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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8 회


제 5 장

7


이해 첫눈이 내리고있었다. 아침에는 싸락눈을 뿌리더니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해서 눈은 발목이 빠지게 깔렸다.

일요일이였다, 오전에는 탁구애호가들이 종합청사탁구장에 모여들어 떠들썩하게 탁구를 치더니 오후에는 그들마저 보이지 않았다.

리진오는 조용한 사무실에서 그사이 밀린 경리문건을 검토하기 시작하였지만 얼마후에는 문건을 밀어버리고 창가에서 눈내리는 밖을 내다보고있었다. 조용한 외래자합숙에서 하루를 보내고있을 국장의 모습이 떠올라서 일이 손에 걸리지 않았던것이다.

그는 스케트장건설장에서 국장과 자기사이에 있었던 일을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애썼지만 오히려 날이 갈수록 국장에게 지나친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더우기 국장이 공장에 내려왔던 부장한테서 개별적으로 호된 비판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음부터는 무슨 죄나 지은듯이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날 밤인가 박철산당비서에게 더는 못 견디겠노라고 말했었다.

《괴롭지 않다면 그 비판은 동지적인것이 아니였을거요. 정빈동문 더 괴로와한다는걸 잊지 마오.》

리진오는 당비서의 대답을 회상하며 책상을 거두고 밖에 나갔다.

송이가 커진 눈이 자로 대고 금을 긋듯이 곧추 내리고있었다. 얼마 걷지 않아서 그의 어깨에는 눈이 쌓였다.

리진오는 문득 인철이녀석이 스케트를 배우느라고 손이 터지고 오금이 부은것을 본 생각이 나서 천천히 스케트장쪽으로 향했다.

인철이 말에 의하면 매일 아이들이 끓는다던 스케트장이였는데 그가 갔을 때는 날이 어둑어둑해져서 몇되지 않는 아이들이 얼음판에 있을뿐이였다. 얼음판옆 산기슭쪽에서는 얼음타기에 지친 아이들 몇이 모닥불을 피워놓고있었다.

얼음판우를 재주스럽게 빙빙 돌고있는 어린것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앞에는 홰불을 들고 스케트장의 기초를 굴착하던 날이 떠올랐다. 그는 국장과 이야기하던 장소를 가늠해보다가 모닥불을 피워놓은쪽으로 갔다.

《아저씨, 눈털구 와요.》

눈을 쓴채로 불곁에 오면 옷이 젖는다는 소리였다.

그는 아이들이 시키는대로 옷과 모자에 앉은 눈을 털고 불곁에 갔다.

어떤 녀석들은 긴 나무꼬챙이에 운동화를 걸고 말리고있었다. 아이들의 빰은 불에 익어서 마치 연지를 찍은것 같아보였다.

그는 온기에 취해서 꺼벅꺼벅 졸고있는 녀석곁에 가앉으며 그의 잔등을 두드렸다.

《이녀석, 머리칼 타겠다.》

《신발 한쪽은 벌써 다 탔어요.》

옆의 아이가 불에 구운 신발을 가리키며 방긋 웃었다.

스케트타기에 지친 아이들이 우르르 불곁으로 모여들자 불을 쪼이던 키큰 녀석이 소리쳤다.

《입장권들 가져와!》

강냉이짚이며 나무꼬챙이들을 얻어오라는것이다. 사방으로 흩어진 아이들은 잠시후 강낭짚들을 한아름씩 안고왔다.

리진오는 불을 뒤적이며 물었다.

《너희들은 왜 집에 돌아가지 않느냐?》

《남보다 뒤떨어져서요.》 하고 대답한것은 스케트를 타던 녀석이고 《우린 낮에 못 타게 해요.》 하고 대답한것은 외발구를 타는 어린 녀석이였다.

송곳으로 얼음을 찍어서 얼음판을 못쓰게 만든다고 쫓겨나는 모양이다.

아이들은 인차 불쪼이기에 싫증을 느끼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무리의 아이들이 일어섰다.

《아저씬 안 가시나요?》

키큰 녀석이 물었다.

