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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회


제3장 장마비가 그친 뒤

2


백태가 송유인이 살고있는 수덕궁의 마당에 들어섰을 때 그는 사랑방에서 문객들과 해정술잔을 나누고있었다.

수덕궁은 원래 이전 임금이 거처하던 별궁인데 두겹으로 된 높은 담장안에 안채, 바깥채의 두 건물이 들어앉은 크고 화려한 집이였다.

국권을 장악한 정중부의 사위요, 상장군에 재상인 송유인은 이 집을 차지한 후 수십간이나 되는 방안을 값진 가구들로 사치하게 장식하고 각처에서 골라온 진귀한 나무며 화초들로 정원도 새롭게 꾸려놓았다.

퇴색한 삼간가옥에서 살던 송유인이 무신란이후에 이처럼 대궐같은 집을 쓰고살게 되자 문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더우기 한두해의 짧은 사이에 그가 병부상서(군사관청의 우두머리)와 형부상서(사법관청의 우두머리)를 거쳐 관리임명권을 틀어쥔 상서성의 복야로 재상자리에 올라앉자 문객이 더 부쩍 늘어 요즘은 늘 백도 넘는 사람들이 안채, 바깥채에서 우글거렸다.

대개가 칼을 찬 무관들인 이 건달들은 송유인의 눈에 들어 혹시 벼슬자리라도 하나 얻어볼가싶어 자칭하여 마름노릇을 하고 하인노릇도 하면서 그의 손발이 되여 돌아쳤다.

낯익은 혹은 낯선 무관들의 부러움과 시기에 찬 눈총을 받으며 바깥마당에서 안마당으로 들어서던 백태는 자기의 직속상관인 룡호군(국왕의 시위군) 대장군 정황재와 맞다들렸다.

정원가에서 뒤짐을 지고 서성거리던 정황재는 찌프린 눈으로 백태를 흘겨보며 물었다.

《자네가 어떻게?》

그와 뜻밖에 맞다든 백태는 속이 찔끔하여 얼른 고개를 숙여 읍을 하며 자기 낯에 떠오르는 당황한 빛을 감추었다.

《송재상께서 부르시옵기에…》

《그렇게 자별한 사이던가?》

바른편 이마로부터 볼에 걸쳐 깊숙이 패인 칼자리가 나있는 정황재는 랭소를 띠고 빈정거렸다. 생김새처럼 성미마저 우직한 그는 자기를 어깨넘이하여 송유인한테 아부하는 백태를 여간 밉광스럽게 여기지 않았으며 그런 내심의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백태는 정황재를 대할 때면 언제나 거북스러움을 느끼군 했다.

《재상께 알현하게. 자, 어서.》

정황재는 역스러운듯 손을 들어 사랑채쪽을 가리키고나서 몸을 삑 돌려버렸다.

이 로골적인 무시에 백태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불쾌감과 함께 반발심이 치받쳤다. 이 경우의 반발심이 자신을 향한것이라면 그는 아마도 인간다운 체모를 간직할수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교만한 인간들은 어떤 경우에나 자신의 우월감을 먼저 내세우는 법이여서 백태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여러 컬레의 목화(가죽신)가 놓여있는 사랑채의 섬돌계단우로 올라갔다.

아침볕발이 밝게 비쳐드는 사랑방에는 주인 송유인과 함께 네댓명의 고관들이 커다란 각상에 둘러앉아 해정술잔을 기울이고있었다.

기다란 자색공복에 금물올린 붉은 띠를 두른 그들은 모두 고관대작의 표식인 금어(물고기모양의 금장식품)를 차고있는 무신량반들이였다.

철색의 강마른 얼굴에 크지 않은 눈이 유난스레 반뜩이는 송유인은 여느날 달리 찌뿌둥한 기색이였다.

주인의 기분이 침울하다보니 대작하는 동료량반들도 묵묵히 술잔들만 비웠다.

정황재로 하여 의기가 소침해진 백태는 송유인의 어두운 낯색을 보자 말문이 열리지 않아 섬돌우에서 잠시 망설였다.

다행히 그를 먼저 띄여본 대장군 정세유가 송유인에게 백태가 왔음을 귀띔해주어 그를 송구스러운 처지에서 건져주었다.

백태쪽에 고개를 돌린 송유인의 칼칼한 낯에 일순 반기는 웃음이 얼핏 스치고지나갔다.

그 짧은 웃음이 어떻게나 고맙고 기뻤던지 백태는 그만 눈물이 솟을것 같았다.

