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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9 회


제 5 장

8


새해에 들어와서도 많은 눈이 내렸다.

그렇게 쌓인 눈이 언제 다 녹으랴싶었는데 어느새 대동강이 풀리고 잔디밭에 파아란 새싹들이 돋아나더니 나무들에 물이 올라 서학산은 한결 푸르러보였다.

종합청사와 가공조립종합현장사이에 있는 대형탑식구호판둘레에는 후방부의 부지런한 녀동무들이 비닐덮개를 씌웠다벗겼다 온도를 조절하며 정성들여 꽃밭을 가꾸더니 늦은 봄에나 필수 있는 여러가지 꽃들이 피여나기 시작했고 함박꽃까지 몇송이 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하였다.

그 건너편 소공원에는 연두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실버들이 흐느적이고 양지쪽에서는 진달래가 발그레한 얼굴을 내밀었다.

리진오는 봄이 갑자기 찾아온듯이 주위를 놀랍게 바라보며 출근하고있었다. 삼촌과 함께 정문에 들어선 영진이는 주강직장이 아니라 판매과쪽으로 향했다.

《넌 어딜 가니?》

《온실에요.》

《온실?》

《꽃가꾸러 가요.》

전기로공과는 너무나 인연이 먼 소리를 하자 그는 허허 웃어버렸다.

《체, 삼촌, 4. 15날 보라요. 우리 사로청원들이 현지지도사적비앞에 꽃바구니를 만들어놓을테니까요.》

《그래?!》

《너무 일찍 필가봐 야단났어요. 어떤것은 눈치없이 벌써 피기 시작했다니까요.》

그러고보니 정말 명절이 래일모레이다. 그는 지난 여섯달동안 2천대증산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투쟁을 지휘하느라고 봄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4월 30일까지 수행하자던 2천대증산과제를 생산지휘를 잘 짜고들면 4월 15일까지 완수할수 있을것 같아서 당에 그렇게 보고를 올렸었는데 맹세한 날자대로 2천대증산고지를 돌파하게 되였다. 그래서 박철산당비서와 얼마전에 공부를 끝내고 학교에서 돌아온 지배인은 가벼운 걸음으로 어제 저녁차로 평양에서 소집된 회의에 올라갔다.

《당중앙에 증산계획을 다 수행하였다고 보고해야지요?》

어제 일군들이 모여앉은 자리에서 박철산당비서가 이렇게 말했을 때 리진오는 선뜻 대답했다.

《보고해주십시오. 래일 밤까지는 2천대증산분의 마지막차가 다 조립될겁니다.》

오늘중으로 마감소재를 생산해서 밤안으로 가공에 넘기면 래일중으로 조립을 끝낼수 있을것이다.

일과대로 9시정각에 종합지령실에 들어선 리진오는 마감전투의 복잡한 정황들을 처리하고 잠시 숨을 돌리려고 창가에 가섰다. 창문밖에서 물이 오른 버들이 천천히 그네를 뛴다.

그런 때 밤교대를 마치고 돌아갈 차림을 한 은하가 똑똑… 문을 두드리고 방에 들어왔다. 방금 목욕을 하고 나왔는지 얼굴이 반들반들하였다.

《이거 정말 오랜만이구만. 어서 앉소.》

병원문앞에서 그 일이 있은 후 기사장을 볼낯이 없어서 피해다니는 은하였다.

《좀 이야기할게 있어서…》

《자, 앉아서 이야기하우.》

《아니예요. 잠간이면… 저, 기사장동진 아직 료양소에 가보지 못하셨지요?》

《료양소?》

《네, 우리 직장장동지한테…》

오선달직장장은 2천대증산전투를 결속한 후에 병치료를 하겠다고 하는것을 당비서가 우겨서 료양소에 보낸것이다.

《왜 그러우, 병이 더하다우?》

《아니예요. 짬이 있으면 한번 가보시는게 좋을것 같아 그래요. 의사들은 차도가 있다구 하지만 직장장동지의 얼굴색은 좋지 않더군요.》

리진오는 속으로 손을 꼽아보았다. 직장장이 료양간지 벌써 한달이 되였다.