《난 여기 좀 있겠다.》

《누굴 기다려요?…》

《아니.》

《근데 왜 앉아있나요?》

《이렇게 앉아있는게 좋구나.》

《아저씨, 신발 타요. 헤헤…》

불곁에서 졸다가 그에게 놀림을 받은 녀석이 악의없는 보복을 하며 웃었다. 아닌게아니라 그는 얼음판을 보느라니 이 스케트장을 만들던 날 국장과 언쟁을 한 일을 생각하느라고 신발에서 누린내가 나는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것이다.

《아저씨, 우리가 왜 눈속에서 눈맞지 않는지 알아요?》 하고 붙임성 좋게 생긴 녀석이 무릎을 건드리며 물었다.

《글쎄…》

《해해, 그것도 몰라요? 불길에 녹아버리니까 안 맞아요.》

단순한 그 리치속에 그 무슨 심오한 뜻이 있는것처럼 리진오는 오래도록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린것들이 노래를 부르며 멀어져갔다.

눈은 펑펑 퍼붓고 사위는 어두워지기 시작했지만 리진오는 한자리에 그린듯이 앉아있었다. 국장과 언쟁을 하던 그 자리가 눈길을 잡고 놓지 않아 일어설수 없었다.

국장이 지금 외래자합숙에서 눈내리는 밖을 내다보고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여기 앉아있어?)

오늘같은 날 일은 좀 못해도 창가에 국장과 나란히 서서 설경을 내다보았더라면 좋았을것이다. 이제라도 국장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그가 벌떡 일어섰을 때 등뒤에서 박철산당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오동무가 아니요?》

박철산당비서가 구사택쪽에서 눈속에 빠지며 이리로 온다. 리진오는 몇걸음 달려가서 마치 물속에라도 빠진 사람을 건져내듯 박철산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어떻게 된겁니까?》

《거참, 웬 눈이 이렇게 세차게 내리우?!》

《눈을 털고 불곁에 가야 합니다.》

진오는 모자를 벗어 그의 어깨에 앉은 눈을 털어주었다.

《큰길로 오시지 않구서…》

《그러기 말이요. 좀 질러올가 해서 떠났다가 이꼴이 됐소. 요행수를 바라다가는 이런 꼴로 된다는걸 알면서두, 허허… 근데 왜 여기 와앉아있소?》

《아이들 스케트타는 구경을 했습니다. 이 눈속에 어딜 가댔습니까?》

《동무들의 집을 돌아보았소. 오선달직장장한테도 들렸구…》

《거긴 왜요?》

《감기가 웬만하니까 신경통이 도졌다는군. 그 사람도 든든치 못한 사람이라니까.》

진오는 불우에 나무가치를 올려놓았다.

《그만 쪼이고 가야지.》 하고 말하면서도 박철산은 발을 쬐이였다.

불속에서 무엇이 타는지 탁탁 소리가 났고 박철산의 신발에서는 눈이 녹아 김이 문문 서려올랐다.

《병세가 어떻던가요?》 하고 리진오가 물었다.

《이젠 웬만한것 같습디다.》

리진오는 연기때문인지 그 대답때문인지 눈살을 찌프리며 말했다.

《공연히 가셨댔습니다.》

《공연히 가다니?》

《왜 인심좋은 동네아저씨 역할을 안아맡습니까?》

《인심좋은 아저씨라-》

박철산은 받아외우며 빙그레 웃었다. 리진오는 그 웃음속에서 가벼운 책망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젠 가시지 않겠습니까?》

《좀더 쪼이자구. 불이 아깝구만.》

불을 한참 뒤적이던 박철산은 뒤짐을 지고 잔등에 불을 쪼이고있는 리진오를 쳐다보며 말했다.

《난 인심좋은 동네아저씨라구 치면 기사장동무 생각은 아마 인심 박한 시어머니 생각같다고 하지 않겠소.》

얼마후 불을 꺼버린 그들은 걷기 시작하였다. 리진오가 앞에서 길을 내고 박철산이 그뒤를 따랐다. 거리에 나온 리진오는 집으로가 아니라 외래자합숙으로 향했다.