턱짓과 낯빛으로 호령을 대행하는 송유인은 고개를 두어번 끄덕여 백태에게 방으로 들어오라는 뜻을 표시했다.

세 벽에 꽉 들어찬 으리으리한 가장집물에 위압감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간 백태는 한쪽구석에 옹송그리고앉았다.

정세유가 백태쪽에 불깃해진 낯을 돌리고 《여보게 중랑장, 생각있으면 이리 나앉게.》하고 각근히 권하였다.

백태는 자기한테 거듭 호의를 보이는 정세유가 고마왔다. 정황재대신 정세유가 자기 웃자리에 있으면 살아가기가 한결 편하련만…

그런데 같은 정씨인 정황재와 정세유는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 앙숙이여서 웬간해서는 한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아마 그래서 오늘도 뒤늦게 온 정황재는 정세유가 사랑방에 먼저 와있는것을 보고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을것이였다.

《중랑장, 나앉으라구, 응.》

정세유가 거듭 권하자 등이 굽은 늙은 상장군이 아이들손마냥 작고 빼빼 마른 손을 홰홰 내저었다.

《아, 우리도 이젠 그만두지. 해정술에 취한다는데…》

그는 손아래무관인 백태와 한자리에 앉기를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

《식전술이란 하루 골치거리인데 더 취하기 전에 중방(상장군, 대장군들의 집회소)엘 나갑시다그려.》

그러자 흐린 하늘처럼 낯색이 찌뿌둥해있던 송유인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하루 골치거리쯤 가지고 뭘 그러시우. 평생 우환거리가 야단이지…》

《평생 우환거리라… 그래그래, 덜 고아진 술같은 녀편네야말루 평생우환단지고말고, 흐흐.》

등이 굽은 늙은 상장군이 앞이 없는 입을 벌리고 새망을 떨었다.

호령 한마디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위엄스런 일국의 재상 송유인이 마누라앞에서는 비맞은 장닭처럼 기를 펴지 못하는 위인이라는것은 이미 숨겨진 일이 아니였다.

원래 송유인은 다른 나라와 교역을 하여 거부가 된 서덕언이란 장사치의 미망인을 처로 맞았었다. 그 과부는 비록 천인의 몸이였지만 인물이 곱고 맘성도 무던한데다 전 남편이 세상떠나며 남긴 재산을 고스란히 가지고있어 궁색한 하급무관이였던 송유인으로서는 복덕방에 앉은셈이였다. 인정이 헤픈 그 과부는 후부로 섬기는 송유인의 동료들이 집에 놀러 올 때면 술잔이나 고기점을 섭섭치 않게 대접했고 남편더러 곤궁에 허덕이는 동료들에게 종종 푼돈도 찔러주게 하였다. 그 덕에 송유인은 동배무관들속에서 인기가 자못 컸고 또 출세도 비교적 빨랐다.

그가 무신란전에 벌써 왕태자를 시종하는 무관으로 대장군벼슬길에 오를수 있은것은 《현모량처》라고 할수 있는 안해의 덕이 컸다고 해야 옳을것이다.

무관직에서 승진이 빠른 송유인은 은근히 문관들을 부러워하게 되였다. 한것은 문관만이 오직 재상직에 오를수 있었기때문이였다. 3품의 등급에서 더 오를수 없게 한계가 그어진 무관직에 불만을 느낀 송유인은 차츰 동료무관들을 무시하고 멀리하는 한편 문관들과 친분을 맺기 시작하였다. 무관들은 문관들과만 어울려돌아가는 송유인을 가리켜 백로속에 끼운 까마귀라고 뒤에서 욕질했으나 워낙 천성이 교만하고 방자한 송유인은 그들을 멸시할뿐이였다.

그는 무관들속에서 고립되였고 지어 그와 가깝게 지내던 동료들까지 이놈 어디 두고보자고 주먹을 부르쥐게 만들었다.

정중부일당이 5년전에 무신란을 일으켜 문신들을 거의나 참살하고 국권을 빼앗아쥐였을 때 무신인 송유인도 환성을 질렀다. 하지만 그 환성이 때이른것임을 깨닫고는 목을 움츠리고 집안에 들어박혔다. 그는 꿈속에서라도 피발이 선 무신들의 눈이 나타날것 같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리의방이나 리고 같은 포악한 무리들은 자기들에게 동조하지 않으면 무관들도 마구 목을 베던 때라 평소에 무신들을 깔보던 송유인의 목에도 언제 칼이 날아들지 모를 일이였다. 그는 당장 꺼지려는 얇은 얼음판우에 선듯 한 위태로움을 느꼈다. 지체없이 든든한 얼음덩이로 발을 옮겨짚어야 목숨을 부지할수 있었다.

