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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0 회


제 3 장

10


남보다 뒤늦게 리재협로인의 병문안을 하고 돌아온 주태섭부기사장은 서재의 안락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명상에 잠기였다.

아들이 평양의 중앙설계기관에 소환된 후 너무 적적해서 어린 손자녀석을 하나 데려다가 키우는데 그 녀석이 《세계동물》시간이라고 텔레비죤앞으로 팔을 잡아당기더니 잠이 들어버리자 집안은 고요해졌다. 전쟁시기 폭격때 망가진것을 그자신이 고쳐서 아직도 쓰고있는 큰 벽시계의 늘어진 소리만 고요를 깨뜨리고있었다.

그는 탁상등의 전압을 낮추고 전등갓이 불빛을 가리워주는 곳에 앉아있어서 방금전에 서재에 들어왔던 마누라는 그가 앉은채로 잠든줄 알고 팔을 건드리며 깨웠다.

《바로 쉬시구려. 그러다가 고뿔 들겠수다레…》

그는 마누라가 무어라고 푸념을 계속하였지만 듣지 못하고 창밖에 펼쳐진 밤하늘을 내다보고있었다. 그 어두운 허공에 좀전에 보고온 리재협로인의 잠든 창백한 얼굴이 떠올라 지워지지 않았다.

주태섭은 2공무직장에 갔다가 오선달직장장한테서 로인이 졸도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사장동무가 종내 제 눈을 찔렀다니까요.》

오선달직장장이 이렇게 말했을 때 주태섭은 그것도 말이라고 하느냐고 벼락같이 소리쳤다. 그렇게 화를 내보기는 요근래에 처음이였다. 오선달직장장은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른대로 하랬는데 로인이 공장때문에 졸도한것이 사실이구 공장형편이 이 지경으로 된것도 기사장의 고집때문인것도 사실이 아니냐고 대꾸했다. 하기는 그 말에도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또다시 오선달에게 동무에겐 책임이 없느냐고 소리쳤다. 기사장이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 무진애를 쓰고있다는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주태섭이였던것이다.

그는 숨이 막힐듯이 속이 답답해서 뙤창문을 열어놓고 다시 안락의자에 와앉았다.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가 하고 자신에게 물었다. 그러자 대답대신에 또다시 리재협로인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뭐, 기사장때문에 그렇게 되였다구?)

그는 오선달직장장이 한 말을 회상하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인정머리 없는 사람같으니!)

벽시계가 늘어지게 22시를 알리기 시작하였다. 늘어진 소리는 이상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그럼 로인이 왜 쓰러졌는가?)

분명 공장일을 걱정하던 끝에 그렇게 되였을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로인처럼 공장일을 걱정했으면 생산형편이 이 지경으로는 되지 않았을텐데…

(너는 공장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

벽시계는 네번을 쳤다. 그 여운은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나는 이런 결과를 예견하고 기사장에게 충고했지.)

또 한점을 친다. 시계종소리는 그것도 대답이라고 하는가고 항의하는것 같았다.

또다시 시계종소리.

(기사장에게 충고했지. 당위원회에도 제기하고…)

(그러니까 제 할바는 다했다는 말이로군.)

시계종소리는 이렇게 조소하며 늘어지게 울리였다.

(그후에는 되도록 일에 간참하지 않으려고 했지!)

사실 그는 당위원회에서 생산을 높은 수준으로 정상화해야 한다는 결정이 채택되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결정을 소극성의 위장물로 리용했다.

《여보, 주강직장장아주버니 오셨수다.》

그는 현관쪽에서 마누라의 목소리가 들리자 적막과 자책의 중압에서 구원된 안도의 숨이 나갔다.

《누가 왔다구?》

《내가 왔네, 내가 왔어.》

강봉학직장장이 복도에서 떠들썩하게 대답했다.

《동갑인가?》

주태섭이 복도에 나서기 전에 강봉학직장장이 먼저 방에 들어섰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왔나? 웃도리 벗으라구. 얼굴경기가 좋구만.》

《한잔 하구나니까 자네 생각이 나더구만.》

《허허… 술기운에 돛을 달았구만. 이젠 우리 집에 영영 발을 끊는가 했지.》

《발을 왜 끊어? 저승에 가서도 찾아다닐걸세.》

그것은 강봉학이 지어내서 한 말이 아니였다. 생활의 오솔길에서 만난 친구가 아니라 간고했던 첫 뜨락또르제작시에 투쟁속에서 맺어진 우정이 어떻게 변할수가 있겠는가?

그때 주태섭은 책임설계자였고 강봉학은 주물품을 담당한 작업반장이였다. 주태섭이 설계한것을 강봉학이 쇠물로 부어내군 했는데 맞붙어서 다툼도 많이 하였고 애를 먹이던 주물품들이 성공하면 얼굴을 맞비비며 함께 눈물을 흘린것이 그 몇번인지 모른다.