리진오가 합숙에 찾아간 시각에 한정빈국장은 강봉학직장장을 따라 큰길을 걷고있었다. 강봉학직장장이 적적할텐데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 억지로 끌고나간것이다.

큰길에 나서자 주강직장 뒤쪽으로 키높이 자란 백양나무들이 어슴푸레하게 바라보인다. 한정빈네 제대군인들이 심은 나무였다.

그 시절에 사람들은 한정빈이 호랑이반장한테서 일을 배우기 시작하더니 모든 일을 시원시원하게 해제낀다고 했었다. 한정빈이 대학을 나온 후 직장장을 거쳐 이 공장에서 기사장을 할 때까지도 모두들 입에 침이 마르게 그를 칭찬하였고 언제나 아래사람들의 하정을 알아주고 아래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다고 《우리 직장장》, 《우리 기사장》이라고들 불렀다.

강봉학은 회상에서 깨여나 말을 건넸다.

《듣자니까 부장동지한테서 비판을 받았다고 하더군.》

《그렇습니다.》

강봉학은 더 묻지 않았다. 더 묻기도 괴로왔고 듣기도 괴로왔다.

사랑은 내리사랑이지 올리사랑은 없다는 말이 부자간의 관계만을 가리키는것이 아닌것 같다. 일을 배운 사람은 선배에 대한 고마움을 잊어도 선배는 일을 배워준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 잊지 않고 생각하는것이 사람의 마음인가부다.

지지리 속을 태우던 주강쇠물문제가 풀리여 속이 좀 편하니까 이번에는 국장의 일이 속을 태운다.

강봉학은 한정빈의 맨머리에 눈이 앉은것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어제 일이 있어서 거리에 나갔다오며 보자니까 우리 직장의 한 녀석이 정문에서 단속을 당해서 욕을 먹고있지 않겠나. 녀석이 아마 외출허가를 받지 않고 작업도중에 어디 나가려다가 들킨것 같더구만. 우리 녀석이 백번 잘못했지. 규률을 지키지 않았으니까. 허지만 사람들이 왕래하는 정문에서 욕을 먹으며 꺼벙하게 서있는걸 보니 내가 수치를 당하는것 같아서 참을수가 있더라구. 경비원이 그 청년에게 모두들 2천대고지를 점령하려고 분초를 아끼고있는 이때에 로동계급의 량심이 있는가 하며 고아대길래 〈로동계급의 량심은 건드리지 말어!〉하고 내가 소리쳤지. 못난 강아지 달보고 짖는다구 무슨 큰 도적이나 잡은것처럼 고아대는가, 로동계급의 량심이 없는 놈같으면 공장의 담을 넘었지 정문으로 나가려고 하겠는가 하고 면박을 주었네그려. 생각해보면 내가 옳지 않았지. 그러나 옳지 않은걸 알면서도 큰소리가 나가는걸 어쩌겠소? 국장동무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심정이요. 어떤 직장장들은 내놓고 국장의 험담을 늘어놓고있다우. 그걸 들을 때마다 난 마음이 좋지 않아서 경비원에게 고함친것처럼 소리를 치군 하지. 그러나 그렇게 소리치구 돌아앉아 자신을 매질하군 했소. 내가 숱한 로동자들을 키웠다고 자랑해왔는데 일하는 법만 배워주었지 로동계급의 량심을 지켜야 한다는걸 가르치지 못했구나 하구 말이요.》

강봉학은 잠시 숨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그 옛날 〈우리 직장장〉, 〈우리 기사장〉이라고 부르던 때처럼 일해보우. 국장이 벌써 이 공장에 와있는지가 퍼그나 되였는데 〈우리 국장〉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더구만. 〈우리 국장〉은 고사하고 우리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지어 우리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라고 보는 사람까지 있더란 말이요. 가만히 보니 국장은 잘못 생각하는것이 있는것 같아, 옛날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는데 국장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것 같단 말이야.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사람은 이름을 남길것이 아니라 일을 남겨야 한다구 생각한다니! 후날 사람들은 이름을 남기자고 한 사람은 기억하지 않아도 일을 남기자고 애쓴 일군은 오래도록 기억하는 법이라우.》

그들의 어깨에는 눈이 손가락 한마디만큼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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