궁여지책으로 그가 모색한것이 바로 무신배의 우두머리인 정중부와 가까운 사이, 그와 인척관계를 맺는 길이였다. 정중부에게는 마침 짝을 뭇지 못해 한숨속에 날을 보내는 과년한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인물이 하도 박색이고 성미 또한 고약하여 독수공방의 귀신이 될것이라고들 했다.

그랬어도 이 소문을 들은 송유인은 살구멍이 생겼다고 무릎을 쳤다. 그는 다 퍼먹은 김치독이나 다름없는 외로운 과부를 다시 돌아오지 못할 먼바다속의 섬으로 쫓아보낸 후 정중부를 찾아가 사뭇 엄숙하게 납채를 드렸다.

홀로 늙히는 딸을 두고 속을 썩이던 정중부가 이 청혼을 마다할리 있었겠는가. 이리하여 권신 정중부의 사위가 된 송유인의 처지는 일약 개선되여 그의 관직은 하늘높은줄 모르고 치달아오르게 되였다. 결국 그를 윽벼르던 무관들도 닭쫓던 개 하늘쳐다보는격으로 망연자실해졌고 이전처럼 그에게 다시 굽실거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어제는 재산가의 녀인을 얻어 호강을 누렸다면 오늘은 권문가의 딸을 취해 권세를 부리는 송유인은 과히 살줄 아는 역어빠진 작자라고 할만 했다. 그러나 남들의 눈에 근심걱정없는 상팔자를 타고나보이는 사람들도 따져놓고보면 그들대로의 고충거리가 한두가지씩은 있는 법이다. 사철 비단옷을 두르고 만문한 송아지고기만 골라먹으면서도 누구는 몸에 난 탈때문에, 또 누구는 자식없는 걱정때문에 혹은 집안의 불화때문에… 송유인의 사랑방문객들이 쉬쉬하며 수군거리는 소리에 의하면 그는 후처로 맞은 정씨부인때문에 어느 하루 마음편한 날이 없다는것이였다.

제 아비를 닮아 사내번지기처럼 키가 크고 손발이 망짝같은 정씨는 성미가 어찌 사무럽고 투기가 심한지 거의 매일 아침마다 송재상의 염소수염을 잡아비틀며 누구덕에 재상노릇을 하는지 일깨워준다고 했다.

송유인은 정씨로 하여 가슴속이 부글부글 괴여오를 때면 뜨끈한 술로 그것을 달래거나 보다는 화김에 화냥질이라고 다른 뭇계집들을 어루만지는것으로 자신을 위안한다는것이였다.

그것이 얼마나 바른 소문인지는 알수 없으나 아무튼 그가 마누라한테 외소박을 당할 때 보면 꼭 고양이앞의 쥐처럼 설설기는것만은 사실이였다. 백태가 후에 안 일이긴 하지만 그가 이날아침 동료문객들속에 섞여 마신 술도 실은 이런 화김에 마시는 화술이였다.

해가 길건짧건 묘정(오전 6시)이면 어김없이 잠을 깨는데 습관된 송유인은 이날아침도 제시간에 일어나 시비 설매가 은대야에 떠다준 물로 얼굴을 씻었다.

설매가 받쳐주는 항라수건을 받아들고 얼굴의 물기를 훔치며 무심결에 어린 녀종을 건너다보던 송유인은 그만 저도모르게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 저애가 어느 결에 저렇게 피였나?)

돋는 볕을 받아 발그스름한 금빛으로 물든 설매의 귀여운 얼굴은 신비로울 정도로 이쁘장하게 보였고 맹주(맹산)먹빛처럼 까만 윤기가 반지르르한 긴 머리태는 어느덧 처녀꼴이 다 잡혔다.

떫은 실과알마냥 거들떠보지도 않던 어린 계집종이 어느새 저처럼 곱게 번졌는지 세상조화란 참으로 기기묘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마두른것이라면 밭가운데 세운 허수아비라도 건드려보고야 직성이 풀리는 송유인이 통으로 삼켜도 비리지 않을 이 능금알같은 설매를 보고 무심할수 없었다.

