고 또 재물이란 사람들에게 흑심이 생기게 할수 있다는것을 경계하여 전해오는 이야기이지만 공으로 생긴 재물을 본인에게 돌려주겠다는 망이의 소행이 별로 차이가 없는 일이라고 오치연은 생각했다.

망이의 소행도 책에 적어놓으면 사람들이 두고두고 옛말처럼 전할것이 아닌가.

오치연은 힘을 모아 메를 휘두르는 망이의 거쿨진 모습을 감회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자, 마저 때리세.》

풀무령감이 또 입을 열었다.

《그렇지.… 이쪽… 또 이쪽… 대체 일이란 덧손질할 여지없게 뒤마무리를 잘해야 하느니. 저기 동경(경주)의 불국사에 무영탑이란 석탑이 하나있는데…》

그가 옛이야기를 펼쳐놓을 잡도리를 하자 여직껏 뚱하고 앉아 풀무질만 하던 총각이 그의 말을 중둥무이시키며 손가락 네개를 세워보였다.

《음, 벌써 네번째 곱씹는 얘기란 말이지.…》

풀무령감은 맹랑스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였다.

모름지기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무슨 약조가 되여있는 모양이였다. 그들의 약조란 별것이 아니였다. 쉴새없이 떠벌이는 풀무령감은 밑천이 딸릴수밖에 없어 이미 여러차례 한 이야기도 언제 했던가싶게 다시 펼쳐놓는 경우가 드문했는데 그것을 민망하게 여긴 아들이 그럴 때마다 일깨워주기로 서로 약정하였던것이다.

시무룩이 웃는 망이와 망쇠의 얼굴을 슬며시 훔쳐보던 풀무령감은 오치연에게 눈길을 멈추었다.

《선생두 들으셨소?》

《아니, 전 첨이외다.》

오치연은 웃는 낯으로 인차 대꾸했다.

《그럼 또 해야겠구만. 새 사람이 들으면 낡은 얘기도 새로우니께.》

풀무령감은 다시 활기를 띠우고 말을 계속했다.

《옛적에 백제국의 부여땅에 재능이 신묘한 한 석수쟁이가 있었는데 그는 서라벌나라(신라)의 경주에 불려가 한 절간에서 불탑을 세우게 되였다오. 그런데 이 석수쟁이는 일단 망치와 정대를 들고나서면 때식을 잊고 일에 달라붙는 성미라 삼년석달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탑우에서 내려오지 않고 돌만 쪼았다는구려. 밤낮으로 울리는 그 성가신 정소리에 잠을 이룰수 없었던 스님들이 그만하면 탑이 썩 훌륭하게 되였으니 이젠 내려오라구 했다는구려. 그래도 석수쟁이는 꾸준히 돌을 다듬었다오. 아무리 보아도 사람의 눈으로는 흠을 잡을래야 잡을수 없는 석탑인데 무엇이 미흡해서 그냥 정질을 하는지 스님들은 종시 의혹을 풀수 없어 하루는 물어보았다질 않소.

〈여보시오. 석공, 누가 볼것이기에 그렇게 공력을 들이시오?〉

그랬더니 석수쟁이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더라오.

〈부처님이 보십니다.〉

코를 떼운 스님들은 뻐꾹소리도 못하고 물러갔는데 그후에 석수쟁이가 탑우에서 내려온 뒤에 보니 그 석탑은 그림자가 없더라지 않소. 대체 무슨 물건이든 빛이 있는 곳에서는 그림자가 생기기마련인데 그 불탑은 글쎄 해가 쨍쨍 내리비치는 한낮에두 영 그림자가 없다는구려. 그러니 그 석수쟁이의 재능을 신묘하달수밖에 있겠나요. 그래서 후세사람들이 그 탑을 부처만이 보는 탑이라 하여 석가탑이라고도 하고 또 그림자없는 탑이래서 무영탑이라고도 불렀다오. 내 말이 그른가 아닌가 하는건 당장이래두 동경(경주)의 불국사에 있는 그 탑을 가보면 알게 될거외다.》

가보진 못했어도 그 불탑에 깃든 고사를 옛책을 통해 알고있는 오치연이도 풀무령감이 재미나게 들려주는 그 이야기를 듣고보니 새 이야기처럼 구수했다. 책을 읽고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그 이야기의 깊은 뜻을 새롭게 깨닫는바가 자못 컸다.

