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회
제2장 학바위전설
5
홍경원의 방축을 돌아보고온 망이는 걸신이 든 사람처럼 저녁상에 접어들었다.
겨릅등을 사이문에 켜놓은 아래방에서 여물지 않은 풋콩을 까던 누리나는 웃방에서 저녁을 먹고있는 아들 망이에게 가끔 눈길을 주었다. 강건너 먼 유성촌에 가서 아홉말들이 독에 물을 길어다주고 오자바람으로 또 홍경원의 방축에까지 갔다왔다니 얼마나 지쳤으랴. 누리나는 온 부락일을 부둥켜안고 애쓰는 아들이 어쩐지 불쌍해보였다.
그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콩꼬투리를 뚝 따서는 파란 구슬같은 콩알을 싸리바구니속에 털어넣었다. 래일 끼니거리로 타개죽이라도 쑤려고 풋콩을 몇단 베들였다.
저녁상을 물린 망이가 누리나에게 고비는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
《응. 아까 서경집에 죽 한그릇 주겠다고 바가지에 쏟아가지고 나가더라. 나두 보니 컴컴한 집에 로인 혼자 있는것 같더구나. 웬걸 저녁을 끓였겠니.》
누리나는 오늘저녁따라 별로 헤덤비던 고비가 이상하게 생각되여 입술을 실룩거렸다. 이마쯤 고비는 망쇠소리만 나와도 얼굴이 붉어지고 또 그 집에 갈 일이 생겨도 이전과 달리 우물쭈물하였는데 오늘저녁은 끼니를 해놓기바쁘게 제가 먼저 한그릇을 퍼들고 망쇠네 집으로 뛰여가는것이였다.
그는 고비와 망쇠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것을 이미전부터 느끼면서도 설마 어린것이 하고 도리머리를 저었다. 하나 그렇게만 여길 일이 아니였다. 처녀꼴이 다 잡힌 애를 언제까지 끼고있을수는 없지 않는가. 새들도 깃을 치면 짝을 찾아 둥지에서 날아가기마련이다. 하다면 누구와 짝을 무어줄가. 누리나는 은근히 망쇠를 점찍어두고있었다. 그렇게 되기를 진정 바랐었다.
그에게는 자기의 젖을 빨며 자라난 망쇠가 친아들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어미없이 자란 불쌍한 망쇠에게 그리고 홀아비로
(고비같이 똑똑하고 이악스러운 애를 맞아들이면 그 집도 복을 탄셈이지. 그런데 안성맞춤으로 고비와 망쇠의 눈치가 남스럽지 않으니 얼마나 신통바른 일인가.)
그는 금년가을안으로 그애들의 혼례를 치러야겠다고 작정하고있었다.
누리나는 콩바구니를 한쪽으로 밀어놓으며 웃방쪽으로 다가앉았다.
《좀 의논할 일이 있다.》
《뭘요?》
망이는 의미심장한 어머니의 눈길을 마주보며 의아해서 물었다.
《내 그애들 눈치를 몰라서… 고비란 년두 가만 보니 고게 속에는 엉큼대왕이 들어앉았다니까. 또 망쇠녀석두 덩어리가 커다란게 호박씨를 깔
능청을 부리며 시까스르는 어머니의 말에 망이는 긴장했던 낯색을 풀었다.
《허허…》
망이는 웃기만 했다.
누리나의 얼굴에도 자애에 넘친 웃음이 벙싯거렸다.
《수양딸 며느리삼기란 말두 있지만 정말 잘됐다. 그래 이번 한가위날에 그애들 혼례를 치러주자는거다.》
《… … …》
《가난구제는 나라도 못한다구 언제 우리 살림이 펴이겠니. 없는대로 성례를 치르고말자. 홀아비집엔 서캐가 서말이란 말도 있건만 서경집은 정말 궁상스러워 못보겠더라. 그래두 고비가 그 집에 들어가 녀자손이 좀 미치면 낫겠지. 키운 정으로 봐서는 고비를 좀더 곁에 두고싶다만…》
누리나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어머니, 생각 잘하셨소.》
망이는 고마움이 가득 어린 눈길로 누리나를 건너다보았다.