《제가 보기에는 직장장동진 무슨 고민이 있는것만 같아요.》

《고민?》

《아니, 그건 제 생각이예요. 직장장동진 기사장동지가 상하지 않았던가 하고 걱정을 하시더구만요.》

리진오는 많은 일이 발목을 붙잡고있었지만 가만있을수 없었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리진오는 마침 료양소쪽으로 가는 화물자동차가 있어서 적재함에 뛰여올랐다. 운전사가 앞자리를 권하는걸 굳이 사양하였다. 그는 시원한 들바람을 한껏 들이마시고싶었던것이다.

차가 떠나자 그는 모자를 눌러썼다. 귀에서 휘파람소리가 들렸고 옷자락이 펼럭거렸다. 상쾌했다. 아지랑이 가물거리는 지평선과 푸른 산우로 펼쳐진 맑은 하늘, 그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있는 새들과 자로 대고 금을 그은듯 곧게 뻗은 물길에 반사되여 반짝이는 해빛 그리고 거름을 내는 뜨락또르들이 널린 살진 대지며… 하마트면 이 유정한 봄을 느끼지 못할번 하였다.

리진오가 료양소뜨락에 들어서자 오선달직장장은 눈이 둥그래서 달려나왔다. 전투를 결속할 때는 기사장이 보통으로 바쁜것이 아니라는것을 잘 아는 직장장이였다.

리진오는 양지바른 곳 긴걸상에 앉은 다음에야 병문안을 온다는 자기가 빈손이라는것을 깨달았다.

《급히 오느라고 담배밖에 권할것이 없구만요.》

《컬컬하던김에 아주 맞춤이외다. 간호원한테 다 털리고 어제와 오늘은 촐촐 굶었다니까요.》

오선달직장장은 연기를 허파깊이 빨아들였다.

공장형편을 간단히 알려준 리진오는 직장장이 줄담배를 태우는것을 보며 재삼 사과하였다.

《벌써 찾아왔어야 하는걸 늦었습니다.》

《하긴 만나고싶었수다. 나이가 들어가는 징조인지 만나서 조용히 이야기를 하고싶더구만요.》

뭉게구름이 앞산에 그림자를 던지며 고요히 흘러가고있었다.

오선달직장장은 부신듯이 눈을 쪼프리고 한참 하늘을 바라보다가 회심에 잠긴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지난 세밑 어느날인가 당위원회에서 비판을 받고 집으로 돌아갈 때였수다. 그날 기사장동무의 아버님과 같이 퇴근길에 올랐는데 로인님은 이말저말 들려주다가 느닷없이 이렇게 묻지 않겠소. 자네가 죽으면 이 공장에 슬퍼할 사람이 몇이나 되고 죽은 후에 오래오래 잊지 않고 추억해줄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구 말이요.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그 깊은 뜻을 리해하지 못하고 청승맞은 소릴 한다구 생각하지 않았겠소. 정말 내 지난날은 서글픈 삶이였지요.…

이 료양소는 거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있어서 면회가 허락되는 일요일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요. 내가 료양소에 입소한 다음날이였수다. 그날도 일요일이여서 병문안자들이 어찌나 찾아오는지 료양소는 치료기관이 아니라 거리의 시장같이 되더구만요.

내가 든 13호실에는 제강소에서 일하는 부직장장과 편직물공장의 털보직장장하고 셋이 있었는데 그들한테 숱한 사람들이 찾아왔수다. 병문안자들은 들고온것을 헤쳐놓고 속탈때문에 먹지 못하는 내게 자꾸 권하더구만요.

