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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회


제 1 장

5



이깔나무수림속에 난 길을 따라 검은빛이 도는 회색바탕에 흰점무늬를 가진 얼룩말이 경쾌한 자세로 달리고있다.

기수는 연갈색승마복을 입은 지그프리트였다. 말을 타고 사색하기를 즐겨하는 그였다.

그의 평양방문과 교류의 시작은 예견한 그대로 각이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있다. 앞으로는 더 큰 도전에 직면할수 있으리라는것도 그는 내다보고있었다.

얼마나 다난했던 세기가 얼마나 많은 시름을 걷어안고 마지막해들을 보내고있는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것은 새로운 세기에는 보다 더 치렬한 경쟁이 벌어질것이라는것이다. 기업가로서의 안목을 가지고 전망하건대 아시아태평양지대를 어떻게 차지하는가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리라고 확신하는 지그프리트다. 거대한 인적자원과 원료원천지에 의거한 이 지역의 나라들은 나날이 세계적인 투자가들에게 새로운 인식에 기초한 새로운 시장을 구상하게 하고있다. 이와 같은 추이는 그로 하여금 눈길을 돌리게 하였고 다국적기업인 에쎈의 교두보로 될 대상탐색을 서두르게 하고있는것이다. 전략적인 시도가 궤도에 들어서면 지그프리트의 계획은 자기의 속도와 률동을 가지고 질주할수 있다.

그는 풍부한 경험에서 오는 불안정을 감촉하였으며 멀리 앞이 아니라 발밑을 보게 되였던것이다. 지각운동이 무서운 재난을 가져오는 원인은 판괴들이 흔들리는 현상때문이다. 그 흔들림이 세찬 충돌로 이어질 때에 결과는 엄중한것이며 그 후과를 만회할수 없다. 에쎈의 흔들림은 경영두뇌진의 견해상차이도 아니며 독점체들사이에 생겨나는 리해관계의 대립도 아니다. 종속관계를 가지지 않은 한 인물로 하여 그는 마음을 쓰고있으며 오늘은 이렇게 고급승용차가 아니라 말을 타고 찾아간다. 그 인물이 바로 다름아닌 서상록이였다.

자기의 후원을 받은바도 있고 뛰여난 두뇌를 가진데다 의리심도 지녔기에 그를 남달리 총애한것은 사실이였다. 그런 상록이지만 자기의 평양방문이후에 보이고있는 립장은 색갈이 달랐다. 그런데다가 그의 연구소를 노리고 다른 독점체들이 접근을 시도한다는 정보도 입수하였다. 이거야말로 위기를 초래할수 있는 정황을 암시하는것으로서 지그프리트의 심리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상록은 에쎈의 후원이 없이도 얼마든지 자기의 연구소를 이끌어나갈수 있는 권위와 영향력을 가지고있었다. 오늘까지 이어져온 그들의 관계는 미묘한 공생의 관계라고 할수 있었다.

서상록의 머리에서 나온것을 지그프리트가 제품으로 만들어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에쎈은 언제나 상록의 연구소에 넉넉한 지출을 하였으며 자기 회사의 개발팀으로 간주하는데 습관되였다. 그러나 사람은 고정불변한 존재가 아닌것만큼 상록의 태도가 변할수도 있는것이다.

지그프리트가 말에 박차를 가하자 또다시 질주를 시작한다. 기수는 고삐를 바투 잡고 몸을 일으켜세운채 중심을 유지하며 말과 호흡도 률동도 같이한다.

사라브레드종인 말은 스며드는 해빛에 번들거리는 억센 네굽을 자랑하며 주인이 만족할만큼 기운차게 내달리였다.

련락을 받고 연구소마당에 나와있던 서상록이 지그프리트를 맞이하였다.

《바쁘신 시간을 내셨습니다.》

상록의 인사를 받은 지그프리트는 손에 든 채찍을 호기있게 휘두르고나서 활기에 넘쳐 물었다.

《나하구 정구시합을 해보지 않겠나?》

《제가 져줄수도 있지만 연구소의 질서를 지켜야 하니까요.》

상록은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부인께서 전화로 알려오기까지 했습니다.》

억세여보이는 턱을 힘을 주어 잡았다놓은 지그프리트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우리가 만나는 이 상봉의 중요성이기도 하오.》

상록은 옆자리에 앉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마어마한데요. 아무런 사전약속도 없지 않았습니까.》

지그프리트의 푸른 기운이 도는 갈색눈이 상록을 시종 주시하는 속에 얼굴표정이 미소와 정색, 의문과 아량으로 뒤바뀌였다.

