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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1 회


제 4 장

9


리진오는 김기룡의 시험생산이 성공하면 모든 시름이 놓일것 같았고 푹 쉬고 푹 자리라고 마음먹고있었다. 그런데 시험생산이 성공한 이 밤 그는 더욱 큰 시름을 안고 퇴근길에 올랐다. 소재문제를 둘러싼 국장과의 의견상이때문에 부에서 래일아침까지 올라오라는 전화가 왔던것이다.

《부장동진 공장에서 소재를 자체로 해결하겠다는데 대해서 대단히 만족하게 생각하고있지만 국장의 의견을 무시할수 없어서 불렀습니다.》

저녁때 부장서기가 전화로 한 말이였다.

결국 국장과의 론쟁은 공개되였고 부에 가서 론쟁이 계속되면 국장과의 사이는 아주 벌어지고말것이다.

저만큼에 6층아빠트가 바라보이자 리진오는 자기네 집 창문을 찾았다. 안해가 탁상등을 켜놓았는지 다른 창문들보다 어두웠다. 안해는 탁상등을 켜놓고 책을 보다가 팔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을것이다. 얼마전까지는 압착기의 설계때문에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더니 요즈음은 여러 직장에 벌려놓은 부분품가공을 다그치고 그것을 조립하느라 집에 들어오면 꼼짝을 못하고 쓰러지군 하는 안해였다.

부엌일을 돌보아주던 어머니는 아버지병이 위독해진 그날부터 큰집에 돌아가 찬거리나 마련해주군 한다.

계단을 오른 그는 안해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용히 문을 열었는데 뜻밖에 선희는 방에도 부엌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인철이를 바로 눕히고 서재로 쓰는 웃방에 올라갔다.

책상에는 언제나처럼 선희가 손수 만든 생과자와 우유가 포도무늬수를 놓은 흰보아래에 놓여있었다. 그것을 보자 그는 갑자기 허기증이 났다. 생과자 하나를 다 먹은 다음에야 그는 무엇인가 적어놓은 쪽지편지가 다반옆에 놓여있는것을 보았다.

《급히 공장으로 다시 나가며 몇자 적어요. 퇴근하다가 은하를 만났는데 평양으로 가려구 휴가를 받았더군요. 2공무직장은 가뜩이나 예비부속품때문에 말썽많은 직장이구 해서 은하가 맡아 깎던 고철압착기의 부분품을 은하대신 제가 깎기로 결심했어요. 4~5일동안 일을 끝내고 밤마다 현장에서 기대를 잡으려고 해요. 2교대동무들과 함께 일하다가 오겠어요.》

시계는 23시를 가리키고있었다.

그는 우유그릇을 밀어놓고 은하가 평양으로 떠나게 된 사연을 적은것을 읽어내려갔다.

《…글쎄 그들의 앞날이 어떻게 될가요?

우리 생활의 밑바닥에서는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생활이 소용돌이치고있군요.》

리진오는 마감부분을 다시 읽고 시선을 창가로 옮기였다.

안해와 마주앉으면 혹시 울적한 마음이 밝아지겠는지 모르겠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다.

갑자기 문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그는 복도에 나섰다. 자기네 집을 찾는줄로 알았는데 손님은 옆집문을 열었다.

《할머니, 빨리 좀 와주어요.》

5층에서 사는 지구직장 작업반장의 처가 해산이 가까와온다고 하더니 그래서 옆집의 할머니를 찾고있었던것이다.

《어디가 말째다던가?》

옆집할머니가 문을 펄쩍 열며 물었다.

《로친이 무얼 안다고 나서는거요?》하고 나무라는 옆집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게 반장, 어서 병원에 가 알리라구!》

《병원은 병원이고 사람이 옆에 있어가지고 건너다보고만 있어야 한단 말이요?》하고 할머니가 급히 차림을 하며 대답한다.

《여보게, 어서 병원에 가라는데두…》

할아버지의 급한 소리끝에 《아는 병인데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네.》하는 할머니의 늘어진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후 복도는 조용해졌다.

