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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회


제1장 명학소

6


뽀얀 비발속을 뚫고 달려온 가라말은 커다란 소슬대문앞에서 멈춰섰다. 윤기 번지르르한 검정말도, 그 말등에서 어깨숨을 몰아쉬는 중랑장 백태의 얼굴에도 비물과 함께 땀기가 번들거렸다.

엊그제 명학소의 버드내가에서 금시 비가 쏟아질것 같아 줄곧 말을 때려몰았으나 경천역말에 못미처 끝내 폭우를 들쓰고야말았다. 그래 하는수없이 역말의 객사에서 하루밤을 묵어 비가 좀 뜨음해진 다음에야 다시 길을 떠났었다.

백태는 이 집주인인 공주상호장 백가신의 아들이였다. 개경에 올라가 중랑장이라는 정5품의 무관직을 차지하고있던 그는 말미를 얻어 10여년만에 처음으로 개경의 무더위를 피해 피서를 할겸 고향을 다녀보러 내려왔다. 그런데 화덕현일대를 유람하던차에 급히 상경하라는 조정의 급보를 받았던것이다.

말등에서 내려 섬돌우로 올라간 백태는 말에서 먼저 내려 대문을 열어준 하졸의 앞을 지나 성큼 안마당에 들어섰다. 기암괴석들로 장식한 정원의 련못가에서 비를 피해 목단나무밑에 움츠리고있던 날개를 잘리운 학들이 껑충거리며 달아났다.

자기 처소인 사랑채앞에 이른 백태는 그때까지 우산을 펼쳐들고 공손히 뒤따르고있던 하졸에게 얼굴을 돌렸다. 개경에서 데리고 내려온 하졸은 습관된 자세로 다음령을 기다렸다.

《소세물.》

《알아들었소이다.》

하졸이 세면물을 떠오려고 뒤걸음쳐 물러간 뒤 자기 방에 들어간 백태는 젖은 옷을 벗어던지고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을씨년스러운 장마비를 맞으며 달려온 뒤끝이라 병풍을 둘러친 넓고 아늑한 방안의 보료우에 앉아 안석에 저바뜸히 기대니 만난시름이 풀리는듯 싶었다. 그는 저도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한가지 상념에 빠져들었다. 끝없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마비소리를 들으며 객사에서 묵던 어제밤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가득한것은 엊그제 버드내가에서 만났던 한 계집에 대한 생각뿐이였다. 온 나라를 기울여도 고르기 힘들만 한 미모를 가진 처녀였다. 공포가 어려있던 그의 얼굴모색이며 강바람에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던 그 예쁜 계집의 자태를 눈앞에 되새기던 백태는 저도모르게 《으음―》하고 신음소리같은 탄식을 내뿜었다. 빙충맞고 얼뜬 자기 처사가 못견디게 후회스러웠다. 당장 폭우가 쏟아질것 같은 조급증에 그리고 조정에서 급히 올라오라는 서간을 받은 뒤라 앞뒤생각없이 자리를 떴지만 하다못해 계집의 이름자나 거주지명이야 알아둘수 있지 않았는가. 더우기 가소로운것은 그들을 추적하던 관군들을 쫓아버린것이였다. 가련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다는 들뜬 기분으로 그런 호기와 만용을 부린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그는 달콤한 꿈을 꾸고난 뒤처럼 아쉽고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세면을 하고 의관을 정제한 백태는 목이 긴 가죽신을 끄당겨 신고 마당에 내려섰다. 아비인 백가신에게 하직을 고하러 가기 위해서였다.

《도련님.》

그는 누군가 자기를 부르는것 같기에 걸음을 멈췄다.

참대를 심은 커다란 오지화분들이 놓인 마당 한쪽에 자기의 어릴적 젖어멈인 그믐녀가 서있었다.

《그간 귀체만강하옵나이까?》

그믐녀는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아, 유모!》

백태 역시 반가운 소리로 부르짖으며 그한테로 다가갔다.

친어머니의 낯도 모르고 오직 젖어멈의 극진한 사랑과 애무를 받으며 자라난 백태는 그에게 각별한 정을 품고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고향집에 돌아와보고 그가 보이지 않기에 당장 데려오라고 서사며 청지기들을 다몰아세웠다. 그런데 오늘에야, 당금 개경으로 떠나게 된 때에야 그가 나타난것이다.