《이것 보라구. 자넨 모든것을 의심하라는 자기의 좌우명을 이미 공개했네. 하지만 난 인간적으로 나에게 의혹을 품는것은 바라지 않네.》

상록은 솔직하면서도 심리적압박을 가하는 지그프리트의 돌입적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이것은 이 사람의 성격이야. 그리구 수법이기도 하지. 이 사람이 면담의 능수라는것은 알려지고도 남았다. 나라는 물질에 물리적인 부하를 걸어놓은 다음 화제의 주도권을 쥐자는것이다. 나를 수단으로 리용해서 일확천금을 노리는것이 이 사람의 목적이지. 그것을 떠난 나와 지그프리트의 관계는 상상할수 없는거지. 다행스러운것은 나는 정확한 보상외에는 더 바라는 목적이 없다는거다.

《고대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는 철학의 첫 명제로 자연의 비밀에 대한 인식, 생활지혜의 장악이라고 했던가?! 내가 자연의 비밀을 인식하는데서 자네한테 뒤떨어진다는것을 인정한다면 자넨 지혜에서도 나를 앞선다고 여기지는 말라구. 이건 나이든 웃사람으로서 하는 권고일세.》

《부정할 여지도 없이 공격을 하시는군요. 그런 비교를 어떻게 생각해내셨습니까? 허허.》

대답하고 반문하며 상록은 엉너리치듯 웃었다. 잃을것이란 없는 면담마당이 아닌가. 이러루한 대화가 더이상 지속되는것이 지긋지긋해나기 시작했다. 인식한 놈은 인식한대로, 지혜를 장악한 놈은 그것대로 덕을 보면서 살라지.

지그프리트가 가지고 온 서류 한통을 차탁우에 올려놓았다.

《보게.》

《이건 어떤 통첩입니까?》

《주문이지.》

《예?》

서류를 무심히 펼쳤던 상록은 안경을 찾아끼고 보기 시작했다.

생산업체의 표준형을 만들데 대한 요구가 담겨있었다.

가장 정확히 계산된 합리적인 면적과 생산공간의 형성, 최상의 효률을 가져올수 있는 작업공정들과 부문간의 호상성, 로동력과 에네르기를 최대로 절약할수 있는 구조…

에쎈회사가 새로 창설하려는 공장의 사명과 생산능력도 첨부된 문건으로서 어느 연구기관에나 쉽게 차례질수 없는 특혜나 다름없었다.

지그프리트가 자기의 설명을 하였다.

우리는 21세기 산업의 모델을 만들어내는것이 필요하다. 어떤 방향을 추구해야 할것인가. 화석연료는 고갈기에 들어섰으며 산업혁명의 초시기부터 태워버린 연기는 행성을 뒤덮고있을뿐만아니라 인간의 생태환경을 여지없이 파괴하고있다. 에쎈의 축적된 자본은 더이상 이처럼 무지한 산업경쟁에 소비되지 말아야 한다. 새로운 에네르기에 의거하면서도 최대한으로 절약하는 기업체, 지속적인 생산장성이 담보되는 기업체가 필요하다. 또 록색산업에로 지향해야 하며 여기에서 앞장서야만 새 세기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뒤떨어지면 따라가야 하고 앞선 기술은 지금보다 가혹하다고 할 정도의 가격으로도 사들이기 어렵게 될것이다. 누가 멀리 내다보는가…

역시 지그프리트는 지그프리트였다.

《관심을 가지게 되는군요.》

서상록은 본래의 심리에서 저도 모르게 벗어나 자기의 안목을 가지고 긍정하게 되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지그프리트는 너는 이런 머리를 쓰며 살라는거다 하고 속으로 웃었다.

내가 기업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허덕인다면 너는 연구개발에서 앞선 자리를 양보하면 안된다는것을 알고있거던.

이런 생각을 한 지그프리트가 넌지시 물었다.

《어떤가, 구미가 돌지 않나?》

《부탁하는건가요?》

《에쎈의 명의로 주문하네.》

《실무적인감이 드는군요.》

《엄청난 거래가 아닌가. 수백만에 가까운 돈이 지출되기때문이네.》

상록은 자기 연구소의 현재 능력으로는 새로운 재료개발과 제품발명도 힘에 부치지만 이 주문 역시 놓쳐서는 안되겠다고 마음먹게 되였다.