재미있는 부부생활이였다. 다정한 부부의 정이 늙어가면서 저렇게 표현되고있을것이다.

리진오는 느닷없이 자기네 부부의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것은 그 《꿀벌》연필과 반짝거리던 밤알로부터 시작되였을것이다. 혹시 졸업론문을 쓰려고 집에 온 다음날아침 머리에 허연 비누거품을 묻혀가지고 선희를 쳐다본 그 시각부터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후 어느날, 론문자료를 보충하려고 현장에 나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소나기를 만났다. 피할데가 없는데 우산을 펼쳐든 선반공처녀들이 앞서간다. 그는 처녀들속에서 몸매가 눈에 익은 선희의 뒤모습을 발견하였다. 놀라리만큼 균형을 이룬 몸매였고 고전적인 엄숙한 기운이 풍기는 몸가짐이였다.

처녀들한테로 달려간 그는 무작정 선희의 우산아래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선반공처녀들은 멋없이 까르르 웃었지만 그들의 눈에는 선희에 대한 부러움이 깃들어있었다.

선희는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하다가 우산손잡이를 내밀며 말했다.

《어서 쓰세요. 전 저기…》

그는 선희의 손을 큰손으로 덧쥐였다. 선희는 손을 빼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쳐다보던 선희의 눈은 기다란 속눈섭으로 채양을 친듯 하였는데 그 깊이를 알수 없게 그윽히 빛났고 울밑에 피여난 박꽃처럼 순박해보였다.

…시계가 24시를 가리키고있었다.

2교대가 끝났으니까 얼마후면 안해가 무거운 다리로 현관에 들어설것이다.

리진오는 문득 그렇게 지친 안해에게 자기의 무거운 심정을 호소하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해를 사랑해온것이 아니라 안해를 필요로 하며 살아왔기에 자기만을 생각하는것이 아닐가?

잠시후 그는 안해를 기쁘게 해주려고 웃옷을 걸치고 거리에 나섰다.

밤, 정적, 인적이 없는 거리에 외등이 외롭게 서서 지친듯 뿌잇한 빛을 뿌린다.

그는 문득 주태섭부기사장이 자기의 새 주조법때문에 평양에 갔다가 온 이야기를 안해에게 해주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새 주조법을 성공한 날 남이 보지 않는 밤에 시험장에 달려가서 성공한 주물품을 쓸어만지던 선희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며 소녀처럼 목을 젖히고 펑펑 쏟아지는 눈을 얼굴에 맞던 안해였다.

정적이 깃든 밤거리에 나서면 사람의 마음은 리유없이 쓸쓸해지군 하는데 리진오는 안해에게 기쁜 소식을 안겨주게 된다는 생각으로 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걷고있었다.

멀리서 녀인이 걸어온다. 급한 걸음이였다. 그는 멀지만 륙감으로 안해임을 알아차리였다. 처녀시절처럼 탄력있게 걷고있었다.

총각시절처럼 마음을 설레게 하는 자태였다. 저 자태속에 그의 기쁨이 있었고 행복이 있었다. 지금 리진오는 그것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결혼후 졸고있던 그 감정을 가을밤의 정적이 흔들어깨웠는지.

선희가 가까이 왔다. 초불같이 따뜻한 눈이였다. 저 따뜻한 빛이 없는 곳은 영원한 암흑지대일것이다.

《당신이예요?》

선희의 목소리였다. 저 음향이 없는 곳은 영원한 동토대일것이다.

《왜 이제 오우?》

말해놓고보니 반가운 마음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였다.

《그런걸 난 당신 사무실에 전등이 켜져있나 하구 살피며 왔군요.》

《가방 인주우.》

그 바쁜 속에서도 상점에서 무엇을 사넣었는지 가방이 불룩했다.

《괜찮아요.》

그는 더 말하지 않고 가방을 빼앗아들었다.