베옷에 감싸인 그믐녀의 쇠잔한 어깨가 가볍게 물결쳤다. 귀밑머리는 물론 이마전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에도 흰오리가 많았다.

《어멈도 많이 늙었구려. 참 얼마만인가?… 그간 어데 가있었나? 내가 얼마나 찾았다구.》

백태의 동정어린 말에 고개를 쳐든 그믐녀의 눈굽에는 물기가 맺혔다. 비록 머리에는 서리가 내리고 잔주름이 얽혔지만 아직도 아련하던 옛 모습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렇게 큰 나리가 되신 도련님을 뵈오니 쇤네는 정말…》

그믐녀는 백태의 물음에는 대답없이 이렇게 말하며 눈굽을 훔쳤다.

백태는 불현듯 자기가 개경으로 떠나던 날 그믐녀가 성밖 멀리까지 바래주며 당부하던 말이 귀전에 울리는것만 같았다.

《도련님, 부디 과거급제하시여 백성들에게 어진 정사를 베푸는 착한 선비가 되옵시오.… 쇤네는 매일밤 도련님의 길복을 신령님께 빌겠나이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며 말등자를 잡고 따라오던 젖어멈의 모습을 백태는 잊을수 없었다.

어린 자기를 품에 안고 잠을 재우던 그의 젊었을적모색도 눈앞에 삼삼했다. 한없이 애정어린 눈매로 자기를 굽어보며 소곤소곤 불러주던 자장가소리도…

백태는 저도모를 충동에 이끌려 그믐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를 위로해주려고 어깨로 손을 가져가던 백태는 잠시 망설이던 끝에 다시 손을 내리웠다. 자기를 키워준 젖어멈일지라도 어쨌든 그는 천한 노비요 자기는 그의 상전이라는 신분관념이 부지중 뇌리를 쳤던것이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젊은 마님께선 오시지 않으시오이까?》

그믐녀의 물음에 백태는 어름어름 대꾸했다.

《개경에 있네.》

《참 아가씨를 보셨단 말을…》

《응, 네살났어. 그런데 계집애야.》

《아유, 얼마나 기쁘시겠사와유. 첫보달(딸)은 금주고도 못산다는데…》

그믐녀는 감개어린 표정을 띠우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퍽도 예쁘시겠지유. 어느분을 닮으셨나이까?》

《어멈을 닮은것 같애.》

롱말처럼 뇌까린 백태는 이어 정색하여 그믐녀를 지켜보았다.

《원, 무슨…》

그믐녀는 당황한 기색으로 눈동자를 약간 샙뜨며 뒤말을 얼버무렸다.

백태는 자기 딸의 모색이 신통히도 그믐녀와 같다는 느낌이 머리속에 갈마들었다. 동그스름한 턱이며 오똑한 코날은 말할것 없고 이따금 눈동자를 샙뜨는 버릇마저 어쩌면 그렇게도 방불할가. 이것은 오늘 비로소 느끼는 의혹이 아니였다. 개경에 있을 때 해죽거리는 딸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는 이상스럽게도 젖어멈인 그믐녀의 모습이 련상되군 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머리를 세차게 도리질했다. 귀한 집 가문에 태여난 규수를 하필 늙은 녀종의 얼굴에 견줄게 뭔가 하는 자격지심에서였다.

백태의 찌르는듯 한 눈길앞에 얼굴이 불그레해져 잠시 어쩔바를 모르던 그믐녀는 《쇤네는…》하고 허리를 숙이며 황황히 자리를 피해버렸다.

만약 백태가 조금만 더 그믐녀를 주시했더라도 그의 거동에서 수상쩍은 기미를 눈치챘을수도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벌써 그믐녀의 존재를 안중에서 지워버린 백태는 아비가 있는 대청쪽으로 방자스런 걸음을 옮기였다.

넓은 대청의 모란무늬를 수놓은 비단보료우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백가신은 아들이 들어서자 웃몸을 일으켜앉았다.

대청에 들어서는참 백태는 아비에게 머리를 조아려 절을 했다.

《비를 맞았겠구나. 오자바람으로 급히 올라가야 하니?》

《예.》

백가신은 혀를 찼다. 가량가량한 몸에 얼굴마저 강마른 그는 어딘가 뱀을 련상시키는 그런 차거움과 살기가 풍기는 늙은이였다.