그는 거의 경의에 가까운 심정으로 성수가 나서 일하고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무영탑을 다듬어세운 석공의 눈빛이 바로 그랬을 정기가 빛발치는 풀무령감의 눈빛이며 줄땀을 흘리며 힘있게 쇠메를 휘두르는 망이와 망쇠의 진정에 넘치는 얼굴빛, 그들의 힘과 넋은 오로지 모루우에 놓인 벼림쇠에 쏠리고있었다.

률조있게 울리는 힘찬 메질소리를 풀무의 바람소리가 받쳐주고 풀무령감의 흥그러운 먹임소리가 간을 맞춘다.

오치연은 자기 어깨도 들썩거려지는것 같았다.

그는 못먹고 못입고 천대받으면서도 꾸준히 생을 영위해가는 이들에겐 일하는 재미가 곧 사는 재미일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 부지런하고 꾸밈없는 사람들속에서 자기 마음도 한없이 젊어지고 맑아지는감을 느꼈다.

그런데도 세상은 이 어진 사람들을 거들떠보지 않았으며 마소처럼 천시하고 구박하지 않는가. 고금의 력사책들을 놓고보아도 그가 비록 선왕이든 폭군이든 그리고 충신이든 간신이든 임금이나 재상, 장군들은 언제 잠들고 깨여나는것까지 지지콜콜이 기록하고 지어 그들의 처첩들에 대해서도 렬전에 그 이름을 올리지만 세상을 먹여살리는 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구석에도 언급하지 않으니 그것은 도대체 무엇때문인가.

오치연은 자기도모르는 사이 깊은 상념속에 잠겨버렸다.

그는 이전에 맹자(중국의 전국시기 관념론철학가)의 《성선설》과 순자(중국의 전국시기 철학가)의 《성악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본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본성은 원래 선하다고 한 맹자의 주장이나 반대로 본성은 본래부터 악하다고 한 순자의 주장이나 어느것이 옳은지 그때는 물론 지금도 판단하기 어려웠다.

사람의 본성이 어진것이라면 어이하여 세상에는 회덕현의 현령처럼 독사같이 악독한 인간들이 그렇게 많으며 또 사람의 본성이 악하기만 하다면 어찌하여 여기 명학소의 농군들처럼 순한 양같은 사람들이 있을것인가. 그런데 문제는 세상의 중생이 자기가 생각하는것처럼 악한 인간과 선한 인간으로 구분되여있지 않으며 오로지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으로 나뉘여있다는것이였다. 사람이란 그 성품의 선악에는 무관하게 존귀한 계층에 속하면 《님》으로 불리우며 우대를 받는것이요, 비천한 계층에 끼우면 《놈》으로 불리우면서 짐승취급을 당하는것이 이 세상의 리치며 법도이다.

허궁 띄워 머리를 쓰던 오치연은 부지중 자신의 신상에로 생각을 굴리였다.

그는 문득 자신에게 그럼 너는 악한이냐 선한이냐 하는 물음을 내놓아보았다. 이 물음에 그는 선한 사람들의 축에 속한다고 떳떳이 말할수 있을것 같았다. 왜냐면 50평생에 남에게 죄되거나 남보기 부끄러운짓은 한번도 한적이 없으니까.

그러나 귀인이냐 천인이냐 하는 물음을 다시 내놓았을 때 그는 선뜻 대답할수가 없었다. 그는 천민으로 전락된 자신의 처지를 수긍할수도 외면할수도 없었던것이다.

미궁처럼 빠져들어갈수록 헤여날길 없는 이런 생각으로 오치연은 가슴이 답답해났다.

그는 다 벼린 정대를 가지고 돌산으로 가는 망이네들과 헤여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무거운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세상의 철리를 해득한다는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인생의 철리 또한 료량하기 어려운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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