지그프리트의 주문은 앞으로 연구소가 프로그람봉사도 겸비해야 한다는것을 암시해주었기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자금을 투자하려 하고있는가. 재정에서 빈틈이 없고 작은 돈일수록 계산을 밝히는 지그프리트다. 큰돈이란 작은 돈이 지켜낸것이라고 말하기를 즐겨하는 사람이다.

《좋습니다. 접수합니다.》

상록의 대답을 들은 지그프리트는 문건에 수표를 하라는 손짓을 해보이고나서 말했다.

《좋은 일을 매듭지었으니 위스키를 마시는게 어떤가?》

상록은 어차피 자기가 수동적으로 움직이게 된다는것을 알았지만 다른 도리는 없었다. 상대가 에쎈의 거물이 아닌가.

지그프리트는 한잔의 술로 기분을 돌려세웠는데 어찌된 일인지 침중한 기색으로 화제를 바꾸었다.

오래전에 어린 동생을 데리고 오스트랄리아로 추방되여간 그의 어머니는 낯선 대륙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곳에서 철이 든 동생 칼은 조선전쟁마당에 고용병으로 내몰리여 포로가 된 이후 생사를 모른다. 이것은 상록이 이미전에 들은 말이지만 그것을 다시 반복하고있다.

《어떤가? 내 모습이 보이나?》

심사가 울적해난 상록은 머리를 저었다. 오늘의 지그프리트를 통하여 수십년전의 모습을 그려본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유감이구만. 에쎈의 이 늙은이에게도 눈물이 있다는것을 리해 못한다니 말이네. 사실 내가 평양을 찾아간데는 동생 칼의 생사를 알고싶은 개인적인 용무도 있었네. 난 이걸 누구한테도 말하고싶지 않아. 하지만 자네한테는 하게 되는구만.》

상록은 지그프리트가 동정을 바라는 동시에 자기의 깊은 상처에 손을 뻗치여 아픔을 주는것을 형언할수 없는 심정으로 맛보았다. 그것은 어디에도 하소할 곳 없는 정신적인 동통이였다. 심장은 비수에 찔리운듯 전률했고 의식은 허물어져내리는것만 같았다. 사람은 자기의 고통너머에 있는 남의 아픔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지그프리트가 바로 그렇게 자기의 심정을 하소하고있는것이다. 제손으로 잡았건 남이 억지로 메워줬건 총을 가지고 다른 민족에게 전쟁이라는 참화를 들씌우는데 참가했으면 포로가 아니라 죽어도 할 소리가 있는가. 하건만 이 억만장자는 인도주의에 한가닥의 기대를 걸고 평양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자기와 같은 동족이 살건만 이 상록이라는 인간은 더 큰 불행을 안고있으면서도 그럴 생각조차 못하니 이처럼 불가사의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어떤 물질이건 마음만 먹으면 분해한다는 해체의 명수지만 자기만은 어쩔수 없다는것을 알고있었기에 상록의 머리속은 2중3중으로 혼탁되여갔고 사고의 마비계선에 이르러서는 소리없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만 맥없이 떨구었다.

지그프리트는 상록을 만나려 했던 목적을 만족하게 달성하였다는 안도감을 안고 돌아갔으며 홀로 남은 사람은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채 실신한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의식의 황야, 사랑이란 씨앗조차 뿌려지지 않았던 삶의 불모지에서 나지 말았어야 할 불운의 생명이 여윈 다리로 아장거리며 걸어온다. 처음으로 눈에 비낀것은 번개치는 하늘이였고 디디고 선 곳은 남의 집 처마밑이였다. 그것은 남의 집이 분명했다. 어머니라고 부를 사람도, 아버지도 없는 그 집에서 어머니를 찾는 아이들 틈에서 주는것이면 다 먹는것으로 여기며 살았다. 바로 그 집 처마밑에서 비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던 날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이 갑자기 불쑥 나타났다. 7살 나던 때였다. 그 나이마저도 아버지가 알려주어서 알았다.

몇해후에는 어떤 리유에선지 배에 실려 어디론가 가게 되였다. 배고동소리가 울릴 때 너무도 무서워 아버지품으로 기여들며 우린 어디로 가는가고 울며 물었다.