그들부자는 모색이 엇비슷했다. 둘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얼굴색이 창백한데 얇은 입술과 커다란 귀가 특징적이였다. 비정상인 그들의 큰 귀는 마치도 먼데서 울리는 소리를 들으려고 손을 귀가에 오그려붙인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차이가 있다면 아들인 백태는 동그스름한 보기 좋은 턱을 가진 반면에 아비인 백가신의 턱은 삽날처럼 앞으로 들린 넙적한 주걱턱이였다. 이 턱으로 하여 백가신은 더 드세고 탐욕스러워보였다. 그리고 한창 젊은 나이인 백태는 기골이 장대하면서도 균형잡혔으나 이미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백가신은 등어리가 약간 구부정했고 량어깨가 우로 솟아있었다. 백가신은 웃는 법이라군 별로 없었고 어쩌다 웃을 때조차 입은 벌리지 않고 흥흥 코소리만 냈다.

조상때부터 공주에서 살면서 아근의 부곡들을 틀어쥐고 령주마냥 세력이 등등하던 백씨문중은 고려봉건국가의 중앙집권체제가 점점 강화되면서부터 상호장이라는 한갖 토호로 전락되고말았다. 하지만 아직도 조정에서는 이 지방 토호들을 통해서만 부곡에 대한 수탈을 할수 있는 조건에서 이들 토호의 세력은 무시할수 없는것이였다. 더우기 백가신은 촌정이나 부호장, 호장 등 지방향리들의 우두머리인 상호장으로서 공주일대의 가장 뿌리깊은 유력자이고 부호였다.

고을원으로 지주사들이 개경에서 파견되여오긴 하지만 그들은 지방의 실정에 어두운데다가 수시로 교체되므로 자기 부임지역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자연히 공주일대에서 오랜 세력지반을 가지고있는 백가신에게 의뢰하여 정사를 펴지 않을수 없었다.

만약 고을원이 그를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정사를 하는 경우 백가신은 보이지 않는 세줄로 이모저모 방해하여 결국 어느 한가지도 제대로 할수 없게 하였다. 관가의 아전들이나 시골의 향리들은 언제 갈려 개경으로 올라갈지 모르는 지주사보다 백가신의 편에 붙는것을 더 안전하게 여기고있었던것이다. 성미가 잔혹한 백가신은 자기 뜻을 거역하는 향리들에 대해서는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모해하고 제거해치우므로 향리들은 두려움을 품고 그에게 공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아무튼 고을의 정사는 지주사의 관저인 동헌에서보다 공주일대의 실제적지배자인 백가신의 집 사랑방에서 시행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런 백가신이로서는 자기 아들이 왕도 개경의 벼슬아치란것이 여간 대견스럽지 않았다.

《그래 산길에서랑 초적놈들을 만나지 않았느냐?》

백가신은 아들의 름름한 체구와 무관다운 코밑수염을 흐뭇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깟 좀도적들…》

백태는 편안히 자리를 고쳐앉으며 제비초리같은 코밑수염을 갈라붙였다.

《그래두 조심은 해라. 누데기옷에 이만 끓인다구 시국이 어수선하니 이즘은 사처에서 도적이 창궐하여 어디 마음을 놓겠더냐. 그건 그렇구. 참 너는 벌써 중랑장의 벼슬을 한다구 했지?》

《예.》

《그래 중랑장의 록봉은 얼마나 되느냐?》

《뭐 백스무섬이라나봅니다.》

백태는 그까짓 록봉따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꾸했다.

《음, 백스무섬이나… 그거 대단하구나. 그러니 한달에 몇섬폭이냐. 일년은 열두달이라 매달 열섬폭이구나. 적지는 않구나.》

《그래두 늘 뒤가 딸려 쩔쩔매는걸요.》

《씀씀이가 헤프면 끝이 없지. 가만있자. 우리 고을원두 너와 같은 5품관인데 얼마나 받는다더라… 응, 그래. 야든여섯섬 열두말을 받는더랬지. 그러니 너는 여기 공주지주사보다 서른네섬이나 더 타는 몫인데 그게 좀 많으냐?》

백가신은 해마다 여러가지 명색으로 백성들로부터 엄청난 재물을 걷어들이는 공주의 지주사가 록봉따위는 새발의 피만큼도 여기지 않는다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백태가 자기에게 손을 내밀지 못하게 하느라고 미리 침을 놓는것이였다.