고비가 망쇠네 집 사람이 되기를 은근히 바라고있었고 또 그들의 사이가 가까와지도록 여러모로 왼심을 써온 망이였다. 하면서도 자기 의향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하지 못한것은 어머니가 어떻게 생각할지 알수 없었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먼저 이 일을 성사시켜주니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그럴수록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함께 미안스러움도 느끼였다. 그 귀여운 고비가 집에서 나간다고 생각하면 자기도 아릿해지는 마음을 금할수 없는데 어머니의 심정이야 오죽하랴. 요즘 집안가사를 고비가 도맡다싶이 하면서부터 늙마에 허리를 편다고 곧잘 우스개소리를 하시는 어머니였다. 그런데 고비를 시집보내면 다시 아침저녁으로 찬 부엌에서 서성거려야 할것이 아닌가.
망이가 이런 생각을 하고있는데 누리나가 문득 가슴꺼지게 한숨을 내쉬였다.
《그애들은 그렇다치고 네일은 어쩐단 말이냐?》
누리나는 볼언저리가 거밋한 아들의 얼굴을 측은하게 쳐다보며 띠염띠염 입을 놀렸다.
《한뉘 죽은 처자식만 생각하고있을테냐? 렬녀비는 세워두 렬부비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없는 놈이 다시 장가들어선 뭘하우.》
망이는 어머니의 마음을 눙쳐줄양으로 웃었다.
《그래 없는것들은 사람이 아니라더냐.》
푸념조로 말한 누리나는 문득 낯색을 바꾸며 아들을 쳐다보았다.
《웃마을에 이사왔다는 의원집시악씨가 어떻더냐? 을님이란 처녀 말이다.》
누리나의 눈은 사뭇 진지한 빛을 담고있었다.
《허허, 원 어머니두… 허허…》
얼굴이 벌개진 망이는 거북스러움을 웃음으로 굼때려는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일이 아니다.》
누리나는 낯을 찡그렸다. 망이가 자기 앞날에 대해 이렇게 상관없는듯 한 태도를 취할 때면 대범하다기보다 어딘가 모자라게 보여 밉광스러웠다.
《나같은 놈한테 누가 딸을 주겠다우?》
망이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소갈머리두 없다. 무에 축잡힐게 있다구, 쯧쯧.》
누리나는 아들의 태도가 못마땅해서 혀를 찼다.
《그럼 어디 매파를 보내보시구려.》
《응?》
누리나는 눈이 데꾼해져 아들의 낯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저도 노상 생각이 없진 않은 모양이였다. 아니 속깊은 아들이 이렇게 나올 땐 모름지기 무슨 마련이 있는게 틀림없었다. 의뭉스러운 자식같으니라구…
그런데 망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머리에 수건을 동졌다.
누리나는 눈이 커져서 물었다.
《아니, 이밤중에 또 어딜 갈려구?》
《예, 웃마을 의원집이 다 실그러져가는 빈집에 들었는데 기둥이라두 몇개 버티여주어야겠어요.》
《래일 하려무나. 온종일 먼길걸음하고 네몸이 견뎌내겠니.》
《래일부턴 홍경원의 방축쌓는 일을 시작해야겠구 또 비풍에 밤중에라도 그 집에 무슨 변고가 생기면 어쩌겠수.》
누리나는 한숨을 내쉬였다. 을님이네가 몸을 붙였다는 웃마을집이 다 헐어빠진 낡은 집이라면 밤중에라도 무슨 일이 생길지 어찌 알겠는가. 이전에 자기 집 바람벽도 비풍을 맞아 무너지는 바람에 무리죽음이 날번 하지 않았던가.
누리나는 망이가 밖으로 나간 다음에도 한동안 일손을 놓고 하염없는 생각을 쫓았다.
그는 눈굽이 뜨끔하여 두눈을 슴벅거렸다. 정말 자기 아들같은 사람은 다시 있을것 같지 않았다. 저렇게 장한 아들을 두고도 언제한번 배불리먹이지도, 뜨뜻이 입히지도 못하는것이 못내 한스러웠다. 착하고 부지런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지만 그것도 빈말에 지나지 않았다. 착하다면 자기 아들처럼 마음이 고운 사람이 또 어데 있으며 부지런하다면 자기 아들처럼 부지런한 농군이 또 어데 있을것인가. 그러나 세상은 착하고 부지런한 자기 아들을 짐승처럼 구박하고 천대하고 멸시하지 않는가. 천민으로 태여나 부곡마을에서 살기때문에 자기 아들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누리나는 죄스러웠다. 망이가 천민인 자기 자식으로 태여나지 않고 어느 귀한 집안에서 태여났다면 모름지기 지금처럼 살지 않을것이였다.
깊은 상념에 잠겼던 누리나는 갑자기 문밖에서 나는 무슨 기척에 정신을 차렸다.
