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회


제3장 장마비가 그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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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도읍인 개경에도 장마비가 내리고있었다.

시름겨운 장마비는 푸른 솔숲과 기묘한 바위들로 이채로운 송악산도, 송악산의 남쪽 기슭에 층층으로 솟은 화경전이며 강화전이며 원덕전을 비롯한 웅장한 궁전들도, 궁전을 화려하게 장식한 붉은 옻칠기둥이며 돌축대며 푸른 기와 할것없이 모든것을 먹으로 그린 몰골산수화처럼 거무칙칙한 장막으로 덮어버렸다.

옛적엔 송악군으로 불리워온 자그마한 고을이던 이곳이 도회지로 번창하기 시작한것은 왕건이 궁예의 태봉국을 거꾸러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 이듬해인 919년부터였다.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 하여 국호를 고려라고 지은 태조 왕건은 도읍을 철원으로부터 자기의 세력지반이 강한 송악으로 옮긴 후 왕권의 상징이며 위엄인 궁궐을 굉장하게 짓는 한편 관청을 짓고 길을 닦아나갔다.

이리하여 개주, 개경, 황도로 불리운 이곳으로 나라의 권력이 집중되고 물산이 집적되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곧 권세와 재부와 향락을 위한 간계와 모해와 칼부림의 피비린 과정이기도 하였다. 왕도 개경은 깨끗한것을 먹고 더러운 오물을 배설하듯이 자기에게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부패시키는 괴물이였다.

이 괴물의 도읍, 개경에 다시 올라온 백태는 지체하지 않고 이튿날 아침에 자기의 상전인 송유인을 찾아 집을 나섰다. 기름먹인 종이우산을 받쳐들고 걸음을 옮기는 그의 심중은 구접스러운 날씨처럼 뒤숭숭했다. 이제는 축축하고 끈적끈적한 이 장마에 진저리가 났다.

음침한 계절에 세월 마저 불안하고 어수선했다. 그는 국권을 틀어쥔 정중부의 사위요, 무신들의 두목인 송유인이 자기를 급히 부른것이 아무래도 께름직하였다. 조정에서 골머리를 앓고있는 서경폭도들과의 싸움에 자기를 내보내려고 작정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시간이 갈수록 그의 심기를 괴롭혔다. 전장에 나가 군공을 세우는것은 무관으로서 떳떳한 출세의 길이긴 하지만 그것은 목숨을 내대야 하는 지극히 위험한 길이였다. 벌써 얼마나 많은 장군들이 승산없는 서경토벌에 나갔다가 군공은 고사하고 무주고혼이 되여버렸는가. 연주성(녕변)에서는 서북면병마사 차중규가 서북농민군한테 죽었고 화주(금야)에서는 동북면병마사 리의, 동북로도지휘사 최균, 분대어사 지언정이 또한 죽음을 당했다. 지금도 개경의 경군(중앙군)을 깡그리 끌고 싸움터에 나가있는 상장군 윤림첨이며 두경승은 물론 개경의 중방이나 장군방의 모든 장군들이 다음의 죽음차례가 자기에게 돌아올가싶어 전전긍긍하고있지 않는가.

백태의 위구는 공연한것이 아니였다. 작년(1174년) 9월에 서경에서 조위총의 반란을 계기로 일어난 서북농민군의 봉기는 서북의 모든 고을을 휩쓰는 대농민전쟁으로 개경무신통치배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있었다.

서북지방의 군대와 인민들은 원래부터 타곳에 비해 고통을 더 당하였다.

그들은 해마다 이웃나라들에 오가는 사신들의 접대와 국경경비의 무거운 부담을 걸머지고있었는데 무신정권이 선 이후로 이 지방에 파견되는 무지막지한 무신관료들의 포악한 학정으로 원성이 높았다.