그들부자를 맞아준 곳은 무시무시한 열대수림속의 농장이였다. 나무잎으로 지붕을 씌운 말뚝집들, 맹수들의 울부짖음소리, 그칠줄 모르는 열대성폭우… 남의 나라 땅이였다. 벌거벗다싶이 한 청동색피부를 가진 사람들의 얼룩얼룩 칠감을 입힌 얼굴이 나타날 때면 겁이 나서 도망을 치군 했다.

우리는 왜 이런 곳에 와서 살아야 하는가. 동심이 품은 첫 의문은 세월이 흘러서야 풀리게 되였다. …

나는 누구의 자식인가. 나에겐 어머니가 왜 없는가.

어린 가슴은 너무도 일찌기 말라버리기 시작했다. 사람은 어머니가 있어 자기의 한살때도 알게 되는것이다. 기억할수 없는 그것을 어머니의 속삭임이 전해준다. 하건만 상록은 남의 집 비내리는 처마밑으로 아버지라며 찾아온 아버지로 하여 의문을 품으면서부터 자기를 알기 시작하였다. 이민으로 자기가 나서자란 땅을 떠나야 했던 부자간이였던것이다. 그 땅에서 살수도 있었건만 쫓겨났던것이다.

버림받은 아버지와 아들, 그것을 알았을 때 먹여주고 입혀주며 의지가 되여주지만 그는 아버지를 저주하기 시작했으며 아버지의 무거운 한숨소리마저 지긋지긋하게만 여겨졌다. 모든것은 아버지의탓이였다.

서상록의 성격은 이렇게 형성되였으며 성공과 함께 굳어진것이였다. 하건만 그는 오늘 지그프리트를 만난것으로 하여 모순된 심리에 빠져들고있었다. 사람은 자기의 관념과 의지에 따라 행동하기마련이다.

나는 왜 이렇게도 외로운가? 문득 머리속에 떠오르는 이런 물음을 처음으로 읽으며 상록은 머리를 싸쥐였다. 세상 한복판에 홀로 나선듯 한 감정이 마음을 휩쓸자 저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디서 시작된 충격인지는 모르지 않지만 뒤따르는것은 꺼져내리는 한숨이였다. 소심하고 나약한 자기가 보이는것만 같았다. 달리는 될수 없는 인간이 거만이라는 외피를 쓰고 살지 않는가. 아니다. 나는 자기의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했다. 나의 성공은 눈물겨운것이다. 나의 명예는 과학연구에 바친 노력과 정열의 대가다. 나는 그것을 자부로 여기며 누리고있을뿐이다. 하여 나는 당당하며 외로울수 없는 존재이다. 얼마나 많은 선망어린 눈길들이 나를 바라보고있는가. 내 손으로 일떠세운 연구소가 있고 오늘은 개발경쟁에서 앞서나가고있지 않는가. 오늘의 이런 고민은 생활에서 볼수 있는 잔물결에 불과하다.

서상록은 이렇게 자신을 되찾으며 용기를 내려고 하지만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점점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굳어진 습관과도 같은 사색의 반복이였다.

나에게 명예와 재부가 있지 않는가. 내가 해놓은것이 아버지에 대한 효도로 되지 않는단 말인가. 우리로서는 만족해야 할 집과 남들 못지 않게 먹고 마시는 생활에 대한 담보였지만 아버지는 거절하였다. 그것이면 아버지의 한생에 얻은 수확보다 몇십배가 넘는것인데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세상에 가난하게 살고싶은 사람도 있는가.

서상록은 자신이 어떤 생활에서 소외된 심정으로부터 이렇게 헤여나오고있었다. 그 생활이란 안해가 늘 외우는 민족과 이어진것으로서 먼곳에 있는것이며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하다고 여기며 고개를 쳐들던 그는 뜻밖에도 명현의 모습을 찾아보게 되였다.

어찌된 일인가. 그 친구가 내 머리속에 자리잡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것이 어떤 암시인가, 계시인가.

망연한 자세로 앉은 서상록의 뇌리에서는 자기도 알수 없는 물음이 꼬리를 무는것을 느낄뿐이였다.


낡은 구식안경을 낀 반백의 학장이 의아한 눈길을 쳐들고 바라본다. 앞에는 싼타나가 녀자수도원의 원장과 같은 자세로 서있다.