문밖에서 난데없는 말발굽소리와 함께 투레질하는 말울음소리가 났던것이다. 누군가 주인을 찾았다.
누리나는 방문을 열고 쪼프린 눈으로 어둠속을 살펴보았다.
웬 사람이 문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저, 이 집에 금비란이가 계시는가 해서…?》
《금비요?…》
누리나의 되묻는 물음에 나그네는 다시 물었다.
《나루자치일을 보신다던가…》
《예, 예. 우리 아들이외다. 근데?…》
누리나는 말하다말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방에서 흘러나온 불빛은 으리으리한 량반의 차림을 비치고있지 않는가. 의혹, 공포, 불안…
《아, 바로 찾았군.》
량반은 마음을 놓는 안색이였다.
《지금 계시오니까?》
《저, 방금 어델 가느라구…》
누리나는 서둘러 대답하며 다시금 문밖에 눈길을 주었다.
《거 랑팬걸…》
저으기 유감스러워하며 잠시 생각에 잠기던 량반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방에 들어가도 페가 없겠소이까?》
량반의 차림새에, 더우기 자기를 존대하는 그의 말투에 누리나는 어정쩡해졌다.
량반이 자기 집을 찾아온것도, 량반에게서 이런 존대를 받아보기도 난생처음이여서 그는 어리둥절하지 않을수 없었다.
《허허, 놀랄것 없소이다.》
방안으로 들어온 량반은 너저분히 널린 콩깍지를 황황히 구석쪽으로 밀어치우고 방바닥에 엎드린 누리나에게 점잖게 절을 하였다.
누리나는 놀라움에 잠겨 얼른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그의 뇌리속에는 복잡한 생각이 갈마쳤다.
(량반이 천민에게 절을 하다니?! 이게 미친 량반이 아닌가?)
이윽하여 올방자를 틀고 점잖게 앉은 량반은 누리나를 건너다보며 물었다.
《어데 먼데 가셨는가요?》
《저 웃말에… 그런데 뉘신지?》
누리나는 황송스럽고 불안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물었다.
《예, 이제 차차…》
왜서인지 량반은 자기 소개를 뒤로 미루었다. 그리고는 어서 편안히 앉으라고 누리나의 팔굽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소탈한 몸가짐새며 진정어린 말씨며 그리고 전체로 쾌활하고 인정이 풍기는 젊은 량반에게 누리나는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끌려들어감을 느꼈다.
《벌써 찾아와 뵈와야할건데 차일피일하다보니 오늘에야 이렇게 허허…》
량반은 까닭없이 면구스러워하며 웃음을 띠였다. 그의 뒤말을 듣고서야 누리나는 그가 자기 집을 찾아온 까닭을 알게 되였다.
량반토호의 학정에 천재는 왜 그리 많던지 해마다 장마철이면 넘쳐난 버드내가 숱한 가옥과 사람들을 휩쓸군 했다. 작년에도 류례없는 큰물이 지는 바람에 숱한 인명피해를 냈다.
망이는 밤낮으로 사품치는 버드내를 떠나지 않았다. 그가 건진 사람만도 얼마인지 모른다. 그때 돼지구유통을 잡고 떠내려오는 한 로파를 물녘으로 끌어내였는데 그는 정신을 잃고있었다.
망이네는 그 로파가 깨성하고 행보를 옮길수 있을 때까지 근 달포가까이 구완해주었다. 로파는 눈물을 흘리며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루루이 치하를 하고 떠나갔는데 그가 바로 자기 어머니라고 량반이 말하지 않는가.
입을 하 벌리고 량반의 말을 듣고있던 누리나는 고개를 기웃거렸다.
《량반집 마님같진 않던데…》
의아쩍은 소리로 중얼거리던 그는 급기야 커다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저의 로모를 살려주신 은혜는 백골이 진토되도록 잊지 않겠소이다.》
량반의 거동과 어조에는 다함없는 감사의 정이 어려있었다. 그는 방문을 열고 바깥에 있는 사람을 불렀다.
《여보게, 막새.》
털썩털썩 신발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말구종군차림의 늙수그레한 사람이 꾸레미를 안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희번뜩이는 눈길로 방안을 둘러보고나서 안고들어온 꾸레미를 량반앞에 놓았다.
《그 전대의것두.》
량반의 말에 말구종군은 잔등에 걸멘 보짐을 풀었다.
그속에서 번쩍거리는 은병(고려시기의 은으로 만든 돈)이 나오자 누리나의 눈은 대뜸 휘둥그래졌다. 하긴 은병 하나는 베 100필, 쌀 50섬과 맞먹는 큰 돈이니 놀랄만도 하였다.