이런 때 평소부터 무신정권에 앙심을 품고있던 서경류수 조위총이 군인들과 농민들의 기세에 편승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서북지방의 40여개 성이 일시에 호응해나섰다. 이리하여 삽시에 수만명의 대오로 불어난 서북농민군은 개경으로 통하는 절령(황해북도 자비령)을 차단하고 서북지방도처에서 악질관리들과 토호들을 축출하고 처단하였다. 바빠맞은 개경에서는 급급히 토벌군을 내려보냈지만 번마다 올라오는것은 첩보가 아니라 패보뿐이였다. 오죽이나 급했으면 무신들의 뒤전에 물러나있는 허수아비 임금 명종조차 작년 12월 을묘일에 조서를 내리기를 《내가 덕이 박하고 지혜가 없는 사람으로 외람되게 조상들의 유업을 받들어 나라를 다스리는지 벌써 다섯해나 우로는 하늘의 뜻에 보답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민심을 보살피지 못하여 사변이 끊칠 날이 없으니 마음이 송구하여 앉아있기 어렵도다. 서경으로 출정한 군졸들에게 매 명당 쌀 한섬씩 주고 숙위(왕궁호위)군인의 가족들에게도 두명 어울려 한섬씩 곡식을 주게 하라.》 하고 우는소리를 하면서 군졸들을 위문하는 형편이였다.

이런 시국에 백태인들 어찌 서경징벌에 참가하길 꺼리지 않겠는가. 송유인의 집이 가까와질수록 백태의 걸음발은 떠졌다.

보정문을 지나 락타교를 건느던 백태는 다리우에서 저도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뒤늦게야 15살 철부지소년으로 처음 개경에 왔을 때 남다른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제일먼저 찾아본것이 바로 이 락타교였다는 추억이 떠올랐다. 고려의 허실을 엿보려 거란에서 30명의 사신과 50마리의 락타를 보내왔는데 태조 왕건이 분개하여 사신들은 먼바다가섬으로 류배보내고 락타들은 이 다리밑에 처넣어 굶어죽게 했다는, 그래서 만부교로 부르던것이 이후로는 락타교라 불리운다는 유명한 일화가 깃든 다리였다. 그때 백태는 굶주려 쓰러진 락타들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울리는것만 같아 다리밑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었다.

그 시절의 백태, 자기는 얼마나 천진하고 순진했던가. 어린시절의 회억을 더듬던 그는 개경에서의 10여년사이 자기가 너무도 몰라보게 변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국자감(고려시기 대학교)에 들어가 공부할 때만 해도 그의 머리속에는 출세하여 부자가 되라는 아비의 훈계보다 선정을 베푸는 어진 선비가 되라던 젖어멈의 간절한 당부가 더 깊이 새겨져있었다.

(옛 성현들처럼 학문이 깊고 덕망이 높은 도덕군자가 되리라.)

열정에 불타던 백태는 가슴속에 큰뜻을 품었다.

그는 아비의 친구인 어느 고관의 알선으로 국자감에 들어가 기숙사에 자기 방을 정하던 날 맞은편벽에 자필로 옛 글귀를 써붙였다.

《앙불괴어천 부불작어인》

(우러러 하늘에 죄스러움이 없고 굽어보아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도다.)

이 시기의 백태는 맑은 얼굴에 까만 비단두건을 쓰고 명주로 지은 정결한 백저포를 입은채 벽을 마주하고 글을 외우거나 종이노끈에 책을 두툼히 싸들고 국자감으로 오가는것이 일이였다.

불량한 학우들이 그를 《책벌레》요, 《글뒤주》라고 조롱해도 사악에 물들지 않았던 백태는 도리여 그들을 가련하게 여겼다. 세상에 학문처럼 귀한게 없다고 여기고있던 백태로서는 그럴만도 하였다.

그는 1년간 배워야 하는 갑과에 속한 《호경》과 《론어》(유교경전)를 반년사이에 다 외워치우고 2년간 수업해야 하는 을과를 1년반에 그리고 2년짜리 병과를 1년새에 떼버리였다. 백태는 동년배의 학우들을 눈아래로 굽어보며 과거시험장에 나갔다. 그러나 천만뜻밖에도 그에게 홍패(붉은 종이로 된 합격증)가 차례지지 않았다. 락심한 백태는 다음번 과거시험에 다시 응시했으나 거듭 락제하고말았다. 악에 받친 그는 미칠 지경이 되였다. 그런데 자기를 《책벌레》라고 조롱하던 아둔패기들은 보란듯이 과거에 잘만 급제하지 않는가. 그제야 백태는 벼슬길은 자기같은 시골향리출신인 향공들에게는 닫혀있고 오로지 개경량반자식들인 사공들에게만 열려있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우월감에 차있던 백태는 모멸과 환멸로 가슴을 태웠다. 자기가 생각했던것처럼 학문은 결코 귀중한것이 아니였다. 그것은 벼슬아치들의 한갖 치장거리에 불과했다.