둘이 함께 걸을 때면 시간이 언제 가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알지도 못하군 하던 약혼시절처럼 그들은 오랜만에 조용한 밤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글쎄 몇해사이에 손이 얼마나 굳어졌는지 하마트면 오작을 낼번 했군요.》

선희는 처녀시절처럼 우습지도 않은 일을 두고 깔깔 웃어댔다.

《힘은 들어두 재미가 있으니까 피곤한줄 모르겠더군요. 좀더 일을 할가 했는데 교대부직장장동지랑 막 등을 떠밀어서 할수없이 손을 뗐어요.》

《래일밤에두 또 나가야 하우?》

《조립이 끝날 때까지 이젠 아예 현장에 있겠어요. 아까 실장동지하구두 그렇게 토론했어요. 우리 실장동진 그 압착기가 빨리 조립되여 은을 내야 실장인 자기도 머리를 쳐들게 된다고 실사업은 걱정말라구 하지 않겠어요. 근데 오늘은 어떻게 일찍 돌아왔어요?》

그는 새벽에 평양에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 이야기를 꺼내면 국장과의 론쟁이 공개되게 되였다는 불쾌한 이야기를 하게 될것이다. 이 유정한 밤길을 빼앗기고싶지 않았다.

《원참 당신도. 지금이 몇시인줄 알고 빠르다구 하우?》

《그렇구만요.》

선희는 별치 않은 일인데 또다시 명랑하게 웃었다.

아빠트의 어느 창문에선가 젖먹이아이가 젖을 보채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기운찬 울음이였다. 저것은 울음이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울음소리라고 하는지 모를 일이다.

《정말 은하동무가 떠났소?》하고 그가 물었다.

《떠났을거예요. 기룡동무가 국장동지를 모욕하려고 그런 말 한게 아니라구 타일렀지만 막무가내더군요.》

《하긴 그에게 당비서동지나 국장동지가 아버지나 다름없지.》

《난 그런 고집쟁인줄은 몰랐군요.》

《고집은 있어도 얼마나 의리가 있는 동무요!》

《그래요. 의리도 있구 경우도 바르구 좋은 애예요.》

선희는 가로수가지에 걸린 달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들사이에는 왜 그렇게 공교로운 일만 생겨 다투군 하는지 모르겠어요. 앞날이 근심스럽군요.》

《다툰다는것이 사랑하지 않는다는걸 의미하지야 않지.》

《생활이란 어찌 보면 정말 지꿎어요.》

《지꿎다니, 고마운 생활이지.》

《원참!》

《그런 생활이 벌어져서 인간의 아름다움을 볼수 있잖소.》

선희는 그의 팔에 매달리며 행복하게 웃었다. 그 웃음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선희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밑도 끝도 없이 말했다.

《참, 국장동진 고마운이예요.》

한정빈국장이 교수한테서 온 편지이야기를 듣고 자기일처럼 안절부절하다가 부에 전화를 했다는것이다.

《국장동진 허황한 교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구 빨리 당신의 주조법을 일반화해야 한다구 강력히 주장하드래요. 그리구 국장동진 학위학직수여위원회에다가도 당신의 연구성과에 대해서 편지를 썼는데 본인이 일이 바쁘고 또 학위를 바라지 않아서 론문을 쓰지 않는데 그 위원회에서 반작용을 해서 학위를 수여할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더군요.》

《정말이요?》

《주태섭부기사장동지가 평양에 가서 듣고왔다구 이야기하시던데요.》

리진오는 국장이 자기와 만나기 괴롭다고 하던 말의 진뜻을 이제야 깨닫는것 같았다. 인정에 몰인정으로 대해서 그런 말을 한것이 아닐가? 그런 국장과 어떻게 부에서 론쟁을 하겠는가?

그는 마침내 부에서 전화가 온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선희는 이밤만이라도 그런 이야기를 그만두자고 말했다.

《저 별들을 보세요. 얼마나 넓은 세계예요. 우리 행성에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 작은것만 생각하며 복닥거리는것 같지 않아요?》

(아니지. 그건 작은 일이 아니야.) 하고 그는 속으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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