《그래 요즘 개경은 어떠냐? 듣자하니 서도놈들이 또 들고일어났다며?》

《그렇소이다.》

《거 왜 늬들 칼찬 무리들이 조정에 들어앉은 뒤로 나라안이 이렇게 뒤숭숭하냐?》

《… …》

백태는 아비가 자기를 욕하는것 같아 심기가 불편했지만 잠자코 있었다.

《힘세다고 소가 왕노릇 할수야 없지.》

혼자소리로 중얼거린 백가신은 말머리를 돌렸다.

《그래, 너는 앞으로두 장참 무관질이나 할 셈이냐?》

전에도 루루이 이야기를 했는데 계속 비틀기만 하는 아비가 언짢아 백태는 그냥 침묵을 지켰다.

《그래그래, 요즘은 주먹 센 무신들 세상이라지.》

백가신은 비웃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명주바지를 걷어올리더니 쭈그렁가지처럼 홀쭉한 종아리를 썩썩 긁었다.

《하지만 너는 주먹바람에 들떠다니지 말구 가산을 불구기 위해 전력해라. 그래서 너를 개경에 보낸게 아니냐. 아무튼 너는 나라의 벼슬아치이기 전에 내 아들이란걸 잊지 말아야 하니라.》

백태는 아비의 속이 빤드름히 들여다보여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재물에 미친 좀스런 촌부자, 그러니 한뉘 시골에서 상호장따위의 나지래기벼슬밖에 못하지 않는가.)

백태는 자기가 개경으로 공부떠나던 10여년전에도 아비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던것이 생각났다.

공주일대의 오랜 토호출신으로 권세를 가지고 영화를 누리던 백가신은 백태가 열다섯살나던 해에 공부시키려 개경으로 올려보냈다. 왕도(수도 개경)에 틀고앉은 량반들의 점점 커지는 전횡에 대한 위구와 시골향리의 때를 벗어야겠다는 야심이 그로 하여금 이런 용단을 내리게 했는지 모른다.

백태가 개경으로 떠나기 전날밤 백가신은 아들을 불러앉혔다.

《너 세상에서 제일 귀한게 뭐라구 생각하느냐?》

무릎을 꿇고앉은 백태는 아비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잠시 우물거렸다. 그는 괴벽스러운 아버지를 늘 두렵게 여기고있었다. 하기에 아비곁을 떠나 개경으로 가게 된것을 은근히 기뻐하는터였다.

《모르겠느냐?》

재촉을 받고서야 백태는 어름어름 대꾸했다.

《저… 의리를 지키는게라고 생각하오이다.》

《얼뜨기같은 녀석, 그따위 경전에 씌여있는 글을 곱씹다니…》

혀를 끌끌 찬 백가신은 헛기침을 하고나서 말을 이었다.

《내 말을 명심해 듣거라. 량반이 량반으로서 구실을 하려면 학문과 재물과 권세가 있어야 하느니라. 그중에서도 세상에 재물처럼 귀한게 없다. 재물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수 있고 지옥문도 열고 나갈수 있느니라. 한데 재물이 생기는 구멍은 바로 권세에 있다. 그래서 내가 너를 개경에 보내는게다. 권세를 쥐려면 권세있는 량반들과 가까이 사귀는게 상수다. 나무는 큰 나무밑에 있다간 죽고말지만 사람은 큰사람밑에 있어야 덕을 보게 된다. 사귀는 묘술은 코아래진상을 하는게 기중 빠르니라. 아무리 세도 당당한 량반일지라도 어렵게 여길게 없다. 기름먹인 가죽은 부드러워지는 법이니까. 내 말을 알겠느냐?》

《예.…》

아비앞을 빨리 벗어나고싶은 심정에서 백태는 덮어놓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구 중요한건 출세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거다. 기회란 늦건 빠르건 닥쳐오는 법인데 미련한 족속들은 그것을 분별할줄 모르고 써먹을줄 몰라서 왕왕 놓쳐버리고마는구나. 한번 잃은 기회는 두번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너는 그 어떤 기회든지 너의 출세에 유리한 때가 오거든 말고삐를 틀어잡듯 단단히 거머쥐여야 한다. 그러면 너도 모르는사이 영달의 길에 빨리 다달을수 있을게다. 명심했느냐?》

《알았소이다.》

《이 두가지와 함께 세번째로 당부할건…》

자기 언변에 스스로 도취한 백가신은 눈을 감고 손가락을 꼽으며 웃몸을 흔들거렸다.