그들이 몇마디 주고받는 사이에 주태섭의 부인이 다반에 사과를 들고왔다.

《여보, 이 친구한테야 이게 어울리지 않지.》하고 주태섭부기사장이 웃었다.

《실컷 마시고왔네.》

강봉학은 사과를 깎으며 리재협로인을 찾아갔던 이야기를 꺼냈다.

《자넨 가봤나?》

《방금 갔다오는 길일세.》

주태섭부기사장은 무릎을 그러안고 생각이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국장이 충격을 준 모양이더군.》

강봉학은 손을 멈추며 따져물었다.

《그러니까 자네도 국장이 한 말을 듣고 그 형님이 쓰러졌다고 생각한단 말이지?》

《그 로인으로서야 그게 얼마나 큰 충격인가?》

《아니야!》강봉학은 화를 내듯 부정했다.

《그 형님이 쓰러진건 나때문일세. 우리 직장때문이야.》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내가 소재를 제대로 보장했더라면 그런 일, 저런 일 다 일어나지 않았을걸세. 그렇지 않은가?》

주태섭은 강봉학직장장의 깨끗한 량심에 매혹되여 그를 얼없이 쳐다보고있었다.

《여보게 동갑이, 자네는 이 강봉학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지 않나. 대관절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공장의 우환거리로 되였는가. 어째서 이렇게 되였느냐 말이야. 왜 말이 없어? 이젠 내앞에서까지 입을 봉하고 살셈인가?》

강봉학은 사과를 한입 깨물고나서 얼굴을 쳐들고 물었다.

《여보게, 사람들이 자네를 보고 뭐라고 하는지 아나?》

뜻밖의 질문을 받은 주태섭은 안경을 추슬러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동갑인 안경알만 닦는다고 해. 털이 빠진 낡은 비로도로 말이야.》

주태섭은 정말 털이 빠졌는가 확인하느라고 주머니에서 안경알을 닦는 비로도를 꺼내보았다. 과학과 기술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세밀한 그였지만 생활의 사말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주태섭이였다.

강봉학은 모두숨을 쉬고나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호랑이가 아니라 시라소니로 되였다누만.》

《뭐, 시라소니?》

자신에 대한 모욕은 참을수 있었던 주태섭이지만 친구에 대한 모욕엔 참지 못하고 얼굴이 벌겋게 되여 소리쳤다.

《별로 놀랄건 없어. 사실이 그런데야 접수해야지. 사실말이지 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흑싸리깝대기같은 인간이 되였단 말이야. 내 보기엔 자네도 나와 한바리에 처실을 인간으로 된것 같아서 하는 말일세.》

《뭐라구?》

주태섭부기사장은 흥분해서 부르짖었다.

《흐흐… 화를 내는걸 보니 첫 뜨락또르를 설계하던 주태섭의 그림자는 남아있군. 이보라구 친구, 가만 보니까 자넨 나이가 들어가면서 전에 없던 버릇이 생겼어. 걸핏하면 타산이요, 과학이요 하고 입버릇처럼 외우고있지. 수자는 과학의 언어라는 말을 자네가 자꾸 외워서 나는 그걸 외우고있네. 사람들이 자네를 보고 왜 털빠진 비로도로 안경알만 닦고있다고들 하는지 아는가? 자네가 수자를 가지고 모든걸 재보기때문이야. 자네가 왜 수자만 가지고 따지고있는지 아나? 열정이 식어가기때문이야. 모든걸 수자로만 따지지 말고 먼저 심장을 가지고 계산하라구.》

강봉학은 그제야 생각이 나서 벗어던진 웃저고리에서 김기룡의 도면을 꺼내놓았다.

《이걸 좀 봐주게. 자네가 그새 기룡이를 도와주었다더군. 알아보니까 랭각수공급계통때문에 골을 앓고있어서 들고왔네.》

무릎을 그러안은 주태섭은 도면에는 한눈도 주지 않고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이 흘러드는 창가에 시선을 박고있었다.

《여보게, 좀 보아달라는데두.》

《차차 보겠네.》

《한가한 소리 말구 오늘밤에 보구 래일아침에 의견을 달라구.》

잠시후 자리에서 일어선 강봉학은 밖으로 나가려다가 창턱에 놓인 백일홍이 눈에 띄우자 그옆으로 갔다. 그는 꽃을 한참 살펴보다가 퇴색한 꽃잎들을 뜯어주었다.

《꽃이란 피였다가 질 때는 핀채로 깨끗이 떨어져버려야 사람들이 아쉽게 생각하지 이렇게 퇴색한채로 붙어있으면 그것처럼 보기 흉한것은 없다네.》

주태섭은 강봉학직장장이 나간 다음에도 싱싱한 꽃잎만 남아있는 화분을 오래도록 바라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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