그날 밤이였수다. 자리에 누운 나는 달밝은 밖을 내다보며 과연 나한테는 누구누구가 찾아오겠는가 하고 생각해보았수다. 아무리 더듬어보아도 찾아와줄 사람이 다섯손가락안에 들더란 말이외다. 예견한것처럼 다음공일날도 그다음 공일날도 나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없었지요. 같은 방의 두사람들한테는 꼬리를 물고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우리 직장에선 아무도 찾아오지 않더란 말이외다. 처음에는 화가 났구 다음에는 외로와졌구, 그때부터 나는 나 오선달이란 인간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일요일이 되면 추운대로 밖에 나가 서성거려야 했지요. 나를 찾아온 사람들이 들고온것을 옆의 사람에게 권할적도 있어야지 글쎄 그런 경우는 없고 옆의 사람을 찾아온 병문안자들이 권하는것을 받기만 해야 하니 그 자리에 어떻게 앉아있겠소? 밖에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어데 나갈데가 있길 하나, 젊었을 때 놀음놀이를 배웠으면 장기판에라도 끼웠겠는데 장기란 시간도적놈이라구 배우지 않아서 그런 판에도 끼우지 못하구.… 병문안자들이 오면 나는 밖에 나가 추녀아래서 손을 겨드랑이에 끼고 눈내리는 하늘을 쳐다보며 지난날을 돌이켜보았지요. 그제야 기사장동무 아버님 말의 깊은 뜻을 깨닫기 시작했다니까요. 그후의 어느 일요일 저녁때였수다. 병문안왔던 사람들도 다 돌아가고 저녁식사를 하게 되였는데 키가 큰 청년이 헐떡거리며 털보령감을 찾아왔수다. 그 청년은 방에 들어오더니 병문안의 말은 고사하고 비위좋게 〈직장장아바이, 나 점심 못 먹었어요. 무얼 좀 달라요.〉 하지 않겠소. 그 청년은 다른 동무들이 가져온 사탕이며 통졸임들을 닥치는대로 집어먹더구만요.

〈이녀석, 무엇이 바빠서 제때에 먹지도 못하구 드달려다니는거냐?〉 털보직장장이 이렇게 욕을 하니까 그 청년은 대답으로 주머니에서 넓은 종이를 한장 꺼내놓습디다. 기술혁신을 하기 위한 도면이였지요.

털보직장장은 안경을 코에 걸고 도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얼굴을 들며 〈머리가 기껏 이렇게밖에 돌지 않아?〉하고 욕을 합디다. 허지만 그 청년은 그냥 먹어대며 〈그래서 왔지요 뭐.〉하고 히쭉 웃는게 아니겠소!

나는 찾아올 사람을 기다리는데 털보직장장은 찾아온 사람에게 욕을 퍼붓구 청년은 그 욕을 웃음으로 넘기더란 말이요.… 그때 느낀 생각을 어떻게 표현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수다. 하여간 그때 그 청년이 짓는 웃음이 얼마나 부럽던지. 아마도 돈이 그 웃음처럼 부러웠으면 나는 은행금고라도 털어낼 생각을 했을거외다. 그런걸 나는 이제야 깨달았구만요. 사람옆에 사람이 있어서 사는 보람이 있구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들을 위해서 일한다는걸 너무나 늦게야 깨달았단 말입니다.》

한정빈국장은 료양소에 간 기사장이 이제나저제나 오는가 해서 기다리다가 종합지령실에 가서 그의 움직임을 알아보았다. 기사장은 료양소에 갔던 길에 그 아근에 있는 분공장에 들렸다는 련락이 왔다고 했다.

늘 일에 몰리고 시간에 쫓기여 공장에만 붙들려있는 기사장으로서는 떠난김에 그쪽일을 살펴보는것이 응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정빈은 떠날 때 자기가 개인적인 문제때문에 할말이 있다고 강조한것을 망각하고있는것 같아서 섭섭하였다. 그는 벌써 며칠전부터 다른 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 기사장과 만나려고 벼르고있었다. 2천대증산과제를 영예롭게 결속하게 되는 오늘 곡절많던 증산투쟁의 나날을 함께 돌이켜보고싶었던것이다.

한정빈이 종합지령실에서 나오려고 하는데 평양에서 전화가 왔다. 박철산당비서가 기사장을 다급히 찾고있었다. 한정빈은 지령장한테서 송수화기를 넘겨받았다.

《여보게, 위대한 수령님께서 치하해주시였네.》

박철산당비서는 밑도 끝도 없이 격동된 목소리로 웨치였다.

《여보게, 좀 자세히 말하게. 어떻게 되였다구?!》하고 한정빈은 수화기를 귀바퀴가 아프게 갖다붙이며 웨쳤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배인이 2천대증산과제를 오늘저녁 현재로 끝내게 된다는 보고를 올리자 대단히 만족하시여 뜨락또르공장 전체 로동자, 기술자들에게 감사를 주시였다는것이다.