《초지일관(처음 먹은 뜻을 관철)하기 전에는 내앞에 나타나지 말라는게다.》

《각골명심하겠소이다.》

백태는 그때 개경에 올라가면 집으로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비의 곁을 물러났다.

그런데 10여년만에 고향집으로 돌아왔으나 재부에 대한 아비의 탐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재물에 환장했다고 해야 옳을것이라고 백태는 생각했다.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메우지 못한다고 재물에 대한 백가신의 탐욕은 실로 한정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도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을 느끼게 되는 소금물과 같은것이였다. 재물에 대한 갈증을 끄기 위해 백가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결국 겨울날 진눈덩이 굴러가듯 그의 재산은 자꾸 커지고 불어났다.

재물이란 또한 거름무지와 같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악취를 풍기는 법인데 거만의 재부는 백가신이를 타락시키기에 충분한것이였다. 너무도 일찍부터 시작된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은 그의 건강을 좀먹어버렸다. 쾌락에 대한 갈구와 그에 응할수 없는 자기 육체에 대한 불만은 천성적으로 메마른 그의 성미를 더욱 괴퍅하고 잔인하게 만들고말았다.

아래방문이 살며시 열리며 머리를 쪽진 젊은 계집이 대청에 들어섰다. 분내가 몹시도 풍겼다. 그 녀자는 자그마한 버선발을 비단치마자락으로 가리우고앉으며 백태쪽에 할끗 추파를 던지였다.

《도련님, 첨 뵈와요.》

면식없는 녀인의 인사에 백태는 어색한 몸가짐새로 고개를 약간 숙였다.

백가신이 공연히 건기침을 깇으며 거북스러워했다.

그제야 백태는 애비가 또 작은 댁을 맞은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령감, 홍경원의 주지스님이 오셨어요.》

그 녀자의 거동이며 말씨에는 교태가 자르르 흘렀다.

《어 그래, 어서 모셔들이지 않구…》

백가신은 민망한 순간을 모면할 일이 생긴것이 다행이다싶어 덤벼쳤다.

애비의 작은댁이 나간 뒤 얼마 안되여 금실로 수놓은 검은 비단장삼을 입고 붉은 비단가사를 어깨에 걸친 늙은 중이 대청에 들어서며 점잖게 인사를 건늬였다.

반색하여 일어난 백가신은 그의 손을 잡아 보료우에 앉혔다.

《그러지 않아 일간 대사께 가려던 참이였소이다.》 하더니 백가신은 아들한테 머리를 돌렸다.

《인사하거라. 우리 집에서 단골로 섬기는 홍경원의 주지 무광대사이시다.》

백태는 자리를 고쳐앉으며 머리를 숙였다. 몸집이 뚱뚱하고 불깃한 혈색에 눈가죽이 처진 무광은 행동거지는 물론 말소리마저 조용하고 느릿했다.

《그래 금년시주는 좀 들어옵니까?》

《웬걸요. 시절이 어수선하니 부처님에 대한 공경심마저 없어지는지 금년은 나까지 동냥자루를 메고나서야 할가분데요.》

무광은 난감한 표정을 띠우고 느릿느릿 입을 벌렸다.

《숱한 전장에 노비를 가지고있는 홍경원이야 뭘…》

《금년같은 가물에 또 장마까지 겹쳐드니 우리 전장인들 무사할리 있나요.》

《하긴 내남없이 야단은 야단이야.》 하며 백가신은 혀를 찼다.

《아무튼 우리 절은 존장께서 계속 보살펴주셔야겠소이다.》

《예, 황송무지로소이다. 시절이 아무렇든 불공이야 어찌 게을리하겠소이까.》

백가신은 두손을 합장하며 엄숙하게 뇌였다. 그는 거의 광적이고 병적이라 할 정도로 부처를 섬기였다. 그는 자신을 독실한 신자로 자부하고있었다. 그가 부처를 조상보다도 더 고맙고 더 귀한 존재로 떠받드는데는 지상에서의 부귀영화에 이어 극락세계가 있다는 천상에로의 길을 쉽게 마련하려는데도 목적이 있었지만 보다는 죄많은 인생의 위안거리를 거기서밖에 찾을수 없었기때문이였다.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백가신의 눈에는 거의나 미친 사람과 같은 그런 광적열기가 번뜩거렸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무광대사는 눈을 감고 조용히 념불을 외웠다.