무표정하면서도 차거운 얼굴빛,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눈동자는 성상을 우러르는 신도의 정중한 신앙심을 내비치는것 같이 느껴졌다. 이 녀자가 찾아온 용건을 듣고난 학장은 대답을 주기 힘들어한다는것이 알렸다.

어느 한 학생의 론문지도교원자격을 릉가한 권리행사나 같은 질문을 하였던것이다. 졸업후 학생의 전도문제는 대학이 일방적으로 결정할수 없다는 암시까지 했기때문에 불쾌해하는데도 이 녀자는 그런데는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싼타나선생, 우리 대학은 졸업생들의 장래에 대해 깊은 관심을 돌려왔습니다. 서지연학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명한 대학들과 관록있는 연구기관들에서 이미 그를 요구하고있다는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싼타나의 표정과 자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녀성으로서 상냥함 같은것은 애초 갖추지 못한것이 아닌지 모른다.

《케임브리지나 하바드, 도꾜일수도 있겠지만 서지연의 전도는 우리가 결정해야 합니다.》

학장이 고개를 내젓자 도수높은 안경알이 번쩍이였다.

《우리란 누구를 의미합니까?》

《우리지요. 구체적으로는 아버지의 결심입니다.》

《그 학생에게는 아버지가 없소.》

학장은 조금 언짢아난 어조로 부정했다.

《학장선생님은 서상록선생을 아십니까?》

뭔가 또 부정하려던 학장이 책상우에 놓인 문건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그럴수가 있나. 여기 학생의 개인경력문건에는 올라있지 않소.》하고 자신없는 소리를 흘렸다. 대학의 겸임교수직을 가진 싼타나가 서상록의 연구소에서 일하고있기에 의문을 가질 필요조차 없었던것이다.

《문건으로 사람을 다 료해할수는 없답니다.》

《그렇다면 에쎈회사가?》

《아마도 그것이면 충분한 판단으로 될것입니다. 저는 론문지도를 하기 위한 준비를 다 갖추었습니다.》

《그에 대해선 반대가 없소.》

《감사합니다.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수도원 원장 같은 녀자가 례의있게 인사를 하자 학장은 안경을 벗어들고나서 머리를 끄덕였다.


고색찬연한 뾰족탑들, 옛 사원의 고지크식지붕들이 푸른 하늘을 향해 머리를 쳐들었다. 비둘기떼들이 날아옌다. 저마다 재색, 흰색, 연청색날개를 자랑하며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에 날아내려서는 꽁지를 달싹거리며 콩당콩당 뛰여다닌다. 가로수와 공원숲은 신록으로 물들고 청신한 바람결은 더위를 가셔준다.

서지연은 연한 하늘색달린옷을 몸매에 맞게 입어 경쾌한감을 자아내는 모습으로 거리에 나섰다. 그의 전후좌우로 오가는 같은 나이또래 청년들의 차림새는 형형색색이다.

어떤 처녀들은 머리를 마구 풀어헤친 장발을 한데다 반바지를 입고 목이 긴 장화를 신었는가 하면 엉덩이가 금시 터져나올것 같은 청바지차림을 자랑하며 활보한다. 벗고싶으면 벗어내치고 입고싶으면 닥치는대로 주어입은듯 한 젊은이들의 군상은 유럽의 미래를 보게 하는것이기도 하다. 청년들의 개성의 《자유》는 이렇듯 유감없이 시위되는것이다.

짧게 입어 드러낸 다리도, 배꼽을 내놓은 허리와 다 들여다보이는 앞가슴도 수집음이라는 말조차 모르는 《피끓는 세대》의 만용을 소리쳐 자랑하고있었다.

이러한 주위의 사람들을 관심에 두지도 않으며 지연은 상쾌한 기분으로 걸음을 내디딘다. 고독스럽던 병원생활을 끝냈다.

얼마나 좋은가. 가슴속에서는 무엇인가 환희로운것이 쉬임없이 뿜어나오는것이다. 래일은 대학으로 돌아가 졸업론문에 심취되여야 한다. 탐구야말로 인간이 가지고있는 최상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처녀다. 자연의 비밀을 밝혀내는 과학의 세계에 자기도 들어섰다고 자부할 때면 가슴은 부풀고 황홀한 미래가 마주오는것이 보이는것만 같았다.

그는 오늘 아침 쌍드에게 전화를 하였다. 무척 만나보고싶은 녀자였기때문이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자기의 장래까지 관심을 돌려준다니 얼마나 고마운분인가. 아무리 일이 바빠도 지연이가 바란다면 그 어디건 갈테니 기다리라고 하는것이였다.