《얘, 이리 온.》

설매는 주인나으리의 전과 다른 부드러운 태도가 자못 의혹스러운듯 가늘고 긴 눈섭을 상큼히 쳐들고 머뭇거렸다.

《이리 오래두.》

《무슨 분부이시오니까?》

설매는 송유인의 너그러운 말투에 저도몰래 방싯 볼샘을 지어보였다.

그 복성스러운 웃음이 송유인의 짐승같은 관능을 얼마나 자극했으랴.

《허, 고년…》

송유인은 저쪽에서 성큼 설매앞으로 다가가 물묻은 손으로 그애의 칠흑같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곱게 번진 너를 보니 오늘은 물만 마셔도 배가 부를것 같구나.》

이 뜻밖의 애무에 놀란 설매는 고개를 숙이고 어쩔바를 몰라하더니 이윽고 몸을 빼쳐 부엌쪽으로 쪼르르 달아났다.

《허어, 고년, 맹랑한 년이로고…》

부엌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설매의 흰종아리를 탐욕스럽게 좇던 송유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비단보료우에 앉아 웃몸을 가볍게 흔들거리는데 조반상을 든 정씨부인이 볼이 넓다란 마당발을 성큼성큼 옮겨짚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송유인의 앞에 밥상을 쿵 소리나게 놓아준 정씨는 웬일인지 물러갈념을 않고 상머리에 지켜앉았다.

송유인은 여느날 달리 손수 밥상을 들고 나타난 부인을 의아쩍게 쳐다보며 웃음어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오늘은 어째 해가 서쪽에서 뜬게 아니요?》

《재수없이 아침부터 무슨 새빠진 소리요?》

정씨는 대바람으로 개구리눈알처럼 툭 불거진 두눈을 흡뜨며 미욱스럽게 내쏘았다.

정씨의 상스러운 말투에 입이 쓰거워진 송유인은 조반먹을 생각도 싹 사라지고말았다.

《웨 안드시우? 내가 차린 밥상은 맛갈머리없어서?…》

생각같아서는 그냥 넙죽거리는 년의 미련한 주둥아리를 밥사발을 들어 짓조겨주고싶었다. 그러나…

《으음…》

송유인은 아침부터 기분을 잡치고싶지 않아 정씨와 더 대척하지 않고 상머리에 나앉았다.

하지만 밥사발뚜껑을 열어붙이던 그는 그만 깜짝 놀라 손을 털며 웃몸을 젖혔다.

《엉?!…》

밥사발속에는 그가 아침마다 즐겨먹는 약밥대신에 멀건 맹물이 한가득 담겨있었던것이다.

정씨는 남편의 성난 눈을 마주쏘아보며 비웃음이 잔뜩 실린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빈정댔다.

《흥, 실컷 잡숫구려. 오늘은 맹물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구 하잖았소.》

못난 녀편네 투기가 장끼라더니 설매를 희롱하는것을 어느 결에 벌써 눈치챘단 말인가. 설마 그랬던들 이런 버르장머리없는짓거리를 하려들다니…

《천하에… 음, 고약한지고…》

송유인의 입에서는 신음소리같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계집의 투기가 무섭다무섭다 해도 이렇게 매서운 년이 또 어데 있으랴싶었다.

상머리를 털고일어선 송유인은 문객들이 아침밥을 얻어먹고있는 사랑방쪽으로 휘청휘청 걸어갔다.

그는 가슴이 뻑적지근하게 아팠다.

하지만 그 아픔은 아직 피지도 못한 애어린 시비가 억울한 봉변을 당했으리라는 불쌍한 심정때문도 아니요, 귀신처럼 모질고 독한 정씨를 갈가리 찢어죽이고싶은 미운 생각 때문만도 아니였다. 그것은 못된 녀편네밑에서 이런 굴욕을 겪으면서도 년의 애비인 정중부가 두려워 씨원히 치욕을 씻지 못하는 자신의 가긍한 처지에 대한 애달픈 마음에 비롯한것이였다. 그러나 자승자박격으로 제손으로 제 몸을 옭아맸으니 누구를 원망할수도 없는노릇이 아닌가. 화술이나 퍼마시고 이 순간을 잊는것이 상수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정을 다는 몰랐지만 아무튼 정씨부인으로 하여 이날아침 그의 기분이 흐렸다는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있는 문객들은 속으로 여간 깨고소하게 여기지 않는 기색들이였다.