무광은 원래 개경의 어느 고관대작의 아들이였으나 벼슬길로 나갈 대신 중이 되는 길을 택했다. 《호국호왕지교》(나라를 지키고 왕을 지키는 교리)라 하여 불교를 국교로 내세우고 우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시골의 아전들에 이르기까지 끔찍이도 부처를 숭배하던 시절이라 고관대작들은 물론 력대의 임금들도 자기의 여러 왕자들중의 한둘은 의례 절간으로 들여보내는것이 하나의 세속으로 되여있었다.

무광은 홍경원의 중이 된 후 자기 아비의 세줄로 젊어서 인차 절간의 재정을 맡아보는 감사의 자리를 차지할수 있었다. 천성이 탐욕적이고 음흉한 그는 자기 재물을 늘이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하였다. 홍경원의 부처를 섬기면 래세에 극락간다는 그의 달콤한 설교에 속아넘어가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홍경원으로 시주하러 가는 사람들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는 자기 절간의 교세를 확장하여 나중에는 가야사의 영향하에 있던 이곳 공주일대도 홍경원의 포교지역으로 만들었고 이런 수완으로 하여 일찍 주지의 승직을 맡게 되였다.

그가 공주일대에 교세를 펴는데서 이곳의 유력자인 백가신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그 신세갚음으로 무광이 또한 백가신을 이모저모로 비호하고 두둔해주었다. 이처럼 그들은 젊어서부터 서로 깊이 유착되여있었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절간에 깊숙이 들어박혀있던 무광도 늙은 몸을 움직여 각 곳을 돌아다니며 낟알이건 베천이건 하나라도 더 시주받으려고 돌아쳤다. 더우기 금년엔 류례없는 왕가물로 저희네 전장이 페농하다싶이 되다보니 더 안이 달았다. 그런데 명학소의 신풀이논벼가 기막히게 잘되였다는 말을 들은 그는 구미가 바짝 당겼다. 장마통에 큰물이 져서 신답풀이아래에 있는 저희네 전장이 조금만 물에 잠겨도 트집을 걸어 신풀이논벼를 빼앗을 심산이였다. 그런데 명학소는 백가신의 관할지역이라 그의 동태를 중떠보기 위해 장마비도 마다하지 않고 그를 찾아온것이였다.

《참, 명학소의 버드내가에 푼 논의 벼가 빼물게 잘되였더란 말을 들었는데…》

무광은 거적눈으로 백가신의 낯색을 살폈다.

《아, 그 논?… 신풀이는 워낙 나라법에 3년간 조세를 받지 않게 되여있어서…》

벌써부터 신풀이논에 욕심을 부리는 무광의 속심을 넘겨본 백가신은 서둘러 연막을 쳤다. 명색뿐인 나라법을 코에 걸고 그 논벼를 알쭌히 제것으로 만들 작정이던 백가신은 무광의 말에 놀라기까지 했다. 아무리 불가를 섬기는 불도로서니 그 노란자위같은 명학소의 신풀이논마저 홍경원에 섬겨바칠 생각은 꼬물도 없었던것이다.

《한데 우리 불도들의 말이 그 신풀이방천을 높이 쌓은 관계로 장마통에 벌물이 지면 아래쪽의 우리 전장이 물에 잠길 우려가 있다구 하더이다.》

무광은 념주를 주무르며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나두 장마걱정에 오늘래일 그곳으로 나가볼 생각이오만 아마 그럴리야…》

당장 명학소에 나가 선손을 쓰지 않으면 무슨 랑패를 볼수도 있다는 우려를 느낀 백가신은 한가스레 앉아 수작질하는 이 순간조차 몸이 쑤시여 견딜수 없는듯 무척 조급해하는 기색이였다.

백태는 명학소의 신답이란 어떤 논이기에 이들이 점잖은 말투속에서도 뿔을 세우는지 알수 없었어도 아무튼 재물을 탐내는데는 자기 아비나 홍경원의 주지나 한바리에 실어도 조금도 기울지 않을 한등속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는 다만 명학소의 앞강가에서 절색이라고 할수 있는 계집을 지나쳐버렸다는 아쉬움을 다시금 가슴 쩌릿하게 느꼈을뿐이다.

그리고 아무때든 그 계집을 꼭 찾아내고야말리라는 속심을 굳게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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