이 시기의 백태는 빈대가 기여가는 천장을 멀거니 바라보거나 구겨진 옷을 입고 술청의 문턱을 드나드는것이 고작이였다.

먼지이는 길로 비틀걸음을 칠 때 벽제소리를 울리며 지나가는 교자우의 벼슬아치들을 치떠보는 술기에 붉어진 그의 눈길은 온곱지 않았다.

술친구로 사귄 한 무관을 통하여 무반은 출세의 길이 별로 까다롭지 않다는것을 알게 된 백태는 그길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금오위(순검군)에 입영한 백태는 밤새워 외우던 유교경전들을 불태워버리고 칼쓰기며 활쏘기로 밤을 새웠다. 남달리 건장한 체구와 그에 걸맞는 힘을 가진 백태는 무관직에서의 승진이 빨랐다.

그는 25명의 군졸을 지휘하는 대정을 거쳐 50명을 통솔하는 정9품의 교위직으로 뛰여올랐다. 하지만 이길이 모멸의 길이라는것을 그는 뒤늦게야 깨닫게 되였다. 문관을 우대하고 무관을 천시하는 《우문천무》의 시대풍조가 지배하던 때라 그들, 백태를 비롯한 무관들은 문관들로부터 끝없는 천대와 멸시를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간신의 무리인 문관들은 국왕 의종을 끼고 막대한 재부를 독차지하고 권세를 부렸으나 무관들은 거기에 한몫끼울수 없었다. 게다가 무시로 벌리는 유흥과 오락때마다 문신들은 거나하게 취해 풍월이나 외우며 향락을 누렸지만 따라다니면서 숙위(호위)노릇이나 해야 하는 무신들은 배를 곯고 추위에 떨어야만 했다.

절망에 잠긴 백태는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마디의 옹이처럼 꼬이기만 하는 자기 신세를 한탄하던 나머지 벼슬길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버릴 생각까지 하게 되였다. 뜻밖의 기회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는 개경을 떠나고말았을것이다.

5년전인 경인년(1170년) 8월 그믐께였다. 이날 의종왕은 수많은 문신들과 군사를 거느리고 파주에 있는 절간인 보현원으로 유흥의 길을 떠났다. 보현원에 못미처 솔밭에 둘러싸인 융단같은 잔디가 깔린 공지에 이른 왕의 일행은 술자리를 벌려놓았다. 술에 취한 문신들은 꽃을 꺾어 관모에 꽂아쓰고는 흥에 겨워서 춤을 추며 날뛰였다. 굶주림과 피곤에 지친 무신들은 분노에 찬 눈길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무신들의 기분을 눈치챈 의종왕은 좌우를 돌아보며 혀꼬부라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어, 좋은 곳이로군. 무예를 베품직하다.》

그리고는 무신들에게 명령하여 5명수박회(다섯명씩 진행하는 무술경기)를 하도록 했다.

이때 왕의 측근에 있던 종5품관인 문관 한뢰는 무신들이 임금에게 총애를 받을가보아 시기에 차서 무신들을 지켜보았다. 때마침 대장군(종3품의 상층무관) 리소응이 몸이 여위고 힘이 약하다보니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무신들의 기를 꺾어버릴 좋은 기회라고 여긴 한뢰는 그앞을 막아서며 《비겁한 자식!》 하고 뇌까리며 리소응의 뺨을 후려쳤다. 불시에 타격을 받은 리소응은 풀밭에 나동그라졌는데 코에서는 피가 흘렀다. 이 광경을 보고있던 국왕과 문신들은 손벽을 치면서 껄껄 웃어댔다. 상장군(정3품의 상층무관) 정중부는 격분으로 가슴앞에 드리운 구름같은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한뢰의 멱살을 틀어잡고 흔들었다.

《이놈, 리소응이 아무리 무부(무관)라 해도 벼슬이 너보다 높은 3품관인데 이렇게 욕보이는 법이 어데 있느냐?》

산원(정8품의 하급무관) 리고도 앞으로 나서며 칼을 뽑아들었다.