말구종군이 은병 하나를 량반앞에 밀어놓고나서 나머지 한개는 도로 보자기에 감싸려고 하자 량반이 그것도 마저 내놓으라고 했다. 말구종군은 난감한 표정으로 망설이였다.
《어서!》
량반의 호령기어린 말에 말구종군은 다시 마뜩잖게 눈을 희번뜩이며 나머지 은병도 밀어놓았다. 그는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머리칼로 신을 삼아올려야 할 은혜이오나 지금은 이것밖에 없사오니 약소한대로 가사에 보태도록 하옵시오.》
량반이 이러며 은병과 꾸레미를 누리나앞에 옮겨놓아주었다.
누리나는 황급히 사양했다.
《이러지 마옵시오. 인명을 어찌 돈으로…》
《그 말씀은 옳소이다. 하지만.》
량반은 자기 말을 꼭 들어야 한다고 미리 다짐하듯 《하지만》 이라는 소리에 힘을 주고나서 말을 이었다.
《성의를 받아두는것도 성의가 아니겠소이까.》
누리나는 너무나도 엄청난 일을 당하고보니 어쨌으면 좋을지 엄두가 나지 않아 잠시 침묵을 지켰다.
《내 묻고싶은게 하나 있는데 이댁
량반은 공식적인 관계는 다 끝났다는듯 서글서글한 웃음을 띠우며 말투를 바꾸었다.
《금비는 별명이구 원래 이름은 망이라구 하오이다.》
누리나가 귀인상스러운 량반의 얼굴을 훔쳐보며 대꾸했다. 미천한 자기 아들이 량반한테 존대받는것이 자랑스럽고 또 큰 돈이 생긴데 기뻐 평소에는 과묵하던 그도 입이 헤벌어지는 모양이였다.
《그 사람이 늘 어려운 사람들을 제일처럼 도와준다고 린근에서들 가물의 비같다고 하오이다.》
오늘을 당하고보니 누리나는 그사이의 만단시름이 다 풀리는듯싶었다. 평소에도 사람들이 아들을 칭찬할 때면 기쁨을 감출길 없었지만 오늘은 자기 아들이 더 돋보였다. 공은 닦은데로 간다고 하늘이, 천신이 도와주는것이 아닌가.
끼니걱정에 오늘은 풋콩까지 꺾어왔고 더우기 금년가을엔 고비와 망쇠의 혼례식도 치르고 또 망이도 무슨 마련을 볼려고 잡도리를 하던 판인데 이것은 분명 하늘이 내린 시주가 틀림없다.
부처한테만 시주하란 법이 있는가. 부처는 죽는 사람을 살리지 못해도 내 아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려냈는가. 대사를 앞두고 경사를 당한 그는 흡사 꿈을 꾸는것만 같았다. 아, 꿈이라면 제발 깨지 말아.…
량반이 떠나가려는지 옷깃을 여미며 말했다.
《우리가 길이 바빠 만나지 못하고 떠나가는데 혹 이다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역참마을에서 역졸노릇하는 흥도리란 총각애를 찾아가라고 일러주시오.》
량반은 당자인 망이를 만나보지 못하고 떠나는것을 못내 섭섭해하는 기색이였다.
《나리님의 고명을… 이처럼 큰 신세를 지고 선성도 모르고서야 죄스러워 어찌 살겠나이까.》
누리나가 황송스럽게 물었다.
마음같아서는 하루밤 류하라고 청들고싶었지만 귀한 량반을 루추한 집에 모실수도 없고 하니 이름이라도 알아두려는것이였다.
《달령성이라고 불러주시오, 자, 그럼…》
자리에서 일어선 량반은 두손을 맞잡고 머리를 숙여 읍을 하였다.
량반을 바래주고 방에 들어온 두식구(버드내의 학바위에서 돌아온 고비는 부엌문앞에서 량반이 떠날 때까지 기다리고있었다.)는 한동안 덤덤히 앉아있었다. 누리나는 그 량반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며 200필의 베천, 100섬의 곡식과 맞먹는 엄청나게 큰 돈이 생긴것이 여적 믿어지지 않아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은병을 처음 보는 고비는 저 주먹같은 쇠덩어리가 무엇일가 하는 의혹에 싸여있었기에 또한 침묵을 지켰다.
토방돌밑에서 가을밤답게 귀뚜라미소리가 제법 귀따갑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