권신 송유인에게 이런 루추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통쾌감비슷한 만족스러움을 맛보게 했던것이다. 남에게서 장점보다 약점을 발견하게 될 때 즐거움을 느끼는것이 이들 권력배들의 공통된 심리인것이다.

《투기심한 계집은 행실이 방정하다구 합디다. 뭐 목청고운 공작새가 없다구 이도저도 좋을수가 있겠나요. 그랬으면 좋기사하겠지만.》

등이 굽은 늙은 상장군이 송유인을 위안하는 투로 웅얼거렸다.

송유인은 흠칫하며 가시돋힌 눈길로 그 늙은 상장군을 당장 찔러죽일듯이 쏘아보았다.

입빠른 소리를 한마디 해서 송유인의 미움을 받게 된 늙은 상장군은 그의 가시눈길에 기가 눌려 채머리를 떨며 몹시도 옹색해하였다.

갑자기 송유인은 머리를 한번 흔들었다. 그러자 지금껏 그를 지배하고있던 우울한 기분이 머리속에서 훌 날아가버리기라도 한듯 그의 낯에는 평소의 그 위엄스럽고 오만한 표정이 깃들었다.

그는 속으로 칼을 벼리면서도 때에 따라 얼굴에 함박같은 웃음을 띠울줄도 알고 또 속으로는 장고를 치면서도 비오는듯 한 눈물을 흘릴줄도 아는 간활무쌍한 인간이여서 자기 기분을 능히 조절할줄 알았다.

《자네도 여기 와서 한잔 들게.》

송유인은 너그러운 웃음을 띠우고 백태를 건너다보았다. 백태는 자기를 속박하고있던 그 어떤 그물에서 벗어져나오는듯한 안도감을 느끼며 자리를 고쳐앉았다.

《전 이미…》

《조반을 들었단 말이지. 그런들 대순가, 어서 들게.》

백태는 상머리로 다가가 송유인이 내미는 은술잔을 송구스럽게 받아 입으로 가져갔다.

《자네 관향이 어디드라?》

송유인은 백태가 비워버린 술잔에 다시 은주전자를 기울이며 물었다.

백태는 인차 대꾸하지 못했다. 긴장되여있은데도 까닭이 있었지만 보다는 자기의 고향이 공주라는것을 송유인이 번연히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기때문이였다.

자기를 서북지방의 죽음터로 보내려니 이런 빈인사말부터 묻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입에서는 자연 동안이 뜬 대답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주…로소이다.》

《아참, 공주라 했댔지…》

그제야 기억이 나는 모양 송유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나서 다시 백태를 건너다보았다.

《공주는 산천이 수려하고 물산이 풍요하다지?》

《그런줄로 아오만 이번에 내려가보니 가물바람에…》

《고향떠난지 얼마나 됐나?》

송유인이 백태의 말을 중둥무이하며 또 물었다.

백태는 다시금 얼떠름해졌다. 속히 올라오라는 서간을 받고 곧바로 공주에서 떠났다는것을 그가 모를리 있겠는가. 그렇다면 어째서 떠난것을 묻는것인가.

《저, 산천이 변할만 하게 됐소이다.》

자신없이 중얼거리는 백태를 힐끔 치떠본 송유인은 오금박듯 천천히 찍어말했다.

《웃사람과는 그런 투로 말하는 법이 아닐세.》

그는 아무리 친절한 사이라도 아래사람들이 무엄하게 구는것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꼭 열한해가 됐소이다.》

백태는 경솔히 대꾸한 자신의 실언을 깨닫고 황급히 중얼거렸다. 그는 무슨 문초를 당하는것 같은 까닭모를 초조감을 느꼈다.

송유인은 아무일도 없었던듯 무관한 태도로 다시 물었다.

《자네 관향에 별공사로 다녀올 의향이 없나?》

백태는 기쁨으로 눈빛이 빛났다.

고향을 다녀오기 얼마전에 백태는 공주에 별공사로 내려가고싶은 심정을 지나가는 말처럼 그에게 은근슬쩍 비쳐보았는데 그때는 못들은척 하던 송유인이 오늘 이렇게 제쪽에서 먼저 그 말을 꺼내니 감격하지 않을수 없었다.