《이놈을!…》

《어서!》

장소가 적합치 않다고 여긴 정중부가 리고를 말렸다.

하지만 그날저녁 왕의 행차가 보현원에 이르렀을 때 변란은 끝내 터지고야말았다. 한발앞서 보현원에 도착한 리고와 리의방은 왕의 명령이라는 거짓말로 순검군을 자기 휘하에 끌어당겼다.

그들은 보현원에서 문신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겁에 질려 왕의 침상밑에 들어가 숨은 한뢰를 끌어내다 죽이는 리고를 보고 백태가 어전에서 무슨 칼부림이냐고 낯을 찡그렸다. 그러자 리의방이 《이놈, 너는 무신이냐, 문신이냐?》하고 호되게 꾸짖었다.

이때까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있던 백태는 비로소 사태를 짐작할수 있었다. 하기에 그는 정중부가 《우리를 따르려는자들은 바른소매를 걷어올리고 복두를 벗어던져라.》고 호령했을 때 얼른 그렇게 했다. 백태야말로 평소부터 개경출신의 문관들한테 불만을 품고있었던것이다.

이날 백태는 정중부가 일으킨 무신란이 우발적인 변란이 아니라 오래동안 준비해온 권력탈취싸움이란것을 알게 되였다.

(국권을 우리들, 무신들이 잡게 된다면 천하가 우리것으로 될것이 아니냐?)

백태는 피가 끓어올랐다. 출세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던 부친의 말이 뇌리를 쳤다.

(그렇다. 이것은 내 일생일대에 전무후무한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드디여 때는 왔구나! 아!…)

백태는 눈에 피발이 섰다. 어진 선비가 되라던 젖어멈의 당부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도대체 어진 선비가 될수 있었던가. 당당한 호족의 아들로 태여났건만 시골뜨기라고 개경량반들한테 얼마나 심한 굴욕을 당했던가.

장검을 뽑아든 그의 손은 복수심으로 떨었다.

그의 칼날은 문신들의 더운피로 식을 사이가 없었다. 보현원에서 개경에 돌아온 백태는 앞장에서 살판뜀을 했다.

《문신의 관을 쓴 놈은 비록 서리라도 씨를 남기지 말라!》

눈에 달이 뜬 백태는 닥치는대로 문신들을 찔러넘기고 그들이 살던 집을 허물어치웠다.

어쨌든 며칠간의 무신란(군사정변)뒤끝에 겨우 50명의 병졸들을 이끄는 교위(정9품)에 지나지 않던 백태는 두 등급이나 뛰여넘어 200명을 거느리는 별장(정7품)이 되였다. 그리고 재작년(1173년)에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무신정권을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것을 토벌한 공로로 중랑장(정5품)이 되였다.

백태뿐이 아니였다.

문신과 환관들을 거의 일망타진하고 왕까지 갈아치워 의종대신 명종을 새로 왕자리에 들어앉힌 후 국권을 틀어쥔 무신통치배들은 제후의 높은 벼슬자리를 비롯한 조정의 요직을 모두 차지하였고 계사년이후로는 지방의 벼슬자리까지 칼찬 무관들로 말짱 갈아치웠다. 그리고 문신들의 토지와 노비와 재산을 빼앗아가졌다.

무지막지한 군사불한당들인 무신통치배들은 백성들을 포악하게 다루면서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마구 강탈했다.

문하시중(정부수반)이 된 정중부는 거만의 재산이 있는 의종왕의 집을 빼앗아가졌고 서해도(황해도)의 군, 현들을 자기 고향인 해주에 소속시켜 이곳 백성들의 피땀을 짜냈을뿐아니라 전국의 여러곳에 앞잡이들을 내려보내 백성들을 악착하게 착취하였다. 그의 본을 따라 벼슬자리에 오른 모든 무신들이 략탈에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그들의 전횡에 의하여 나라의 정사는 여지없이 헝클어졌다.

백태의 젊은 가슴도 야망으로 끓어올랐다.

무관으로 출세의 길은 전장에 나가 군공을 세우는것인데 그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였다. 보다 쉽고 빠른 길은 웃사람에게 잘 보여 그의 덕으로 벼슬자리를 얻는것이였다. 그런데 송유인은 자기의 앞길을 능히 열어줄수 있는 힘을 가진 재상이라고 백태는 믿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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