지연은 국립도서관앞 광장에 자리잡은 공원에 이르러서 쌍드의 모습을 찾으며 소로길에 들어섰다.

청신한 숲속에서는 풀벌레들이 소란을 피우지만 대기는 한결 맑고 숨쉬기조차 즐거워났다. 분수터에는 청동으로 굳어진 말탄 무사가 물보라를 한가로이 맞고있었다.

튤립꽃밭에서 풍겨오는 향기를 맡으며 공원의자에 앉아있는 한 녀인의 모습이 보이자 지연은 선자리에서 발끝을 세우며 두손을 맞잡았다. 쌍드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있지 않는가.

《선생님!…》

지연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오자 쌍드는 앉은자리에서 두팔을 벌리였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냉큼 뛰여드는 지연을 품안에 껴안으며 쌍드는 잔등을 다독여주었다.

《나도 방금 왔다. 여긴 조용한게 정말 좋구나.》

《그래요. 책을 읽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찾는 공원이거든요.》

《우리 지연인 책밖에 모르는 처녀인데 그게 얼마나 좋니. 그래서 너를 더 사랑하게 되는가봐.》

쌍드의 말을 들으며 지연은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대면서 소르르 눈을 감았다. 지성과 애정이 넘쳐나는 녀성을 알게 된것이 자기에겐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여겨졌던것이다.

《네게 주려고 내가 이런걸 마련했다.》

의자우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지연의 무릎우에 놓아주며 쌍드는 어서 열어보라고 눈짓해보였다.

《콤퓨터가 아니예요?》

《그래, 최신형인데 너에게 꼭 필요할것 같아서 마련했다.》

지연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발까지 콩콩 굴러대며 손벽을 쳐댔다.

《나도 언제부터 이런 콤퓨터를 하나 사려고 했었는데… 정말 이걸 나한테 주는건가요?》

쌍드는 눈을 감았다떠보이는것으로 긍정하였다. 첫 순간의 기쁨이 형언할수 없는 고마움으로 바뀌우자 지연은 고개를 깊이 숙여보였다.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진심어린 처녀의 인사를 받자 쌍드는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며 말했다.

《날 어떻게 불러야 하지?》

《어떻게?…》

《어머니가 말씀하시지 않던?》

《했어요.》

《그럼 이모라고 불러야지. 어머니와 난 자매간이 되기로 약속했다.》

지연의 순결한 눈동자에서 이슬꽃이 반짝거렸다.

《어머닌 참말 많은 이야길 했어요. 선생님한테 홀딱 반해버린것 같아요.》

《다시 불러봐.》

《처음 입에 올리는 말이 돼서… 이모!》

《그래그래.》

쌍드는 지연의 어깨를 끌어당겨 옆에 꼭 끼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일본에는 학계는 물론 정계와 재계에도 내 친구들이 많다. 한마디로 너를 후원해줄 믿음직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너의 대학에 이미 신청문건을 발송했다. 일본의 이름난 대학의 연구원생으로 받아주겠다고 담보했으니 너만 결심하면 된다. …

《전 아직 졸업론문을 완성하지 못했어요. 아마 한두달은 걸려야 할지도 몰라요.》

《그건 일없다. 졸업을 하면서 론문을 일본에 보내면 된다. 어떻니?》

쌍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지연은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순진한 처녀의 가슴은 꿈을 안고 설레였다.

《난 어려서부터 훨훨 날아서 동쪽나라로 가는 꿈을 꾸군 했어요. 우리 할아버지가 옛말을 자주 들려주셨거든요.》

쌍드는 처녀의 비단결같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 꿈을 이루게 될게다. 꿈을 가지고 사는게 얼마나 좋니.》

공원속에 앉은 두사람의 모습을 훔쳐보는 눈이 있다는것을 그들은 알수 없었다.

맞은켠 대통로옆에는 중세기때의 건물이 무겁게 자리잡고있다. 그 집의 로대에 나와선 한사람이 쌍안경으로 두 녀자를 조준하고있었던것이다.

처녀에게 애무에 넘친 눈길을 보내며 정답게 이야기를 하는 쌍드의 모습을 지꿎게 노려보던 사나이가 침을 뱉으며 쌍안경을 내리웠다. 바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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