《소인이 정녕 원하던바였소이다.》

《그렇다면 나도 기쁘이, 내가 이미 정시중께 자네를 천거했으니 모름지기 오늘 중방회의에서 락착을 보게 될걸세.》

무신통치배들은 여러 지역을 나누어 차지하고 그에 대한 수탈을 경쟁적으로 벌리면서 그런 소임을 맡은 별공사(징수관)들을 급급히 각지로 떠나보내였다. 송유인도 물산이 많은 공주일대를 자기 소유지로 만들 꿍꿍이를 하고있었는데 백태는 바로 그곳 태생으로서 리용하기 적합한 인물이였던것이다. 송유인은 다시금 빈잔에 술을 따르며 중떠보는듯 한 불쾌한 눈길로 백태를 슬쩍 치떠보았다. 입술에는 까닭모를 야릇한 웃음이 실려있었다.

그 불쾌한 눈빛과 야릇한 웃음속에 무엇인가 음험한 그림자가 드리워있어 백태는 가슴 한구석에 아직은 가늠할수 없는 그 어떤 불안이 깃들었다.

대장군 정세유가 그에게 말을 건네였다.

《자네 소임이 실루 지중할세그려. 요즘 좌창(나라창고)이 말라서 관리들의 록봉두 제대로 못주지 않나.》

그러자 백태를 쓴외보듯 하고 앉아있던 등굽은 늙은 상장군이 아이들손같이 작은 손을 내저었다.

《참 좌창얘기가 났으니 말이지 아, 어제는 여러 위(부대)의 산원이며 별장따위 나지래기군교들이 좌창에 몰려가 고직이와 아웅다웅하던 끝에 글쎄 고직이를 때려눕히고 몇톨 되지 않던 좌창의 곡식을 다 털어갔다지 않소.》

《저런 죽일 놈들 봤나. 그래 그놈들을 그냥두었소?》

누군가 성이 나서 부르짖었다.

《뭐 그냥두었겠소. 당일저녁으로 형부의 가두소(감옥)에 다 잡아가두었나 봅디다. 헌데 그놈들이 했다는 수작이 맹랑하단 말이요.》

《무슨 소리들을 했기에?…》

《뭐 권신들의 집창사가 나라창사보다 더 크기때문에 자기들은 록봉도 못받고 배를 곯는다고 했다나요, 흐흐.》

이 말은 분명히 송유인을 빗대고 한 말이였으나 당자인 송유인은 못들은척 하고 백태한테 말머리를 돌렸다.

《그래 언제쯤 떠나겠나?》

《오늘 당장이라도 떠나겠소이다.》

백태는 그가 생각을 달리할가싶어 겁을 내기라도 하는듯 서둘러 대답했다.

《장허이, 허지만 뭐 그리 덤빌건 없어. 여러달 집을 떠나야 할텐데. 며칠 말미를 두도록 하게.》

송유인의 온화한 말에 정세유가 웃음띤 소리로 참녜를 했다.

《송별주라도 나누고 떠나야 인사가 아닌가.》

잠간 생각에 잠겨있던 송유인은 이윽고 백태에게 무게있는 어조로 넌지시 물어보았다.

《자네 중랑장의 직첩을 언제 받았더라.》

《벌써 두해가 됐소이다.》

백태는 짜릿한 긴장을 느끼며 송유인을 바라보았다.

《음, 그렇게 됐나.》

송유인은 고개를 두어번 주억거렸다. 천천히, 그러나 의미심장하게.

백태는 송유인의 이 무언의 암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는 불시에 온몸을 휩싸는 전률에 가까운 충동으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저도모르게 손아귀가 쥐여지고 쥐여진 손아귀에 땀이 내배였다.

불현듯 문하시중 정중부가 작년 자기 생일잔치날에 탄식하듯 하던 말이 생각났다.

그날 정중부는 꿀물에 절궈 말린 소고기 육포를 자기앞에 권하는 한 장군에게 서글픈 웃음을 띠우고 이런 말을 했었다.

《젊어서 이발이 든든할 땐 고기가 없더니 이렇게 고기가 많고보니 이젠 이발이 변변치 않소그려.》

그때는 우스개소리로 무심히 흘려들었지만 그뒤에 백태는 웬일인지 그 말을 두고두고 되새겨보게 되였다.

늘그막의 부귀영화, 그것은 결국 이발없는 사람앞에 놓인 고기접시와 같은것이였다.

백태는 그렇게 되고싶지 않았다. 스물전에 자식이요, 서른전에 천량이라고 그는 젊어서, 젊었을 때 모든것을 이룩하고싶었다. 자기가 절하는 사람보다 자기에게 절하는 사람이 더 많기를 바라는 모든 야심군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조급증에 사로잡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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