《아니, 한시간전이 되나마나하네. 지금 회의를 끝내고 막 나오는 길일세.… 정빈동무, 안들리는가?》

박철산당비서는 그냥 찾고있었지만 한정빈은 기뻐해야 할 이 시각에 자책의 아픔때문에 대답을 못하고있었다.

《정빈동무, 들었는가?… 왜 말이 없어?》

《들었네. 다 들었네. 진심으로 축하하네.》

《못난 친구같으니, 왜 날 축하하나? 자넨 뭐 남인가?》

《그래 언제 돌아오겠나?》

《래일이나 일이 끝날걸세.》

《래일은 무슨 래일이야. 야밤에라도 돌아오라구!》

《허허, 나도 빨리 돌아가고싶네. 기사장은 어디 갔는가?》

《분공장에 나갔네. 내 이제 곧 알려주겠어.》

한정빈은 전화가 끝나는 길로 분공장에 가있는 리진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곧 가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평양소식을 들은 리진오는 환희에 넘치여 부르짖었다.

종합지령실을 나온 한정빈은 리진오가 돌아올 판매과쪽 문을 향해서 걸음을 옮기였다. 시운전장에서는 《천리마》호와 《풍년》호뜨락또르들이 부르릉거리며 돌아쳤다. 2천대총조립의 완성과 함께 시운전도 동시에 끝낼 목표밑에 일을 다그치고있는것이다.

한정빈이 판매과쪽으로 가는데 벌써 기사장이 헐떡거리며 문에 들어섰다. 환희에 휩싸인 얼굴이였다. 한정빈은 기사장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해서 먼저 걷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해가 퍼그나 기울었다. 바래말린 옥양목같이 하얀 구름이 천천히 모양을 변하며 흐르고있었다.

그들은 공장의 전경이 내다보이는 들름한 둔덕에 올라섰다. 대동강가에서 써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리진오는 문득 아까 료양소에 갈 때 국장이 할 이야기가 있다고 인차 돌아와달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 사죄하였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인차 돌아선다는것이 그만 이럭저럭…》

《아닌게아니라 기다렸소.》

《당비서동지랑 언제 돌아오신답니까?》

리진오가 먼저 침묵을 깼다.

《오늘 저녁에 오겠지.》

《그새 정말 수고하셨습니다.》하고 리진오는 어버이수령님의 치하를 받은 일을 회상하며 흥분해서 말했다.

《국장동지가 애쓰신걸 공장사람들은 잊지 않을겁니다.》

《내가 애쓴건 사실이지.》

한정빈은 기계적으로 외우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리고 련거퍼 빨고나서 말을 이었다.

《애쓴건 사실인데 무엇때문에 그리고 어떻게 애를 썼는가 하는 과정이 문제지. 성실한 과정이 있어야 그 결과도 귀중한거라니까!》

《왜 또 그 이야기를 꺼내십니까?》

리진오는 가볍게 화를 냈다. 그가 그렇게 말한것때문이였는지 한정빈은 가슴에 쌓여있던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말았다. 국장은 삶의 신념이 깨끗할 때만이 그 충실성 역시 순결한것으로 되며 그 삶이 시대에 대한 열정으로 불탈 때만 그 충성심 역시 뜨거운것으로 된다는 리진오에게서 배운 생활의 진리를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말이 나가지 않았다. 이야기한다고 하여 추한 흔적이 지워지지 않을것이다.

서쪽하늘에 널린 구름에 노을이 물들어 수채화같은 화폭을 펼쳐놓았다.

한정빈은 마치도 그렇게 아름다운것을 처음 보듯 눈을 떼지 못하고있었다. 마음속의 추한것을 밀어내게 하는 아름다움이였다.

《국장동지, 빨리 가십시다.》

국장의 안색을 살피던 리진오가 재촉하였다.

《감사를 전달하는 모임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준비해야지.》

그 준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빨리 2천대분의 마지막뜨락또르조립을 끝내는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조립직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조립장의 문에서 뜨락또르들이 앞을 다투어 빠져나오고있었다. 시운전장에 나온 뜨락또르들은 놀란 짐승처럼 급히 달리기 시작한다. 시운전공들이 얼마나 조급하게 모는지 뜨락또르들은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달린다.

(원, 저런 친구들 봤나. 일을 치겠군.)

한정빈은 시운전공들에게 주의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리진오보다 앞서 급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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